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18. 멸망의 시작
정다운이 그 공간에서 빠져나오기 전, 다른 증명의 장.
[최초로 자격을 증명하였습니다.]
[증명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없습니다.]
[추가 보상을 획득합니다.]
"우와! 우리가 최초래요! 이렇게 빨리 끝낼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그러게요. 괴물들을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무서웠는데.... 다 아름씨 덕분이에요."
"아름씨는 회사원이라 그러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침착하게 싸울 수 있지?"
알림을 보고 환호하며 여자들이 이곳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싱긋.
그런 그들에게 이쁘게 미소지은 그녀는.
"꺄아아아악!"
"....아름씨! 지금 뭐 하시는 거에..아아아악!"
"흐으윽! 왜 이러는 거야 미친년아! 죽ㅇ....커억."
순식간에 두 사람을 죽여버리고 달려드는 남은 한 명에게도 깔끔한 솜씨로 찔러 넣어지는 칼.
"미안, 너희한테 악감정은 없어. 저번엔 내가 많이 도와줘도 결국엔 다 죽어버렸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날 좀 도와줘."
"끄....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정아름을 바라보던 여자의 발버둥이 멎었다.
"하아...."
칼을 빼내며 묻어있는 핏물을 털어낸 정아름이 떠오른 알림창을 확인했다.
[최초로 증명을 마친 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추가 능력치와 보상을 획득합니다.]
"됐어. 이 정도면 처음 얻을 수 있을 때 얻는 건 다 얻은거야. 그러니까 제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도륙할때만해도 차가웠던 그녀의 얼굴은.
"흐윽, 무사히, 무사히, 흑, 돌아와줘, 다운아. 다운아, 다운아, 누나가, 누나가 다 해줄게.... 흐으윽, 꼭 돌아와서 우리 둘만의 낙원을...."
흐느껴 울으며 애타게 정다운을 찾다가 현실로 돌아갔다.
*
"다운아!"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세게 끌어 안았다.
"무사했구나!"
눈을 떠 앞을 바라보니 누나가 나를 부서질 듯이 꽉 껴안고 내 품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우는 그녀를 마주 안아주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자 그녀의 울음이 조금씩 그쳐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울음을 멈춘 그녀는 이내 걱정을 한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늦게 나왔어?"
그녀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보다도 거의 10시간은 넘게 있다가 나온 것 같아. 남은 시간 보여?"
[00:05:24]
"어?! 이렇게나 많이 지났다고?"
"그래. 그래도 시간이 다 되기 전에 와서 다행이다. 난 정말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그녀가 다시 울음을 터트리려 하길래 나는 애써 그녀를 다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에이, 누나. 난 괜찮아. 좀 늦긴 했어도 이렇게 멀쩡하게 나왔는 걸?"
"그래도... 그래도.... 할아버지,할머니랑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줄 알아?"
"미안. 내가 미안해."
"너가 뭐가 미안한데!"
그녀의 투정 섞인 걱정을 받아주고 어느정도 진정이 된 그녀가 내게서 팔을 풀려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 다운아. 너 뒤에 있는 저 여자. 아는 사람이야?"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니 나와 계약을 맺은 그녀가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다가 누나에게 말했다.
"아, 안에서 알게 된 사람이야."
내가 대답할 때 나에게 잠깐 향했던 시선이 바로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누나가 뚫어질 듯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마치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드레스 끝을 잡고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누나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안에서? 정다운. 너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대체 왜 여자랑 같이 나오는 건데? 어? 빨리 말...."
누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뒤편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름아? 다운이가 돌아온거니?)
그 목소리는 핸드폰에서 흘러 나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누나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핸드폰을 잡아서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다운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금 돌아왔어요."
(그래? 휴... 정말 다행이구나. 다운이 좀 바꿔주지 않으련?)
누나에게서 전화기를 받아 들은 나는 조부모님과 대화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거의 오열하다시피 하시며 나와 통화를 하시길래 누나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입모양으로 할머니가 다시 쓰러지셨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말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 올 때.
문득 타이머가 눈에 들어왔다.
'어? 잠깐 벌써....?'
[00:00:01]
[00:00:00]
타이머가 0을 가리켰고.
콰과광!
[멸망을 집행한다.]
굉음과 함께 목소리와 들리며.
콰앙!
내 눈앞에 있던 핸드폰에서 칼날이 튀어나오다 뒤에서 날아온 무언가에 휴대폰이 박살 나기 전.
(아아악!)
휴대폰 너머에서는 할머니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에서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쳐다보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에서 튀어 나온 칼날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피를 흘리는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핸드폰에서 또다른 칼날이 나에게로 튀어 나오는 것도.
쾅! 콰광!
"정신 차려!"
내 뒤에서 무언가 날라와서 나를 향해오던 칼날이 부서진 후에 연이어 핸드폰이 터졌고 누군가가 내 뒤에서 소리치는 걸 듣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을 조금씩 내뱉으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 완전히 박살 난 핸드폰에서 튀어 나왔던 칼날이 내 그런 사고를 방해하고 있었다.
챙강!
앞에서 나는 거슬리는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누나가 잡고있던 칼날을 땅에 털어트리고 피범벅이 된 손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누나가 고개를 돌렸다.
”다운아....“
”누나... 괜찮아?“
그녀가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받고 있으니 내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정신 차리라고!“
내 어깨를 꽉 붙잡으며 소리치는 누군가의 목소리.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정신이 무너지면 끝이야!“
그 덕분에 다시금 흔들리려는 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누나도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듯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연한 눈빛으로 돌아온 누나가 내게 말했다.
”아까.... 분명 할머니가 비명 지르신거지?“
누나가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고 말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이 어떻게 되셨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밖으로 나가기가...”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진 일만이 아니라면 어떤 위협이 다가올지도 모르는데 밖으로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조부모님의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에 참담한 심정일 때 뒤에 있던 그녀가 말했다.
“후.. 필요하면 그곳으로 이동할 수는 있어.”
“뭐? 그게 가능해?”
갑작스럽게 들려온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말에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다면.”
나는 그녀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그런 나의 행동을 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잠깐. 공간이동?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것보다 당신이 누군지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우리 가족과 관련된 일을 맡기려고?”
어딘가 공격적으로 말하는 누나의 말에 그녀가 코웃음치며 말했다.
“하! 어이가 없네. 너가 그런 말할 자격은 있고?”
말을 끝마친 그녀가 나를 힐긋 눈짓했다가 다시 누나를 바라봤다.
그러자 누나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그녀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마..... 아냐, 그럴리가.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나랑 이런 의미없는 대화를 할 시간에 얼른 이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가족들이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날 것 같은데? 아, 너는 그런 걸 할 필요가...”
“그 입 안 닥쳐!”
누나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크게 소리쳤지만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기만 하고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도 참... 에휴... 아까도 말했다시피 시간 아까우니까 가야 할 장소나 얼른 떠올려 봐.”
“잠깐.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파악을...”
“시간 없어. 너가 만약 조금이라도 네 가족을 구하고 싶다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나을거야.”
결국 나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을 삼키고 그녀가 말한대로 부모님 댁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녀가 내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올리자 내가 떠올리던 그 생각이 그녀에게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그럼 이제 여기로 이동할게.”
“기다려! 당신이 대체 뭔데 그런 걸 멋대로...!”
누나가 다급히 다시 소리쳤지만 누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주문을 외는 순간.
어딘가로 몸이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