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2 1. 지친 악녀 =========================
하마터면 그대로 얼어붙을 뻔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마주친 적안에 이전과는 달리 고요하게 도사린 비정함 때문이었다. 아니, 위압감이라 해야 더 옳은 표현인가? 하여튼 어렸을 적 대하던 그 분위기와는 달랐다.
말이야 사 년 동안 멀리했다지, 사실 둘 다 지위가 지위인지라 사교계나 황실 행사에서 이래저래 종종 만나긴 했다만. 그럴 적마다 열에 여덟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내가 먼저 자리를 피하거나 무시하느라 제대로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낯설었다. 참고로 열에 나머지 둘은 라인하르트가 지나가듯 말을 건네고, 내가 마지못해 간단히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끝내 당혹감을 숨기는 데 얼마간 실패한 나는 빈틈없는 미소를 띄워 그것을 애써 감췄다. 라인하르트가 그걸 잡아채지 못할 리 없겠지만. 체면상, 그리고 현재 위치한 장소의 공적인 특성상 겉치레는 해야 하잖아? 썰물 빠져나가듯 자연스레, 그러나 신속하게 다시금 웃음기를 거두며 까딱 고개를 숙였다.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 황태손 저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례했다고 여긴 걸까.
"대공녀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부디 저하께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미처 자각하지 못했는데, 라인하르트 옆에 그의 보좌관이자 호위인 프리드리히가 엷은 웃음을 띄고 서 있었다.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고지식한 학자풍의 생김새와 행동거지를 가진 주제에 비도飛刀를 다루는 기술이 할레시온에서 따를 자가 없다지. 물론 원작 설정의 얘기다. 나는 저 자와는 친분이 없기에 진짜 그런지는 알 길이 전무하다.
사뭇 눈에 띄는 설정을 부여받은 프리드리히는 작중 비중이 큰 첫 번째 서브 남주인공이다. 그러나 라니아가 어렸을 적, 그러니까 내가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아직 뭘 모를 당시 주고받은 친애와, 원작에서 가장 큰 스토리 전개 능력을 갖춘 남주인공을 필요로 했던 내 상황으로 인해 깊게 연관되고 만 라인하르트와는 달리 프리드리히와는 아직 이렇다 할 접점을 만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가장 위험한 남자거든. 나는 그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아는 과거의 독자로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보고 내리라는 말씀이신가요."
단조로운 어조로 물음인 듯 아닌 듯 조곤히 묻자 프리드리히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고 서글서글 웃는 얼굴로 못박았다.
"황태손 저하께서는 대공녀님과 함께 걸어서 휠리안 궁으로 가실 겁니다."
닥치고 내리라, 이 소리군. 본래 황족은 마차를 탄 채로 궁성의 정문을 통과할 수 있건만. 반쪽짜리 황족이라 빙 돌려 조롱하는 건가. 기가 차 비아냥거리는 형식의 숨을 뱉으려다 참고 얌전히 문을 열었다. 여기는 내 방패막이가 되어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제국의 심장, 황궁이다.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됐다.
휠리안 궁은 라인하르트 소유의 거주 용도 건물이다. 황궁의 동편 안쪽 깊숙히 자리잡아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일품이라고 옛날에 '그 친구'가 칭찬했던 것이 떠오른다. 거기서 여기까지는 한참 걸어야 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인지.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앞에는 라인하르트가 내민 손이 있었고, 불행하게도 나는 나 하는 짓을 끝까지 지켜볼 셈인 프리드리히와 성문 주변에 그득한 권력자들의 스쳐가는 시선 틈바구니에서 도저히 선택지를 찾을 수 없었다.
"여전히 변함없는 친절이십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으며 능숙하게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라인하르트는 이후 별다른 말 없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손을 놓고 열린 문을 지나 걸어갔다. 프리드리히는 속 모를 눈을 하고 나를 지켜보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따라왔다. 그 와중에 잠깐 고개를 돌려 여전히 줄을 서서 출입 수속을 밟고 있는 마차들을 스치듯 슥 둘러살피고는 평이한 어조로 참석자 명단을 줄줄 읊었다.
