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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화 〉몽환은 싫어(5) (107/115)



〈 107화 〉몽환은 싫어(5)

꿈에서 다시 잠을 잔다는 것은 꽤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내게 배정된 침대가 어딘지도 모르는 터라 창고 구석에서 쪽잠을 잤을 뿐인데, 어째선지 편안한 몸 상태에 놀라기도 잠시.

눈을 뜬  시간이 무엇임을 깨닫고는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벌써 시작하진 않았겠지.”

그런 생각에 창고의 문을 열어젖히자, 다행히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놓치지는 않은 건가. 그들을 따라 함께 움직이자, 이내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있었다.
어제 돌아다니면서 기지 곳곳을 확인 해 둔 걸 생각해보면...

이제 슬슬 전투가 시작되려는 거겠지.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던 여명 전투의 개시를 떠올려보면, 그리 친절하게 선전포고  전투 개시가 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까지 떠올리자,  사람들과 함께 있어봤자 오히려 행동하기만 불편하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차피 여기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단독행동 하는 훨씬 나을 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른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보자.”

어제 봐두었던 이 곳의 지리. 그리고 내가 검색해서 보았던 여명 전투의 전개를 생각해보면.

“저 산.”

기지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돌산, 그 곳으로 시선을 옮긴 내 발걸음이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

“친절하게 시작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어머, 그럼 기습이라던가?”
“위험하겠네. 샤론, 기지 밖으로 피해있을래?”
“...조금 진지하게 있어주면 안 되나? 아무리 그래도 전장인데.”

후우, 터져 나오는 한숨을 겨우 참으며 레이 마이어는 자신의 친우들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이렇게 장난스런 모습이라니.
이번작전의 모든 책임을  이상 가벼이 처리할 수 없는 만큼 이마에 주름이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괜찮아. 여차하면 이능 쓰고 몸만 쇽 빼면 되니까.”
“그리고 내가 샤론하고 붙어있을 테니까.  폭탄이라도 터지는 거 아니면 우리 둘은 괜찮아.”
“폭탄 감지는 철저히 해두었다. 혹시 모를 기습이 있을 수도 있으니 지하로 대피하라...고 하면 말을 안 듣겠지.”
“잘 알면서 왜 그래.”

장난스럽게 미소짓는 샤론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도 설핏 미소가 감돌자, 아이크가 그 모습을 보곤 큭큭거리며 웃었다.

여차하면  전장을 압도할 힘을 지녔음에도 이리 걱정하다니, 물론 만삭의 몸을 가진 샤론에 대한 걱정이 대부분이겠지만,
 무뚝뚝한 성격에도 티가  만큼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이런 위험한 상황에도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럼 조심해라. 홀몸도 아니지 않은가.”
“근데 레이, 도대체 그 말투 언제까지 고집할 거야? 컨셉이야?”
“...컨셉이 아니라, 어쩌다보니 말투가 이렇게 굳었다...아니, 굳었어.”

끄응, 친구들과 있을 때면 언제나 머리가 아파오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페이스에 이렇게 휘말릴 때면
, 그냥 마음을 비우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내심 깨닫고 있어 그녀는 무감한 표정으로 말투를 자연스레 바꿨다.

총사령관, 탑히어로.

무엇하나 가벼운 호칭이 없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그 칭호의 무게는 이제야 서른을 막 넘어선 자신에게 너무도 무거웠다.
무겁고 무거워서, 언젠가는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녀는 늘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책임에 한 눈이 팔려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샤론과 아이크는 늘 가벼운 모습으로 제 옆을 따라다녔다.
행동들이 자신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점차 무거워지는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샤론, 아이크.”

아카데미에서 처음 만났을 때,  때 만났던 그 둘의 모습을 그녀는 가슴 한 켠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아이크, 상냥한 샤론. 듬직한 아이크, 친절한 샤론.

거기에 뒤섞인 한 줄기의 사심도.

이제는 다시 품을 수 없는 뜨거웠던 마음도.

그녀는 모두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늘 걱정이었다.
혹여  둘이 자신의 시야 속에서 사라진다면, 자신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메말라버린 사막과도 같아진 자신의 마음이, 과연 물  방울 없이 삭막해지는 것을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가끔은 신경질적으로 대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무뚝뚝한 자신의 모습이 혹여 그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신경 쓰고 있었지만.
탑히어로라는 자리는 쉬이 남에게 친분을 허락할  없었다.

약점을 만들게 된다면, 그리고 그 약점을 찔리게 되면 자신은 무너지게 될 테니까.

탑히어로, 히어로의 정점. 그리고 평화의 상징.

언제나 굳건히, 그리고 단단히 모두의 위에서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녀의 자리였기에.
그녀는 한없이 친했던 그들을 일부러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전투, 이런 상황에서까지  둘을 가만 놔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끝나고, 술이나 한잔 하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샤론과 아이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와 알고 지냈던 세월이 꽤나 길었음에도, 그녀가 먼저 무얼 하자고 한 적은 없었으니.
지금 들은 말이 과연 정말인지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싫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거라 착각한 레이 마이어가 눈살을 찌푸리자, 샤론과 아이크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싫을 리가 없지. 좋아!”
“완전 좋지.”
“...그래, 그럼.  가던 곳에서 마시자고.”

수락하는 친구들을 보며 살짝 웃은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끔 씩 손을 내려 볼 때마다 보였던 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오랜만에 멀쩡한 살색의 손을 볼  있다는 사실이 퍽 신기했다.

