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1. 지친 악녀 =========================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 - 제 1장 : 봄》
윤이설은 내 전생의 이름이다.
가족 구성은 엄마와 나, 단 둘.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가 없다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고,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며 세상을 사랑하는 법보다 증오하는 법을 먼저 배웠다. 세상은 잿빛이었고, 외로웠으며, 성가셨다. 그래서 무가치하고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그저 홀로 웅크린 채 흘려보내며 살았다.
조금 일찍 지나간 사춘기의 끝물 무렵,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원고 교정 아르바이트를 하며 악착같이 일해 방 월세와 생활비만 빠듯하게 벌던 엄마가 쓰러졌다. 엄마는 나 하나만큼은 여타 아이들처럼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갖은 애를 다 쓰다가 정작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을 몰랐다. 병원에 갔지만 가망이 없다고 했다. 엄마는 이틀 후 세상을 떠났다.
나는 엄마가 죽고 나서야 진짜 혼자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태껏 피해의식에 젖어 자학하고 있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너무 늦은 자각이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내 세계의 마지막 보루를 잃은 나는, 끝내 진정으로 무가치해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사라진 것은 윤이설이라는 이름에 국한된다는 사실이다.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그냥 눈 떠보니 낯선 곳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읽었던 소설 '꽃물 든 하늘'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엄마가 죽던 날 아침, 정부에서 지원해 줬다던 컴퓨터의 화면에 덩그러니 띄워진 웹소설이었다. 나는 엄마가 새벽까지 그 소설을 읽다가 깜박하고 컴퓨터를 끄는 걸 잊은 채 급히 출근하러 나갔을 거라고 추측했다.
가끔 새벽에 깨어날 때 살핀 엄마는 열 번 중에 여섯 번 정도는 깨어있었다. 열심히 타자를 치고 있던 엄마는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깨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어서 다시 자라고 하고는 했다. 처음 몇 번은 이 늦은 밤에 엄마야말로 안 자고 뭐 하냐고 물어봤는데, 항상 교정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대답만이 들려와서 조금은 울적해지기도 했었다. 잠까지 물리쳐가며 일을 해야 할 만큼 모녀의 생활이 궁핍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게 되니까. 그런데 그 날 아침에 발견한 켜져있는 컴퓨터 화면에는 교정에 필요할 법한 페이지가 아니라 웹소설 페이지가 떠 있어서 묘하게 안도했던 것 같다. 그 날 저녁 엄마의 비보를 접하기 전까지는, 작은 집 안에 갇혀 겨울 방학을 낭비하며 우울해하던 지난 며칠과 달리 그 소설을 읽으며 마음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정도로.
그 웹소설은 정말 재미있었다. 엄마의 의도치 않은 소개로 인해 접하게 된 소설 '꽃물 든 하늘'은 당차고 생존력 높은 여주인공이 가문의 몰락 후 먼 친척 격인 세력가의 양녀가 되고 상류 사회에 입성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주인공의 활약상과 그녀에게 빠져 사랑을 고백하는 남주인공들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소설 후반에서야 처형으로 끝을 맺은 악녀 라니아 또한 내게 만만찮은 흥미를 안겨주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라니아는 작중 절대악에 가까운 인물로서 악랄한 성품과 거침없는 패악질로 여주인공을 시시각각 압박하는데 아주 도가 튼, 제 역할에 충실한 '악녀'였다. 왜인지 여주인공에게 딱히 몰입해 읽지 않았던 나는 그녀의 오만과 잔혹성에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다. 한국에서 살았을 적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수없이, 그리고 수많은 방법으로 죽이는 상상을 하곤 했던 사람으로서.
그래서인지 나는 라니아가 되었다.
참, 그러고 보니 그것도 벌써 19년 된 이야기군.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 현재 열아홉 살이니까. 열아홉. 전생의 엄마가 전생의 윤이설을 낳은 나이이자, '그 친구'가 떠난 나이.
지난 십구 년 동안 나는 수많은 일을 겪었다. 대부분은 소설에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은 악녀의 과거였다. 안정과 불안정이라는 양 극단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새로운 삶.
나는 어느새 지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가씨,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습니다."
멍하니 빛바랜 생각에 잠겨있다 하녀의 알림에 퍼뜩 깨어났다.
"초대장? '카리스티아' 초대는 이미 받은 걸로 아는데."
