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단 둘이가 좋아(3)
맞닿았던 입술이 그렇게 떨어지고, 어느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그제서야 나는 제논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일주일 전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차이가 날 만큼마른 얼굴에 놀라기도 잠시,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자 제논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피? 별 거 아냐. 그냥 주술식 새기다가 혀 깨물어서.”
“...혀 깨문 거 맞아?”
눈살을 찌푸리자, 제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
“괜찮아. 너도 들었을 거 아냐. 좀 아프긴 했거든.”
“그러니까 그런 걸 왜 해 가지고.”
“이제 며칠 안 남았어. 주술식은 다 새겼고, 내가 이능에 적응하는 시간만 남았다더라.”
“오래 걸릴 것 같아?”
“...3일.”
잠시 뜸을 들이던 제논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답했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확신을 가질 때처럼,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을 품은 눈동자는 한 치의 떨림조차 지니지 않았다.
“3일 안에 끝낼게.”
어쩐지 비장한 말이었지만, 내 입에서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폼을 잡는 건지,
다른 때였으면 모를까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상태에서 그렇게 말하니 그저 웃기기만 할 따름 이었다.
“그렇게 폼 잡지 않아도 돼.”
“폼 잡는 거 아닌데.”
내가 웃어서 삐지기라도 한 걸까, 입술을 삐죽이는 제논을 히죽거리며 바라보자 제논이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엄청 말랐네. 분명 일주일 정도였는데 이렇게 눈에 띌 만큼이나 마른 게 말이 되는 걸까.
밥을 먹었다고는 했는데, 진짜 먹으면서 한 건 맞는 건지.
아니면 단지 너무 아파서 이렇게 말라버린 건지 고민하기도 잠시, 나는 손을 들어 제논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예전과 달리 푸석해진 피붓결에 한숨이 터져 나오자 제논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나야 주술식을 새겨본 적이 없으니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이런 몸 상태를 볼 때마다 자연스레 얼마나 아팠을지 어림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입가에 묻어 있던 핏자국이나, 며칠 새에 푸석해진 피부, 앙상해진 얼굴을 볼 때면, 아무리 생각해도 주술식으로 인한 고통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그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오늘 만난 것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으니까. 일주일 동안 못 보는 바람에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말하려 만난 것이 아니던가.
계속 서있는 제논에게 눈짓하자, 제논을 알겠다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여태 힘들었는지 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이 퍽 피곤해보였다.
“졸려?”
“...조금, 그런데 자는 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누가 봐도 피곤해 보이는데, 눈 밑에 짙게 깔린 음영을 보며 말하자 제논은 두 눈을 비비며 이제 괜찮다는 듯 손을 활짝 펴보였다.
“이제 안 피곤해. 밤도 샐 수 있어.”
“밥은 먹었어?”
“너는 나 볼 때마다 그 소리 하는 것 같더라. 누가 보면 아주 굶고 다니는 줄 알겠어.”
“...말랐으니까 그렇지.”
전보다 훨씬 핼쑥해진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자, 제논은 자기 얼굴을 매만지며 옅게 미소지었다.
“밥은 다 챙겨 먹었어. 첫날에는 걸렀는데, 나중에는 다 챙겨먹었으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너 가뜩이나 많이 먹는데, 이렇게 마를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조금 먹은 거야. 살 쪄도 되니까 더 많이 먹어. 이렇게 마르면 보기 안 좋다니까?”
“무슨 엄마야? 괜찮다니까.”
엄마라니, 그 말에 충격 받아 제논을 쏘아보자 제논은 큭큭 거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좀 할 수도 있지. 아무리 그래도 동갑인 사람한테 엄마라니
내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자, 아차 싶었는지 제논이 황급히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까, 그 꿈이라는 건 꿨어?”
“...아맞아.”
생각해보니까 아련을 뽑으려 했던 이유가 그 꿈을 다시꾸기 위해서였는데.
어쩌다 보니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요 일주일 사이에 워낙 이런저런 일이 많은 지라.
생각해보면 제논이랑 떨어져 있던 것 밖에 없긴 했지만, 그 만큼 큰일도 없을 터였다.
“아직 잠을 안 잤으니까. 그리고 아련을 뽑았다고 해서 그 꿈을 꿀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어.”
“그럼 여기서 잘래?”
“...뭐?”
난데없이 튀어나온제논의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내 얼굴은 이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잔다니, 여기서 잔다니.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나와 제논 둘 뿐이었다.
