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1화 〉{외전} 야, 책임져 (101/115)



〈 101화 〉{외전} 야, 책임져

나른한 오후, 커튼 사이로 비치는 햇빛 탓에 깬지라 몸 상태는 노곤하기 그지 없었다.
비틀거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기도 잠시, 침대의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이샤?”

얘가 어디 갔지.

새벽까지만 해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던 속옷도 사라지고, 아이샤가 누워있던 자리에 온기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뭐, 예전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 당황해서 창문이라도 깨부수고 나갔겠지만.

“으음-.”

에드윈 카르멘도 그렇고, 산하 빌런 조직마저 모두 제압하여 여유를 되찾은 지금은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겠지.
19살, 그 모든 일들을 전부 끝내고 20살에 결혼한 우리였기에,
이렇게 함께 살게  것도 벌써 5년이 넘어갔다는 게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사귈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만 품었는데.

이렇게 아무 탈 없이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된  보면 참 뭐라 해야 할까.
꼭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살을 맞대며 몸을 섞는 것도, 아침에일어나 서로가 차려준 밥을 먹는 것도, 어쩌면 환상이 아닐까.

“...오늘 아이샤가 아침 하는 날이었나?”

하나 둘 셋, 손가락을 접으며 세어봤지만 아무래도 날짜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늘이 휴일이라는  확실한데, 토요일이었나 일요일이었나.

“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샤가 먼저 일어난 이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귓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에 놀란 듯 짧고 강렬하게 퍼진 그 소리에 다급히 몸을 일으키자,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려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샤!”

화장실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에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자 보인 것은 무언가를 든  입으로 손을 가린 아이샤였다.

“뭐, 뭔데?”

다친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이내 내 시선은 아이샤가 들고 있는 무언가에 향했다.
들고 있는 것을 익히 봐온 것도 있지만, 그 물건 가운데에 나타난 두 개의 빨간 선이. 어째서인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저 물건 이름이 임신 테스트기였나.

“세상에.”

물건의 이름을 깨닫는 순간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임신 테스트기,  줄. 내가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아이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밝게 웃던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아이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논. 나...나, 임신했나봐.”

그래, 이제 나는  아이의 아빠가 되는 거고.
아이샤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그런 날이 찾아 오게 된 것이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며,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기쁨일거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내가 콘돔끼라고 했잖아...이 미친 새끼야...!”

문득 악마처럼 사납게 일그러지는 아이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 화났구나.

퍼억- 명치를 가볍게 꿰뚫는 주먹의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울고 웃었다.

#

우욱,

음식의 냄새를 느낄 때마다 느껴지는 구토감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는 그런 감각이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내가 고기를 먹을  없는 것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는지,
제논은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내 얼굴을 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성국의 성녀에게 부탁해볼까? 어쩌면 아예 치료할 수도 있을 거 아냐.”
“걔 지금 자기 나라 수습하기도 바쁠 텐데 어떻게 그래.”

에드윈 카르멘을 상대하고 성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리디아를 떠올리며, 나는 푸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입덧가지고 부르면 당장 나를 칼로 찌르려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결혼식 때 보냈던 청첩장을 불태워서 가져왔던 애인데.

이런 일로 부를 수야 없지.

“그럼  어떡해, 나는 이렇게 네가 토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되는 거야?”
“네 탓이잖아.”

가볍게 내뱉은 말에 충격 먹은 듯 입을 다무는 제논을 보며 피식 웃기도 잠시,
뱃속에 있는 아이가혹여 듣고 자신을 싫어한다 오해할 까 걱정되어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 아빠가 이상하다는 말이야. 엄마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나는!”
“너는 싫어.”
“왜.”
“그야, 네가 한 짓을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까.”

장난스럽게 그리 답하자, 제논은 비틀거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내가 위험한 날이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뱃속의 아기가 탄생했을 거라 생각되는 그 날 밤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못 참겠어.’
‘...나 내일 출근이야. 그리고 위험한 날인데 콘돔 사둔 것도 없...야, 이 미친놈아!’
‘내가 책임질게. 진짜로.’
‘뭐라는 거야, 안 빼? 안 빼?  마이어씨한테 이를 거야!’

 한 번, 딱 한 번이었는데 그게 성공할 줄이야.
확률의 위대함에 이제와 감탄하더라도, 결국 이렇게 맺어진 생명이었다.
그런 것에 후회라니, 절대로 그렇게는 할  없지.

처음에는 제논한테 화도 나고, 이렇게 일찍 가지게  아이에 대해 두렵기도 했는데.

뭐, 지금은 그저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릴뿐이었다.
제논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냥 반응이 재밌으니까 하는 거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미리 집안의 주도권을 내가 잡아두기 위한 일종의 작업이라 해야 할까.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렸을 때, 가장 놀랐던 사람은 단연코 마이어씨라 할 수 있었다.

제논을 죽이려 드는 것을 내가 보다 못해 말릴 정도였으니까.
내 어깨를 붙잡고 혹시 협박당한  아니냐며,
제논이 내가 자는 사이에 꼽아서 이렇게 된  아니냐며 아예제논과 내가 따로 살게 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고.

임신한 지 3달 정도가 지난 지금이야 다시 사이가 원만해지기는 했지만,
그 때 마이어씨가 제논에게 화내며 내게 알려줬던 팁들은 지금까지도 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 주도권을 이렇게 잡는 방법도 마이어씨가 알려준 것이니까.

“변태.”
“...미안해.”
“나 스테이크 먹고 싶어...”
“너 고기 냄새만 맡아도 토하잖아.”
“힝.”

