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엄마가 싫어(2)
“아으, 정신 차리자.”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멍해있는 정신을 겨우 차리자, 나는 다시 내가 향할 곳을 떠올렸다.
샤론과 아이크를 도망치라 하지 않았던가.
그 들을 쫓던 이들을 처리했으니 이제는 그들을 다시 찾으러 가면 될 터였다.
...그래, 그러면 될 터였다.
잠시 멍한 정신을 다시 붙잡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이대로 이 곳에 서있다간 영원히 그 발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아 발걸음은 평소보다도 훨씬 빨랐다.
꿈, 여기는 꿈이었다. 그러니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예전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죽은 이들도 결국은 꿈속에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후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자,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제논이 보고 싶었다. 이럴 때 제논이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었을 텐데.
이 빌어먹을 꿈을 빨리 끝내야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다시 샤론과 아이크가 향한 곳으로 걷자, 가까이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수없이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이건 분명히 마이어씨의 기척.
마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문득 들어 몸을 숨기자,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마이어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샤론과 아이크의 방향은?”
-파악할 수가 없...! 마치....방해...습니다!
“쳇. 마력도 얼마 없어서 찾지도못하는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얌전히 지하에 있으라니까.”
누군가와 통신이라도 하는 듯, 귀를 붙잡은 채 인상을 찌푸리는 마이어씨는 아무래도 샤론과 아이크 두 사람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통신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끊겨 정확히 들을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을 찾는 것에 난항을 겪는 것 같은데.
모습을 드러내 알려주고 싶긴 했지만, 그랬다간 내가 여기 있는 걸 문제 삼아 돌려보낼 수도 있으니 일단 지금은 참는 게 맞겠지.
뭐, 아직 전투는 한창이지 않은가. 하지만 마이어씨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자기 친구가 임신한 상태라 피해있으라고 했건만,
전투가 한창인 이곳에 둘이서 돌아다니고 있다니 그야말로 속이 썩어가고 있지 않을까.
“하아, 아무튼 위치를 찾으면 내게 연락해라. 바로 그 쪽으로 갈 테니.”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마어이씨가 한 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비로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아까 들어보니 마력으로 탐지하는 것도 못 쓴다고 그랬으니, 내 존재를 알아차리진 못했겠지.
그나저나 이게 원래의 시간대와 똑같이 흘러가는 거라면, 아까의 그 30명은 마이어씨가 처리했을 것 같았다.
그건 조금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더 걷자,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느껴지는 기색이 퍽 익숙한 터라 경계를 풀고 다가가니 보이는 사람은 역시나 샤론과 아이크였다.
샤론의 부푼 배 때문인지 멀리 가지 못한 걸까,
표정이 어두웠던 두 사람은 나를 발견했는지 이리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앤, 살아있었구나!”
“쫓아오던 사람들은.”
“다 죽였어요.”
내가 덤덤히 내뱉자, 두 사람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그리 맘에 들지는 않았던 걸까. 하기야, 겉으로 보기에 나는 조금 어려 보였으니.
“...다친 곳은 없니?”
그런 나를 바라보던 샤론이 짐짓 미소를 지으며 묻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몸상태를 확인했다.
겉으로 봤을 때 다친 곳은 없고, 이능을 조금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다한들 더 이능을 못 쓰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걱정해주는 게 조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무어라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크도 궁금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내가 그들을 처리했다는 말에 입을 꾹 닫은 채 연신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런 생각에 묻자, 아이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지하실에 박혀 있어야 맞겠지만, 우리 성격에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말이야. 근데 이거 너한테 말해도 되는 거냐?”
“...어, 중요한 거면 말씀 안하셔도 돼요.”
여명 전투에 대한 것쯤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손사레를 치자,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는지 아이크가 혀를 한 번 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애초에 입을 연 내 잘못이지. 게다가 아까 그 녀석들을 처리할 정도면...뭐, 신병 수준은 아닌 것 같고. 우리가 목표로 삼은 건 급진주의자들을 이끄는 단체의 간부야.”
“간부?”
내가 되묻자, 샤론이 아이크의 말을 이어받았다.
