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27. 사역 (27/69)



〈 27화 〉27. 사역

빛을 받아서 아름답게 빛나는 핏빛 칼날을 그녀가 손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칼 전체를 고혹적인 손길로 매만진 그녀는 가볍게 칼을 몇차례 휘드르다가.

쉭!


 눈으로 도저히 따라잡을  없는 엄청난 속도로 현란한 검술을 펼친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 씨익 웃으며 칼 끝을 두드리며 말했다.


“칼뿐인  알아? 웬만한 무기들은  쓸 수 있지. 싸우다 보면 마법을 봉인 당할 때도 있고 내가 아직 약할 때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들도 많이 만났어. 그리고 마법을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최대한 내 몸을 지키면서 상대를 죽여버리기 위해서 많은 걸 익해야 했고.”

“그럼 마법만큼이나 칼을 잘 다루는 거야?”


“마법만큼은 아니지만.”


그녀가 말을 하는 순간.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새빨갛게 빛나는 칼 끝이  눈 앞에 멈춰있었다.


‘.... 눈으로 전혀 따라가질  했어. 아니, 움직이는 줄도 몰랐는데.’


다시 한번 새삼 내가 어떤 존재와 그 지랄을 했는지 생각이 떠오르자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내 차원에서 나보다 칼을 잘 쓰는 사람은 없지. 부하들 중 무투파인 놈들도 칼로  무릎 꿇려줬으니.”

그녀는 찔러 넣었던 칼을 옆으로 빼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하나도 놀라지를 않네?”

“아마 월하가 나를 찌를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서 아닐까?”

“.... 재미없어.”

“뭐, 사실은 너가 움직이는 걸 하나도 몰라서 그런 것 뿐이야.”


“눈앞까지 칼이 들어왔음에도 일말의 동요가 없는 건 힘들지. 아무리 내가 찌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더라도. 그렇다는건.......”


“그렇다는건?”

“후. 아니야. 아무것도.”


그녀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아 되물어봤지만 주먹을 살짝 움켜쥐며 그녀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뭐야. 뭔데 그래? 그렇게 애매하게 말을 끊고. 아! 혹시 돌아오기 전에 너한테 고문을 당한 것 때문에 겁이  없어져서 그렇다고 말하려 한 건가?”


그녀는 나를 잠깐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그래. 너 말이 맞아. 그렇게 고맨해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대담해져서 다행이라고 해야겠네.”

“뭐야? 저게 정답이 아니라고?”


“신경  필요 없어. 어차피……. 영원히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을 끝내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제대로 답을 듣지  한 것이 너무 불편해서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잠깐. 진짜 뭐인지 말 안해줄 거야?”

그러나 그녀는  말을 무시하고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분명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하지 않았나?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되기 때문에 대답을 안하는 거야?”


내가 소리치는  듣자마자 우뚝 멈춰선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대답했다.


"그래. 너가  필요 없으니까 내가 말 안 해도 맹세가 멀쩡한 거겠지?"

“대체 뭐길래... 좀 말해주면  돼, 월하야?”

내가 그녀의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뒤돌아서서 내 앞으로 달려와 으르렁 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아무 때나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아니.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아니면서 부를때 이름으로 부르는  뭐가 이상하다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럽게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너는  이름 함부로 막 부르면 좋아?”


“엄청 좋을  같은데? 그러고 보니 아직 한 번도 너가 나를 이름으로 불러주는 걸 못 들은 것 같다. 한번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을래. 월하야?”

“아아아악! 진짜  알고 있으면서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처음 이름이 생긴 게 방금 전인데 나한테 너무 어색하다고!  불러도 괜찮은 그럴 때. 내가 마음의 준비가 좀 됐을 때 말하란 말이야!”


부끄러움을 억지로 참으며 짜증을 내는 그녀였기에 나도 더 이상 놀리지 못하고 다시 본론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알겠어. 그러니까 너도 내가 궁금한 거 말해주면 되는  아냐?”

“후…….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내가 말을 안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니? 여자가 말을 안 하는 거 그렇게 하나하나 캐묻는 거 진짜  좋은 버릇인 거 알아...... 다운아?”

고개를 돌린 채 다시 한번 내 말에 대답을 해주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실망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나의 이름을 듣고 실망했던 마음이 눈녹듯 풀어지며 기분이 꽤 좋아졌다.

“와. 뭐야.  이름 불러주는 거 너무 좋은데? 한 번만 더 불러주면 안 될까?”


“내가 너 이름 불러주는게 그렇게 좋으면 부르고 싶게 좀 만들어봐. 괜히 이상한 거나 하지 말고.”


