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네가 없는 시간이 싫어(6)
[아이샤?]
어쩐지 급하게 휘갈겨 쓴 것 같은 그 글씨를 봤을 때, 순간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간질간질하고, 답답해서 당장이라도 감정들을 쏟아내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허공에 애꿎은 한숨만 자꾸 내뱉어졌다.
물론 그래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 건지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나는 궁금했던 것들을 마치 토해내듯 벽에 적어내려갔다.
[진짜 제논이지? 몸은 괜찮아? 밥은 먹었고? 많이 아파?]
일단 저 벽 너머에 있는 게 제논인지,
주술식 새기느라 고생했을 텐데 몸은 괜찮은 건지,
밥은 꼬박꼬박 먹고 있는 건지, 또 제일 중요한 것.
얼마나 아픈 건지.
마이어씨에게 주술식을 새기는 방식에 대해 들어 어느정도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제논이 새기는 방식이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런 방식이었다.
온 몸에 구멍을 낸다니, 상상만 해도 치가 떨리는 그 광경을 떠올리자마자 드는 생각은 제논의 몸 상태였다.
나한테는 안아프다며 또 쌘 척 하겠지만, 그런 걸 두고볼 수 없는 내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프다고 티라도 내줬으면, 차라리 이렇게 걱정하진 않았을 텐데.
[제논 맞고, 몸은 괜찮고, 밥은 먹었어.]
하지만 이어서 벽에 적힌 글자에, 내 표정은 한 없이 일그러졌다.
내가 가장 기대했던 대답이 적혀있지 않은 탓이었다. 또, 나한테 숨기는 구나.
왜 나한테는 아프다고 말해주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차라리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거라면 좋을 터였다.
내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이 정말이라면, 나는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은 채 벽에 글씨를 적었다.
[아프긴 한 거구나.]
안 아픈 게 이상한 거겠지. 그런 당연한 건데도, 왜 내게 말해주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사실 주술식을 새기게 된 것도 내 지분이 다분했으니. 할 말이 없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음.”
그렇게 한차례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답장을 기다리자, 꽤 시간이 지나 글자가 새겨졌다.
매우 빠르게 쓴 듯 아까보다 더욱 날림으로 써진 글씨였다. 그렇게 다급했나.
[아니야.]
그래, 아니겠지. 나한테만 쏙 숨기고 아닌 척,괜찮은 척 하는 거겠지.
입술을삐죽 내밀며 쓴 글씨는 내 마음처럼 삐뚤빼뚤 거렸다.
[거짓말]
[어떻게 하면 믿을래?]
어떻게하면 믿을 거냐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얼 하든 나는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한숨을 내쉬며, 이제는 서서히 글자가 사라지는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믿음을 못 줬나?
제논과 만난 이후 내가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 봤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땠지?
교문 앞에서 눈 마주치는 바람에 내가 도망가고, 그런 나를 기어코 쫓아와 말을 걸고,
강당에서 싸우는 걸 내가 통째로 얼려버리고.
무슨 첫 만남이 이러냐.
물론 그때는 히로인이 되기 싫다며 늘 얼굴에 ‘나 너 싫어.’ 이 글자를 새겨두고 다니던 때라,
툴툴거리면서도 어쨌든 스토리 때문에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그러다가 제논이 트라우마를 얻는 사건을 내가 대신 나서 해결하고,
헤라 카르멘하고 엮이고, 다치고, 업히고...
“믿음이 안 가긴 하네.”
그 뒤로 이어지는 기억은 한결 같았다.
제논하고 있다가, 빌런하고 엮이고 싸우고 다치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제논이 옆에 있고, 나는 누워있고, 그게 아니면 둘 다 다치고.
끄응, 나는 아파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다 내 탓이지.
이제는 완전히 투명해진 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숨을 내뱉어 다시 하얗게 만들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턱을 두드리며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보다가, 이내 마땅한 답이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항상 믿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증명하라고 시켜.
숨을 쉬는 사람한테 숨을 어떻게 쉬는 지 논리적으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1이 2개면 2가 되는 것처럼, 사람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당연한 걸 어떻게 설명해줄까.
그러다가 문득, 제논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벽 너머, 분명히 저기 보이는 흰 타일이 가득한 공간에 제논이 있는 건 분명했는데.
스르륵, 벽을 매만지는 손이 미끄러지며 벽에 하얀 자국을 만들어냈다.
자국? 그 것을 바라보던 중 뇌리를 스쳐지나간 생각에,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손 내밀어 봐.]
이 글자를 본 제논의 표정이 어떨까?
의아하다는 듯 갸웃거릴제논의 얼굴을 떠올리며 쿡쿡거리기도 잠시, 벽에 찍히는 커다란 손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크네.”
엄청 큰 손이었다. 하기야, 키가 그렇게 크니까 손도 크겠지. 발도 크고, 다른 곳도...음, 크겠지.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리고 손을 쥐어주던 그 큼지막한 손자국을 바라보자 괜스레 가슴이 간질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다가가서 냉큼 잡았을 손인데,
기껏해야 자국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하아.”
