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09.굴레의 계산기(2)
싱긋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서 아까 전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사람이 바뀐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이 당황스럽고 여신과 같은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 졌지만, 아까 전 일들을 떠올리며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이 미친 아이템은 이번엔 왜 아무 알림도 안 뜨는거야!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지금 괜찮은 거 맞아? 다시 풀이 과정인지 뭔지 좀 내놔 보라고!‘
알림을 띄우면서 '자위를 할 것!!!!!' 이 지랄을 하면서 나에게 명령을 시켜대던 저 망할 아이템은 지금 같은 상황에 어떤 알림도 띄우지 않고 있었다.
비록 아이템 덕분에 몇번씩이나 위기를 넘겼을 터인데도 내 앞에 보이는 그녀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미친듯이 경종을 울려대는 삶의 본능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이템을 향해 욕설을 내뱉게 만들었다.
개같은 아이템을 향해서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욕설을 날리며 화를 냈지만 아이템은 처음 아이템을 손에 쥐었을 때처럼 침묵하며 어떤 지시도 나에게 주지 않았다.
'씨발 진짜!'
"대답 안 할거야?"
그 때, 그녀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내가 지금 기분이 꽤 좋아서 너 같은 벌레한테까지 말할 기회를 주고 있는데 말이야..... 언제까지 그렇게 입 닥치고 있으려고 그래?"
아까 전과 똑같이 웃으면서 말하는 그녀였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머릿속을 울리는 강렬한 직감.
'대답 안 하면 죽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게 저 빌어먹을 아이템의 도움이었지만 이번에도 아이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버티기를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내가 사역했던 고블린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납작 엎드리며 소리쳤다.
"그런 건 집어치우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한숨을 한번 쉬더니 말을 이었다.
"하아, 이래서 열등한 것들은. 쯧! 관대한 내가 봐줄게. 어떻게 죽을래?"
믿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나의 죽음을 말하는 그녀를 보며 난 이번에도 입을 열지 못 했다.
"하...."
내 대답이 없자 살짝 찌푸려지려는 그녀의 얼굴.
그 순간.
아까 전 느꼈던 진정한 공포가 내 숨통을 다시 조여왔고 나는 얼른 소리 높여 목숨을 구걸할 수 밖에 없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죄송합니다!"
"나한테 주인님 소리를 들었으면서 살아남길 바라는 거야? 감히 네까짓게?"
손에 든 계산기를 만지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런 물건을 얻었으니까 주는 마지막 기회야. 어떻게 죽을래?"
’이런 미친년이......! 지가 주인님이라고 불러놓고서 뭔 개지랄이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내가 죽는 건 그녀에게 있어 기정사실이나 다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떤 방법을 고르던 간에 나한테 '주인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에 발작하는 저 년에게 끔찍한 짓을 당하면서 농락당하다가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가볍게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 쟤도 있었지?“
바짝 엎드려 있던 내가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녀가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쓰러져 있던 고블린을 바라보며 손짓하자 고블린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끼에에엑!"
아까 전의 고통이 남아 있는지 쿨럭거리며 거센 기침을 내뱉던 고블린은 그녀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순식간에 기침을 삼키며 재빨리 그녀를 향해 괴성을 내뱉은 뒤 나처럼 납작 엎드렸다.
”와, 진짜 재밌네. 눈치도 빠르단 말이지?"
재빠르게 행동하는 고블린을 약간의 흥미가 깃든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엎드려 있는 나와 고블린을 번갈아 보더니 우리에게 명령했다.
”둘이 싸워봐.“
내 귀에 틀어박히는 개같은 명령.
”아, 그렇다고 해서 서로 죽이지는 말고~."
그녀가 우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을 끝냈고 그와 동시에 고블린이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타악!
땅을 박차는 소리에 놀라 옆을 바라보자 고블린이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투기와 살기가 가득 찬 눈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 했지만.
방금 전까지 나를 잠식했던 '공포'로 인해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왔다.
돌아온 이성은 내게 잊고 있던 끔찍한 통증을 일깨워주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비명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끄아아아아악!"
그러나 내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고블린은 내 쪽으로 뛰어왔고.
”안돼! 씨발! 크으윽! 움직여! 움직이라고!“
나는 나에게 달려드는 고블린을 피해 미친 듯이 팔 다리를 움직이며 도망치려 했다.
"끾끾끾끼!"