"저하. 멘데로프 백작가에서 이번에 샤카르 영식을 참석시켰습니다. 히엘로 공작가에서는 당연히 유일한 구성원인 히엘로 공작, 르웰린 후작가는 저번과 같이 에단 영식입니다."
아까부터 보고 삼아 읊어대고 있었던 것인지 몇 가문 언급하지 않아 그의 말은 끝이 났다. 그나저나 에단 르웰린이라는 이름은 또 오랜만이네. 그는 작중 두 번째 서브 남주인공이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예쁜 분홍색 표지의 공책을 떠올렸다. 그건 소설 내용을 여기서 계속 살다보면 잊을 것 같아 글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정리해 둔 공책이었다. 거기에 적어둔 에단 르웰린의 키워드는, 순박한 시골 청년.
진짜 시골에 박혀 사는 남자는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에단은 온통 비상한 머리를 가진 야심가로 가득한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거의 마지막 남은 희귀종인데, 여자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히고 활자에 적힌 모든 이상적인 것들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함을 지녔다. 여주인공 아이린이 그와 친해지는 과정부터 꽤나 애를 먹어야 했던 이유다. 그래도 우직한 호위무사 같은 매력이 은근히 돋보였었지.
한때 그와도 모임을 통해 교류한 적 있다만 지금은 아니다. 내 유년의 친교 수단이 되어주었던 그 모임은 빌어먹을 왕관 쟁탈전이 산산히 깨부숴 버렸다.
"스카일러 후작가는, 올해 어떤 영식이 참석하지?"
시선을 정면에 그대로 둔 채 뒤로 던진 라인하르트의 질문에 프리드리히 스카일러의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게 내려갔다.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그는 제 보좌관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번 소집령에 참석해야 할 필수 인원은 각 가문의 가주, 그리고 가문에서 가장 유망한 자 또는 차기 가주 후계자이다. 둘째로 태어나 형의 그늘에 가려져 살아온 후작 영식인 프리드리히가 이걸 노리지 않을 리가 없는데.
문제는 소설 속 프리드리히가 처음으로 대표로 뽑혀 이 소집령에 참가하는 해는 내년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 온갖 쓰레기짓을 해서. 고로 올해는 아니다.
프리드리히가 소리 없이 웃음지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에셀레드 영식이 참석합니다."
"그렇군."
에셀레드는 프리드리히의 친형이자 후계자로 정해진 인물이었다. 긴장이 느껴지는 가운데 라인하르트만이 태평하게 걸음을 재개했다. 나는 녹음진 색상의 치맛자락을 두 손에 가볍게 쥐고서 관찰하듯 그를 훑었다. 신임하는 인재라며 특별히 차출해 곁에 둔 것치고 썩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는 건가.
그나저나 프리드리히가 더이상 쫓아오질 않는다. 설마 아까 그 대화 때문에 빈정 상해서? 나는 한층 오묘해졌다.
우리는 침묵을 밟고 조금 걸었다. 봄의 정경이 대체로 푸근하고 밝은 것에 비해 늦가을은 어쩐지 묵직하고 느긋한 분위기가 있었다. 마른 붉음이 땅에 내려앉아 밟을 때마다 부스러졌다. 바람에 갈대가 부스스 떨었다.
그는 휠리안 궁의 뒤편에 마련된 정원길에서 멈추어 뒤돌았다. 궁 안보다는 탁 트인 이 곳이 낫다 판단한 듯하다.
"라니아, 네가 사 년만에 처음으로 답장을 보낸 걸 알고 있나 모르겠다."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어투에 감정이 빠진 채 내용으로만 원망을 담고 있었다. 원망. 원망이라고. 네가 감히?