이 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도 길게 이어지기를.
그렇게 생각한 그녀의 시선은 이내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조잘거리는 샤론과 아이크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애를 낳으면 결혼식을 치른다고 했었나, 잠시 선물을 무얼 준비해야할지 고민하던 그녀의 귓가에, 평온을 깨부수는 날카로운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아앙-

“...기습인가.”

잠시 놀란 기색이 그녀의 눈가에 스쳐지나갔지만, 늘 그렇듯 다시 차분함을 되찾은 그녀가 샤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사령관, 기습을 상정한 상태로 수립했던 작전을 시행한다. 아이크 준장과 함께 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려는 샤론과 아이크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입술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살아 돌아와라.”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저 둘을 보내면, 어째선지 이 모습을 영영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자기 마음이 고스란히 내뱉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의 눈이 크게 떠지는  본 아이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처음명령을 받았던 그 때처럼,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아이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이 마미어는 잠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코를 타고 들어오는 화약 냄새가 여느 때보다 불쾌하게 느껴져서, 숨이 막힐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흔들려서는 안됐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침착해야 했고, 누구보다도 앞에  굳건히 버티는 역할이었으니.

잠시나마 흔들렸던 검은 빛의 눈동자는 이내 자리를 되찾고, 그 자리에는 다시 냉정함이 깃들었다.

#

“전황은.”

작전실에 나타난 레이 마이어를 발견한 장교의 표정에 화색이 감돌았다.
탑히어로가 나선다면 지금의 상황을 단숨에 타파할 수 있을테니까.

“현재 상황은 아군에게 불리합니다. 미리 기습을 상정해두긴 했으나, 기습에 의한 피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 당장 진격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가.”

상정해두었음에도 이런 피해라니, 데스크에 띄워진 상황판을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병력을 물려라.”
“네?...아, 알겠습니다!”

그녀가 덤덤히 내뱉은 말의 의미를 깨달은 장교가 다급히 전화기를 들고 소리쳤다.

“전원, 그 장소에서 최대한 빠르게 대피해라!”

주변의 상황이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의미로.


꽤 위급했던 상황에 지친 기색을 잠시나마 내비친 사람들이었지만. 그녀의 등장만으로도 그들은 힘을 되찾고 있었다.

‘무겁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책임이, 너무도 무거운 게 아니냐고.
자신의 존재로 힘을 얻는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나 커져버린 자신이, 혹시 언젠가 무너질 때가 온다면.

그 파장을. 그리고 책임을 자신이 감내할 수 있을지.

그녀는 언제나 두려워하고 있었다.

“...시작한다.”

조용히 눈을 감은 그녀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마법’이라는 이능을 지닌 그녀, 오직 그녀만이 다룰 수 있고, 그녀만이 볼 수 있는 ‘마력’이라는 이름의 기운이 퍼지자 사람들은 왠지 모를 활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파아앗-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퍼져나간 푸른 기운은 이내 기지 주변의 상공을 빠른 속도로 뒤덮기 시작했다.
푸른 색의 하늘과 같은 색을 지녔기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기운은,
주변 수 킬로미터의 반경을 집어 삼켜 기운의 주인인 그녀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400...475명 인가. 산개해 있어, 아마도 내 이능을 염두에  거겠지.’

마법이란,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적이라 불렸고,  힘은 그녀가 최연소의 나이에 탑히어로가 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마력이 가져다 준 정보를 얻은 그녀는 이내 허공에 가볍게 손가락을 휘저었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지휘자처럼, 일정한 운율이 담긴 그녀의 손길을 장교가 의아하게 바라보기도 잠시,
레이더에 떠오른 거대한 붉은 점을  장교가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건!”

미사일, 아니 2차 대전에 쓰였다던 핵이라 해도 좋을 힘.

그런 힘과 비견될 만큼이나 강렬한 이능 반응을 보이는 점들이 레이더의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장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아연한 표정으로 레이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런 힘을 내보이고도 땀  방울 흘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같은 편임에도 전율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유성우.”

가볍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한 마디에 주변에 폭풍이 일었다.

하늘에 생겨난 수십 개의 육망성을 바라보는 적군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분명히 푸른 하늘, 방금까지만 해도 그들의 승리에 미소 짓는 찬란한 태양이었건만.

그 하늘을 가린 거대한 운석들이, 그들의 패배를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었기에.

까딱-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다시금 움직이자, 운석들이 땅으로 강하했다.
고요했던 대지에 일순간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었다.
버섯처럼 피어오르는 그 폭발에 시선이 모이기도 잠시, 주변에 퍼져 있던 마력이 적군의 상황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남은 적군, 0명.  전멸입니다.”

단숨에 변해버린 상황, 같은 편인 장교들마저 믿을 수 없는 그 광경에 목소리는 힘없이 새어나왔다. 과연  것이 개인이 가진 힘이란 말인가.

아까까지만 해도 피로 얼룩져 있던 땅은, 거대하고도 광오한 힘에 휩쓸려 움푹 패여져 있었다.
마치 거인이 밟은 것처럼,  혼자 어울리지 않게 푹 파인 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게 만들었다.

일개 개인이, 대지의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허나, 전쟁의 시작부터 파란을 일으킨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무감했기에. 전쟁은 그렇게 조용히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일격, 그렇게 사망한 적군 475명.
여명 전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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