아침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으며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안착한 금색 초대장은 하녀가 이미 뜯어 둔 상태였다. 내용물을 꺼내 펼친 나는 지독히 무표정해졌다.
- 오랜만에 에빌 대공녀를 만나고 싶어 이리 초대장을 보내노라. 황태손의 궁에 방문하여 짐과 황태손의 무료함을 달래주길 바라는 바이다.
"하다하다 이젠 조부의 권력까지 사용하는 건가. 망할 황태손."
딱 봐도 현 황제 오벨 3세의 초대를 빙자한 황태손의 부름이다. 왜냐하면 작금의 황제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니까. 정확한 병명은 공식 발표된 바 없지만 세간에서는 치매라고들 하던데. 그런 양반이 날 무슨 수로 편지까지 써서 부르겠어. 게다가 하필 오늘이라니. 아주 대놓고 농락하는군.
아무튼 내가 거절하기 어렵게 손을 써 놨다. 이 자리에 없는 실질적 발신인을 향해 속으로 욕설을 날리며 종이를 북 찢어 하녀에게 다시 건넸다. 기껏 먹은 아침이 얹힐 것 같다. 하녀는 말없이, 그리고 익숙하게 종이 쪼가리를 벽난로에 던져넣었다. 내가 손수 찢은 편지나 초대장은 항상 그런 식의 최후를 맞곤 한다는 걸 잘 아는 고참이라 눈치가 빨랐다.
"언니, 무슨 일인데 그래?"
푸딩을 깔끔히 포기한 후 앞에 앉은 꼬맹이의 물음에 답했다.
"황태손이 조잡한 수로 날 불러냈어. 그렇게나 날 만나고 싶다고 하니, 가 줘야 예의겠지."
더이상 못 참겠다. 어차피 언제까지고 없는 듯 숨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움직이기로 했다.
"화, 황태손 저하께서?"
저를 낳아준 어머니와 똑같이 잿빛이 섞여들어간 분홍 머리를 가진 소녀, 셀리아가 눈을 뎅그렇게 뜨고 반문했다. 이 귀엽게 생긴 애는 내 여동생이다. 라니아의 기가 하도 세서 그런지 얘는 좀 얌전한 편이었다. 전생에는 없었던 동생이라는 존재가 꽤 신선해서 어릴 적부터 가까이 두고 있다. 일단 자매인 만큼 가문의 일에 있어서는 운명공동체고, 고로 하나만 죽고 하나는 살아남아 고통받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응. 혹시 무슨 문제라도?"
"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신기해서."
"뭐가?"
"황태손 저하께서는 타인에게 차갑고 무관심하기로 유명하시다면서? 그런 분께서 언니를 계략까지 짜서 부른다니."
아. 얘가 어려서 나와 그의 관계를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잊었다. 하기사 사 년 전에 이 애는 기껏해야 아홉 살이었으니까.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가, 물 흐르듯 대꾸했다. 대화에 대한 집중은 이미 잃어버린 상태에서 적당히 자연스럽게 둘러댄 것이었다.
"차갑고 냉정한 인간이니 원하는 게 있으면 어떻게든 얻어야 성에 차는 거지. 아무래도 내가 쥔 패 중에 그가 탐내는 것이 있는 모양이야."
라인하르트 엔리케 할레시온. 할레시온 제국의 황태손. 그는 '꽃물 든 하늘'의 남주인공이고, 소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차가운 황궁 남자다.
한때, 나는 여주인공이 나타나기 전에 그를 사로잡아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허무하게 끝난 전생도 모자라 이번 생까지 파멸이 예정된 여자가 되기는 싫었으니까. 그래서 그를 비롯한 어린 고위 귀족, 황족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았고 몇몇과는 깊게 친해졌다.
그게 지옥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인 줄 모르고.
4년 전, 우리의 관계가 파탄난 날. 나는 라인하르트에게서 등을 돌렸으나.
그는 아직까지 미련이 남은 듯 했다. 하잘 것 없는 과거의 친구 따위에게 뒤늦은 변명이라도 늘어놓고 싶은 건가.
나는 지난 사 년간 그의 편지와 초대장을 고스란히 받아보며 차오르는 화를 억눌러야만 했고, 동시에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그것들을 전부 갈가리 찢어 불태웠다. 그런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 인생은 한층 더 성가셔질 게 분명하다. 아예 이번 기회에 아작을 내고 오는 편이 좋겠어.