“응, 얼굴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확히 모른다는데. 그 녀석을붙잡으면 상황이 꽤 호전될 것 같아서.”
“...붙잡는 다니.”
그녀의 부푼 배를 바라보던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그녀는 다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기 배가 이렇게 부풀어보여서 만삭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아직 7개월이라며.
산통이 오기까지 꽤나 먼 것도 있고 무엇보다 자기가 가진 이능 탓에 격한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도 없다고.
“무슨 이능인데요?”
“음, 뭐라해야하지. 꿈을 꾸게 하는 거라 해야 하나?”
꿈, 그 단어에 순간 내 몸이 움찔 거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람의 머릿속에 꿈을 심어주는 거지, 일종의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금은 조금 다듬어서 자각몽 수준까지 만들어낼 수 있긴 한데. 내가 깨우지 않는 이상 쉽게 깨어나기 힘들어서 한 사람 제압하기에 유용하거든.”
“...자각몽.”
“응, 혹시 그런 쪽에 관심있니?”
“아뇨, 그냥.”
제가 겪고 있는 게 자각몽이라서요. 그렇게 답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아이크를 바라봤다.
그러자 자기 이능을 말해달라는 걸 깨달았는지 아이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특별한 건 없는데, 그냥 투명한 방패를 만들어내는 거야.”
그렇게 말한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이내 반투명한 막이 허공에 나타났다.
쩌저적, 얼음을 만들어내 힘껏 쳐봐도 흠집하나 안나는 것이 꽤 단단한데.
아무래도 아이크가 샤론과 꼭 붙어 다니는 것은, 혹시 모를 위협에 샤론을 지켜주기 위해서 인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내가 만들어낸 얼음을 바라보더니, 이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앤. 설마 아까 그 커다란 얼음 네가 만든거니?”
“네.”
얼음을 두 사람 앞에서 만들어 낸 것은 일종의 신뢰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도 내게 이능을 알려줬으니, 나도 알려주는 것이 응당 옳을 터.
하지만 내가 만들어냈던 요르문간드가 두 사람에겐 꽤나 놀라웠던 건지,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 들을 향해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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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세요?”
쏴아아-
밤하늘이 청명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 그 쓸쓸한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에게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늘, 달이 뜰 때면 바다 너머를 바라보는 그녀.
시간을 세어보면 꼬박10년이 넘어가는 세월동안 바다를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 것이 야속했으나, 그녀가 누구를 기다리는 지 깨달은 뒤로는 불만은 싹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감히 불만이나 가질 수 있을까.
이 상황을 겪고 있는 그녀의 마음이야 말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상처투성이일텐데.
여자의 말을 들은 건지, 바다를 바라보던 여인은 고개를 돌려 말을 건 여인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쳐 묘한 금빛을 띄는 블론드의 짧은 단발이 희미하게나마 반짝이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살짝 젖은 것만 같이 느껴질 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아요. 다만, 그 아이가 걱정이네요.”
“그 아이라 하면...”
“네. 제 딸아이요.”
흡,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녀의 말에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혹여 자신이아픈 곳을 건드린 것이 아닐까, 초조해하는 여자에게 여인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어보였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녀의미모는 그리 변하지 않았다.
아직 루비를 닮은 눈동자는 빛을 잃지 않았으며,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찬란히 빛났으니.
다만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생겨난 주름이, 그녀가 지나친 세월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모두 제 탓이죠. 그 어린 아이를 혼자 세상에 내보낸. 제 잘못이에요.”
“...장로님.”
“어쩌면 벌써 저를 만났을지도 모르죠. 몽환을 심어두었으니, 제가 바라는 만큼 성장했다면...”
곧, 저를 보러올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말을 내뱉은 여인은 이내 다시 시선을 바다 너머에 두었다.
자신이 심어둔 꿈들을 생각하며, 차마 먼저 알려줄 수 없었던 진실을 깨달은 자신의 딸이. 혹여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녀는 다시 깊은 숨을 내뱉었다.
“...아이샤.”
미망인의 한숨은, 그 어느때보다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