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앓는 소리를 내자,
제논이 흠칫하며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게?”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모습에 묻자, 제논은 비장한 표정으로 겉옷을 걸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먹을 수 있는 고기 찾으러.”
“...그만해,  이렇게 호들갑이야.”
“너 고기 그렇게 좋아하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못 먹잖아. 찾아올게. 아마 서방에 있는 그 녀석한테 부탁하면...”
“야, 서방까지 갔다 오면 나 입덧 다 끝났겠다. 이제 나 3개월이야, 곧 있으면 입덧도 끝난다고.”
“미안해...이  밖에 할  없어서 미안해.”
“...에휴.”

날이 갈수록 기운이 없어지는 제논을 보는 것도 나름 부담이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이라도 가지는 걸까. 그렇게 신경  필요 없다니까, 왜 혼자 저러는 건지.

내가 처음 입덧을 시작했을 때, 제논의 얼굴은 그야말로 반쯤 죽은 사람에 가까웠다.
 얼굴이 창백해서, 내가 구토를 조금이라도 할 기색이 보이면 황급히 달려와 화장실까지 부축하기 일쑤였다.

처음에 너무 화를 냈던 걸까. 계속 저러다가 애를 낳았을 때도 저러면 애한테 좋게 보이진 않을 텐데.
제논이 아이 앞에서는 당당한 아빠가 되기를 원했다.
예전에 나를 수많은 위험 속에서 구해내던,  넓직하고도 단단한 등이 곧 태어날 아이에게도 보이기를 바랐다.

너는 충분히 멋진 사람인데, 왜 그렇게 내게 미안해하는 건지.

“제논, 아직도 나한테 미안해?”

내가 묻자, 제논은 내 시선을 은근히 피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왜 미안한 건데. 내가 이제 괜찮다고 했잖아.”
“...조금 더 조심할 수 있었는데. 아이를낳으면 네가 너무 힘들어 질까 봐. 하고 싶은  많이 남았잖아. 그...바다도 한 번  가기로 했고.”

그런 걱정이었나. 속으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삼키며, 나름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였다.
그 마음은 기꺼웠다.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아이를 가졌기에, 혹시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할까봐 그런 거였을까.
하지만 이미 하고 싶은 것은 전부 해본 터였다.

바다도 가봤고, 손도 잡아봤고, 불꽃놀이도, 놀이동산도, 산도, 결혼도.

“난 다 해봐서 괜찮아.”
“...그래도.”
“너 꼭 말하는  내가 애 낳으면 나 혼자  해야할 것처럼 말한다? 도망이라도 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너를  버리고 가.”

 말에 말도 안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 제논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도대체뭘 걱정하고 그렇게 미안해하는 건지.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아이샤.”
“처음에는 화도 났어. 솔직히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냅다 꽂아서 찍 싸버리고, 며칠 뒤에 보니까 임테기에 두 줄 찍찍 그어져 있고. 거기서 화 안내면그건 부처님이지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이젠 화 안나. 진짜 화 하나도 안 난다? 그냥 기분이 좋아. 앞으로가 기대 돼. 우리 애가 태어나면 남자일까, 여자일까. 무슨 꿈을 꿀까, 이능은 뭘까,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엄마랑 아빠 중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 이런 생각을 하면 그냥 좋기만 해.”
“엄마를  좋아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겠지. 네가 계속 이따구로 우울해하고 있으면.”

어느새 제논의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간 나는, 축 늘어져 있는 제논의 어깨를 붙잡아 확, 하고 펼쳤다.

“나는 네가 좋아 제논. 너 나 싫어?”
“...아니, 좋아.”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건 당당하고,  미소 짓고 있는 그런 사람인데. 이렇게 침울해져 있는데다 늘 입에 미안하다는 말만 달고 사는 사람은 좀 많이 싫어.”

애가 보고 배우면 어쩌려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제논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  막무가내로 한 건 너지만 뭐...피임약 안 먹은 건  책임이니까.  네 잘못은 아니잖아.”
“내 잘못이지.”
“야!”

듣다 못한 내가 빼액- 소리치자 제논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사람 말을  알아들어?

“나를 이렇게 만든 너도 내가 좋아하니까! 미안해하지 말라고!”
“소리치면 애한테-”
“사랑해, 그러니까 조용히 해. 알았어?”

쩌저적-

꽤 오랜만에얼음 덩어리를 얼리며 말하자, 제논이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까와는 달리 어깨도 처져있지 않고, 꼭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아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애가, 네가 그렇게 있는  꼴보기 싫대.”
“...아빠한테 벌써 그런 말을 해?”
“아빠 같지가 않으니까 그렇지.”

내가 비아냥거리자, 제논을 얼굴을 감싸쥔 채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굴을감쌌던 그 손을 떼었을 때, 제논의 눈은 이전과 달리 날카롭게 반짝였다.
마치 사냥감을 탐하는 짐승처럼, 거칠게 호흡을 내쉬는 제논은 꼭 그날 밤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하아, 알았어. 이제 그냥 예전처럼할 거야. 네가 싫다 해도 나는 내 할 일 열심히  거고,  애 낳으면 바로 둘째 만들어버릴래.”
“뭐, 뭐라는 거야.”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에 내가 움찔거리자, 제논이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서로의 코가 맞닿을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 빠져나오려 버둥거렸지만 제논은 손에 힘을 꽉 주어 나를 벗어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나는 최대한 너한테 미안해하려고, 자제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늘 듣는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귓바퀴를 감싸는 감미로운 목소리에 몽롱한 감각을 느끼기도 잠시,  턱을 쥔 제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앞으로 4명 남았어. 각오해.”

세상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생각했다. 내가 그 수를 감당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앞으로 4명이라니, 내 배가 가벼워지는 날이 오긴 하는 걸까.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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