"역시 무서운 분이야......언니, 조심해야 해. 알았지?"
셀리아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날 쳐다보길래 입가를 끌어올려 옅게나마 웃어주었다.
"그래. 걱정 안해도 괜찮으니 너는 집에서 편히 쉬고 있어."
아침 식사를 그대로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전속 하녀 마리가 조용히 뒤를 따르다 지나가는 길에 치장 담당 하녀들의 무리를 발견하고 호들갑스런 손짓으로 불러 끌고 왔다. 마리도 내 곁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눈치엔 뼈가 굵은 아이였다. 주인의 입궁을 몇 마디 말만으로 단박에 알아듣고 준비하는 걸 보면.
계단을 올라 3층으로 들어섰다. 중앙에 가장 크고 화려한 방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이고, 그 양쪽으로 나와 셀리아의 방이 있다. 고풍스러운 양식의 장식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복도를 지나 내 휴식처에 다다르자 로즈마리 향이 은은하게 코 끝을 간질였다. 향초 바꿨나. 누구 소행인지는 몰라도 꽤 당돌한 선택이다.
그래도 황궁에 가는 것이니 무슨 옷을 입고 가야 격식에 맞을지 나름 고민하며 하녀가 건네준 편지지에 몇 글자를 휘갈겨 썼다. 라인하르트에게 보내는 답신이었다.
- 오후 4시.
노리고 선정한 시각이었다. 노리고 한 선택이었다는 걸 그가 알지는 의문이지만. 종이를 봉투에 넣고 마리에게 건넸다.
"황제의 전령이 아니라 황태손의 전령에게 전해야 한다."
"예, 아가씨."
마리는 공손하게 인사하고 편지를 보내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른 하녀들은 화장 도구를 가져오고 드레스룸의 문을 여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외출 장소가 황궁이라고 하자 날 꾸미는 손놀림은 다른 때보다 더 세심해졌다. 하기사 꼭 가야 할 때가 아니면 일체 걸음하지 않았던 장소니까. 이번 방문도 근 일 년 만인가. 가진 신분 치고는 이례적인 행보였다.
현 황제 오벨 3세를 친조부로, 2황자였으나 기반이 약했던 탓에 4년 전 황위 다툼에서 물러나 대공 지위를 하사받고 방계 황가 '루 할레시온'으로 독립해 나온 카시우스 마일 루 할레시온을 부친으로 둔 라니아는 황위계승권을 가진 어엿한 황족이다. 다만 아버지가 황자 칭호를 내려놓고 나온 탓에 계승 순위가 무의미할 만큼 저 멀리 밀려났고, 피 터지는 왕관 쟁탈전을 피해 조용히 웅크리고 사느라 일반적인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세력으로 전락한 방계의 장녀라는 게 결점이라면 결점이겠지만.
드레스룸에서 옷을 골라 갈아입고 나서는 얼굴 쪽으로 하녀들의 집중이 옮겨갔다.
"분을 바르겠습니다. 눈을 감아 주십시오."
"진하지 않게 해."
이 세계의 화장품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니라 짙은 화장은 꺼렸다. 물론 이를 알고 있을 법한 하녀가 내 담당인지라 크게 걱정은 않고 눈을 감았다. 로즈마리 향을 음미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내다, 화장이 끝났다는 말에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단정하게 틀어올린 백금발 아래 고요히 깔린 붉은빛 눈이 거울에 비쳤다. 타오르는 태양의 대명사인 붉은색이건만 정작 느껴지는 것은 한기 뿐이더라. 온기를 도려낸 양 싸하게 식은 게, 내가 봐도 한성깔 하게 생겼다. 태생부터 악녀라서 그런가.
가만 뜯어보니 화장이며 꾸밈이 전체적으로 잘 먹었다. 이만하면 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이자 하녀가 내 얼굴 앞에 대령했던 거울을 도로 제자리에 갖다 두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시선이 무심결에 뒤쫓아 흘렀다. 저 거울은 오래전 내 친구였던 사람이 선물해 준 물건이다. 그가 호의로 내게 주었던 것들을 죄다 버릴 때 꽤 쓸 만한 물건이라는 이유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래봬도 대단한 거울이지.
나는 지금 저것을 선물한 자를 만나러 간다.
