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2)
“2주 동안 못 본다는 게 무슨 소리인데.”
후우, 멱살을 쥔 손을 놓으며 묻자 제논이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가 사귄 지 이제 이틀이었다. 그런데 2주 동안 못 본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했으면 좋으련만, 저 진지한 표정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이거를 이해해줘야 할까? 상의를 해야지, 상의를.
이마를 짚은 채 제논을 노려보자, 자기가 잘못한 건 아는지 움찔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주술식의 패널티가 사라지는 대신, 마이어씨가 주술식을 꾸준히 살펴야 해. 그게 2주 정도 걸리는 거고.”
“그거랑 못 보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꾸준히 살피는 게, 잠 잘 때도 봐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잖아.”
내가 되묻자, 어쩐지 제논이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목을 긁었다.
설마 진짜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마이어씨가 아무리 믿을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엿한 성인 여성이었다.
비록 나이가 조금 많긴 하지만, 그래도 외형은 20대 초반의 미인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하고 같이 먹고 자면서 2주를 있겠다니.
아무튼 그런 거 내가 백 번 양보해서 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일 문제가 되는 점은 왜 나한테 말도 안하고 그런 걸 덥썩 수락했다는 점이었다.
마이어씨가 제논 몸에 주술식을 새겨주겠다는 망나니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자기가 찾아가서 부탁한 거겠지.
“왜 그랬어. 왜 나랑 한 마디도 안 하고 도대체 왜 일을 벌인 거야.”
“...미안해.”
“지금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야. 마지막으로 물을게, 제논. 너한테 나는 도대체 뭐야? 내 생각에는,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아.”
그 말을하는 내 입꼬리가 옅게 떨렸다. 제논이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 잘 알고 있었다.
그 뜨거운 불 속에서 나를지키는 그 모습을 어떻게 잊어. 하지만 그런 것과 이번 일은 별개였다.
나는 제논의 여자 친구였고, 무엇을 하든 나는 미리 알 권리가 있었다.
자기 목숨 절반을 떡하니 주고 오겠다는 일을 허락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어.
그걸 알고 내게 알리지 않은 거라면 더 괘씸했다.
마음을 정리한 내가 사나운 눈초리로 쏘아보자, 제논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지키고 싶었어.”
“...나를?”
너는 이미 몇 번이고 나를 지켜줬는데,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걸까.
내 눈이 차갑게 식어가자, 제논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똑바로, 네가 생각하던 것들을 제대로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너한테 보호받을 만큼 약하지 않아.”
아련을 거의 다 뽑은 상태의 나는, 아마 동갑내기 중에선 나 이상의 실력자가 없다고 해도 좋았다.
아니, 3학년을 통틀어서도 그렇겠지. 제논도 충분히 강했지만, 그렇다 한들 내 수준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높게 쳐줘도 헤라 카르멘, 투랄리온하고 조금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냉정한 평가에 제논은 씁쓸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한차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랬어. 내가 너보다 한참 약해서.”
“그게 무슨...”
“아이샤, 너는 내가 너를 지켜줬다고는 했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네가 나를 구해준 적이 더 많아. 당장 저번에 마루더즈가 습격했을 때만 해도 네가 없었으면, 나는 죽었겠지.”
“......”
“앞으로 더 강한 빌런들과 싸우게 될지 몰라. 지금은 헤라 카르멘을 처리해서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지금 이런 평화가 쭉 지속될 거라고 생각 안 해.”
제논의 말이 맞았다.
지금이야 괜찮지, 당장 여름방학만 해도 마루더즈의 간부들은 우습게 여기는 빌런들이 속속들이 등장했으니.
하지만 그런 빌런들을 꺾으며 성장한 게 제논인데, 왜 이렇게 조급한 걸까.
그런 고민이 이내 어떤 생각에 닿았을 때,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 때문인가.
내가 너무 빠른 속도로 강해졌기에, 제논의 입장에서는 뒤쳐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늘 자신이 소중히여기는 이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제논 입장에서는,
쉽사리 끼어들 수 없는 힘에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꼈겠지.
그 것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네 곁에 서고 싶어. 지금처럼 네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감탄하는 게 아니라, 너랑 동등한 위치에서, 당당하게 싸우고 싶어.”
나는 네 남자 친구잖아. 잘게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는 제논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서, 네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던 내가 미안해서.
생각해보면, 나는 늘 위험 앞에 서있었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생명을 담보로 빌런과 싸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죽음을 각오한 순간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논이 구해줘서 망정이었지. 제논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꺾일 의지였을 텐데.