그런 나를 향해 비웃음을 지으며 코앞까지 다가온 고블린이 팔을 들어올리려 할 때.
”그만.“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고블린은 행동을 바로 멈췄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그녀를 바라봤다.
”재미없게 진짜. 상대도 안 되는 싸움이었네? 너무 실망스러운걸."
나를 바라보며 얼굴을 살짝 찌푸린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바닥에 붙어있던 내 몸이 붕 떠올랐고 팔다리가 형틀에 묶인 것처럼 몸이 공중에 매달렸다.
망가진 다리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강제로 잡아 당겨지면서 반듯하게 펴졌고.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뼈가 완전히 부서지는 그 생생한 느낌에 저절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벌써 그렇게 비명 지르다 보면 일찍 목이 쉴텐데? 참을성도 이렇게 없으면서 아까는 도대체 어떻게 연기한거야?"
내 비명을 들으면서 조롱하는 그녀를 보니 아까 전 그녀로부터 느껴졌던 진정한 '공포'의 잔해가 진득한 악의로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악의가 질척거리며 흘러 나오기 시작하자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것도.
하지만 너무나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는 애원이 터져 나왔다.
"안돼!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뭐든지 다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내 외침은 무엇을 위한 외침이었을까.
살고 싶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애원일지, 내 안에 부서지는 무언가가 더 이상 부서져서는 안된다는 울부짖음일지,
나는 점점 내 진실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갔다.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는 안 죽을 거야. 아! 그리고 너가 먼저 죽여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는데 난 분명 너가 살려달라고 해서 살려두는 거다?“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입에선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은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 나왔다.
말을 마치고 손가락을 들어올려 고블린을 가리키는 그녀.
”너. 고문 좀 할 줄 아니?"
갑작스럽게 자신을 지목하는 그녀의 말에 고블린이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얼른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고블린에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한번 해봐."
챙그랑!
청명한 소리를 내며 고블린의 앞에 떨어지는 단검 하나.
"내가 돌아가기 전까지 최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아! 한번에 죽이지는 말고?"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고블린을 향해 그녀가 손을 흔들었고 그것을 본 고블린이 얼른 단검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몸을 돌려 새파랗게 날이 선 단검을 들고 다가오는 고블린.
"씨발! 꺼져! 이 괴물 새끼야!"
묶여있는 몸을 미친 듯이 흔들면서 고블린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녹색 괴물은 아랑곳 않고 내 앞에 다가와 손을 들어올렸다.
”끼엑!“
기합소리와 함께 그대로 내 허벅지에 내려 찍히는 칼날.
”끄아아아악!“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었던 칼날이 맨 살을 파고드는 고통은 내 상상을 초월했다.
"저런. 그래서 내가 미리 말해줬잖니. 벌써부터 비명 지르면 목이 남아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좀 심심하네?"
"아아아아악!"
그녀의 말에 단검을 손에 쥔 고블린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파고든 칼날도 그 떨림에 맞춰 내 살을 헤집었고 내 고통은 더더욱 끔찍해져 갔다.
"흠... 아! 안 그래도 비명 지를 일이 많을텐데 목이라도 좀 덜 아프게 혀를 좀 잘라주는건 어떨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고블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칼을 단번에 뽑아냈다.
"!!!!!!!!"
그 압도적인 고통에 나는 소리없는 비명을 내질르며 저절로 온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그러나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 칼날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든 근육을 움직여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미치이이인! 씨발! 목이 쉬는거랑 혀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어머, 이번엔 아까처럼 비굴하게 구걸하질 않네? 그런데...."
웃음을 완전히 지운 그녀가 정색하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어딜 하찮은 벌레 따위가 내 앞에서 욕을 해?"
"으으으읍!"
나는 내 얼굴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칼날을 보며 필사적으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어느새 내 머리는 팔 다리와 똑같이 고정되어 입이 강제로 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시퍼런 칼날이 밀고 들어왔다.
"이번에도 재미 없진 않겠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떨리던 칼날이 입안 깊숙이 들어왔다가 다시 앞쪽으로 돌아와 혀 끝을 겨눴다.
어느새 쇠의 차가운 감촉이 혀에 느껴졌고 미친듯이 이 상황을 벗어나려 발악했지만.
칼날이 앞 뒤로 움직이며 내 혀를 고기 썰 듯 썰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그 끔찍한 고통에 목에서 저절로 짐승같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왔고 입안에 피가 가득차오르기 시작했다.
