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6. '소환' 하다
"내가 쟤한테 소환당한거라고?"
"그래. 이곳에서 너가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둔 거겠지."
"그럼 내가 쟤의 명령을 따라야 된다는 건가?"
"소환수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거지. 물론 그 관계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건 아니고 이곳을 공략할 때까지. 그래서 문제는 지금 너가 위해를 가하지 못한다는 건데..."
월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신의 제약이 나한테 걸린 이상 이 차원에서도 내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어. 일단 쟤한테 피해를 입히려 하지 말고 만져보라고만 해봐."
월하가 카렌을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월하의 말 그대로 카렌에게 명령했다.
카렌은 아직도 눈이 기절한 여자를 향한 살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내가 말하자 이를 꽉 깨물며 촉수들을 움직였고 촉수들이 그녀를 거칠게 만지기 시작했다.
"흐음.... 저 정도는 위해가 아니라는 건데... 그럼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거려나? 대상을 복종시키는 마법은 다룰 줄 아니?"
"네. 몇 가지 알고 있는 주문이 있습니다."
"한번 써볼래?"
카렌이 월하의 말을 듣고 나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월하가 하는 말은 내가 하는 말이랑 똑같이 생각하면 돼. 전부 나한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어. 내 말과 월하의 말이 다를 때만 내 말을 우선시 하면 될 것 같아. 이제부터 그렇게 해줄래?"
"알겠습니다."
카렌의 주문이 완성되고 검은 빛이 기절한 여자에게 쏘아졌지만 이번에도 아까 전처럼 촉수들이 쏘아졌을 때와 같이 끝까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빛이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크윽. 앞에 벽이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주문을 전진시킬 수가 없습니다."
"주문을 취소해. 저건 내가 힘을 쓴다고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야, 최면이나 매혹하는 마법도 써볼래?"
카렌이 월하가 말하는 대로 몇차례 빛을 쏘아 보냈지만 번번이 앞에서 가로막혔고 월하가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상태이상의 마법은 전부 위해로 취급하는 소환식인건가? 다른 방법을 선택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운데..."
고민을 하던 월하에게 카렌이 조용히 말했다.
"고귀하신 분이시여. 저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월하가 카렌의 말을 듣고 카렌에게 말을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수많은 주문을 알고 있지만 제 힘의 근본이자 가장 강력한 주문은 촉수들을 이용한 주문입니다. 위해가불가능하다면... 촉수들이 만지는 것은 가능하니 제 촉수에서 최음액을 분비시켜 보는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런 방법도 가능할 수도 있겠어. 마법이 아니라 단순히 기분 좋게 하는 정도라면 반응을 안 할 것 같은데? 그럼 온몸이 쾌락에 절여질 정도로 조절해서 한번 해볼래?"
"네. 맡겨만 주십시오."
이윽고 촉수들이 만지는 방식이 변화했다.
기절해있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듯 만지며 촉수들이 그녀의 성감대쪽으로 꿈틀대기 시작했고 촉수에서 액체가 분비되어 그녀의 살과 촉수가 만나는 끈적한 소리가 들려와 거칠기만 했던 그 광경이 매우 음란하게 변해 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월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문제가 이곳뿐만이 아니야."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월하의 태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렇게 차원에 던전을 제공한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행동할 정도라면 그 차원을 관리하는 신격도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을 수도 있어."
"뭐? 그럼 그 '목소리'가?"
"그래. 최대한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혹시 모를 상황을 발생시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우리 존재를 눈치챘을 수도 있다는 거지. 우리가 돌아오는 마법을 발동할 때 '목소리'가 무언가를 했다면 이미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위화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젠장.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내가 너무 성급했어. 던전조차도 이런 신격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완전히 최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있는 이 차원은 던전 안으로 취급되어 멸망의 시계와 던전 활성화의 시계가 똑같이 흘러가는 상황이기에 가능한 빨리공략을 완료해야 했다.
그러나 공략을 완료하고 지구로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목소리'가 우리가 시간을 되돌아오기 전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였다면 그 위화감을 눈치채고 우리에게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완벽히 외통수에 몰린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될지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침묵이 길어졌고 촉수가 몸을 만지는 질척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일단 소환 먼저 해보자."
침묵을 깬건 월하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너의 그 말도 안되는 소환이 어떤 걸 우리에게 가져올지 아직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월하가 카렌에게 눈짓했다.
