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화 〉17. 계약조건 (17/69)



〈 17화 〉17. 계약조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도대체 몇번이나 했는지, 내가 얼마나 싸고 그녀가 얼마나 느꼈는지 모르겠다.

일반적인 생각을 전혀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짐승처럼 서로를 탐하며 섹스하던 우리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들어올려 강하게 박아대던 나는 사정감이 다시 차오르고 있었다.

"크윽! 싼다!"

"네! 어서! 어서어! 제 안에 가드윽! 흐으으으읏!"

그녀는 팔다리로  몸을 끌어안고 신음을 내뱉으며 완전히 가버린 후에 정신을 잃었다.
그런 그녀를 침대에 그나마 깨끗한 곳에 내려놓으며 아까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 존댓말도 자연스럽게 하네.'

내가 부탁한 이후에도 그녀가 원래의 말투로 돌아간 적이 있었지만 강하게 박아넣으며 강조하자 고분고분 내 말을 따르는 그녀였다.

내 사정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녀가 절정에 오르는 시간은 짧아졌고 신음은 커져만 갔다.
아마 아까 전부터는 항상 절정한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린 채 그녀의 질에서 내 정액이 빠져 나오는 모습은 다시금 내 아랫도리에 힘이 돌아오게 했지만 아직도 쾌락의 여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그녀가 안쓰러워 머리를  번 쓰다듬어주었다.

'어휴. 내가 너무 많이 했나. 점점 정신 차리는 시간이 길어지네. 좀 미안한...'

"...어?"

섹스할때는 그 쾌감에 밀려 사라졌던 생각이 다시 떠오르자 확연히 이상하다는 생각이들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시작할때 그녀에게 이런 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나? 아니, 이런 감정을 가질만한 계기가 있었나? 분명 그녀의 입에서  것이 되겠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시작했던 것 같은데...?'

지금  눈에 보이는 그녀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 감정이 성욕에서 오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 오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  눈치 챘어?"

그러자 어느 정도 초점이 돌아온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게 어떻게 된....?"

"내가 막 아름다워 보이고 날 사랑하는  같지? 아니다 , 아름다운 건 처음 볼때나 지금이나 똑같을 테니  사랑하는 감정이 들겠네. 아하하!"

그녀가 웃으며 말하자 약간 배알이 뒤틀렸다.

"존댓...."

"그건 섹스할 때 하는 플레이 같은 거고. 다 끝났는데 뭔 개같은 소리야?"

나는 완벽히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게 보여 참았다.

"나도 너를 보면 그렇게 느껴져. 너가싸재낄 때마다 그 감정은 더 강해졌고. 그런데 이 감정은 모두 저 빌어먹을 아이템 때문이니까."

그녀가 누운 자리에서 손을 흔들자 그녀의 온 몸을 더럽히고 있던 모든 것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한층 편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이 감정이 진짜라고 생각  해. 물론 내 운명이 엮인거니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할 때도 있겠지. 하지만 난 이 감정이 진짜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할거야."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그렇게 해."

난 가만히 듣다가 아직도 그녀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 잠깐만! 말은 끝까지 들어봐!"

그녀가 손을 마구 흔들며 나를 막았고 나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 진짜... 이제 와서 그런 것 때문에 굴레를 끊어 달라 그런 게 아냐."

"그럼?"

그녀가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더니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고민 해볼게."

나는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뱉은 말에 당황하며 되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야? 맹세할 수 있어?"

"그래.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조건이 있어, 이 조건이 안 된다고 한다면 넌 절대 너가 원하는대로 못 할거야."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고민했지만 그녀가 이렇게라도 말하는 상황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건이 뭔데?"

"첫째. 아까부터 너가 나를 손에 넣는다고 했지만 나는 너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거야. 내가 너의 것이 된다면 너도 나의 것이라는 동등한 관계라는 거지. 파트너라고 할까? 어차피 굴레가 이어진 상황이니까."

그녀가 하는 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은 계속해서 그녀가 말하는 걸 들었다.

"둘째. 너가 하는 일에 내가 협력할테니 나중에 내가 할 일에도 너가 협력해 줬으면 좋겠어. 그때 갑자기 감정을 공유받거나 하면 곤란할 테니까.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떻게 해야 굴레를 끊어줄건지 말해줄 것."

그녀가 말한 조건들을 하나씩 듣던 나는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생각을 조금 정리한 뒤 그녀에게 말했다.

