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8화 〉엄마가 싫어(1) (108/115)



〈 108화 〉엄마가 싫어(1)

“...대단하네.”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유성우를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감탄을 흘렸다.
아마도 마이어씨의 이능으로 만들어진 광경일 터, 저런 것이 탑히어로라면 아직 나는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이면 애초에 혼자서도 전투를 끝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마이어씨가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명 전투는 양쪽 모두 많은 수의 사상자가 나왔으니,
어쩌면 상대쪽에도 마이어씨 만큼의 실력자가 있다는 소리겠지.

“누굴까.”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결국 여명 전투에서 죽은 것 같았다.
마이어씨 만큼 강한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이라면 진즉에 유명해지고도 남았을 테니.
아무리 악에 치우친 사람이라 한들, 그 힘이 강하면 유명해지는 법이었다.
내가 한때 살던 현대에도 테러리스트 중에선 어지간한 슈퍼 스타만큼이나 유명한 이들이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여명 전투가 막 시작된 지금, 그 강한 사람은 살아있을 게 분명했다.

혹시 샤론과 아이크의 죽음이  사람에 의한 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그래, 시간이 없지.

이제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명 전투의 막을 레이 마이어가 유성우로 화려하게 장식해주었으니, 이제 그 두 번째 막이 열릴 시간이었다.
그 막의 무대는 바로 이 돌산, 지속된 교전으로 이능이 많이 소모된 레이 마이어가 더 이상 참전하기 힘든 시간이었으며.


그 처절한 전투가 열리는 무대가 이 곳이었으니.

“뭘 보여주려는 건지는 몰라도...확실히 봐주겠어.”

돌산으로 향하겠다는 것은 내 의지였지만, 돌산에 향한 뒤 한 지점에 이르기까지 내 몸은 한차례 통제를 벗어났었다.
저번에 꾸었던 꿈에서처럼 자기 멋대로 몸이 움직여 이동한 곳이 바로 여기였고,
나는 돌산의  통로 근처에 몸을 숨긴 채, 앞으로 일어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여기에 나를 데려왔다는 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걸 말하는 걸 테니까.

그렇게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도 한참, 달이 아래를 향해 조금 기울기 시작했을 때.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련을 완성시킨 뒤 민감해진 감각이 그 소리를 알아채고, 곧이어 두 명이라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그 두 사람이 어떤 이인지 알 수 있었다.

한 명은 몸이 무거운 듯 발걸음이 경쾌하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어쩐지 발걸음이 부자연스러워, 꼭 다른 한 명을 부축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으니.

“...설마.”

숨기고 있던 몸을 일으키자, 저 멀리서 다가오던  사람이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역시나, 불빛 하나 없는 산이라 시야 확보가 힘들었지만, 그 그늘진 음영속에서도 부풀어오른 배는 확실히 보였다.

이곳저곳 상처 입은  보면, 누군가에게 추격이라도 당하는 걸까.

머뭇거리며 다가온 그들이  얼굴을 확인하자, 이내 놀란 표정을 띄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어제 만난 사람이라지만 갑자기 산 속에서 나타나니 경계할 수 밖에 없지.
이 들을 도와주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긴 했지만.
어차피 꿈이라는 생각에 두 손을 들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너...앤이니?”
“네, 그보다 얼른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다시 기지 쪽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접는  좋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꿈이 보여주려던 게 이 둘이었나. 샤론과 아이크,  두 사람이 도대체 나하고 무슨 관계길래.

부모님,

...그런 생각도 들긴 했지만.  둘은 이 전투에서 죽는다.
시간을 따져봐도 내가 태어났다기엔 너무 이전 시간대가 아니던가.
하지만 꿈이 보여주려는 것이  둘과 관계가 있는 것 같으니. 일단  사람을 돕는 것이 먼저였다.

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사람이었지만,
일단 이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는지 이내 아이크가 내게 다가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앤, 네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추격해오는 적이 상당해, 우리는 전투 쪽 이능이 아니라서 상대할 수도 없고. 우리를 도와주려는 건 고마운데 일단 도망-”
“괜찮아요.”

그의 말을 끊자, 아이크는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다니까요.”

내가 단호히 대답해도 계속 데려가려는 아이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자, 이내 샤론이 아이크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크, 일단 도망가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혼자...”
“아이크.”
“...하아.”