점심은 간단하게 때우고 마차에 올랐다. 황궁까지는 대공가의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정문 앞, 일직선으로 펼쳐진 대로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행렬로 꽉 막혀 있었다.
맞다. 오늘부터 귀족원 전체 소집이 있댔지. 일 년에 한 번 황실은 귀족 세력의 현황을 점검하고 감시하기 위해 소집령을 내리곤 했다. 얼마 전 내가 받은 '카리스티아' 초대장은 소집 일정이 마무리 된 후 이어서 열리는 제국 최대의 대연회에 참석하라는 강제였고. 카리스티아는 제국의 귀족원과 황족들까지 전부 모여야 하기 때문에 소집령 뒤에 붙여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들을 배려한 것이다.
아무리 황족인 나라고 해도 섣불리 비키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내로라하는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들이 대부분이라 거리 통과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라인하르트의 부름에 고분고분 응하는 것이 아니꼬워 일부러 일찍 출발했건만. 뜻하지 않게 정시에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창문 밖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광경이 연극처럼 지나갔다. 이 많은 사람들이 죄다 한 사람의 손 끝에서 탄생한 가공의 생명체라는 것을 자각할 때면 나는 곧잘 현실감을 잃어버리곤 했다. 내가 이 만들어진 세계의 주연급 인물이라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살아보겠답시고 시간의 흐름에 힘입어 간신히 라니아를 나 자신으로, 나 자신을 소설 속 인물로 정의내렸다. 하지만 도중에 일이 터지는 바람에 두려움만 가중되어 버렸다. 이곳은 전생의 세상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가혹한 세상이었어. 특히나 신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자리한 이들에게.
힘을 뺀 미소가 입가를 흐리게 덮을 무렵이었다.
"어이! 에빌!"
견고해 보이는 짙푸른색 마차가 극심한 정체를 용케 뚫고 내 마차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창문이 열렸다. 누군가 안에서 손을 흔들며 부르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샤카르 멘데로프 백작 영식이군. 아버지인 백작과 함께 탄 건 아닌지 창문 안으로 얼핏 보이는 옷차림이 영 껄렁했다. 평소 하던대로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마차 안에서 차림새를 대강 정돈할 셈인가 보다.
결국 다시 만나고야 말았다. 나는 오랜만에 재회한 그를 묘한 감상에 잠겨 살폈다. 여타 귀족과 달리 마냥 희지만은 않은 피부와, 새벽 하늘 같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금안의 남자는 반항적인 듯 세련된 희한한 인상이었다. 딱 달라붙는 검은 바지에 헐렁한 흰 셔츠, 오른 손목에 자리잡은 널널하고 얇은 링 모양의 금팔찌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그 때'까지만 해도 한 개였는데 오늘은 두 개 차고 왔네. 왼쪽 귀에는 길쭉한 마름모 모양 루비 귀걸이도 있다.
전체적으로 어디서 몇 년 유흥하다 돌아온 돈 많은 탕아 같았다. 어쨌거나 저 독보적인 존재감이 어딜 가나 마주할 수 있는 종류는 절대 아니지. 도도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오랜만이에요, 샤카르."
그러자 샤카르가 창문 밖으로 튀어나올 듯 몸을 반쯤 내밀고 유난스럽게 반응했다.
"허어? 웬 존댓말? 분명 마지막에 헤어질 때 다음에 만나면 말 놓기로 했잖아, 에빌."
"그러는 당신도 잊었잖아요. 날 미들네임으로 부르지 말라고 경고했던 걸. 그리고 난 말 놓기로 한 적 없어요. 당신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내가 반박할 기회를 박탈해 버린 거지."
"에이, 까다롭기는."
이 인간이 정말. 눈썹을 꿈틀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샤카르가 내 표정을 살피곤 큼큼 헛기침을 했다. 몸을 마차 안으로 쏙 집어넣더니 뒤늦게 대귀족의 일원인 척 목소리를 과장되게 까는 꼴이 영 우스꽝스러워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뭐, 아무튼. 넌 무려 루 할레시온 가의 후계자이니 우리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내린 소집령 때문에 황궁에 가는 길은 아닐 테고. 무슨 용건으로 여기서 무한 대기 중이셔?"
"그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손자가 4년 동안 줄기차게 불러대서요. 결국 굴복하고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세상 만사 귀찮은 얼굴을 하고 담담히 대답했다. 때마침 마차가 약간 앞으로 움직여서 샤카르와는 잠시 시야를 공유하지 못하게 된 순간이었다.