"좋아. 너가 원하는 조건을 말했으니까 이제 내가 원하는  말해도 되겠지?"

"그래. 한번 해봐."

"먼저 확실히 해야 할게 있는  같은데 내가 지금 굴레의 앞에 있다는 건 잊지 않았지?"

".....당연하지."

"근데 지금 조건은 너한테만 너무 유리한 조건 같은데?"

그녀가 잠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게 말했다.

"그래서?"

"너가 말한 조건들을 좀 바꾸는 게 맞지 않나?"

"... 일단   들어볼게."

"먼저 첫 번째. 동등한 관계가 아니지. 내가 굴레의 앞에 있는 게 분명한데? 그러니나머지 다른 부분은 받아들이겠지만 동등한 관계라는 표현은 아니라는 거지. 명백히 내가 좀 더 우위에 있는  아냐?"

빠드득.

그녀의 입속에서 살벌하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만 말하고 섹스나 더 실컷 할까?"

"... 아니야. 계속 말해."

"두번째는 너가 나한테 협력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내가 너한테 협력하는 일은 다른 문제인 거지. 너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알고 내가 무턱대고 널 도와?"

"난 방해를 하지 말란..."

"그러니까 내가 왜? 너가 만일 내가 협력하길 원한다면 그에 따른 무언갈 제공해야 할거야."

그녀가 화가 나는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지만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너가 말한 세번째는 너가 나에게 아이템이 만든 가짜 감정이 아닌 진실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에게 말한다고 맹세하면   말해주지."

그녀는  마지막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지만 그녀의 그런 눈빛을 받으면서도 내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끊어줄 생각 따윈 없다 이거네."

"아니? 나는 진심으로 말한건데?"

"하...."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좋아. 다 인정할게. 대신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도 끊을 방법을 한가지 더 마련해줘."

"아니.  방법 외에 다른  없을 거야."

"아... 씨발... 진짜..."

그녀가 낙담한듯 중얼거리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고 내게 말했다.

"하... 그래...  업보겠지... 그리고 두번째는 너가 원할 때 섹스 해줄테니까 그걸로 하면 안될까? 그냥 파트너가 아니라 섹스 파트너도 겸하는 거지. 어때?"

"뭐? 그건 당연한 거지. 그렇게나 즐겨 놓고 지금 뭔 개소리를 하는거야?"

"아니! 그건...!"

내 말에 그녀가 당황하며 소리치려 했지만 아까 전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닫았다.

"내가 대신 말해주지. 너가 나한테 해줘야  건 하나야. 뭐든지 나한테 솔직하게 말할 것."

"....."

"지금 솔직히 우리 사이가 정상은 아니잖아? 그런데 말로만 파트너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지. 나한테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말한다면 너가 하는 일에 나 또한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고 맹세할게."

그녀가 내 말에 침묵하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거절한다면?"

"그럼 그때부터는 다시 즐거운 섹스의 시작인거지."

"하...."

그녀갸 눈을 감은 채  고민을 이어가다 입을 열었다.

".... 좋아. 하지만 너한테 도움이 되는 거라면 거짓말을 할 수 있게  줘. 그럼 받아들일게."

"그래. 그럼 이제 너의 모든 걸 걸고 맹세를 해. 너가 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마법 같은 건 없어?"

"하...."

그녀가 다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모든 마법을 손짓 한번으로 해결하던 그녀가 길게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왼쪽 가슴 부근에서 핏빛 종이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능숙하게 그 종이를 받아 들더니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피를 내서 그 종이에 찍은 후 내게 그 종이를 건네 주었다.

"자. 읽어봐. 존재를 걸고 하는 맹세의 계약서니까."

나는 천천히 그 종이를 읽어보았고 그곳에는 우리가 나눈 대화가 그대로 적혀져 있었다.
그리고 서명을 하는 란에 그녀의 피가 묻어 있었다.

'음... 이거 피를 어떻게 내야 하지?'

나도 그녀처럼 피를 찍어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가 했던 것처럼 피만 살짝 정도로 조절을 할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을때.

그녀가 내 손을 가져가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깨물었다.

"윽!"

피가 약간 새어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가 입에서  손을 뺌과 동시에 종이에 내 손가락을 찍었다.
그러자 종이가 피로 변해 반으로 나눠지며 우리 둘에게 스며 들었다.