“저 여자는 깨어나지 않게 최음액이랑 수면액까지 적절하게섞어서 일이 끝날 때 까지는 깨어나지 않게 해줘.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소환부터 해보자. 소환수만 나오지 않아야 할텐데... 강력한 소환수가 나오면 신격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변수도 더 적어질 테고.."
월하의 말을 듣고 우리가 이곳으로 이동해야 했던 원흉인 랜덤 소환을 선택했다.
'후... 이 한번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던전을 공략했더니 돌아오는 상황이 이거란 거지? 제발 좋은 것 좀 나와라...'
룰렛이 떠오르고 내 눈앞에 나타난 알림창엔.
[랜덤 소환의 대상 지정이 끝났습니다. 대상: 소환수]
[소환수 소환이 시작됩니다.]
"씨발."
"뭐야, 왜 그래? 설마? 아..."
나를 보고 당황한 월하였지만 내 발 앞에 새겨지는 마법진을 보고 탄식을 흘렸다.
나는 우리가 생각했던 최악의 수가 벌어졌다는 것에 분노할 때 그런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배신하듯 마법진은 순식간에 완성되어졌다.
이제 곧 마법진에서 어떤 빛이 터져나올지 생각하며 마법진을 바라보았지만 예전과 다르게 빛은 터져나오지 않았고 단순한 연기만이 흘러나왔다.
"어?"
지금까지 와는 완전히 다른 소환 방식에 당황했지만 어느새 연기 속 마법진 중앙에 형체가 생겨나 있었고 연기가 흩어지자 그곳에는 옛날 중국식의 하늘색 비단 옷을 입은 여자가 검은색 학우선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녀에게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목소리.
“거룩한 소환 의식에 따라 소환된 자. 주인을 뵙습니다.”
그녀가 정중히 예를 올리자 눈 앞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C급 ‘삼분(三分)을 끝낸 수렴(垂簾)속 황(鳳)’ 이 소환되었습니다!]
[소환수의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Y/N ]
"뭐야 이건 또?"
처음 겪어보는, 빛이 나오지 않는 소환과 처음 보는 C급의 소환수.
그리고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는 알림까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소환에 당황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후... 1800년 동안이나 잘 버텨 왔는데 오늘로 끝인가 보네요."
담담하게 말을 하는 그녀.
"일단 제가 어떤 분께 소환되었고 어떤 상황에서 저를 소환하신건지 이유를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그녀가 학우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고 분명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인 것 같다는느낌을 주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친 순간 무언가를 초월한 듯한 그녀의 눈에 나는 압도되었다.
그녀의 그 눈빛에 압도되어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옆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아 주었다.
"뭐지? 너가 지금까지 소환한 그 어떤 것보다 '격'이 가장 낮아보이는데? 그런데 '격'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무언가를 품은 듯한 이 느낌은.... 너가 당황할만도 해."
학우선을 든 채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를 관찰하던 월하가 말을 이었다.
"이곳의 신격들에게서도 간섭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데..... '격'의 고하만 중요하다는건가? 이 정도의 '격'을 가진 존재의 소환은 괜찮고? 너랑도 한 단계 정도의 차이만 나는 '격'이니까...... 그런데 저 느낌은 도대체 뭐지?"
월하가 그녀에게 입을 열어 대답을 하라는 듯 강하게 노려봤지만 그녀는 월하의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이곳을 둘러보기만 했다.
천천히 이곳을 전부 둘러본 그녀가 다시 월하를 바라보았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시간이 흐를 때 손에 든 학우선을 살랑살랑 흔들며 그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
"흥미롭군요. 초월자가 제약이 걸려 있는 상태라... 여기 있는 강자들의 중심은 제 소환사인 주인님이라니.... 오랫동안 버텨온 보람인 걸까요? 확실히 재미가 있겠네요."
한번 주위를 둘러보는것만으로 상황을 파악한 듯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그녀를 보고 월하가 놀라며 말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지? 너 정도의 '격'은 절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
월하의 물음에도 다시 입을 다문채 부채만 살랑이는 그녀.
"당장 정보를 열람해봐."
월하가 고개를 돌려 내게 말하자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소환수의 정보인 데다가월하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이기에 기대에 가득 차 열람을 선택한 순간.
[이 소환수는 정보의 열람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소환수가 열람을 거부하였습니다.]
“이건 또 뭐야,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