“좋아. 노력해볼게. 그럼 너 이름도 내가 부르고 싶을 때 부르면 되는거네? 근데 난 항상 부르고 싶은데?”

그녀는 내 마지막 말은 무시하고 뒤돌아서서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레 새끼들 다 죽여 버려야지. 이 씨발 새끼를 내가 사지를 찢어 놔야겠어.”

누구에게 내뱉는 말인지 모를 말을 마친 그녀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갑작스럽게 그녀가 사라지자 나도 허겁지겁 그녀를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뛰어가자 저 멀리에 있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빛을 피해 도망을 가던 고블린 무리의 뒤편에 서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역겨운 냄새.”

방금까지만 해도 고블린들과 거리가 꽤 떨어져 있던 그녀는 다시 한번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고블린들과 좀 더 가까운 곳에 나타난 그녀가 핏빛으로 빛나는 레이피어를 그대로 치켜들더니 한순간에 내질렀다.

그 순간.

앞에 있던 모든 고블린의 팔, 다리가 찢겨 나갔다.


“끼에에에엑!”


순식간에 사지를 잃은 괴물들의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고 몸통만 남아 땅바닥에서 꿈틀대는 고블린들이 눈 앞에 보였다.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행동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그녀의 마지막 동작으로 유추했을 뿐이었다.


이런 미친 광경을 단 한번의 찌르기로 만들어낸 그녀는 칼을 한 번 털어내며 열심히 달려와 이제야 겨우 그곳에 도착한 나에게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너가 마무리해. 칼로 찔러 죽이는 게 편하겠지? 머리든 심장이든 찔러 넣으면 바로 죽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공간에서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렇게 죽여도 상관이 없을까?”

“분명 처음에 ‘처치에 관여’라고만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지?”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기억을 되짚었고 그녀의 말을 긍정해주었다.

“그래. 분명 그렇게 적혀져 있었을거야.”

“‘처치에 관여’랑 ‘처치’가 얼마나 차이가 날진 모르겠지만 분명 관여보단 일반적인 처치가 낫겠지? 그러니 일단 돌아온 김에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거로 하자고.”


그녀에게 이유를 들은 나는  손으로 칼을 잡고 누워서 고통에 꿈틀대는 고블린들에게로 다가갔다.


“그거 한 손으로 쓰는 건데, 두 손으로 잡는  편해? 그걸로 줄까?”


....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

팔다리가 사라져 몸통만 남은 고블린의 끔찍한 모습은 보통 사람같았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모습이었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고블린들의 모습이 하나도 역겹다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이상하다. 처음 고블린들이 죽는  봤을 때도 이랬나? 핏물로 터졌을  좀 역겨웠던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라서 그런가?'


내 고블린이 고블린들을 죽이는 걸 많이 봐서 였을까, 아니면 고블린들이 내게 했던 조롱이 생각나서 였을까.

죽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고블린들에게 칼을 들어 죽이려 다가갈 때도 나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내게 보이는 두려움에 찬, 피식자의 눈빛에 만족하며 그들에게 칼을 찔러 넣었다.

[정다운(소환사)가 고블린 1마리를 처치했습니다.]
[정다운(소환사)가 고블린 1마리를 처치했습니다.]
[정다운(소환사)가 고블린 1마리를 처치했습니다.]
[정다운(소환사)가 고블린 1마리를 처치했습니다.]
[정다운(소환사)가 고블린 1마리를 처치했습니다.]

“별로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네? 누굴 죽여본 적 있어?”

“벌레들은 죽여본 적 있지만 이렇게  생명체는 처음이지.”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이것들도 벌레 아닌가....?  하긴 그래, 그런데도 별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딱히 별 생각 안 드는데? 어차피 죽여야  놈들이고. 너가 없었으면 난 이 새끼들한테 죽을지도 몰랐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나.”


“흠.... 그래, 뭐. 그렇다고 하자. 그런 생각이 벌써 들었으면 나야 편하고 좋지. 그럼 다른 애들도 빨리 죽이러 가보자고.”

말을 마친 그녀는 또다시 순식간에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나도 얼른 그녀의 뒤를 다시 쫓았다.


우리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전 고블린 무리를 마주쳤을 때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상처투성이의 고블린과 다른  고블린을 발견할  있었다.


“아! 저놈들은!”


“특이한  겁도 없던 놈이 저기 있네? 그럼 다시 한번 죽여볼까?”

순식간에 레이피어를 고쳐 잡는 그녀를 향해 재빨리 외쳤다.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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