"뭐?"
낯빛을 볼 순 없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낮아진 음성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샤카르는 지금 내 처사에 대해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았다. 반 박자 빠르게 내뱉은 물음만 해도 그랬다.
"손자라는 게 설마 황태손은 아니겠지."
"그가 아니면 누가 감히 나를 오라가라 할까요?"
"와. 대체 얼마나 귀찮게 굴었길래 네가 그 작자를 개인면담하러 직접 방문까지 해? 웬만해선 발 끝도 까딱 안하고 칩거하는 사람이."
그 때 샤카르의 마차가 솜씨 좋게 치고 나왔고, 나는 그와 다시 마주보게 되었다.
"글쎄요. 이런 것까지 공유해야 할 정당성을 찾지 못하겠네요. 우리가 사적인 요소를 서로에게 보고할 만큼 친밀한 사이였던가요?"
대답하기 싫은 항목에 속하는지라 빙글 돌려 내쳤다, 라고 말하면 핑계가 될 테지. 사실 황태손 때문에 잔뜩 날이 서 있어서 아무데나 화풀이 좀 해 봤다. 그 '아무데나'에 운 없는 동업자가 당첨된 거고. 좀 미안하군.
샤카르는 여유롭게 미소하며 창틀에 팔을 교차해 올려 그 위에 턱을 댔다. 그 역시 정통성 넘치는 대귀족 혈계의 한 자리를 차지한 자. 하는 짓은 방정맞다지만 처세의 기본도 모르고 민감한 요소에 대한 궁금증을 성급히 드러내진 않는다. 일단은 포장하고 겉돌리며 자신이 파고들어도 괜찮을지 간 보는 거지. 내가 그에게 있어서 아무렇게나 대해도 무리 없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알 테니.
"무슨 서운하게 그런 소리를. 우린 꽤 오랜 동업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야?"
그리고 그는 이 주제를 보류하기로 결정내렸다. 능청스런 대꾸와 이에 적절히 반응한 내 덕에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흘렀다.
"동업자라고 친구는 아니죠."
"그리고 방금 그건 더더욱 서운한 소리였어. 너무하잖아, 라니아."
"당신의 감상은 별로 궁금하지가 않아요."
실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멀고 먼 저세상에서 쓰던 투를 여기서 쓰긴 좀 그렇지. 샤카르는 사뭇 냉담한 대꾸에 뭐라 투덜대려는 눈치였으나 타이밍 좋게 길이 뚫리고 중앙에 있던 내 마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면서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창문을 휘감아 부는 산들바람을 맞이하며 흘끔 뒤편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목적지가 같으니 오다가다 다시 만나게 되겠지. 영양가 없는 재회쯤이야 그 때로 미뤄도 늦지 않다.
얼마간 이동한 마차는 거대하고 위압감 넘치는 황궁 정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금속성 은색의 갑옷을 전신에 둘러입은 근위병이 신분과 방문 목적을 물었다. 나는 열린 창문을 통해 직접 얼굴을 내보였다.
"방문자,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 방문 목적은."
아, 잠깐만. 방문 허가서가 되어줄 초대장을 찢어버렸잖아? 이런 덜떨어진 처사가 다 있나. 나답지 않게 실수했다. 입술을 매만지다 라니아가 가진 다른 방문 자격을 하나 찾아냈다.
"황실 종친으로서 계보록 신규 작성을 위해,"
"내가 불렀다. 통과시켜라."
말을 꺼내다 말고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는 거지? 어찌 대처할지에 관해 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입을 꾹 다물고 조금쯤 어둡게 가라앉은 낯빛의 남자가 마차 창문 쪽으로 걸어와 고개를 들었다. 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무방비하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대제국 할레시온의 황위 계승 서열 2위, 황태손 라인하르트 엔리케 할레시온의 서늘한 적색 눈이 나를 뚫어버릴 듯 직시했다.
============================ 작품 후기 ============================
새해 첫 날, 시작합니다.
+밑에는 가끔 후기에 들어갈 비하인드 또는 설정풀이입니다
《오늘의 악.살.다》
1. 1화 시점의 날짜는 대륙력 1061년 11월 7일이다.
2. 연재시작 날짜는 2017년 1월 1일 1시 1분이다.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