감정이 죽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건조하기만 한 안색의 옛 친구에게, 내가 무어라 답해야 격한 분노를 선물해 줄 수 있을까. 우선은 조신한 척 시선을 깔았다.
"알고 있습니다."
"주위의 수행원은 모두 물려 두었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모종의 어떤 것을 억지로 지워낸 음성이었다. 시선을 도로 들자 경직된 뺨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이미 화가 나 있었구나? 도발하듯 평서문 형식으로 그의 첫마디와 비슷한 문장 구조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연락에 응하지 않은 이유를 네가 아는지 모르겠어."
"......알긴 하지만 이해는 못했다."
늦가을, 태양빛이 짙어지는 오후 무렵. 나는 그의 얼굴을 피해 황족의 거주지가 자리한 내궁 구역을 눈만 움직여 대강 돌아본 직후 한 가지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야? 그래서 수없이 만남을 청하며 해명해달라 조른 거고?"
"나 또한 르쉬네를."
손이 삐끗해 그만 치맛자락을 놓쳤다. 그 외에 내 쪽의 타격은 없었다. 그렇게 믿고자 했다. 라인하르트도 섣불리 그 이름을 내놓았다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뒷말을 이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찰나 귀를 의심했다.
"무슨 소리야. 네가 그녀의 죽음을 원했잖아."
내가 여기서까지 참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곳은 대외적 이미지를 굳이 차리지 않아도 괜찮은 사석이었다. 냉랭한 단언이 일직선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어느새 그를 지극히 적대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제국 황가의 상징과 다름없는 선명한 적색의 시선 두 개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 그렇지. 나와 그는 사촌이었다. 얼음을 깨듯 날선 웃음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왜 그렇게 놀란 눈을 해? 맞잖아. 사 년 전 황태자위를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에서, 너 때문에 그녀의 가족이 제일 먼저 표적이 됐잖아."
"그건."
"르쉬네의 아버지는 황태자의 사촌이었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어. 그런데 네가 다 망쳤어."
르쉬네의 아버지는 현 황제 오벨 3세가 황위 계승 당시 죽이지 않고 살려둔 유일한 동생의 아들이었다. 또한 숨을 죽이고 살아가던, 황위 계승 구도에서 저 멀리 물러난 방계 황족이었다. 황태자가 제 왕관을 지키려고 베어내야 할 친족을 추려내던 도중 라인하르트가 르쉬네의 저택에서 반역 서류를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도. 그것을 제 아버지에게 고해바치고 직접 지휘권을 넘겨받아 수많은 자에게 죽음을 내리지만 않았으면. 적어도 그녀 직계의 계보는 현재까지 건재했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
"라니아."
"다시 말해줄까? 살인자 주제에 내게 예전과 같은 관계를 기대하지 마."
더없이 서늘하게 못박고 호소하듯 일그러진 눈빛을 냉정히 회피했다. 명석한 황족이니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젠장할. 결국에는 내가 이딴 식으로 매듭을 짓게 만들지. 약간 후련하면서도 서러워져 주먹을 꽉 쥐고 돌아섰다. 그리고 한 발짝 내딛기 무섭게 말로써 붙잡혔다.
"나는 살고 싶었어. 그게 잘못된 일인가?"
"뭐?"
옅은 금빛 머리칼이 후드득 바람결에 날렸다. 얼음 창이 심장을 궤뚫고 지나간 양 가슴께가 싸했다.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못 본 새 많이 퇴화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딴 망발을 지껄일 리가 있나. 순도 높은 분노를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았다.
"살고 싶었다고?"
한 글자 한 글자 짓씹었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내게 목소리를 높였다. 쎄한 바람에 그의 까마귀 같은 검은 머리카락도 그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쓸었다.
