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04. 계획 (4/69)



〈 4화 〉04. 계획

정아름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다시  번 찾아온 이상현상에 온 신경을 쏟고 있는 정다운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그녀.


'예전이랑 완전히 똑같아! 아아! 이대로만 가면 다운이랑 내가 드디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몰랐던, 그러나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알았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오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모든 방법을 써서 되돌아온건 그녀와 소멸한 천사 뿐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차근차근  순간을 준비하며 기다려왔다.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그를 위해 준비해온 모든 계획.


찬란하게 빛나는 그가 없더라도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그녀가.

오직 그와 그녀,  둘만을 위한 계획.

몇번이나 전전긍긍하며 이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던 그녀에게, 지금 시작된 이변은 더할나위없는 축복이었다.


'다운이는 이제 뛰어난 부분이 전혀 없으니까 증명을 거치지 않겠지. 그러면.....'


전혀 의심하지 않는 다운이를 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우고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



처음 그 소리가 들렸을 때보다 더 큰 굉음과 더욱 격렬한 진동이 느껴졌고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가 끝났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떠올라 있었다.

[24:00:00]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숫자들은 눈을 수차례 깜박여 봐도 사라지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내려 누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자신의 앞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몸을 세차게 떨고 있었다.

'눈 앞에 이 숫자들은 대체.....? 말도  돼... 게다가 그렇게 격렬한 진동이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누나가 그대로 내 품에 있다니....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거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다시 한번 더 확실하게 얼마나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려퍼지는 이질적인 소리.

<유예의 시간이니라. 너희에게 마지막으로 발버둥 칠 기회를 주노라.>

'멸망을 고한다' 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괴상한 소리를 내고 사라졌던 저번과는 다르게 이번엔 더 길게 이어지는 소리.

처음 들었을 때에는  소리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에 혹시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소리를 들을수록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고도로 발달한 기계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었다면 적어도 그 기계를 종료시켜 지금 이 현실을 끝날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런 내 생각을 비웃듯 눈 앞에 다시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23:59:59]
[23:59:58]


목소리가 끝나자 숫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천천히 내려가는 숫자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타이머 같았다.


'정말 저 시간이 맞다면..... 하루인건가?'

우리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밖에서 들려오던 소음도 멈춰 우리 남매의 숨소리만 들리던 침묵.
그 침묵을 깨트리듯 갑자기 모니터에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말도 안 돼!"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모니터를 바라보자 화면 속에 앵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친듯이 손으로 앞을 휘젓고 있었다.

"저 사람도 이게 보이는 거겠지.....? 그런데 반응이 좀 많이 과격한 것 같은데....."

큰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던 누나가 화면 속에 그의 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친 듯이 손을 휘저어 대는 화면 속의 앵커.
한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 앞을 휘저어 대던 그는 이내 체념한 듯 털썩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한동안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못한 채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에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화면 너머로 들려왔고, 그 소리를 들은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에게는 그에게 말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것이겠지만 우리에겐 우리를 보고 눈을 부릅 뜬 것처럼 보이는 모습.


그 공포감을 더하는 모습에 누나의 떨림이  더 심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쳐다보던 그가 이내 눈을 질끈 감더니 무언가를 결심한 듯, 탁자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쥐며 다시 눈을 떴고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국민 여러분. 방금도 같은 상황을 겪으셨습니까? 눈앞에 움직이는 숫자가 보이십니까? 현재 모든 사람이 겪고 있는 이 비현실적인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 제가 감히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너무나도 힘듭니다. 그러나 지금 저에게 막중한 책임이 내려온  같습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현재 저에게는 여러분이 보이시는 숫자뿐만 아니라 그 밑에 다른 글씨들이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계 모든 공영 방송 앵커에게 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그의 이야기를 들은 누나가 아플 정도로 내 몸을 꽉 붙잡았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참담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는 저희 방송국의 방송만 송출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어떤 채널을 돌려도 저희 방송만 나온다고 방금 제게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제게는 이 글씨들을 읽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말일 겁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가 침을 삼키고 천천히, 아마도 그의 눈 앞에 있을 글자들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고한다. 멸망의 시간은 찾아왔고 이 차원의 끝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마지막 발버둥 정도는 쳐봐야 하는 법.  시간이 지났을  자격을 갖춘 이들이 자격을 증명하러 떠날 것이다. 남은 이들은 선택하라.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가만히 멸망을 기다릴지, 혹은 자신을 제물로 바쳐 그들에게 도움을 줄지.]


