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7화 〉단 둘이가 좋아(2) (97/115)



〈 97화 〉단 둘이가 좋아(2)

“방학식까지 아련을 뽑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진짜 해냈네요.”
“그렇네. 축하해, 아이샤.”

내 손에 들린 아련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이내 싱긋 미소 지어보였다.
솔직히  수 있을까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해낸 걸 보니 뿌듯한 감정이 마구 샘솟는 것만 같았다.

일단 목표 하나는 이루긴 했는데.

“흠, 제논은 아직 꽤 남았죠?”

옆에 있는 투명한 벽을 바라보며 묻자, 마이어씨는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이제부터는 얼마나 걸린다고 장담할 수가 없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끝날 수도 있고,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지. 사실 2주라는 시간은 대충 예상 기간을 말한 거니까.”
“흠...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뭐, 제논한테 달린 거지. 빨리 보고 싶으면 전화해서  하라고 닦달이라도 하던가.”

닦달이라니,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마이어씨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닦달은 또 못하겠어?   먹었다고 그렇게 화내면서, 왜 닦달은 못해.”
“굳이 그런 거까지 화낼 필요는 없잖아요.  안 먹은건 그렇게 안 먹으면...더 아플 테니까 화내는 거고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레 답하자, 마이어씨는 담배를 한 번 흡, 빨아드리며 연기를 내뱉었다.
아까 전부터 훨씬 짙은 연기 사이에서, 그녀는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논은 어떻게 이런 애랑.”
“...예?”
“아니, 그냥 부러워서. 어떻게 숨 쉴 때마다 남자 친구 걱정을 하지? 나는 그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숨 쉴 때마다 걱정하진 않아요. 근데 전화 걸 때마다 목소리가 안 좋으니까, 그냥 조금 빈도가 잦아진 것뿐이죠.”
“그래, 퍽이나 그렇겠다.”

마치 비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끌어올린 마이어씨를 노려보기도 잠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은 건가. 이제야 마음을 깨달았는데,
되려 깨달은 마음 탓에 그 일주일이 더욱 길게 느껴질 거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문 열고 ‘제논 나와-!’ 라고 해버리고 싶은데.

혹시 그랬다간 주술식에 문제가 생길까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주술식 그거 아직도 새기는 중이에요?”

내가 묻자, 마이어씨는 눈을 살짝 접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도 모르는 건가? 그런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녀가 눈을 조그맣게 뜨며 입을 열었다.

“흠, 아마 제논이 잘만 하면 내일 모레쯤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일 모레요? 오래 걸린다면서요.”
“주술식 자체는 이제 마무리 단계야. 스스로 이능만 조절할 줄 알면끝나는 거지. 내 생각보다 주술식 새기는  빠르게 끝나서, 아마 2주보다 빠르게 끝날 확률이 더 커.”
“아까는  오래 걸릴 수도 있다면서요. 마이어씨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면서요.”

내가 따지듯 물었지만, 그녀는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하고 찔렀다.

“네가 무슨 표정 지을지 궁금했거든.”
“장난이었던 거에요?”
“응.”

미치겠네, 내가 질렸다는 듯 쳐다보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담뱃갑을 들어올렸다.
내 반응이 재밌는지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는 그녀를 바라보기도 잠시, 나는재빨리 손을 움직여 그녀가 들고 있던 담뱃갑을 뺏어들었다.

“,,,어?”

아련을 들고 있었던 탓일까, 그녀가 눈치 채지도 못한 사이에 담뱃갑을 뺏기자 그녀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린 담뱃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압수.”
“아이샤, 장난은 나빠. 어차피 너 그거 필 것도 아니잖아. 응?”
“싫어요.”

고개를 가로젓자, 마이어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냥 줄 수는 없지. 손이 닿지 않는 천장으로 담배를 휙, 하고 던지자 그녀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쩌저적-

“안돼!”

얼음을 얼려 천장에 담배를 붙인 모습에 그녀가 뺨을 감싸며 소리쳤지만, 나는 팔짱을  채 마이어씨를 빤히 쳐다봤다.
더 오래걸릴 수도 있다는 말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녀에게 담배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놀랄 정도면 내가 원하는  하나쯤은 충분히 얻어낼 수 있을  같았다.

“아, 아이샤? 장난 그만하고. 응? 이제 돌려주자. 착하지?”

어쩐지 간절해보이기까지  마이어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비릿하게 웃어보였다.
주술식 마무리 단계. 그렇다면, 이제 마력 주입도 꼬박꼬박 안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럼 이제 만나도 되는 게 아닐까?

아련을 완성시킨 그 순간부터, 나는 내가 품고 있던 감정이 전보다 더욱 커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알아채지못했던, 그저 가슴 간질거리는 그런 감정이었지만.
아련을 뽑은 뒤엔  감정이 부풀어 자꾸만 제논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지면 부들거리는 하얀색의 머리카락이,  머리카락만큼이나 새하얀 피부가, 자꾸만 떠올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쉽사리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마이어씨가 마법으로 얼음을 부수지 못하도록, 담배를 감싼 얼음을 두껍게 말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탁?”
“네, 그러니까 엄청 사소한 부탁인데.”
“...말해봐. 그거 들어주면, 저거 돌려줄 거지? 돛대란 말이야. 돛대를 막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니.”
“제논  만날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요? 이제 만나도 되잖아요. 주술식 계속 마나 불어넣는 것 때문에 못 만난 건데, 이제는 주술식 마무리 단계라면서요.”
“단지 그것 때문에 못 만나게 한 건 아니야. 주술식을 다 새기더라도, 자기가 이능을 컨트롤 못하면 네가 자칫 휩쓸릴 수도 있어.”
“안 휩쓸릴 자신 있어요.”