역겨운 내 피의 맛.
미쳐 버릴 것 같은 고통과 함께 내 안의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잘린 혀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이 끔찍한 느낌.
혀가 내 목구멍을 틀어막으며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숨이 막혀 왔다.
나는 죽음을 직감하며 정신을 잃.....
"너가 말하지 않았어? 제발 살려달라고?"
번쩍!
척수를 관통하는 전기 충격과 함께 내 정신이 강제로 각성했다.
감기다가 강제로 부릅떠진 눈에는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고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내뱉는 말이 귀에 틀어박혔다.
"절대 안 죽어. 걱정하지 마."
싱긋.
미소 짓는 그녀.
그 미소를 시작으로 지옥의 막이 올랐다.
*
온 몸에서. 온 신경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에게 말해 온다.
이 고통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이제 제발 끝내달라고.
다시 한번 온몸에 새겨진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흐려지며 죽음이 내게 손짓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제발 저 손짓을 따라가 모든 걸 끝내고 싶었지만.
나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콰득! 콰아악!
강력한 힘에 의해 강제로 입이 뜯어지듯 벌려지고 밑에서는 피가 솟아 오른다.
내 몸에서 흐른 걸쭉한 피가 강제로 입안으로 밀고 들어와 곧바로 식도를 통과해 내 몸 속으로 쳐박혔다.
피가 온 몸으로 퍼지며 완전히 멀쩡해진 정신으로 돌아온 순간.
더욱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
”정신 차려야지~“
옥좌에 앉은 괴물이 계산기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나를 향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주…. 어……. ᄌ…….“
나는 난도질당해 제대로 발음조차 할 수 없는 혀를 움직여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 몸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한쪽 눈과 귀는 이미 파내어져 있었고 왼쪽 다리, 오른쪽 팔은 완전히 잘려나가 있었다.
남아있는 눈을 들어 앞을 보면 걸레가 되버린 온갖 내 신체 부위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고 피가 사방으로 흥건하게 뿌려진 곳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고블린이 서 있었다.
내 몸에 남아 있는 신체 부위 중 정상적인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수백번이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간절히 죽음을 원했지만 죽음은 내게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
이 악랄한 지옥같은 고문을 받으면서 몇 번이나 정신을 잃는 순간이 오면 강제로 피가 내 입을 타고 들어와 내 정신을 각성시켰고.
정신이 돌아오면 모든 신경이 되살아나며 모든 통증을 다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힘드니?“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고블린에게 괴물이 물었다.
”끼에엑! 끼엑!“
격렬히 고개를 저으면서 부정하는 고블린.
”그래. 그 정도로 힘들면 말이 안 되지. 너 고문에도 소질이 좀 있구나? 한번 알려주니까 보는 재미가 꽤 있었어. 이제 조금만 있으면 나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도 슬슬 잘라 볼까?“
”끼에엑!“
저 미친 괴물은 내가 고문을 당할 동안 계산기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는 듯, 그녀의 뒤에서 마법진이 나타나거나 빛과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러다 가끔 고블린을 향해 원하는 고문을 지시하며 내 신체 부위가 잘려 나가는 걸 재밌다는 듯 바라보곤 했다.
”에…. ᄇ…. ᄌ…. 어….“
”아까 분명 너가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았어? 이번엔 왜 또 말이 바뀔까? 너가 원하는 대로 내가 '직접' 살려주고 있는데 말이야."
죽음의 문턱을 수없이 밟으면서 제발 이 지옥을 끝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아까와 같은 말을 하며 나를 비웃었다.
마음속에서 흔들리던 무언가는 완전히 깨지고 짓밟혀 버렸다.
쾌락 따위는 압도적인 공포에 짓눌렸다.
그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녀를 향한 진득한 악의 위에 긴 시간에 걸쳐 새겨진 공포와 고통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몸과 마음이 전부 산산이 부서지고 찢겼다.
아, 다시 또 이 망할 고문귀가 내 코를 자르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이기를, 제발 마지막 고문이기를.
이제 제발 저 끔찍한 악마가 떠날 시간이 되었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바라며.
또 한 번 찾아올 끔찍한 고통에 몸이 떨리는 순간.
눈 앞에 알림이 떠올랐다.
[계산 결과 도출 완료]
[계산을 처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