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5) (94/115)



〈 94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5)

“...하아.”

하얀 타일로 가득했던 공간은 어느덧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붓에 빨간 물감을 묻혀 주변을 칠했다는 게 차라리 믿을만 할까.
바닥에 흥건히 고여있는 빨간색의 액체들은 전부 내 몸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철퍽-

이제는 밟으면 웅덩이를 밟은 것마냥 발에 들러붙었다.
사람의 몸에서 이렇게 피가 많이 나올  있는 걸까?
처음에 피를 쏟을 때는 조금 당황했지만, 지금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떠도, 밥을 먹어도, 아이샤랑 전화를 해도,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아도 보이는색깔이 빨간색이라면 누구나 그럴 터였다.

그 몽환적인 풍경에서 서있는 검은색의 인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회색의 연기. 붉은 공간에서 조용히 자태를 드러내는 그 회색을 쳐다보기도 잠시, 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며칠이나 지났죠?”
“일주일.”
“...씨발.”

시간 더럽게 안 가네. 원래 욕을 잘 안하는 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욕설이었다.
하도 아프다보니까 정신이 잠깐 나가버린 건가.
그런 나를 바라보던 마이어씨가 담배를 손으로 쥐더니 이내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하다.”
“뭐가요?”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곳곳에 흩뿌려진 피를 이능으로 말끔히 치우며 말을 이어갔다.

“너에게 이렇게 무리가  줄은 몰랐어.  몸에   새겨보긴 했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방어하고 있다는 걸 잊었다. 미안해, 제논.”
“...뭐, 굳이 그런 걸로 사과까지야.”

이제는 다시 하얗게 돌아온 바닥에 드러누우며,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과할 것도 없는데 무슨 사과. 내가 손사래를 치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피를 쏟고, 아파하는 데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제논, 이건 내가 진심으로 미안해서 하는 말이야. 내 실수 였어,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볼 필요가 있었는데. 내가 조급했던 것...”
“괜찮다니까요.”

진심으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이렇게 아플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수명을 각오했으나 따라오는 것은 결국 고통 뿐이었다.
 정도면 엄청 괜찮은 거지. 다만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2주라는 기간인데.

“조금 더 아파도 되는데 시간은 어떻게 못 줄여요?”

그러자 마이어씨는 나를 질린 듯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아쉽네요.”

고통엔 결국무뎌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게 순 거짓말이라는걸 근래의 일주일 동안 몸소 체감 중이었다.
조금 익숙해지려 하면 새롭게 다가오는 고통은 이제 반갑기까지 했다.

심장을 찌르다가 옆구리를, 옆구리를 찌르다 배를, 각양각색의 위치에서 찾아오는 고통은 그래도 이제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일주일 고통을 겪었다고, 몸이 고통이란 감각에 적응이 아닌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찢어진 근육이 아물며 더욱 단단해지고, 통증을 겪은 뇌는 모든 감각에 더욱 예민하고, 또한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이능을 사용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건 이 고통이 아무 수확 없이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얻을 게 있다.  강해질 수 있다.

비록 몸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입가에 미소가 걸릴 수 있는  그런 이유였다.
게다가 아이샤가 날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자기는 모르는  같았지만 아이샤는 전화할 때마다 목소리에 물기가 점점 많아졌다.

이러다가 나중에 만나면 진짜 울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나저나 이제 아이샤는 방학이었던가.
희미해진 시간 감각을 되살리며 눈살을 찌푸리던 그 때에, 앞에 있던 마이어씨가 다가와 팔을 어루만졌다.

“...뭐죠?”

몸을 감싸던 고통이 점점 옅어지는 기묘한 감각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는 순순히 대답하며 내 팔에 있는 문양을 계속해서 살폈다.

“이제 주술식을 새기는 것 자체는 거의 끝났어.
몸이 적응하고, 그 발전된 이능을 조절하는 데 적응하는 기간이 남은 거지.”
“오...”
“잘 버텨줘서 고마워. 다음부터는 사람한테 쓰면 안 될  같네.”

아무래도 내 상태가 꽤나 심각했는지, 마이어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내가 생각해도 바닥에 피가 철퍽거리면서 고일 때까지 뱉는 건 조금 너무 했으니까.
다만 다행인 점이라면 그 것들이 전부 피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순물을 뱉어내는 과정이야. 쉽게 말하면 건더기를 걸러내고 맑은 물만 남기는 거지.’
‘그게 피처럼 나오는 거라고요?’
‘그래, 그래서 빨갛기 보다는 까맣잖아.’

그렇게 피를 쏟아내고도 살아남은 이유, 그리고 몸이 가벼워진 이유가 바로 검붉은 핏덩어리를 수없이 뱉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조금 고통에서 벗어난 몸을 확인하던 내 시선이 향한 곳은 저 너머, 마이어씨가 설치해둔 투명한 벽이었다.

