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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4) (93/115)



〈 93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4)

시간은 야속하게도, 정말 느리게 흘러갔다.

눈을 뜨자마자 내가 하는 행동은 이제 버릇처럼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날짜를 확인한 내 표정은, 늘 그렇듯 가볍게 일그러졌다.

“이제 일주일...”

제논이 곁에 없다는 사실은 의외로 점점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첫날에만 그렇고 다음에는 조금씩 괜찮아질  알았는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란 말은 순 거짓말에 불과했다.

적응이 안  적응이.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늘이 방학식이라는 점일까.
평소와는 달리 아카데미 수업도 없고, 가서 방학식만 하고 집에 오면 되는 터라 지루함에 지쳐 힘이 쭉 빠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마이어씨나 오랜만에 뵈어야겠네.

방학이 되기 전까지 아련을 완성 시킨다고 다짐했건만,
담당실에 갈 때마다 심란해지는 탓에 이제 겨우 8할에서 9할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이 전부였다.
아주 작은 실마리만 붙잡는다면 아련을 뽑다 못해  이상의 경지까지 닿을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건지.

하지만 조금이나마 알아낸 것이 있다면 그건  검들이 하나 같이 ‘감정’에 영향을 받는 점이었다.

예를 들자면, 1번 검 월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에서 태어난 것.
처음 월야를 뽑아낸 것은 내가 힘을 각성하여 뽑은  아닌, 그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을 꺼내든 것이었으니까.

2번  태동은 그 무지막지한 위력과는 별개로 자애로움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 이름에 걸맞게, 태동을 휘두를 때면 내가 뽑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얼음들이 피어나곤 했으니.
누군가를 죽이기보다는 단지 제압에 목적을  검이라 보는 게 옳았다.

살인검이 아닌, 활인검이라.

3번 검은 이름처럼 무언가를 죽이려는 살의에서 거듭났다.
헤라 카르멘에게 품는 내 감정은 명백한 적의, 어쩌면 그녀를죽이려 하는 마음에서 3번 검을 뽑게 했으니,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결국 필요했던 감정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했다.
제압만 하겠다는 어리숙한 감정으론 누구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이 세계에 온 뒤로 절실히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아련은.”

내가 막힌 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지금 내 감정 상태를 진지하게 돌아보려 해도 너무 심란하니까, 차마 내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알 수가 없으니.

다시 기억을 되돌려 아련을 처음 뽑았을 때를 떠올려본다면 무언가 갈피를 잡을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여신의 눈물로 인한 증폭의 결과물이나 다름 없었다.

나중에 리디아와 싸울 때 다시 뽑긴했지만,  때는 솔직히 조금 화가 많이  있던 터라 분노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화를 내야 하나.”

이익, 혼자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쳐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솔직히 화를 자기 마음대로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지간한 일로는 화가 나지도 않아 분노를 억지로 이끌어내기는 힘들었다.

마이어씨한테 얘기나 해봐야지.

솔직히 따져볼 것도 있었고. 주술식에 대해 검색해봤는데, 그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끔찍했다.
심장에 기다린 봉을 꼽아 이능인자를 강제로 각성시키고, 그 각성시킨 이능을 문신을 매개 삼아  데로 모으는 방법이라니.

그러니까 수명이 줄지. 물론 마이어씨가 개량했다니 그렇게 험악한 방식은 사용하지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안한  사실이었다.

전화할 때마다 목소리가 어두워지는 것도 그렇고,
가끔씩혼자 기침하는 것도 그렇고.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얼굴을 봐야 가장 확실하게 알겠지만 그건 앞으로도 일주일 뒤의 이야기였다.

일단은 아련을 완성하는 데에 집중해야겠지.
TV화면에 비치는, 허허로이 웃어보이는 교장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울리는 종소리에 나는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샤, 담당실로 가는 거야?”
“응, 오늘은 완성시켜야지. 이제 이것만 완성하면 놀러가는거야!”

제논이 없으니까, 내게 남은 사람이라곤 프레이 밖에 없었다.
솔직히 일주일동안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고, 프레이랑 같이 제논이랑 못했던 것들을 미리 해보기로 했다.

영화라던가, 놀이공원이라던가.

“오늘도 오래 걸리면 난 먼저 간다? 좀 이따 우리 집으로 오는 거 잊지 말고.”
“당연하지.”

그렇게 손을 흔들며 프레이와 헤어진 나는 곧바로 담당실로 향했다.
몇주  바뀌지 않는 풍경, 하얀 타일로 가득한 담당실에서는 늘 그렇듯 마이어씨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다.

“오늘은 왔네. 그래, 드디어 감이 좀 잡힌 거야?”
“마이어씨.”
“...왜?”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가 서늘하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가 흠칫거리며 담배를 입에서 떼었다.

“주술식에 대해서 제가 좀 찾아봤거든요. 근데 막 심장에 봉을 쑤셔 넣더라구요.”
“...그렇지?”
“막...제논도 그런 걸 하고 있는 건 아니죠?”