"그래! 당시 태자 전하는 위기의 한복판에 계셨고, 아무도 믿지 말라 하셨다. 실제로 여러 번 살해 위협을 받았던 터라 날이 서 있었지. 그리고 한 가지 자각에 이르렀다. 이제껏 만나 웃으며 놀던 모임의 핵심 구성원 역시도 대다수가 황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상기한 거야. 그러던 와중 르쉬네의 저택 깊숙한 구석에서 숨겨진 문서를 찾은 내가, 그것을 그저 덮어 둘 수 있었을까? 친우라고 여겼던 이와 그 가족들이 나를 노린다는데, 어떻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지? 어떤 멍청한 희생정신으로 친우가 날리는 검을 그대로 맞아내려 결심할 테지?"
순간 보이지 않는 실이 뚝 끊겼다.
"그 반역 문서는 3황자가 연막책으로 내세운 조작이었어! 제 반란을 들키지 않으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거였다고!"
결국 씨근덕대며 외치고 말았다. 적당히 날 더는 건들지 말라 경고만 하고 갈 셈이었던 애초의 계획은 완전히 뭉개진 지 오래였다.
"......그게 무슨."
라인하르트가 삽시간에 멍해져 뇌까리듯 미완의 의문을 내던졌다. 아마 이 밑도 끝도 없는 새로운 정보에 대해 따져물으려는 요량일 테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쓸모없고 소모적인 언쟁을 그만두고 싶어져 이 틈에 말을 쏟아냈다.
"살고 싶었다고? 그랬겠지. 황족은 목숨만 부지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흔히들 그러니까. 나도 배워서 알아. 살기 위해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거. 하지만 넌 너무 쉽게, 섣불리 그녀를 버렸어. 마치 친구로 생각한 적 없다는 듯이. 한 줌 의심도 없이, 더 이상의 어떠한 진상 조사도 없이! 넌 진실을 명확히 밝힌 후 판단하려는 이성을 갖기는 커녕 출처 모를 서류 조각을 그녀보다 더 믿었어."
당시 열다섯 살, 전생을 포함하면 서른두 살로서 자본주의로 점철된 세상부터 신분주의가 만연한 세상까지 접해본 나조차 그토록 가차없는 손속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열아홉 살이자 서른여섯 살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라인하르트는 내 아버지가 2황자라는 지위를 버리고 방계 가문으로 물러서지 않았다면 나조차 르쉬네와 같은 결말을 맺게 했을 것이다. 그가 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버지인 황태자가 그렇게 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사 년 전 당시의 나는 더 이상 아무런 계산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들로부터 멀리 도망쳐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다.
많은 것을 공유하고, 또 많은 것을 공감하고. 의지했었는데. 그간 함께 쌓은 시간을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지.
"난 그게 너무 무서워서."
떨리는 숨이 섞인 말이었다. 짐작건대 내 눈에는 당시 겪은 공포가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다. 악녀의 운명에서 벗어나 살아남는 엔딩을 맞이하고 싶지만, 굳이 라인하르트를 통해 그것을 이루고 싶지는 않다. 사 년 전 그날 이후로 나는 작중 반전적인 속내를 가진 프리드리히보다 그가 더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멀리했다. 오늘 이후로는 그도 나를 멀리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라니아. 나는 지금, 네 말을, 믿을 수가......아니, 애초에 무슨 소리인지 도통......"
라인하르트가 혼돈에 잠긴 눈에 나를 담았다. 미친듯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초점 나간 눈을 공연히 떨구었다가 끝내 내게 고정했다. 그리고는 뻣뻣이 굳은 다리를 움직여 멈칫 다가왔다.
"오지 마!"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끔찍했다. 상처입은 짐승 같은 눈을 하는 내 앞의 남자와, 질척한 고요, 천천히 스러지는 가을녘 나무의 낙엽, 볼가를 스치는 하늬바람, 하늘을 맴도는 매, 수도 외곽의 외진 곳에 외로이 잠들어 있을 누군가의 시체, 풀 자란 둔덕과 비석, 칼이 살점을 베는 소리, 피, 그리고 굴러떨어진 얼굴. 모조리 다 끔찍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오지 말고, 그대로 똑똑히 들어."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무고한 사람들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그리고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네게 죽어줬는지.