앵커는 부들부들 떨면서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가 내용이 끝나는 순간 완전히 심력을 다 소모했는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당황스러운 그 모습에 화면이 소란스러워졌다가 급하게 방송 화면이 전환되었다.

그가 쓰러진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그가 읽어 내려갔던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의 반복에 그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느 새 숫자 위에 한 글자가 새겨졌다.


[희생]
[23:48:26]

"그러니까 저걸 선택하면 내가 제물로 바쳐지는 거고 그게 멸망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가?"

"누나!"

누나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소리로 그녀를 불렀고 누나는 내 품에서 조심스럽게 떨어지며 말했다.

"깜짝이야.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 그럴 생각인  아니라."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누나는 억울하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 의미심장한 누나의 말에 무어라 그녀에게 말하려  때 놓여있던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름아, 들리니?"


핸드폰에서 새어나온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누나가 서둘러 핸드폰을 들어 답했고 지금 상황에 대해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그녀.
대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은 누나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다운아."


"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걸까?"

이제는 더 이상 떨지 않고 말하는 그녀를 보니 나는 누나가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나는 영리하고 상황 판단이 빠르니까...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인 순간에 바로 차분하게 계획을 세웠겠지.’


그녀가 나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답을 재촉했다.
잠시  생각을 끝마친 나는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엄청 뛰어난 사람들이겠지? 만일 티비에서 나온 내용대로라면 그런 사람들이 발버둥을 친다는 거니까....."

말을 이어가는 도중 내 머릿속을 강타하는 불길한 상상.

"누나. 설마?"

놀라 소리치며 앞을 바라보니 누나가 처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생각을 못 했지?'


모든 것이 평균 이하였던 나와 다르게 누나는 모든 것이 훌륭했다.
어릴 때는 수영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정도로 모든 운동신경이 훌륭했고 머리도 뛰어난 그녀는 지금 벌써 할아버지의 회사에서 기획실에서 촉망받는 인재로 일하고 있었다.

"누나. 설마 누나가  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내가 말한 뛰어난 사람들은 누나 정도되는 사람을 말한게 아니라 진짜 대단한 사람들 말한 거야. 지금 현역으로 뛰고 있는 국가대표 선수들이나 노벨상 수상자 같은 그런 사람들."

"하, 은근슬쩍  정도라고 하면서 은근히 그러네? 나는 대단하지 않다고 지금 돌려 까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하는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주먹을 치켜드는 그녀.
하지만 그런 누나의 모습을 보고도 나는 불길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멸망을 막기 위해서 자격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끔찍한 내용이었는데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한시간 뒤에 겪을 일이 아무렇지 않을까?‘

누나에게 말을 걸려는 그 순간 화면에서 다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화면을 다시 바라보자 전환되어 있던 티비 속 화면이 다시 돌아왔고 화면 속에는 다른 아나운서가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국민 여러분.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전대미문의 사태에 많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우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럴 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린 점. 진심으로 사죄 드립니다."


깊게 고개를 숙인 그였지만 모든 이가 눈치챘을 것이다.
그의 눈에도 이미 짙은 '공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고 새로운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방금 저희측에서 말씀드린 내용은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전에 말씀 드린 대로 사태 파악이 완료될 때까지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 절대 함부로 행동하시면  됩니다. 시각 위에 표시된 희생을 선택하시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꼭 섣부르게 행동하지 마시고 추가되는 발표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상황까지 왔는데도 아직까지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그들의 안일한 대처에 한바탕 욕을 퍼부으려고 할 때, 아나운서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힘을 합쳐서 원인을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결할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러자 누나가  듣기 싫다는 듯 일어나서 화면을 꺼버렸고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다운아. 확실히 말해줄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현실이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믿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두손으로 붙잡으며 누나가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멸망이 시작된거야."


