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엄마가 싫어(4)
3일, 전투가 시작되고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들리지 않는 소식에 레이 마이어는 그 어느 때보다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챈 장교들은 섣불리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심지어 전황을 알리는 것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암운이, 너무나도 어두웠기에.
그러다가 한 장교가 이를악물며 그녀의 앞에 서자, 레이 마이어는 그런 장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말라 갈라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음성은 겨울처럼 시렸다.
그 차가움에 장교가 움찔거리기도 잠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레이 마이어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이 곳을 타격하는 적의 부대가 줄어들었다고. 어째서지?”
“...아마도, 적의 중심부를 타격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산 쪽에서 처음 보는 이능반응이 관측됐다 했지.”
산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뱀, 얼음으로 만들어져 곧바로 그 곳으로 출동했지만 있는 것이라곤 처참히 뭉개진 적군 약 서른 명.
시체의 훼손 상태를 보아, 아무래도 그들은 단숨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된다, 라 했었나.
레이 마이어는 그 때 들었던 한 보고를 떠올리며 침음을 삼켰다.
그 정도의 이능을 지닌 사람이라면 중심부를 능히 타격할 수 있겠다만, 중심부를타격하는 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이라는 것을 그리 신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불길한 감은 늘 들어맞곤 했다.
정찰대가 보고한 보고내용, 적의 기지에서 간부 하나가 누군가가 납치되었다는 것.
만약 정문이 뚫린 사이에 간부가 사라졌다는데, 만약 그게 얼음을 만든 이능력자의 소행이었다면 구태여 몰래 잠입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다.
덕분에 이 쪽으로 오는 부대가 몇몇 사라져 정리하는 시간이 훨씬 빨라지긴 했다만.
“...설마, 그 둘이 그 쪽에 가있는 건 아니겠지.”
샤론과 아이크,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은 두 골칫덩어리들.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아 날이 갈수록 속이 썩어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지하실에 얌전히 박혀있지,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건지.
늘 걱정이었다.
임신한 몸을 이끌고 참전하는 것도 그리 반대했건만,
기어코 나를 따라오겠다는 샤론을 말리기에 저와 아이크는 의지가 부족했다.
그래서 일부러 부사령관에 그녀를 추천해 기지 안에 두려했는데.
기어코 기지 밖을 나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수명이 턱턱 깎이는 것만 같았다.
“위험한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아이크의 이능이 방어적인 측면에서 좋은 것은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 한들 결국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그 얼음을 사용하는 이능력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하는 지금 그렇게 돌아다니다니.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옆에다 두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감시라도 하고 싶은데.
“쯧.”
적막한 공간, 레이 마이어가 혀를 한 번 차자 앞에 있던 장교가 움찔거렸다.
상관의 성심이 어지간히 나쁜 듯하니, 몸을 빼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하는 상황.
머릿속에 담겨있는 생각이란 혀를 깨물고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가.”
“네!”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장교가 화색을 띄며 밖으로 나가자 레이 마이어는 잔뜩 쌓인 서류를 집었다.
“...이건.”
서류의 한 구석, 아주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그녀의 눈에 이채가 일었다.
“번개라.”
얼음에 이어 번개라, 원소계가 판을 치는구만.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이내 코트를 걸친 채 밖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번개라는 단어가 너무 신경 쓰였다.
#
번쩍-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화창한 하늘에 갑작스레 번쩍이는 번갯불을 본 아이크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우, 뭔 번개냐.”
“한두 번도 아니잖아요.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어요?”
“아니, 적응이 안 돼. 난 번개는 영 싫거든.”
“원래 아이크가 예전부터 겁이 많았어. 그런 면이 조금 귀엽지.”
샤론이 싱긋 미소지으며 말하자, 그걸 들은 아이크의 입가가 헤벌레, 하고 늘어졌다.
그 귀엽다는 한 마디가 그리도 좋은 걸까.
그 모습을 본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당연하게도 제논이었다.
내가 제논한테 칭찬을 해준 적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에 빠지던 내 눈썹이 순간 일그러졌다.
생각해보니 벌써 이 둘과 같이 다니게 된 시간이 5일을 넘어섰다.
물론 현실 시간은 아직 내가 자고 있는 시간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제논을 보려면 꿈에서 깨고도 3일은 더 지나야 하는 게 아닌가?
“...아악.”
“꼭 오래토록 못 본 애인이라도 못 본 표정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냐?”
아이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정확히 들어맞는 그 말에 내 몸이 순간 움찔했다.
“어, 진짜냐...?”
“...넵.”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크가 키득거리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샤론에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껏 높아져 있었다. 남은 심각한데, 뭐가 그리 웃긴 건지.
혼자 한숨을 연신 내쉬던 내 상념이 깨진 것은, 갑작스레 들려온 아이크의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아악! 아, 아파. 왜 갑자기 손가락을 꺾어!”
“지금 내가 이상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 그래요. 앤, 남자 친구가 있다고?”
“예? 아, 네.”
계속 온화했던 샤론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직 단풍이 진 가을임에도 주변에 서리가 낀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나, 서늘해진 주위 공기에 순간 소름이 오스스, 돋을 때쯤 샤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생겼니?”
“잘생겼죠?”
프레이는 영 시원찮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봤을 때 잘생긴 건 확실했다.
그 영화 배우보다도 괜찮고, 어쨌든 나 말고 주변 반응으로 보기에도 제논은 충분히...음, 잘생겼으니.
“착하니? 밥은 잘 먹고? 매너는 어떻니?”
어쩐지 점점 내게 추궁하는 것 같았지만, 나도 모르게 그 기세에 휩쓸려 입을 열고 말았다.
“음, 착하고요. 밥은 엄청 잘 먹어서 식비가 좀 많이 나가요. 매너는...잘 모르겠지만 괜찮은 편이 아닐까요?”
“후우, 그나마 다행이구나. 근데 식비라니, 왜 식비를 네가 신경쓰지? 설마 남자 친구가 돈 안내주는 거니?”
갑작스레 사나워진 그녀의 눈빛에 움찔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대답했다.
왠지 대답을 잘못하면 제논이 위험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18년이라는 시간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왠지.
“아, 아니요. 그냥 가끔 제가 돈 내고 그럴 때가 있어서요. 그, 뭐냐. 더치페이라는 게 있잖아요.”
“더치페이...그래, 더치페이.”
고개를 주억거린 샤론은 이내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니?”
“지, 진도요?”
내가 이걸 말해주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생활인데.
이제와 처음보는 사람한테 이런 걸 전부 말해주는 게 맞을까.
하여 고개를 저으려다가, 어쩐지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대답하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죽을 거라며 목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은 그를 바라보며 나는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하지만 제논과 했던 것을 떠올리자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손가락을 꼬물대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그, 키...스까지는 했는데.”
버드 키스였지만, 왠지 뽀뽀라 하기에는 조금 유치한 것 같잖아.
그런 마음에 살짝 진도를 높여 부르자 샤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각상처럼 딱딱히 굳은 입술에서 메마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키스?
“네. 그러니까, 네. 키스 맞아요.”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며 대답하자, 샤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꽉 쥐어진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이내 그녀는 큰 소리로 외쳤다.
“아, 안 돼!”
“네?”
그녀의 빨간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으로 그녀는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애, 앤. 사귄지는 얼마나 됐는데? 1년은 된 거지?”
“10일?”
“맙소사...”
충격 먹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샤론의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쩐지 그 모습이 엄마 같다는 생각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쿠르릉-
난데없이 울리는 번개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저 기우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