아련도 뽑았고, 나름 내 실력에 대해 자신도 있었다.
제논을 믿는 것도 있고, 제논의 재능을 믿는 것도 있고.
설령 주술식으로 인하여 자신이 예상치도 못할 만큼 강해졌다하더라도, 제논이라면 그 걸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쩌저적-

내가 담뱃갑을 얼린 얼음을 점점 두껍게 만들자, 마이어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돛대가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소중한 건가. 그럼 빨리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침내 담뱃갑의 안으로 얼음이 파고 들어가자, 마이어씨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 잠깐만. 그래, 좋아.  부탁 들어줄게. 만나게 해주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언제인지부터 말해. 내가 최대한 빨리 끝내볼 테니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마이어씨를 바라보며, 나는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바라는  딱 하나. 제논을 만나는 거였지만 거기엔 조건이 하나 달려있었다.

내일도, 내일 모레도 아니었다.

마음이 생겼을 때, 내가 이 마음을 깨달았다는  알아차린 지금. 그러니까 오늘 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설마 오늘?”

마이어씨가 아하하, 하고 웃으며 나를 힐끔 쳐다보자,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나 이제 퇴근 시간인데?”
“그럼 더 빨리 완성시켜야겠네요.”
“완성시키려면 앞으로 서너 시간은 더 걸릴 텐데?”
“이런, 야근이네요.”
“안 해주면?”
“담배 새로 사시면 되는 거죠. 돛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트에서 팔 거 아니에요.”
“안 팔아!”

내게 씩씩거리며 소리친그녀는, 이내 이마를 짚더니 나를 힐끔 쳐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오늘 만나고 싶어?”
“네.”
“...기다려 그럼.”

천장에 붙어있는 담뱃갑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우수에 찬 것 같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미소지었다.


#

금방 끝낸다며 나를 내보냈던 마이어씨였건만, 4시간이 흘러 어느덧 노을이 지기 시작한 지금까지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마무리 단계라고 하더니 실상은 반도  끝낸  아닐까, 문득 그런 걱정이 들었다.

어두워지면 집으로 가야할 텐데. 해가 늬엿늬엿 땅 아래로 그 무거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내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날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후우.”

오늘은 목소리도 거의 듣지 못했다.
아침에는 오늘 방학식이라며 짧게 끊은 게 전부였고, 점심에는 벽에 글씨를 써가며 대화하느라 전화를 따로 걸지 않았으니.
아련으로 커져버린 감정은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이유로 살짝 현기증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언제나 나긋나긋한,  귓가에 부드럽게 흘러들어와 심장에 그대로 자리 잡는 그 목소리를.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기도 잠시, 앞에 있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아이샤.”

아까보다 훨씬 퀭한 눈의 마이어씨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끝났어요? 이제 만나도 되는 거죠?”
“...그래, 이제 만나. 난 퇴근할 거니까. 알아서 하고 싶은 건  해버려.”
“수고하셨어요.”

품속에 두었던 담뱃갑을 건네자, 마이어씨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진짜...힘들어. 다음부터는 이런 부탁 하지마.”
“알았어요. 다음에 만날 때는 제논이 주술식에 완전히 적응했을 때일 테니까요.”
“일단 주술식 자체는 잠깐 억제 시켜놨어. 다치는 일은 없을 거고...뭐, 살짝 힘이 빠져 있는 상태니까 잡고 흔들지는 마라?”
“제가 왜 잡고 흔들어요.”

당장에라도 잡고 놓고 싶지가 않은데.
내가 피식 웃자, 그녀도 따라 미소 짓더니 이내  밖으로 몸을 빼내었다.

“아마 지금 좀 많이 힘들 거야. 잘 해줘.”
“걱정마세요.”

내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슬쩍 비켜주며 손을 흔들었다.
 해보라는 듯, 주먹을 살짝 움켜쥔 그녀를 뒤로하고 나는 마침내 문을 살짝 움직였다.

“...후우.”

이 문을 열면 제논이 있을 거란 생각에 심장이 요동쳤다.
앞으로뛸 심박수까지 지금 가져다 쓰는 걸까,
평소보다 배는 빨리 뛰는 심장 소리는 가만히 있는 내 귀에 들릴 만큼이나 크게 들려왔다.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수없이 해왔다. 사귄지 이틀, 하지만 정작 그 뒤로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보고 싶었다는 마음조차 이제 깨달았는데, 어떻게 할지 내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냥 본능에 따르기로 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이 행하는 대로.

그렇게 맡기면, 어떻게든 되겠지.

긴장으로 살짝 떨리는 손을 움직여 문을 밀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내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것과 똑같은 하얀 색의 공간,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제논.”

익숙한, 그리고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 그 안에 있다는 점이었다.

부들거리는 하얀색의 머리, 땀에 젖어 한 쪽으로 넘겨진 머리를 쓸던 제논의 푸른 눈동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파문이 일 듯, 잠시 일렁이던 눈동자는 어느덧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이샤.”

잔잔한 목소리였다.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이 적막한 공간을 파고드는 그 목소리에 귀가 간질거렸다.
귀를 부드럽게 감싸는,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몸을 살짝 떨자, 어느덧 내 앞으로 다가온 제논이 내 팔을 잡았다.

“아이샤 맞지?”
“...만져 보면 알잖아.”
“왜...왔냐고는 안 물어볼게.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면.”

 팔을, 어깨를, 목을, 그리고 뺨을 부드럽게 만진 제논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다는 듯, 흔들리던 눈을 접으며 제논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었어.”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뒷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너무도 가까워진 숨결이 결국 맞닿았기 때문이었다.

툭,

고백하고 난  처음 맞닿은 입술은, 부드러웠다. 그때보다도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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