충격적인 그녀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분명 이 숫자가 멈추는 순간.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가 확실히 찾아올거야. 이런 일을   있을 정도의 존재라면 말뿐만 멸망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아까와는 확연히 다르게 결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그녀는 지금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다짐한 것 같았다.


말을 마친 누나는 내 어깨를 꽉 붙잡았던 손을 풀고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녀는 내가 무언가 말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열심히 할 말을 떠올려 봤지만 아무리 해봐도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쨍그랑!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음에 화들짝 놀라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한대가 유리창이 깨진 채 시끄럽게 차량경보음을 울리고 있었고 그 위에 몇몇 사람들이 올라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도는 약과에 불과했다.


정신없이 어딘가로 뛰어다니는 사람들, 꽉 막힌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의 경적소리, 믿을  없다는 듯 절망하며 주저앉은 사람들, 그리고 곳곳에서 들려오는사람들의 비명소리.


이미 밖은 완전히 혼돈이 잠식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완전히 미쳐버렸어."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읊조리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누나가 말했다.


"벌써 사회가 무너지면 안 될 텐데.... 무언가 빠르게 조치가 취해져야 해. 국가에서 인원을 투입하거나, 빨리 시간이 지나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나타나서 변화를 주거나."

말을 마치고 복잡한 눈빛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던 누나는 조용히 돌아서서 핸드폰을 들어 전화가 연결되어 있던 조부모님과 통화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통화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좀 더 밖을 지켜보았다.


밖에서는 이제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여성을 끌고 가려는 남성들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범죄가 아무렇지도 않게  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폭력을 말리거나 막지 않았고 그러한 참상을 무시한  자신의 갈 길만 서둘러 가기 바빴다.

그런 광경들을 보고 있자니 아까 전 누나의 약해진 모습들을 보게 됐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안의 무언가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내가 인지하자마자 점점 거세졌고 어느새 그곳에 정신이 팔린 나는 바깥에서의 소음과 누나의 통화하는 목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았다.
 안에서 무언가가 미친듯이 흔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

"정다운!"


누군가가 내 이름을 크게 소리치는 것이 들렸고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아!"

"뭐야! 다운아! 많이 힘들어? 괜찮아?"


정신이 돌아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누나가 보였다.


"괜찮... 괜찮아. 그냥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


"뭐? 내가 몇번이나 불렀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라  들은거야?"

"별거 아니었어. 그냥 좀 깊게 생각 하느라 그랬나봐. 걱정 안 해도 돼. 난 괜찮아, 누나."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 보는 그녀였지만 방금 내가 느꼈던 그것을 솔직하게 말해줄  없었다.

방금 전 그 느낌은.......
이 흔들리는 무언가가 깨지면 분명 위험할 걸 알지만...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마치 누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쾌감과도 같았기에  느낌을 그녀에게 말할수는 없었다.


격렬한 배덕감과 이율배반적인 충동이 솟구치는 이 느낌은 저절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


"후......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줘야 해? 이런 상황에서 힘든 건 이상한게 아니니까.... 알겠지? 응? 꼭 숨기지 말고 누나한테  말해줘야 해?"

나에게 제대로 말하라고 추궁하는 그녀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누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랑 통화 해봐. 너한테 하실 말씀이 많은 것 같더라."

누나가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다운아!)

울먹이시며 나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아름이가 몇번 불러도 대답 안하는 것 같던데 괜찮은거니?)

"네, 할머니.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못 들은거에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크게 아프고 난 후부터 아직까지도 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내 평균 이하의 재능은 누나의 도움과 내 노력으로 어느 정도 극복할  있었으나, 내 평균 이하의 능력을 알고 계시던 조부모님은 나에게 신경을 많이 쓰셨기에 아까 전  소리 때문에 많이 놀라신 것 같았다.
그리고 신경을 더 많이 쓰시는 다른 이유도 있고.....


(어디 다치지 말고. 누나랑 몸 조심하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당연하죠. 누나도 제가  지키다가 상황이 나아지면 하나도 다친 데 없이 건강하게 뵈러갈게요."