무언가가  어딘가에 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녀를 바라보자 얼굴을 찌푸린 그녀가 보였다.

"씨발. 대체 해를 끼치는 범위가 뭐야?"

불만스럽게 내뱉은 그녀가 나를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왜,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이제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건가?"

"그래. 못 느꼈어? 이걸 어긴 존재는 완전히 소멸될거야."

"흠...."

나는 물론 그녀를 전부 믿기는 힘들었지만 그녀를 믿기보다는 굴레를 믿으며 그녀에게 가장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방금 내 말을 들어주겠다고 한 이유가 뭐야?"

"뭐? 어떤 거? 조건?"

"아니.  것이 되어 달라는 말을 들어준 거. 나한테  말을 할때는 너무 멀쩡해 보였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해서."

"하.... 씨발 진짜."

그녀가 깊게 한숨을 내쉬다 말을 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만족해야 해주겠다고."

"그런 것보다 너가 그걸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던 이유."

"하.....진짜...."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게 말했다.

"내가 멀쩡해 보였다고 했지? 완전히 정반대였어.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칠 것 같은 쾌락이 너가 사정할 때마다 강도를 높여 찾아오고, 점점 감정은 이상해지고, 아마 계속되었다면 나라도 버티지 못했을 거야. 물론 엄청나게 섹스가 길어졌다면."

"그래서, 사실은 한계였다?"

"그래. 이게 계속되다간 정말 내가 미쳐 버리거나 나를 잃어버릴  같아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고 있었지. 어딘가 조금씩 변해가는 너의 행동을 보며 너도 이걸 눈치채길 바라면서."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내가 정말로 그녀를 쾌감 때문에 변하게 하고 그녀의  고고하고 오만한 콧대를 무너트렸다는 말에 짜릿한 성취감과 뿌듯함이 찾아왔지만 그래도 어딘가에 찝찝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럼 내가 계속했으면 지금과 상황이 달라졌을까?"

"달라졌겠지.  안 좋은 방향으로."

그녀가 머리를 한차례 쓸어넘기며 말했다.

"감정의 괴리감을 이겨내지 못해 완전히 미쳐버린 나를 손에 넣거나 쾌락에 정신이 뭉게진 나를 얻었겠지. 이런 온전한 내가 아니라. 그런데 그 전에 너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했다면 너가 완전히 사랑의 포로가 되었을수도?"

그녀의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완벽히 그녀를 굴복시키지 않았다는 찜찜함을 털어 내었다.

'그래. 이게 최선이었어.'

"더 궁금한 게 있어? 없으면 나도 몇가지를 좀 물어봐야 것 같은데."

"이제 없어. 물어봐도 괜찮아."

그녀가 손을 한번 저으니 알몸이었던 그녀의 몸 위에 아까 전의 드레스가 입혀졌다.
그리고 그녀가 진지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너가 사정할  무언가를 의도한 건 아니라고 했지?"

"그래."

"그럼 사정할때 있었던 일은 굴레 때문에 생긴 일이란 건데...  그때 너의 정액이 느껴지면 너가 나한테 했던 그 모든 것보다도 더 큰 쾌락을 겪었고 너를 향한 감정이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긍정적인 감정이 생겨났어. 이런 게 가능하다는 걸 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고. 너는 어땠어?"

"음... 사정할때마다 쾌감을 더 견디기 쉬워지거나 정력이 더 강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너가 말한 것처럼 너에 대한 감정이 변해갔지."

내가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 씨이발 진짜. 욕심 한번 부렸다가 대체  꼴을.... 무슨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차이점이....씨발...."

한참을 더 욕설을 내뱉던 그녀가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일단 확실한  굴레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해."

감정의 강제적인 변화 같은 의도하지 않은 일을 겪었기에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일단 이건 넘어가고 이제 나를 소환했는지 말해줄래?"

그녀의 말에 잊고 있던 내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젠장! 충격적인 일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잊고 있었어!'

내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의 극치와 쾌락의 극치.
완전히 상반된 두 감정의 극치를 겪으며 내 머리가 잠시 망가져 버린  같았다.

'씨발 어떻게 이런 걸 잊고 있었지?!'

"내가 사는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어서."

그녀가  말에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한 듯 잠깐 굳어있다가 다시 내게 되물었다.

"........................ 뭐?"

나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에게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

설명이 다 끝나자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딴 상황인데 나랑 여기서 떡이나 치고 있었다고?"