“지금 여기 아이샤가 있을까요.”

내 중얼거림을 들은 마이어씨가 잠시 눈을 감더니, 이내 입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있네. 아마도 아련 뽑는 걸 마무리하려는  같은데.”
“잘했으면 좋겠는데. 부모님하고 관련이 있다 하더라고요.  검들을 뽑는 게.”

어떤 부분에서 연관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걸 떠올리면 꼭 원하던 걸 이뤘음 했다.
아이샤를 떠올린 내가 옅은 미소를 짓자 마이어씨가 어이없다는  옆에서 실소를 흘렸다.

“누굴 걱정할 때냐 지금. 네 몸 상태나 좀 잘 살펴봐.”
“괜찮은데요 뭐.”
“...에휴, 아무튼 조금 쉬어. 주술식은 내일이면 완전히 마무리 될 테니까.”

마어이씨가 다시 담배를 물며 발걸음을 옮기자, 나는 투명한 벽에 몸을 기댔다.
이  너머에 아이샤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모르게 적적해지는 것만 같았다.
벽 한 장의 거리, 얇디 얇은 벽이었지만 소리도 전해지지 않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질까.

“아이샤.”

들리지 않을 이름을 중얼거리며, 투명한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에 힘을 주면 저 너머가 어렴풋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야속하게도, 마이어씨의 이능으로 만들어진  벽은 너무도 투명했다.
저 너머에 있는 하얀 타일들만 비춰주는 벽을 원망스레 바라보기도 잠시, 귓가에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눈매가 좁아졌다.

똑똑-

문을 두드리듯,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는 분명히 저 너머에서 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환청일까?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투명한 벽이 갑작스레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

마치 김이 서린 것 같이 하얗게 물들은 벽, 그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하얀 부분에 점차 글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너 거기에 있어?]

“아이샤?”

글씨를 본 순간,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약 저 너머에 있는 거라면, 이 글씨를 아이샤가 쓰는 거라면.
순간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간단히 글씨를 적었다.
이럴 때면 말재주가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아이샤?]

아이샤가 맞을 텐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적은 글씨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설마 그새 자리를 비운 걸까, 고민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에 뺨을 두들기려는 찰나 벽에 글씨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짜 제논이지? 몸은 괜찮아? 밥은 먹었고? 많이 아파?]

하나씩만 질문해도  텐데. 이렇게 한 번에 질문하면, 얘기할 거리가 줄어드는  같아 괜스레 불만스러웠다.
어떻게든 구실을 잡아 조금이라도 길게 얘기하고 싶었건만.

하지만 그마저도 좋았기에, 씰룩이는 입꼬리를 매만지며 천천히 글씨를 적어나갔다.

[제논 맞고, 몸은 괜찮고, 밥은 먹었어.]

피식, 맨날 전화만 하다가 이렇게 글자로 대화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적으려는 찰나,

[아프긴 한 거구나.]

“어?”

아니, 이제는 별로 아프지 않은데.
순간 벽에 글씨를 적으려 했지만, 무어라 적어야할지 쉽사리 손가락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벽 너머에 있을 아이샤의 표정이 왠지 보이는 것만 같아서,
늘 곱게 휘어있던 눈썹이  처지고 얼굴이 일그러지는,  반짝이는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일렁이는 모습이 떠올라서.

[안 아파.]
[거짓말.]
[어떻게 하면 믿을래?]

그러자 잠시 벽에 새겨지던 글씨가 멈추었다. 무엇을 요구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걸까?

후우,

갑작스레 터지는 한숨을 뱉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대화를 나눌수록 커지는 감정이 있었다.
말하고 있지만, 들리지 않았으며. 서로를 느끼고 있지만, 보이지 않았다.

 벽 너머에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허전함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되려 마음속을 좀먹으며 그 존재감을 키워나갈 뿐.

[손 내밀어 봐.]

그러다가 다시 벽에 새겨진 글씨를 보았을 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손을 내밀어 벽에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벽에 커다란 손 자국이 생기자, 다시 글씨가 생겨났다.

[이제 손 뗴.]

갑자기 이런 걸  시키는 건지, 그렇게 손을 떼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벽에 새겨진 새로운 자국을 보자 입꼬리가 저절로 스르륵 올라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커다란 손자국 안에 생겨난 자그마한 손자국.
 보고, 만져왔기에 알 수 있었다. 저 손자국이 아이샤의 것이라는 것을.

[닿았다.]

그래, 닿았어.

새롭게 생겨난 글씨를 보며 웃기도 잠시, 어쩐지 아련한 표정이 된 나는 그 손자국의 주변을 어루만졌다.
 자국이 혹여 사라질까, 조심스레 바라보며 떠오른 생각은.

너를 빨리 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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