〈 90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1)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놀랍게도 교실의 천장이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던 거지?
혼란스런 생각을 수습하며 주변을 둘러보기도 잠시,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 나를 흘겨보는 프레이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왜 여기 있는지를 알아 챌 수 있었다.
“...제논이야?”
“응.”
난 분명 양호실에서 잠든 것 같았는데, 어째서 교실 책상에 눕혀있는 지 설명하려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리디아가 나를 여기에 둘리도 없고, 역시 제논 밖에 없겠지.
어떻게 들고 왔을 지를 상상하다가, 이내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모르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일어났으면 이제 슬슬 가자. 제논이 먼저 가도 된다고 했거든.”
“걘 어디 있는데?”
같이 가는 거 아니었나? 내가 묻자 프레이는 자기도 모른다며 어깨를 한차례 으쓱였다.
“어디 간다고는 했는데, 어디로 가는 지는 몰라.”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안될 것 같은 강한 예감.
이런 감이 들 때면 항상 맞아떨어지곤 해서, 무시하려 해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다.
“먼저 가 프레이. 오늘 자일 씨 쉬는 날이라며, 나는 제논 기다렸다가 같이 가려고.”
“...흠, 알았어. 그냥 단 둘이 가고 싶다고 해도 되는데. 그럼 난 먼저 간다?”
“잘 가, 그리고 내가 항상 고마워하는 거 알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프레이는 피식 웃으며 더듬이를 흔들었다.
“나중에 밥이나 사주던가.”
“너희 아빠 밥이 제일 맛있는 걸.”
“그 것도 맞지.”
풋,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전에는 자일씨 얘기만 나와도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제는 자기 아빠 자랑까지 하는 게 퍽 웃겼다.
저렇게 말하고 싶은 걸 여태 어떻게 참고 살았대.
웃는 내가 못마땅한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린 프레이였지만, 이내 씨익 웃더니 손을 흔들곤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프레이가 내 친구라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눈치 좋게 빠져 주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제논보다도 프레이가 내 걱정을 해줄 때가 더 많았으니까.
“그나저나 얜 어디 간 거야.”
머리맡에 있던 가방을 내리곤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나만 남은 교실, 한적하다 못해 이제는 해가 뉘엿뉘엿 져 어쩐지 음산하기까지 한 교실에 몸서리치기도 잠시,
이대로 혼자 있기엔 조금 꺼림직한 것 같아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제논이 혼자 갈 곳이라 하면, 역시 마이어씨밖에 없는데.
과제나 시험 때문에 교수님한테 찾아갈 사람도 아니고, 또 무슨 훈련한다면서 마이어씨한테 갈 게 뻔했다.
다행히 불이 켜져 있는 복도의 분위기도 음산하진 않아 혼자 돌아다니다가, 중앙에 놓여진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아서 날 찾아서 오지 않을까. 마이어씨의 담당실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이 여기였으니,
아마 나온다면 바로 만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까 리디아는 어떻게 됐지?
지켜보다가 하도 깨질 않아 중간에 잠들었는데. 제논이 나를 데려다 놓은 걸 보면 일어난 게 아닐까.
“걔가 일어나든 말든 별 상관도 없긴 한데.”
리디아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그 간사한 행동이, 제논을 빤히 쳐다보는 그 시선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련할 때 힘조절에 실패해버렸다.
차라리 그냥 아예 더 깊게 벨 걸 그랬나.
눈도 못 마주치게 마음속에 나라는 사람을 새겨버릴 걸 그랬다.
다시는 제논을 넘보지 못하도록, 원작에서는 히로인이었다고 하지만 그걸 내가 허락해줄 수는 없으니까.
히로인은 어디까지나 나 한 명.
그 한 명보다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었다.
뭐, 리디아한테 행동하는 걸 떠올려 보면 알아서 잘 하겠다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그렇다곤 해도 만약이라는 가능성은 항상 있었으니,
내가 곁에서 그런 예비 히로인들을 감시하는 것도 여자 친구로써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리디아를 떠올리며 이를 갈던 내가 이어 생각한 것은, 앞으로 무얼 할지 였다.
주말에는 뭐하지?