그녀의 말에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허, 하하, 하..하... 내가... 내가 고작 이딴 개병신만도 못한 벌레 같은 씹버러지 새끼한테...."

엄청난 자괴감이 엄습한 듯 그녀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너가 그 지랄 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할 말을 잠시 잃은 나는 결국 그 원인인 그녀한테 소리칠 밖에 없었다.

"그래, 씨발... 내가 잘못이지... 하여간 망할 새끼들은...."

무언가 체념한 듯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네. 방법은 알아?"

"아니. 그런데 무슨 증명을해야 한다고 했어."

"증명? 하! 그런거야 뻔하지."

그녀가 손을 움직였고 내가 다시 잊고 있던 무언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아! 분명 이 고블린은...'

나를 그녀의 말에 따라 실컷 고문하다가 계산기의 영향으로 그녀가 고통스러워 하자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고블린이었다.

"흠... 얘는  아깝긴 하네. 한낱 미물이어도 격의 차이는 확연히 느낀 것 같았는데.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할 줄 아는 미물이니까. 정신 개조만 다음에 잘 써먹으면 괜찮았을수도?"

그녀가 이 고블린에 대해 뭐라고 품평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블린을 보자 살의가 들끓어 올랐다.

"후...."

그녀에게는 내가 겪었던 고통을 안겨주고 지금은 내 밑에서 나와 협력하는 관계로 만들어 복수를 했다지만 이 고블린에게는 내가 어떠한 짓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감정을 눈치챈  그녀가 나를 힐긋 바라보았다.

"흠... 어떻게 할래? 나는 사실 내가 보관하다가 쓰고 싶은데. 어차피 얘는 내 말대로   뿐이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분노에 찬 내게 이미 그녀의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칼 줘."

"뭐?"

"아까  단검. 달라고."

"뭐? 그거 감당도 못 하면서 무슨.... 하... 진짜."

그녀는 나의 이런 행동이 맘에 들지 않는 듯 했지만 내가 말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자 단검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피, 피를 먹고 싶다.’

‘나에게 검붉은, 신선한, 맛있는 피를 먹여다오.’

‘피를 위해서라면 나는 너의 앞에 어떤 것이라도 베어주겠다.’

그리고 전에 들었던 괴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끔찍하게 느껴졌던 저번과는 달리 어딘가 동질감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먹여주지.'

'좋아! 지금 당장 베어주마!'

나는 괴물들의 갈망과 나의 분노에 몸을 맡기며 고블린이 가장 고통스러워할 장소로 나를 이끄는 단검에 인도를 따라 손을 휘둘렀다.

성기, 눈, 혀, 배, 손, 발.

그 고블린은 단검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입이 막힌 채 허공에 묶여 눈을 까 뒤집으면서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그녀의 마법에 구속되어 있는 이상 그 고블린이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신나게 칼을 휘두른 뒤 생명이 꺼져가는 고블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만족스럽군!'

'이상해... 분명 부족한데... 너가 휘두르니까 이상하게 부족하지 않아...'

난 의미를  수 없는괴물들의 소리를 듣다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단검을 다시 건네주었다.

"흐응? 이번엔 또 버텨냈네?"

그녀는 단검을 내게 받으며 흥미로운 듯 말했다.

"이 단검으로 노는게  괜찮았나 봐? 웃고 있는데 너?"

손을 들어 입가를 어루만져 보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쯧!"

그리고 나는 아쉬움이 남기도, 즐겁기도 한 뭔지 모를 이 감정에 혀를 차며 다시 등을 돌려 고블린을 바라보았다.

꿈틀대던 고블린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자 내게 알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격을 증명하였습니다.]
[‘정다운’에게 자격이 부여 됩니다.]
[던전 성과 계산 완료.]
[모든 처치에 관여했습니다. 특별 보상을 책정합니다.]
[혼자서 던전을 공략했습니다. 특별 보상을 책정합니다.]
[포인트 200과 능력에 알맞게 '아이템 소환권' 2장이 지급됩니다.]
[이곳에서 나가시겠습니까? Y/N]

"나갈 수 있어? 그게 아니라면 빨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이 차원이 심상치 않아."

"방금 나가겠냐고 묻는  떴어."

나가는  선택하자 마치 처음 겪었을 때처럼 몸이 점점 흰 빛에 둘러싸였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가장 먼 곳에서부터 들판과 하늘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붕 떠올랐고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그 감각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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