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단 둘이가 좋아(4)
“...하.”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별 하나 없이 텅빈 하늘이었다.
네온사인에 가려져, 한 때는 반짝이던 별들이 보이지 않는 광경에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손에 들린 초록빛의 술병을 들어 다시 입에 가져다 대었다.
뜨겁고, 달았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화기에 눈살을 찌푸리자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야, 이렇게 쓴 걸 어떻게 먹어?’
‘잘.’
‘샤론, 너 이거 먹어봤어? 레이도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잘 먹냐?’
‘너는 쓰겠지만, 우리는 달거든.’
‘인생이 워낙 썼던 거지.’
“푸흐.”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아무리 울적한 때여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아이크랑 샤론, 그 둘이랑 같이 다닐 때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을 때였을테니.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몇 년 동안 틱틱 거리던 두 명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가끔 한 번 씩 크게 싸우던 것을 말리는 것도,
셋이서 함께 아카데미를 다니던, 나중에 프로 히어로가 되어 함께 다니던 그 모든 순간이 즐거웠는데.
“...씨발.”
기분 좋은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느덧 가슴 속을 뒤덮은 죄책감에,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며 잔을 삼키듯 입에 대었다.
달았다. 쓰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그저 달았다.
어릴 때엔 그렇게도 쓰던 술이,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달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그 때부터 였던가. 기억을 되짚으려던 나는 그대로 손을 멈춘 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전부, 의미 없는 기억이 아닌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자꾸만 떠오르는 옛 기억에 기분이 울적해지곤 했다.
30년, 무언가를 잊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했건만. 가슴 한 구석에 숨겨져 튀어나오는 기억은 아무리 노력해도 잊을 수 없었다.
마법으로 뇌를 뒤흔들어도, 기억을 잊는 마법을 내게 사용해도,
결국에는 떠올라 어느 순간부터는잊으려는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게다가 요즘엔 똑 닮은 둘도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닮은 게 당연한 걸까. 아이샤를 떠올리던 내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아이샤는 아이크와샤론의 자식인 것만 같았다.
생긴 것은 샤론을 닮았고, 하는 짓은 아이크를 닮은 게. 꼭 예전에 둘이 하던 짓을 연상시켜서.
아이샤를 볼 때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일까, 아이샤와 무언가를 할 때면 꼭 험하게 대할 때도 있었다.
수련시킨다면서 미로를 만들어낸 것도 그렇고, 아련을 뽑을 때도 구태여 극한까지 몰아붙인 것도 있고.
어쩌면 죄책감일지도 몰랐다.
내가 없을 때 다치지 않기를, 꼭 대고 그린 것만 같이 샤론을 닮은 그 아이가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어쩌면 내가 모를 상처를 이미 품고 있을 지도 몰랐다.
늘 웃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속에는 남모를 상처를 품고 있는 이가 종종 있었으니.
처음에는 그저 망상에 불과한 짐작에 가까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언급할 때마다, 그리고 제논을 얘기할 때마다.
아이샤의 버릇이 하나 있다면, 그건 감정이 격해지면 되려 무표정에 가까워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숨을 참는 것처럼 창백해진 그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은 보는 사람 쪽이었다.
그 얼굴을 계속 볼 때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변하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따로 물을 수는 없었다. 말 못할 과거가 있는 거겠지.
인적 사항을 보면, 부모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출생지라 적힌 것은 한 보육원, 그러다가 홀로 자란 것은 대략 8살 즈음부터.
길거리를 홀로 돌아다니며 10여년을 살아온 아이샤의 과거를 함부로 물을 수 없었기에,
나는 아카데미에서조차 아이샤를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라면 상상치도 못할 역경을 꿋꿋이 견뎌내고,
죽음이란 위기를 겪고, 또한 그것을 극복하며 결국 환히 웃는 아이샤를.
나는 어쩌면 부모의 감정으로 보고 있을 지도 몰랐다.
속죄라,
속으로 그 단어를 중얼거리며, 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하나 담은 담배를 바라보자 아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담배를 얼리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던 그 아이가.
“...나한테 애가 있었으면 그랬을까.”
흐음,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래도 아닐 것 같았다.
이런 무뚝뚝한 엄마를 좋아하는 자식이 있다면 그게 더 웃기겠지.
하기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30년 전에 이미 끝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가정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이 더 소중한 거였고.
제논과 아이샤.
만난 시점도, 그리고 성격도 전부 다른 그 둘이었지만. 왠지 모를 감정을 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아이크와 샤론을 아예 겹쳐 보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아이크와 샤론을 떠올릴 때와는 달리 둘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란.
