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0화 〉단 둘이가 좋아(5) (100/115)



〈 100화 〉단 둘이가 좋아(5)

“미치겠네.”

쿵쿵-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을 거칠게 잡아당겨 봤지만, 문고리만 위태롭게 흔들릴 뿐 문이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능으로 부술 수 있을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아카데미의 문이 그리 쉽게 부서지는 재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아까 아련을 만들어 내느라 힘을거진 사용한 탓에 문을 박살낼 만큼 이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상황을 쉽게 설명하자면 단 둘이 여기에 갇힌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마이어씨가 올 때까지여기 있어야겠네.”
“그러게. 아니, 무슨 열쇠를 안 주고 가는 사람이 어딨어?”
“...여기 있네.”

제논이 씁쓸한 듯 미소를 짓자, 나 또한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짜 여기 있구나.

그렇게 두어 번 문을 더 만지던 나는 그냥 털썩, 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열지도 못할 문 붙잡고 있는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마음을 비우는 게 낫겠지.

아직 못 다한 얘기도 있었으니까.

“프레이한테 전화나 해둘까.”
“프레이?”
“응, 오늘 저녁 먹기로 했는데 이미 늦었잖아. 사과는 해야지.”
“...아, 미안해. 나 때문에.”
“아냐아냐, 나도 솔직히 까먹고 있었어. 그니까, 음.    있다 했으니까.”

내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제논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그런거면 뭐, 그럴 수 있지.”
“나 이제 프레이랑 전화 좀 할게? 잠깐만.”

제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프레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저녁 같이 먹자고 했는데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네, 문자도 몇  쌓여있고.
나한테 화난  아닐까, 살짝 초조한 심정으로 전화를 걸자, 곧이어 너머에서 프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프레이,  아이샤야.”
-아이샤가 누군데요.

삐졌구나. 퉁명스레 대답하는 목소리에 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잠시, 나는 최대한 미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프레이, 내가 진짜 미안해. 오늘 제논하고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제논하고 만났어? 뭐래? 무릎 꿇고 사과하대? 내가 너 일주일동안 주접떠는  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걔는 진짜 나한테도 사과해야 돼 진짜.
“주, 주접이라니.”
-아니, 맨날 제논은 뭐하고 있을까- 제논 밥은 먹었을까- 오면 혼내줘야지 하고 주먹 쥐었다가 또 목소리 안 좋으면  혼자 침울해져서 책상에 엎드려 있고...
“야!”
-망부석 마냥 레이샤 교수님 담당실 하염없이 쳐다보길래 보고 싶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니라 그러고, 나 그냥 빌런 할까 고민했다니까.
“...프레이!”

자꾸만 쏟아지는 프레이의 폭로에 달아오르는 볼을 감싸자,
옆에서 제논이 일주일동안 그랬냐며 미소를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니, 그렇게 쳐다봐도 내가 뭐라말할 수가 없는데.
솔직히 아련을 뽑기 직전까지 내가 품은 감정이 뭔지 긴가민가하기도 했고.

나 혼자서 그냥 이건 짜증이 난 거구나,
하고 어림짐작하고 넘겨버려서 프레이한테도 그렇게 말했던 건데.

-...그래서, 좋냐?

툭, 하고 프레이가 내뱉은 말에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좋냐, 라고 물어보면 역시 한 가지 대답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을 본 순간부터,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거울을 봤었나, 혹시 몸에서 냄새가 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심장은 미칠 듯이 뛰지 눈은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지,
 말은 또 더럽게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정리는 안 되지.

손가락은 자리를 잃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그 때 느낀 건,

“좋아. 진짜 좋아.”

내가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나가 죽었으면 좋겠어.  다.
“뭐래.”-아무튼 만났다니까 다행이다. 이제 완전히 다 끝난 거지?
“아니, 그건 아니고 앞으로 3일 정도 남았대.”
-그래도  번 만났다니까 어제처럼 그러진 않겠네. 어제는 진짜 어후, 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그건 말하지 마. 진짜, 내가 떡볶이 사줄게.”
-...2인분.
“콜.”
-좋아, 그럼 둘이서 오붓한 시간 보내고. 아, 근데 이제 슬슬 집에 가겠네.

아, 프레이가 한 말에 나는 제논을 바라봤다.
집, 못 가는데. 잠시 나를 바라본 제논은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아이샤, 오늘 나랑 같이 자. 둘이서.”
-......
“야 이 멍청아, 그걸 말하면 어떡해!”
-...어, 음. 내가 뭐라고 해야 되냐? 둘이서 같이 잔다고? 거기가 어딘데.
“...학교.”
-미친.