나는 마침내 울분에 차 그에게서 멀찍이 뒷걸음질친 채로 옛 이야기를 들춰내고야 말았다.
귓가에 이명처럼 달콤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저하께서 오지 않으셨어. 나 되게 신경써서 꾸미고 왔는데.'
풀이 죽었다가.
'저하께서 내게 이름을 허락하셨어! 라인하르트라고 불러도 괜찮고, 엔리케라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대! 세상에나.'
또 금세 기분이 좋아져 방방 뛰기도 하고.
'에빌. 루드베키아의 꽃말이 뭔지 알아? 영원한 행복이래. 난 엔리케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그에게 루드베키아를 선물했어. 내가 자기한테 고백하는 줄 알고 막 당황하는데 얼마나 웃긴지 아니? 푸흣.'
어느 날은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고선 몇 번이고 꽃을 받은 이의 반응을 설명하며 신나 하다가.
'안 되겠어. 나, 내일 그에게 진짜로 고백할래. 네가 예전에 그랬지?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그래서 한 번 해보려 해. 에빌, 넌 내 제일 친한 친구니까 응원해 줄 거지? 응?'
결연하게 눈을 빛내며 결심을 밝혔던 그녀는.
'왜, 왜 이러세요! 이거 놔요! 에빌, 도와줘! 에빌!'
그 다음 날 황궁 직속 기사단에게 반역죄로 체포되어 구금당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이 지나.
'나는 괜찮아, 에빌. 저하께서 나와 내 아버지께서 반역을 꾸몄다 판명하셨고, 물론 나는 결코 그러지 않았지만 혹시 아버지께서 정말로 그러셨을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저하의 안전을 위해서는 반역에 대한 지엄한 처벌의 본보기도 필요하고. 아이, 울지 말라니까. 그러면 내가 자꾸 슬퍼진다고.'
르쉬네의 아버지가 가장 먼저 사형에 처해지고, 이어서 그녀의 어머니와 남동생까지 뒤를 따른 직후였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어떻게? 나는 그녀의 사고방식을 좀체 모르겠다. 지금까지도. 어쩌면 영원히.
'르쉬네, 너는 아무 잘못 없어! 왜, 대체 네가 왜......! 흐윽......한 마디 변명도 없이 그렇게 순순히......'
힘이 없어 그녀의 도와달란 외침을 들어주지 못한 나는 울었고, 르쉬네는 밧줄에 칭칭 감긴 손을 어렵사리 들어 내 볼을 쓸어주었다. 그녀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아주, 아주 희고 깨끗한 옷이었다. 마치 그녀의 심성을, 결백을 대변하듯이. 그녀가 무죄라는 사실은 나중에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끝에 내가 직접 찾아냈지만, 당시에도 나는 그녀의 무고를 철썩같이 믿었다. 증거 없이 무언가를 그렇게 간절하게 믿은 적은 '윤이설'과 '라니아'의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에빌. 나는 라인하르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요즘 암살 위협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잔다는데......내일부터는 이번 일에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싹 잡아들인다니, 이제 그가 조금 더 편해질 거야.'
그녀는 자신에게 없을 내일을 언급했고.
'흑, 너는, 흐윽. 지금 널 죽이려는 사람을 걱정하는 거야? 미쳤어? 미쳤냐고 너! 앞을, 앞을 보라고......저거 안 보여? 저게 널 죽일 거란 말이야......'
나는 시퍼런 날을 세우고 공중에 뜬 단두대 칼날을 가리키며 오열했다. 르쉬네는 본능적인 공포에 질린 입술을 이로 짓누르며, 내 얼굴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다가 거꾸로 나를 위로했다.
'괜찮아. 다 괜찮아......'
그녀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 없었고, 대신해서 내가 그녀를 안았다. 어깨가 물기로 점차 젖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그녀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너는 끝까지 살아, 에빌. 나를 봐서라도 그렇게 해 줘.'