나는 여자, 제논은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잔다는 건, 그렇고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남녀칠세부동석!”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직 박히는 건 안 돼, 나는 그 생각을 떠올리며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여자라는 걸 뼛속 깊이 인정했지만, 마음까지 제논에게 주었지만.
그렇다 한들 아직 22년이란 세월 동안 남자로 살아왔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비록 성과 관련된 경험이라곤 겪어본 적이 없다지만, 그런 짓을 할 때 각자 맡은 바 역할이 있다는 걸 알고있으니까.
“우리 아직 17살이야. 그러니까, 그, 성인이 되면 몰라도. 아직 안 돼.”
게다가 나이도 문제였다. 마음은 22살이 넘었지만, 신체 나이는 17살이었다.
만약 하게 되더라도 성인이 되고 나서 해야지
.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만약 실수해서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아카데미는 어떻게 다니라고.
배가 부른 채로 에드윈 카르멘과 싸우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가, 이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아이샤의 몸에 빙의하면서 뒤바뀐 성역할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 설마.”
제논이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바라봤다가,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 난 그런 뜻으로 한 거 아니야.”
주춤거리던 제논은 이내 뺨을 긁적이며 깊은 숨을 토해냈다.
절대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라며, 고개를 미친 듯이 젓던 제논이 두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그냥 말 그대로 자고 가란 뜻이었어. 네가 생각한 그런...게 아니라고. 진짜야.”
“...아, 알았어.”
아직까지 얼굴이 뜨겁긴 했지만, 오해였다는 걸 깨닫기엔 충분했기에 나는 제논에게 다시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래, 하기야 이 상황에 ‘잔다’라는 말에서 그렇게 오해하는 쪽이 이상한 거 겠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아직까지도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도 잠시.
시선을 살짝 돌려 제논을 바라보자 제논은 내 눈치를 보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침울해 보이는 기색마저 보이는 것 같아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오해한 건 내 쪽인데, 왜 침울한 건 제논인 건지.
이마를 짚으며 천천히 제논이 앉은 곳 옆에 앉자, 제논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빤히 바라봤다.
“미안해, 오해해서. 내가 너무 들떴나 봐.”
세상에, 나는 방금 내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니, 막 생각나는 데로 지껄이긴 했지만 도대체 제논이 나를 무어라 생각할까.
솔직히 오랜만에 만나 마음이 들뜬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생각이 그런 방향으로 흐른 것은 온전히 내 잘못이었다.
아니지, 프레이 탓도 있었다.
사귄 뒤로 꾸준히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냐며, 이런저런 음습한 욕망을 한껏 드러낸 것이 프레이였으니까.
내가 사과하자, 제논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내가 오해할 법한 말을 한 것도 사실이니까.”
“...네가 싫은 건 아니야.”
“응?”
입고 있던 교복 블라우스의 끝을 매만지며, 나는기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이샤가 된지 3개월이 넘어간 지금, 여자의 몸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터였다.
씻는 것도, 이런 몸을 다루는 것도, 심지어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생리 현상에도 이제는완전히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몸과 달리 마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적응이 필요했다. 내가 제논을 좋아하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것도 그런 점이었으니.
22년을 남자로 살아왔다. 그리고 3개월을 여자로 살았다.
그런 내가 제논을 좋아한다는 게 과연 맞는 걸까, 어쩌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의문은 금세 풀 수 있었다. 나를 위해주는 제논의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 브루노에 불꽃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나를 구했던 그 모습이 가슴 속에 새겨지듯 남았을 때부터.
내가 이 감정을 부정할 수 없음을 알아챘기에 좋아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여자였고, 여자로써 어쩌면 당연한 감정을 품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꽤나 다른 문제였다.
아직 몸이 다 성장하지 못한 것도 있고,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도 컸다.
제논이 싫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약 그런 걸 하게 된다면, 유일하게 허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제논일 테니까.
“알아.”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제논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혹시나 내가 한 말에 마음이 상했을까, 절대 싫어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는데 오해한 게 아닐까.
하지만 제논은 정말로 괜찮다는 듯, 내 팔을 툭 건드리며 미소지었다.
“어른이 되면,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2년만...기다려줘.”
“기다릴게.”
여전히 덤덤히 대답하는 제논을 바라보며, 나는 붉게 물드는 귀를 손으로 가렸다.
2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닌데,
당연하게 기다릴 수 있다며 저렇게 쉽게 대답하는 모습이 어째선지 믿음직스러워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내민 제논의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