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4. 또다른 신
[일어나라!]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그 목소리는 내 영혼 깊은 곳까지 닿아 온 몸과 정신을 진동시켰다.
"허억!"
그 느낌에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일어나자 마치 처음 사라졌을 때 처럼 모든 곳이 단 한가지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때는 주변이 온통 하얀색뿐이었다면 지금은 짙은 암흑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짙은 암흑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이 공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만으로도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싸늘하게 식어갔다.
흰색의 공간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無) 그 자체인 공간에서 오는 공포가 나를 덮쳐왔다면 지금 이 곳은 둘러싸인 어둠에서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짙은 악의가 느껴졌기에 내 정신을 점점 미처버릴 것 같은 처음 느껴보는 제대로 된 공포 속으로 나를 몰아넣고 있었다.
그 광경에 다시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물며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있자 어둠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심하군.]
이 공간을 가득 채운 모든 어둠, 모든 방향에서 들려와 내 주변을 가득채우는 그 목소리는 겨우 공포를 버텨내고 있는 내정신을 한계까지 몰아 넣을 정도로 어두웠다.
너무나도 깊은 심연같은 어두움이 담긴 그 소리를 듣자 숨이 막혀올 때.
‘...어?’
갑자기 내게 커피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에 맡을 수 있었던 익숙한 커피 냄새는 너무나 향긋해 나를 당황시켰고 나는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았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공간을 가득 채우던 어둠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흔히 볼 수있는 카페의 풍경이 눈에 보였다.
순식간에 완전히 달라져 버린 공간에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카페의 모든 것들이 생생한 현실처럼 느껴졌지만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나 차들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이 기괴한 공간.
후륵.
그 속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한곳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그곳을 돌아보자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페도라를 쓴 남자가 눈을 감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오로지 그만 움직이고 있었고 이 기괴한 공간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그 사내에게 시선을 뗄 수 없을 때.
커피잔을 든 손을 내린 그가 나를 바라보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아까 느꼈던 공포가 다시 한번 나를 들이닥쳤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없는 온통 검은색뿐인 그 눈을 보는 순간 끝없이 깊은 심연이 내 앞에 펼쳐진 것 같았다.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위대한 그 어둠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악랄함에 나는 저절로 몸을 엎드리며 그 어둠을 경배하듯 절을 올린 채 몸을 미친듯이 떨 수 밖에 없었다.
"흠."
짧게 소리를 낸 그가 다시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고 내 영혼 깊은 곳까지 압박하던 그 느낌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내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차원의 미물들보다 뛰어난 건 맞지만 절대 이런 일이 가능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대체 어떻게 너 같은 벌레가 저런 자들을 거느릴 수 있는지 신기하구나."
그의 목소리는 언뜻 들으면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 같았지만 분명히 방금 전 어둠에서 들려오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권속의 의견을 따라서 불러오긴 했다만 내 사랑스런 누이가 저런 초월자를 풀어 놓는 걸 반길 것 같지도 않고말이다. 내가 아무리 보아도 어떻게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군. 한번 너의 입으로 말해보겠나?"
담담히 나에게 묻는 그의 말에 아까와 같은 위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저절로 목소리를 내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관계를 물어보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어서는 것을 허락해주마. 네 앞에 놓인 녀석들과의 관계를 설명해라."
조심히 일어서자 그 남자는 똑같이 눈을 감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와 내 사이에는 월하와 카렌, 고은이가 정신을 잃은 채 눕혀져 있었다.
카렌과 고은이는 멀쩡한 반면에 월하는 정돈되어 있던 머리가 산발이 되고 드레스 곳곳이 구겨져 누군가와 한바탕 싸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꿈틀거렸지만 남자의 커피 마시는 소리가 내 그 분노를 억눌렀다.
"설명해 보거라."
"... 제가 소환한 이들과 사역한 이 입니다."
"호오, 그러냐? 저기 모습이 엉망인 애는 내 힘에 저항하려고 그러길래 좀 거칠게 다루어 주었더니 그만 많이 상해버렸구나. 너의 소환수였다면 내가 사과하마."
그의 그 말이 끝나자 자제하고 있던 분노가 솟구쳐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단순한 소환의 관계가 아니군."
그러자 그 순간 바로 그가 말을 했고 내가 흠칫 놀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가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다른 놈들이었다면 저 정도 가치를 지닌 여성체가 반발한다면 실컷 능욕하거나 어떻게든 자기 권속으로 만들었겠다만은 내 취향도 아닐뿐더러 난 확고한 내 부인이 있어서 말이다. 내 힘만 좀 강하게 준 것이니 그렇게 반응할 필요 없다."