희생이라는 단어를 전혀 알지 못했던 미숙한 영혼마저도 울게 하는 그 처절한 비극이란. 차라리 내가 죽고 싶었다. 그래, 이럴 바에는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안녕.'
그러나 병사들이 나와 그녀를 억지로 떼어냈고, 르쉬네는 단두대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반역자에게 허락된 마지막 만남은 딱 거기까지가 허용선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성을 완전히 잃고 쫓아 올라가려 했지만 지금은 얼굴도 그 밖의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 낯선 누군가가 날 막아세우고는 품 안에 가두었다.
'진정하세요. 여기서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을 하시면 그대 또한 의심받습니다.'
아마 처형을 지켜보러 온 귀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 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불쌍해 보였겠지.
주제넘은 자. 그녀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추호도 모르는 자가. 감히 어딜 막아서?
'이거 놔! 놓으라고! 르쉬네!'
나는 그녀에게 가려고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마구 바둥거리다가, 그 정체모를 남자의 어깨 너머로 칼날이 반짝이며 내려서는 것을 똑똑히 목도하고야 말았다.
'아아악! 안 돼!'
서걱!
목이 잘렸다.
피가 후두둑 비산하고, 관중들이 우우 함성을 내질렀다. 나를 꼭 안은 낯선 이의 손에 힘이 더욱 세게 들어갔다.
대륙력 1057년 11월 7일, 오후 4시 즈음. 처형 집행이 마무리되었다. 종이 묵직하게 세 번 울렸다.
열 번은 황제의 죽음. 여덟 번은 황족의 죽음. 일곱 번은 공신과 영웅의 죽음. 다섯 번은 의로운 희생자의 죽음.
세 번은, 반역자의 죽음.
나는 절규했다.
르쉬네의 죽음과 함께 환상이 거둬지고, 해 지는 황궁의 풍경이 다시 펼쳐졌다. 뛴 것도 아닌데 숨이 차 엇박자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난도질 당한 듯 아프다.
"그러니까 오지, 마. 부탁이야. 날 찾지도 말고, 만나려고 하지도 마. 그냥 네 왕관이나 잘 지키란 말이야."
"......르쉬네가. 누명을 썼던 거란 말이지. 억울하게......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하! 괴로이 엉켜든 숨을 뱉으며 매몰차게 웃었다. 더듬거리며 제 과오를 말하는 라인하르트가 우스워 죽을 것 같았다. 자, 어디 한 번 죽도록 자책해 봐.
"르쉬네는 끌려가던 날 네게 좋아한다고 고백할 참이었어. 참으로 시기적절하게도 너는 그런 그녀의 목을 잘라버렸지만."
- 에빌, 나는 라인하르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평생 그녀를 기억하고 사죄하며 살아, 할레시온의 황태손. 넌 그래야만 해."
그녀는 너를 사랑했으니까. 지나치게 사랑해서 네 멍청한 처형에 기꺼이 희생당하고 말았으니까.
나는 매서운 걸음으로 데인 것처럼 정원을 벗어나기 직전 그가 털썩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사 년 전 그랬던 것과 비교되게, 너무 늦은 반응이었다.
============================ 작품 후기 ============================
프롤로그이자 1챕터인 지친 악녀 편(1화부터 4화까지)은 나름 빵빵한 용량을 지향하며 한 편당 8800~10500자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약간 줄어들 거예요. 대략 6500~8500정도?
+1화부터 관심가져 주시는 독자분들이 있어서 기쁘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할게요.
++잉여잉여07님 오타수정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늘의 악.살.다》
1.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과 그 가족의 무덤은 제국 수도의 북쪽 외곽에 있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마련되었다. 반역자의 시신은 누구도 거둘 수 없는 것이 원칙이나 그들이 황족이었다는 점을 들어 에단 르웰린이 수습해 안장했다.
2. 2화의 업뎃 날짜는 1월 1일 4시 4분이다. 글쟁이가 노리고 선정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