설마, 그런 심정으로 묻자 마이어씨는 턱을 괸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진짜로 그렇게 하는 건가? 개량했다고, 자기가 직접 새로 만든 주술식이라며.
불안한 마음에 눈동자가 연신 흔들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이 많구나. 근데 뭐, 그렇게 과격한 방법은 쓰지 않아.”
“그럼 다행이고요.”
“그것보다 조금 많이 아플 뿐이지?”
“네?”

담배를휙, 하고 허공에 던진 그녀는 이내 허공에 봉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끝이 날카로운 봉의한 쪽을 매만지던 그녀는 이내 그것을 바닥에 꽂으며 말을 이어갔다.

“본래의 주술식은  부위의 맥을 뚫는 방식이지, 심장에 있는 혈을 뚫고, 그 자리에 있는 이능 인자를 강제로 각성시키는 거야.”

그녀가 꼽은 창이 꽂힌 타일은 깔끔하게 구멍이 뚫려있긴 했지만,
주변에 생긴 균열은 금방이라도 그 타일이 부서질  같이 보이게 만들었다.

“그 만큼 심장에 무리가 가는 바람에, 수명에 문제가 생기는 건가요?”
“그렇지. 그래서 나는 생각을 조금 바꿨어. 어차피 사람의 몸에는 수많은 혈이 있으니까, 이능인자를 각성시키는 구멍을 여러 개 뚫으면 되지 않을까? 이전처럼 깊게는 말고, 얕게 여러 개를 말이야.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생긴 여러 개의 봉은 처음 뽑았던 것보다 훨씬 얇았다.
기껏해야 연필 정도의 굵기라 해야 할까. 그 것을 바닥에 꼽자, 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수십 개의 구멍이 생긴 타일은 균열이 일진 않았으나, 구멍이 생긴 자리가 꽤 흉측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구멍들을 쳐다보던 마이어씨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지금 제논의 상태가 이런 거지.”
“...네?”
“몸에 무리가 가는 부분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든 방법이니까. 하지만 고통은 예전보다 심해, 몸에 구멍이 하나 나는 거하고, 수십 개가 나는 거하고. 뭐가  아플 거라 생각해?”

당연히 수십 개겠지. 그녀의 말을 듣는 내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렇게 아프면서, 아픈 티를 하나도 안내던 제논이 생각 났다.
얼마나 아플까,차라리 티라도 내줬으면 좋았을텐데.

화상을 입고도 웃어 보였던 그 때의 모습이 생각나서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숨기지 말고, 나한테라도 전부 털어놨으면 좋으련만.
죽을 것 같이 아프다고, 이럴 때면 같이 아파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이내 고개를 들어보였다.
좀 이따 연락할 때 얘기하면, 제논이 부담스러워 하겠지. 나중에 만났을  해도 되는 얘기였다.
그래, 이제 일주일. 여지껏 보내왔던 시간을    보내면 되는 그런 시간.

“...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거죠?”

잘게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며 묻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위해 제논이 한 선택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이해하고 존중해줘야 할 사람은 바로 나겠지.

아마 이 공간 어딘가에 제논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제논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마이어씨와 같이 있을  분명할 텐데도.

“근데 제논 여기 있는 거 맞긴 해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마이어씨는 후후, 하고 웃으며 한 쪽을 가리켰다.

“저 너머에 있지.”
“...아무리 봐도 벽인데.”
“가서  번 만져볼래?”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자, 나는 이내 이상한 점을 찾아낼  있었다.
벽, 분명히 하얀 타일이 깔린 벽이 보이건만, 나는 그 벽을 향해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마치 투명한 무언가에 가로 막혀 있는 것처럼.

“이 공간은  개로 분리되어 있지. 네가 있는 공간, 그리고 제논이 있는 공간.  쪽에서도 그렇고, 이쪽에서도 그렇고 서로에 대해 보거나 듣지는 못해.”
“이  밖에 제논이 있다고요?”
“응. 이름을 불러도 듣지는 못하겠지만.”

세상에, 이런 것도 할 수 있었구나. 내 생각보다 마이어씨의 마법이란 것은 훨씬  놀라운 무언가였다.
공간의 분리라니. 이쯤되면 정말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마법사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똑똑-

투명한 벽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 벽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영화에 나왔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눈사람을 만들자며 자기 언니를 불렀던  꼬마아이처럼 수줍게, 그 벽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닿을까?”

 소리가, 네게 닿을까?

마음 같아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고, 마음 놓고 네가 하는 일에만 집중하라고.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만큼 너도 나를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입에서 나온 뜨거운 바람이 투명한 벽에 하얀 김이 서리게 만들었다.
뽀드득, 손가락을 문질러 글씨를 적기도 잠시, 다 써진 글씨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오지 않을 답장을 기다렸다.

[너 거기에 있어?]

하얀 김 위에 써진 글씨, 그걸 잠깐 바라보다 등을 돌리려던 그때에, 투명한 벽에 홀로 적히는 글씨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아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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