(그래. 그거면 돼. 꼭 몸 조심 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하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끝으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아름이랑 우리 가족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은 세워뒀으니 아름이랑 대화 해보려무나. 우리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너희도  조심하다가 안전해지면 보도록 하자.)

걱정이 가득 담긴 조부모님과의 통화를 하고 누나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나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침대로 이끌었다.

먼저 자리에 앉은 그녀를 따라 옆에 앉자 누나가 천천히 대화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랑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말해줄게. 일단 우리 가족은 특별한 일이 또 일어나거나 안전하게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생기지 않는 한 집에서 움직이지 않기로 했어.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희생은 선택하지 않기로. 우리 가족 중 자격을 가진 사람이 나오더라도."


"누나!"


그녀의 말에 나는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굳은 의지가 담긴 그녀의 눈빛을 보니 내가 하려던 말을 되삼킬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야."


누나가 나에게 몸을 가까이 한  핸드폰에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가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서 내가 말을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조부모님께 거짓말을 해줘. 나는 너무 피곤해서 자고 있다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그녀의 손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내 입을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걱정 안해도 돼.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우리 가족... 다운이 너를 지킬테니까. 내가 말한 것만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어. 알겠지?"

나는 그녀에게 항의하기 위해서 그녀의 손을 떼내려고 버둥거렸지만 나보다 힘이 훨씬 센 누나는 날 꽉 잡은 채 결코 나를 놔주지 않았다.

"내가 방금 말한 거에 대해서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놔줄게. 말 안할거야?"

그녀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손에서 슬쩍 힘이 풀린 그 순간.

"정아름!  어떻..읍읍!"


"역시. 안되겠어. 너 말하는 거 들으면 안  것 같으니까 그냥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이러고 있을래."

말을 마친 누나는 힘으로 나를 눕혀서  입을 막기 위한  편한 자세를 취했고 나는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몸부림 쳐봤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너나 이렇게 안고 있어야겠다."

내 저항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 누나는 웃으며 나에게 더욱 달라붙었고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만 갔다.


*




[23:01:00]

아나운서가 말한 한 시간이 거의 다가왔을  힘이 완전히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향해 누나가 말했다.


"다운아. 이제 입에서 손 떼줄건데 핸드폰 스피커 폰으로 틀고 조부모님이랑 대화할거야. 그러니까 이상한 말 하면 안된다?"


누나는 손을 길게 뻗어 핸드폰을 가져왔고 손을 내 입에서 떼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을 눌렀다.


(아름아!)

할머니가 울면서 누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전 아닐 거에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할머니가 웃어주셔야 저도 더 마음이 편해요."

애써 할머니를 달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착잡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할아버지도 심란하신 듯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름아. 다운아. 그리고 여보.)


"네, 할아버지." (흑..네.)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단다. 마음 단단히 준비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황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침착하게 생각부터 정리하렴. 그리고 절대 잊지 말아라. 우리 가족은 항상 서로의 힘이 되어줄 거라는걸. 그리고 아름아 많이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다운이.)


할아버지는 잠깐 말을 멈추셨다가 말을 이으셨다.


(할애비가 많이 사랑한단다.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할애비를 용서해주렴. 사랑한다 다운아.)


"할아버지!"


나도 무언가 말을 드리려 했지만 어느덧 눈 앞의 숫자가 많이 변해 있었다.

[23:00:02}

"저도 ㅈ....!"

[23:00:00]


그리고 목소리가 말한 시간이  순간.

콰아아앙!

지금까지 들렸던 어떤 굉음보다도 더 큰 소리, 더 강한 진동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격의 증명을 시작한다.>

온 세상이 흔들리는  같은 느낌 속에서 나는 누나의 몸이 흰빛에 쌓여 점점 흐릿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안 돼! 누나!"

그 모습을 보며 누나를 향해 크게 소리쳤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처음  빛이 자신을 둘러  때 괜찮다는 듯 나를 보며 웃어주던 누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이 점점 경악으로 물든 그녀가  소리로 내 이름을 소리치는 듯 했지만 그 소리 또한 내게 닿지 않았다.

[다운아!!!!!!!!!!!]

그 모습을 끝으로 누나가 완전히 사라졌고.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