[이제 손 때.]
손을 땠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큼지막한 손자국이 점점 옅어지는 게 보였다.
벽에 잠시나마 닿았던 체온이 사라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내 손을 그 손자국에 마주대었다.
벽은 따듯했다.
손을 잡았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끌어안았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텅 빈 가슴이 사무치도록 따듯했다. 점점 사라지려하는 온기를 붙잡으려는 듯 내 손가락은 허공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자국이 옅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옆에 자그맣게 글씨를 더하는 것 뿐이었다.
[닿았다.]
닿았니? 직접 얼굴을 보며 묻고 싶었지만, 이렇게 글자로 묻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어서.
아무 대답 없는 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에는 벽에 맞닿은 온기가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그 따듯함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느끼기도 잠시, 벽에 마지막으로 글자를 남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몸이저절로 부르르, 하고 떨렸다.
깨달음이라는 게 있다면, 소설에 나오는 벽을 넘어선다, 라는 말이 정말 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 그 것을 겪은 게 아닐까.
“...뭔 지 알겠어.”
아련을 완성시킬 실마리를.
그러니까, 지금 내가 품고 있는 감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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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거리를 벌린 채 담배를 허공에 던진 마이어씨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 놀던 애가 갑자기 표정이 왜 그러냐며, 헛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아련을 완성 시킨 것같아요. 아니, 완성시켰어요.”
“...확실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이내 주변에 푸른 원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육망성이 새겨진 그림들, 저번에 보았던 그 마법진들을 보는 내 몸에 한기가 엄습했다.
이건, 완성하지 못한 아련으로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사용하는 얼음보다 훨씬 더 차갑고 아린 얼음.
그녀의 수준이 나를 훨씬 넘었기에, 오히려 나를 봐주고 있음에도 이런 수준이었다.
오직 완성된 아련으로만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감이 들었다.
“...후우.”
그 한기를 호흡을 통해 몸 속으로 받아들이며, 내가 품은 감정을 천천히 되돌아 보았다.
처음 월야를 뽑았을 때, 그리고 태동을 뽑았을 때, 수라를 뽑았을 때.
아련을뽑아내고, 리디아의 앞에서 미완성된 아련을 뽑아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막연하게, 나는 그 때 내가 품고 있던 감정을 그저 분노로 여겼다.
아련을 처음 뽑았을 때는 여신의 눈물을 사용했으니 그렇다 치고,
리디아의 앞에서는 단지 그녀의 행태가 맘에 들지 않아 감정이 격해진 탓에 뽑아내었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전부 내 착각에불과했다.
생각해보면, 나는모든 검을 뽑을 때 화를 내고 있었다.
월야를 뽑았을 때는 제논에게 놓여진 운명에 화를 냈고,
태동을 뽑았을 때는 길을 가로막는 이들에 대해, 수라를 뽑았을 때는 헤라 카르멘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었다.
그렇다면 아련과 분노는, 관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내가 품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은, 제논이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루더즈의 습격으로 헤라 카르멘, 투랄리온과 싸웠을 때도, 리디아와 맞붙었을 때도. 그 자리에는 제논이 없었다.
나는 그 걸 알고 있었고.
미약하게나마, 제논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없는 제논에 대한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 이었다.
싸움을 빨리 끝내고 만날 생각을 가득 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다만 그 것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수줍음이라는 가면에 가둔 채 알아내려 하지 않았을 뿐.
아주 자그마한 온기, 그 것에 손을 맞대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그 온기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고있음을,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내가 최근에 존재를 알아냈던 부모님보다도.
내 손을 쥐던 그 큼지막한 손을 어느때보다 찾고 있음을, 나는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빙륜환.”
마이어씨의 손에서 만들어진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나를 갈아버릴 듯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그 것들을 보는 내 얼굴에는, 이전과는 달리 여유가 있었다.
내 감정을 알았다. 내가 품고있던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보고 싶었던 거야.”
가슴이 답답한 것도, 아무리 숨을 토해내도 꽉 막힌 무언가가 풀리지 않았던 것도.
밥을 먹지 않는 게, 내게 아프다 말하지 않는 게 기이하리만치 거슬렸던 것도.
전부 보고 싶었기에 품은 감정들이었다.
내가 깨닫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련했기에.”
똑똑히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이나, 내 가슴속에 숨겨져 있던 미약하고도 사소한 감정이었기에.
나는 미처 그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을 깨달은 순간에, 이미 그 감정은 사소하지도 미약하지도 않았다.
잔잔한 물에 일순간 거센 파문이 일었다.
아련했다. 보기에 부드럽고, 가냘프고, 약해보였던 그 감정은 사실 내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감정이었다.
쩌저적-
손에 들린 검은 가벼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손에 들린 검은 초라했다.
그 어떤 검보다도.
하지만 그 것이 보여주는 광경은, 내 가슴 속에 일으키는 파문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검의 이름은 ‘아련’이었다.
내게 다가오던 얼음들이 허공에서 먼지가 되는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