그래, 알았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아이크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꼭 돌아와라.”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샤론과 아이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크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툴툴 거렸으나 뭐 어쩌겠는가.
샤론이 하자고 하는 일엔 대부분 따르는 그였으니. 그리고 내가 여기서 다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련을 뽑은 이상, 이미 내가 가진 이능의 힘은 어지간한 프로 히어로를 압도하는 힘이었고.

타다닥-

이 발소리의 주인들이, 그다지 강해보이지도 않았으니.

쩌적-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샤론과 아이크가 왜 도망치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제대로 도망가려면 어느정도 내가 시선을 끌어줄 필요가 있었다.
조금 화려하게, 어쩌면  곳에 시선을  이들이 내 존재를 알아채도록.

이능을 담은 손가락이 하늘로 솟아오름과 동시에, 얼음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퍼지지 않고 오직 하늘로. 하늘을 뒤삼킬 것만 같은 기세를 담은 얼음은 이내 조금씩 형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타다닥-

발소리의 수를  민감해진 감각이 잡아내기 시작했다.
적의 수는 얼추 서른, 수준은 그리 낮지도 높지도 않은 애매한 이들이었으니.
월야를 사용해 하나씩 처리하기도 애매한데다 아련을 사용하기도 조금 그랬다.
확실하세 시선을 방법, 그건 내가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쩌저저적-

어느새 거대한 위용을 내뿜는 얼음은 차근히 자신의 형태를 완성시켜나가고 있었다.
산의 중아에서 튀어나온 얼음은 이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이나 거대했고,
어느덧 내게 다가오던 발걸음 소리도 완전히 가까워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르문간드.”

벌써 만들어 낸지 꽤 시간이 흘러버린, 그 때의  형태를 떠올린 내가 단어를 읊자 얼음이 비교도 안 될 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형태를 완성시켜나가기 시작했다.
벌려진 아가리는 흉포하게, 그 시선은  어떠한 얼음보다도 차갑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다가올 수 없도록 그 기세는 흉폭하게.

이능의 힘을 빌어 만들어진 고대의 뱀은 이내 자신의 자아를 되찾았고, 주인을 노리는 모든 것들을 분쇄하기 위해 그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산과 같은, 한 때 세상을 삼키려했던 몸뚱아리가 움직임과 동시에 산이 진동했다.

쿠구궁-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꺾인다.

비록 마이어씨가 보여준 유성우만큼이나 압도적인 거력을 지니진 않았지만, 이 일대의 전황을 뒤집는 것은 충분할 터.

곧이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한 무리의 사람들의 표정에서 읽히는 감정이란, 하나같이 경악이었다.

“...이럴수가.”

어쩌면 유성을 보았을 때도 저들은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죽은 이들에게  이상 물어볼 수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문득 그런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저들을 제압한다한들, 결국 일어서서 위협이 될 터였다.
물론 죽이는  가장 좋긴 했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설령 그것을  없이, 무수히 많이 해왔음에도 꺼려지는 것이었으니까.

저들을 지금 살린다면, 그들이 과연 내게 고마워하며 물러날까?

아니, 나는 알고 있었다. 저들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망설여져서, 그런 나를 한편으로는 탓하고 있었다.
쉽게 끝낼 수 있잖아. 사람을 죽이는 것쯤은, 지금까지 수없이 해봤잖아.

고민하고, 고민했다. 뇌가 뒤엉켜 질척해지고, 뇌수가 탁해질 만큼이나 고민을 거듭해도.
저들을 죽여야 했다. 여긴 전장이었고, 전장에서는 언제 누구가 죽든 이상한 것이 아니었으니.

문득,

볼이 따갑다는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매만지자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따갑고 아린 상처는 움푹 패여 있어서, 꼭 총알이 스쳐지나간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하나같이 내게 총을 들고 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저들은 나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데, 나는 살린다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니.
내가 한 고민이 너무 우습게도 느껴졌다. 입가에 감정 없는 미소가 걸렸다.

“미안해요.”

콰드득-

손을 흔들자, 총을 든 그들의 몸 위로 요르문간드가 떨어졌다.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뭉개지고, 피가 흘러 땅을 물들였다.

“하.”

탄식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렇게 많이 본 광경이었건만, 이제는 보는 것에 무감해져 어쩌면 별신경도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건만.

그럼에도 피는 너무 붉어서, 눈앞이 어지러웠다.

손도, 얼음도, 어두운 밤하늘도.

내게는 그저 붉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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