짧게 중얼거린 프레이는, 이내 혼란스럽다는 듯 연신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야, 진짜야? 둘이서 같이 잔다고?
“...어쩌다 보니까.”
-피임 잘해. 응원 할게.
“무, 무슨 피임이야!”

새빨갛다 못해 피보다도 붉어진 얼굴로 내가 소리치자, 프레이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힘내! 내일 꼭  풀어줘!
“썰 같은 거 없-”

뚝-

“뭐, 뭐야 애는.”

피임이라니, 피임이라니. 그 말을 연신 중얼거린 나는 뜨거워진 목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아무리 나하고 말하는 거지만, 그래도 옆에 제논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곤란해.

“아으.”

아무리 식혀도 진정되지 않는 얼굴을 손으로 감싸자, 그제서야 이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는 것 같았다.
그래, 단둘이 여기에 있는 거였다.

마이어씨가 오려면 최소한 해가 뜬 뒤에나 오실테고, 그럼 새벽을 함께 보내야 한다는 소리겠지.

“...제논, 그러니까 프레이가 한 말은 다 잊어버려.”
“네가  목소리 듣고 침울해진 것도?”
“그것도,”

왜 이렇게 덤덤한 건지, 분명 어디에도 덤덤할 만한 이야기는 없었는데.
내가 한숨을 내뱉자, 제논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자야지. 이불 찾으러.”

여기에 이불도 있었어?
그런 생각에 제논이 하는 일을 지켜보자, 타일 하나를 열며 그 속에서 이불을 꺼내는 모습을   있었다.

“...아, 근데 이불이랑 베개가 하나씩 밖에 없는데.”
“네가 거기서 자.”

애초에 나는 여기서 잘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본 제논이었지만, 이내 알겠다며 이불을 한 쪽에 폈다.
일주일 동안 계속 이렇게 잤던 건지 이불을 까는 모습이 퍽 익숙해보였다.

“힘들었겠다.”
“처음엔 조금 힘들었지. 근데 하다 보니까  익숙해져서.”

역시 주인공인걸까,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자는  보면 참 대단한 정신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벌써 자려고? 내가 그런 눈으로 제논을 바라보자, 제논또한 나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안 자?”
“벌써 자?”

제논은 피곤했던 걸까. 여태 힘들었다고 했으니 어느정도 짐작은 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도저히 잘 수가 없는 기분이라서. 새벽을 혼자 지새야한다고 생각하니 살짝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제논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자기가 깔은 이불의 옆을 두드렸다.

“이리 와. 나도 지금 자려는  아니니까, 조금 더 얘기할 것도 있고.”

무감한 얼굴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는 제논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 옆에 걸터앉았다.
하복을 입은 터라 살이 살짝 맞닿아 움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제논을 보며 나또한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 졸려?”
“잠이 오겠어. 이런 상황에.”
“그건 그렇지.”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아무 말 하지 않던 제논은, 이내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뭐, 익숙해져야지. 앞으로 언젠가는 같이  날이 올  아냐.”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말을 잘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제논을 흘겨보자, 제논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난이야. 근데, 아까 프레이가  말 진짜야? 나 그렇게 걱정하던 거 말이야.”
“...뭐, 거짓말은 없었어. 조금 과장은 섞이긴 했는데.”

솔직히 나도 제논 생각을 많이 하던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게 그리워하기에 하는 행동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 뿐, 지금 생각해보면 유난을 떨었던것도 맞는 말이었다.
어쩐지 프레이 표정이 나를 볼 때면 별로 좋지 않더니만, 그런 이유였구나.

“나도 그랬어.”
“너도?”

내가 묻자, 제논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도 너 많이 보고 싶었어. 그래서 마이어씨한테떼쓰다가 맞기도 했고. 뭐, 그랬지.”
“맞았어?”
“응, 겁나 아프더라.  그렇게 세게 때리는 지.”

아직까지도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쓰다듬는 제논을 보며 피식 웃자 제논이 내 손을 끌어 당겼다.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데. 도대체 사람을 왜 이렇게 안달나게만들어.”
“내, 내가?”
“그 때 벽에서, 닿았다고 했을 때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아...그 때.”

나도 그 때는 살짝 나사가 빠진 상태였으니까.
또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내 마음을 자각한 것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갑작스레 제논이 내 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뭐해?”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나를 자기 다리에 앉힌 채, 뒤에서 끌어안은 제논이 얼굴을 내 목에 파묻었다.
목에서 느껴지는 숨결에 간지럽긴 했지만, 어쩐지 잠깐만이라 말한 제논의 목소리가 퍽 간절해보여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제논이 다시 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런 게 싫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보고 싶었던 만큼 제논도 보고 싶어 했을 테니까.

나를 끌어안은 제논의 손을 움켜쥐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깐은, 이렇게 있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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