이제 내일 모레면 토요일인데, 주말을 그냥 집에서 보내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논하고 사귀는 사이가 된 이후로 보내는 첫 주말인데.
저번에 밥먹기로 했던 약속을 주말에 쓸까?
이렇게 되고 보니, 저번에 프레이가 사줬던 옷이 새롭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둘이서 만나게 됐는데 맨날 입던 것처럼 편하게 반팔에 청바지라니, 그건 예의가 아니지.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문이 덜컹,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샤?”
“아, 역시 여기 있구나.”
그럼 그렇지, 마이어씨의 담당실에서 나오는 제논에게 손을 흔들자 제논은 어째선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굳은 얼굴은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표정이 억지로 지은 걸 알려주는 것처럼 입꼬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마이어씨가 뭐라 한 거야?”
“...하아. 아직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 제논은, 이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무언가가 불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제논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말하려고 했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
“뭐, 뭔 짓을 했길래 그렇게 비장하게 말하는 거야.”
너무도 진지한 표정에 어깨를 움츠리기도 잠시,
제논이 이어서 내뱉은 말에 내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나, 주술식 새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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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식, 그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뜻을 내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수명과 이능의 등가교환, 힘을 증폭시켜주는 대신 수명의 절반을 내주는 그 방법을, 내가 모르는 게 아닌데.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주술식을 새긴다고 허락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새겼다고 통보하는 모습에 기가 찬다고 해야 할까.
도대체 너한테 내가 뭐야? 주술식이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주술식인데.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내가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면 뭔데!”
내가 날카롭게 소리치자, 말을 하던 제논이 멈칫거리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꽉 진 주먹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 제논이 한 말이 더 신경쓰였다.
아니, 신경쓰이다 못해 미칠 것만 같았다.
“너 나 좋아한다며. 나 우는 일 없게 할 거라며, 맨날 나한테 행복한 일만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며!”
“그러니까-”
“닥쳐 제논.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허락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당당히 나 주술식 새겼다고 말하는건 도대체 뭐하자는 건데?”
“설명하게. 조금만, 조금만 차분해지자.”
“어떻게 차분해져. 네 수명이 절반이 날아갔는데, 내가 어떻게침착하게 얘기를 들어? 너 진짜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씩씩거리며 소리치자, 제논은 내 어깨를 감싸려 손을 내밀었다.
탁, 내가 그 손을 거칠게 쳐내자, 그제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제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자기가 한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빨개진 손등을 잠시 바라보던 제논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네가 착각하고있는 게 있어.”
“착각? 내가 뭘 착각하고 있는데. 이제 네가 살날이 20년이 아니라 10년 남았다는 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인 거야. 왜 내 생각은 하나도 안하는데!”
“내가 새긴 주술식은 수명 안 깎여.”
“...그게 무슨 소리야.”
수명이 안 깎인다니, 그런 주술식은 원작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건데.
이능을 증폭시키는 대가로 패널티를 얻는 전형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 바로 주술식이 아니던가.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제논이 말을 이어갔다.
“마이어씨가 직접 만들어낸 주술식이야. 수명을 깎는 패널티를줄였지. 그러니까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내 수명이 줄어들거나 하진...윽.”
퍽,
말하던 제논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꽤 힘이 들어간 터라 맞은 제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처음부터 그거 말했으면 화 안냈잖아.
원망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째려보자, 제논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네가 말할 틈도 안 줬잖아.”
“남자 친구가 주술식 새겼다는 데 어떻게 거기서 틈을 줘. 당장 주술식 있는 팔 그대로 뜯어버려도 모자를 판에.”
“...잘못했어.”
“그래, 너 잘못했어.”
고개를 휙, 하고 돌리자 제논이 아까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근데, 나 한 번만 더 잘못할게.”
그게 무슨 소리야. 주술식 새긴 거 말한 것만 해도 어이가 없었는데, 거기서 한 번 더 잘못한다고?
그걸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황당했지만, 또 잘못한 게 있다는 것도 머릿속을 뒤집어엎기에 충분했다.
내가 황당한표정을 짓자 제논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2주 동안 못 만나.”
“그게 무슨 소리야.”
어느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가 제논의 멱살을 잡고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