네가 나를 얼마나 걱정했을까.
문득 치솟아 오르는 감정에 입술을 짓씹었다.
이에 눌려 하얗게 변한 입술을 바라보던 제논이 손을 뻗어 내 볼을 쓰다듬었다.
“하지 마.”
“...미안해. 네 맘도 모르고, 나는.”
“하지 말라니까. 네가 아프면,”
큼지막한 손이 내 입술을 훑더니, 이내 짓씹고 있던 입술을 부드럽게 벌렸다.
입술에 닿은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기도 잠시. 제논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렸다.
“나도 아파.”
“...내가 했던 말이잖아.”
“알아. 그래도 나는 너 안 미워해.”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나는 네가 그러는 게 정말...싫어. 미워, 제논.
“은근히 뒤끝 있네. 아직 기억하고 있었어? 이제 그거 사실 아니라는 거 알잖아.”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 내가 살짝 흘겨보자, 제논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은 머리 위에 올라가자 솥뚜껑마냥 내 머리를 전부 뒤덮었다.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도록, 이렇게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내 신경을 쓰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네가 주술식을 새기겠다며 찾아간 거겠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나한테 다 얘기해. 알았지?”
“알았어. 그리고,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 말에 내 입꼬리가 휘었다. 이해했다고? 아직 나는 이해 못했는데.
내가 지금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데, 앞으로 2주 못 보는 걸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 거렸다.
2주였다. 방학까지 8일 남은 지금, 2주면 방학이 시작되고도 못 보는 거였다.
내가 방금까지 주말에 뭐할지 계획 짜고 있었다고 말하면, 제논 표정이 어떻게 될지 참 볼만할 텐데 말이야.
“나랑 약속 하나해.”
“...약속?”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논을 바라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걸 대놓고 말해도 되나, 하지만 이렇게 말 안하면 정말 2주 동안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매일 나한테 3번은 꼭 연락해. 또 주술식 새긴다고 연락 씹지 말고.”
“...알았어.”
“아침에, 점심에, 자기 전에. 이거 안 하면 네 주술식이고 뭐고 마이어씨한테 찾아가서 너 달라고 할 거야.”
“내가 물건이야? 달라고 하면 주게.”
“너 내 꺼잖아. 달라고 하면 줘야지.”
붉어진 귀를 손으로 덮어 숨기며, 제논을 똑바로 바라봤다.
알겠다고 할 때까지 안 가야지. 그렇게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제논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진짜 이제 2주 동안 얼굴도 못 보는 건가.
내 앞에서 뺨을 긁적이는 제논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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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났다.
분명 어제 그렇게 다짐했건만,왜 이렇게 빈자리가 허전한 건지.
아침에 몇 시에 나올 거냐 물어봤으면서, 그 날 주술식을 새겼다고 얘기하는 건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거야.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루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똑같이 파랗고, 해는 밝았고, 나무는 푸르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네가 없다는 점이겠지.
“제논은 어디 있어?”
“몰라, 2주 동안 못 온대.”
프레이의 질문에 퉁명스레 대답하자,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2주? 그 말에 나또한 헛웃음을 지었다.
진짜, 돌아오기만 해봐. 다시는 떨어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손을 봐줘야지.
“이제 하루야. 내가 참아야지.”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
“고마워.”
이제는 완전히 텅 비어버린 내 옆자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이 끝난 뒷면 너를 깨워야 했는데, 이제는 깨울 사람이 없네.
옆자리에 제논이 앉은 건 고작해야 이틀, 자고 있는 제논을 깨우던 건 고작해야 3달 정도 됐을까.
여태 살아온 22년이 무색하게도, 그 잠깐의 경험이 내겐 짙은 여운을 남겼나 보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시간이 왜 이렇게 긴 건지.
예전 같으면 눈 깜짝할 새에 끝났던 시간이, 이제는 아무리 딴 생각을 해도 끝나지 않았다.
아카데미가 이렇게 지루한 곳이었나.
프레이랑 얘기하며 웃기도 잠깐,
다시 수업을 들을 때면 몽롱한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지쳐 쉬는 시간엔 계속 엎어져 있었다.
수업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텅 빈 옆자리가 유독 거슬려 공책에는 낙서만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가 적힌 한 글자를 보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쉰다.
[하루]
그래, 이제 고작 하루였다.
앞으로 남은 13일을 떠올리는 내 눈 앞은, 안개가 낀 듯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