아마도 친애가 아닐까.
부모처럼, 그 둘은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감정을 쉬이 받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왔다.
아이샤야 잘 모르겠지만, 제논의 어린 시절을 봐왔던 나로써는 단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사회라는 어둡고 음울한 곳을 너무도 일찍 겪었다. 암투와 피를 너무도 일찍 봤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순수함이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부모만이 해줄 수 있는 것이란 것을, 솔직히 말하자면 나또한 잘 알지 못했다.
“하아.”
미숙한 건 나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술식을 새겨달라는 그 간절한 눈동자를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었다.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을 제거하긴 했지만, 그렇다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얀 색의 공간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그 붉은 것이 모두 한 사람에게 나왔다는 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나에 대한 자조였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너 나은 방법을 찾아서, 덜 아프게, 덜 고통스럽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사과를 하는 내게 괜찮다며 말한 것은 오히려 제논 쪽이었다.
이렇게 저를 만든 나에게 화를 내며 무어라 할 수 있었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는 그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한 사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그렇게 스스로를 희생하며 경지를추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논은 종종 자신이 재능이 없다며 비하하곤 했지만, 내가 보기에 제논이 지닌 재능은 이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노력, 그 무엇이 앞에 있다 한들. 무너지지 않는 그 마음.
그것이 재능이라면, 제논의 재능은 극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둘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까지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에 가끔 씩은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모습이 기꺼워서.
늘 행복했으면 했다. 아이크와 샤론에 대한 속죄도, 어린 시절의 제논을 그저 두고 볼 수 밖에없던 내 처지에 대한 후회도 아닌.
레이 마이어가 가지는, 그런 마음이었다.
휙,
필터까지 타오른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려두고, 술값을 내려 주머니를 뒤진 내 표정이 이내 딱딱히 굳었다.
“...열쇠?”
아이샤한테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안 줬던 건가.
내 담당실은 밖에서 잠그는 구조인데. 잠시 이마를 짚곤 한숨을 내쉰 내 머릿속에 오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17살, 혈기왕성한 두 명의 학생들.
서로를 끔찍이 여기다 못해 아주 좋아 죽는 두 명의 남녀.
그런 둘이 잠긴 방 안에 있다면?
“...피임은 알아서 하겠지.”
열쇠를 쥔 손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으며, 다시 술병을 손에 쥐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조금 일찍 출근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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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과 할 얘기가 워낙 많았던 터라, 시간은 순식간에흘러갔다.
일주일동안 무얼 하면서 지냈는지, 주술식 새기는 게 어땠는지.
아련을 뽑는 과정을 설명하는 게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제논은 웃으면서 자기도 그랬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는 주술식 같은 거 새긴다고 하지 마."
"...알았어. 진짜 안 할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마이어씨 아니었으면어쩌려고 했어."
"그랬어도했겠지."
"뭐?"
한껏 노려보자 제논은 장난이었다며 손을 들어올렸다.
장난이라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듣는 사람 입장이 어떤지도 모르고.
하지만 애초에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고,
아직 할 얘기가 많았음에도 시간은 물흐르듯 사라졌다.
"...11시네."
"그러게."
시간을 확인한 제논이 침울한 얼굴로 입을 열자, 나는 옅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헤어질 때는 웃으면서 헤어져야지.
"기억하고 있지?"
"3일 안에 끝내겠다는 거?"
"기다리고 있을게."
문고리를 쥐며 말하자, 제논은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3일이라는시간동안에 연락은 하겠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잘가."
제논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후련한 듯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 웃으면서 봐야지. 나또한 웃으며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덜컥,
어째서인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잠긴 건가, 그 때가 되서야 떠오른 생각은 마이어씨가 내게 열쇠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밖에서 잠기는 문.
그리고 문을 잠그고 간 마이어씨.
"...미친."
"연락해볼게."
제논이 다급히 스마트 워치를 켜자,나는 목소리를키워 복도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누구 없나요!"
하지만 마이어씨의 담당실은 쓸데없이 방음이 잘되는 편이었고,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밖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락 안 돼?”
“전화를 안 받아...”
혹시나 하고 제논에게 물어봤지만, 스마트 워치를 바라보는 제논이 난처한 듯 볼을 긁적였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
잠겨버린 담당실, 그 안에 있는 것은 제논과 나 단 둘.
문득 떠오른 사실에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로..."
둘이서 자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