커피를 다시 한모금을 마신 그가 이번엔 커피잔을 내리고 눈을 뜨며 나에게 물었다.
"저 타락한 아이와 괴물의 아이는 너가 말한대로 소환과 사역이 느껴진다. 너 같은 미물이 어떻게 저 둘과 관계를 맺었는지도 궁금하지만 저 아이와는 소환의 기운이 느껴지면서도 소환이 아닌 이상한 관계가 흥미로우니 무슨 관계인지 얼른 말해보거라."
그의 눈이 나를 바라본 순간 아까처럼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은 없었지만 내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그의 뜻이 느껴졌고 나는 분노에 차 있는 내 마음을 다스려 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말했다.
"... 소환을 통로로 써서 저를 만나러 온 뒤 관계가 생겼습니다."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군! 소환을 통로로 써서 관계가 그렇게 보인 거였어. 그런데 저 아이가 왜 그렇게까지 해서 너를 찾은거지?"
"저와 운명이 이어져 저를 찾아왔다고 들었습니다."
"흠?"
그가 뚫어지게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최대한 감내했다.
한참을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운명이 이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기묘한 관계로 보이는 게 이해가 되는군."
그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다 멈추고 말했다.
"너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아나?"
나는 최대한 이 일이 있기 전의 상황과 지금은 떠오르지 않는 알림들을 기억해내며 내가 생각한 상황을 말해 나갔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희가 공략하던 곳이 당신의 것이었고 최선을 다해 공략하지 않는 저희를 보고 다른 일을 시키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훌륭한 추측이구나. 과연 이 차원의 미물들보다는 뛰어난 머리를 가진건가? 몇 가지 고쳐주자면 내가 너희를 보고 부른 게 아니라 내 권속이 너희를 본 것이지. 그리고 내 차원 말고도 수 많은 차원에서 불만이 들어왔는데 마침 시스템이 결정을 내린 게 내 차원이었고."
그가 말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공략하던 던전이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차원들에서 지구에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던전을 만들어낸 존재들이 우리가 공략하는 것에 불만을 갖고 항의를 했다는 것.
"소환수와 사역마만 있었다면 항의를 할 것도 없이 다른 적절한 방법이 쓰여졌겠지만 너와 저 아이의 관계가 분명치 않아 이 상황까지 왔구나."
"저희가 어떤 명령을 따르면 되겠습니까?"
그가 다시 커피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의 차원에 유희를 몇 번 즐긴 적이 있어 네가 알기 쉽게 말해주자면 너를 내가 용사로 소환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내주는 진영을 도와 상대 진영을 죽이면 되는 내용이었지. 그런데 내 힘에 반항까지 할 정도로 '격'에 가까운 초월자가 있는데 앙탈을 부려대는 내 누이가 허락할 것 같지는 않군."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모든곳이 멈춰있던 카페에 문이 열리더니 새하얀 정장을 입고 흰색 면사포를 쓴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오라버니!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이런. 눈치도 빠르군."
그는 그녀가 들어오자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의자에 허리를 기댔고 여자는 그의 앞에까지 다가와 분노한 듯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런 초월자를 소환으로 부르겠다니! 제가 오라버니의 이야기를 따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동생아. 나는 초월자를 소환으로 부른 게 아니다. 저기 서 있는 미물을 부른 것이지."
".....네?"
그의 말에 당황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고 그에게서 느껴졌던 짙은 어둠과 정반대의 환한 빛이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들어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그 시선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저런 벌레를요?"
"그래. 너가 생각하는 저 아이들은 전부 저 미물이 소환한 것이다."
"네?!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런....."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나와기절한 그녀들을 바라보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하하! 나도 흥미로워 이런 자리까지 마련한거다."
".... 그런데 가장 중요한 초월자는 소환의 관계도 아니잖아요."
"운명이 이어졌다고 하더군."
자신있게 들어와서 그에게 분노했지만 그의 일리 있는 느긋한 말들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한 채 몸을 떨기만 하는 그녀.
그녀가 그러다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에잇! 그럼 그냥 오라버니가 다 지워버리세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시스템의 인도를 따라 온존재들을 내가 지우라고? 나는 그런 인과를 감당하기는 싫구나."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커진 그녀가 무언가 다시 말을 하려 할 때 그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저 초월자에게 제약을 걸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