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1. 지친 악녀 =========================
다리에 힘이 풀려 나 역시 정원을 벗어나자마자 주저앉을 뻔했는데 굳건한 손이 날 받쳐준 후 끌어 일으켰다. 프리드리히였다. 감정 없는 미소를 가면처럼 띄운. 내 것보다 짙은 금발과 녹조류처럼 깊은 녹색의 눈, 사무적이고 말끔한 이목구비가 저 껍데기 미소에는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라니아 대공녀. 저하께 심한 말이라도 들으셨습니까?"
무서운 자. 저 말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는 내가 미들네임으로 불리길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보통 귀족을 부를 때 맨 첫머리에 오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같은 성을 쓰는 자들 사이의 혼란을 막아야 할 때만 이름을 부른다. 그마저도 황족으로서 중간 이름이 있는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다급히 그를 내치고 내 힘으로 버티고 섰다. 프리드리히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이번에는 오른손을 정중히 내밀었다. 거부하려는 투로 그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려 하자 딱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가로막혔다.
"외궁의 대정전에 귀족들이 대거 집결해 있어 여러모로 혼잡합니다. 제가 샛길을 안내해 드리지요. 길 끝에 가문의 마차도 불러 두었으니 타고 나가시면 됩니다."
"스카일러 '보좌관'. 무례합니다. 물러나시죠."
단호한 음색으로 그의 현재 신분을 명시했다. 에스코트 과정에서의 경미한 신체 접촉조차 사교계의 일원 신분으로 만난 것이면 몰라도 일개 보좌관 따위가 황족에게 할 짓은 못 되었다. 고로 분명 예절에 빠삭할 그는 이미 날 잡아준 것부터가 고의로 저지른 무례라는 뜻이 된다. 정석대로라면 못 본 척 했어야 옳다. 고리타분하고 매정하지만 그게 정석이다. 거기에 황족의 앞길을 가로막기까지 했으니, 그는 할 말 없다.
프리드리히는 뭇 영애들에게 통하고도 남을 제 다정다감한 태도가 도통 먹히지 않는 것에 의아한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에 소름이 쫙 끼쳤다.
"상심이 크신가 봅니다. 저는 그저 영애의 편의를 위해 '보좌관'으로서 일하는 중일 뿐인데 이리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것을 보면."
"제 속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면 섣부른 속단은 삼가 주세요."
"이런. 실례했습니다."
정중하고도 다정하게 미소하며, 그가 짤막하게 사과하고 나를 샛길로 이끌려 했다. 나는 잠시 그를 따라갈까 고민했지만 저 위험스런 작자와 한시도 같이 있기 싫었던 나머지 거절하기로 했다.
"제멋대로시군요, 대공녀께서는."
농담처럼 싱긋 눈웃음지으며 말하는데 내게는 그것마저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의 냉혈한스러운 후일의 처사를 책에서 전부 접한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경계의 대상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그가 포기했다며 한숨처럼 웃었다.
"마차를 다시 정문에 대기시키도록 하지요. 영애께서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나가십시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으음. 앞선 호의를 전부 내치신 분답지 않은 언사이십니다만, 그냥 넘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좌관께서는 친절하시네요."
싹 무시하고 벽을 세워 버렸다.
"......별 말씀을."
프리드리히는 그려낸 듯한 미소로 능숙하게 대답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몇 마디 주고받은 뒤 혼자가 된 나는 곧장 내궁 구역을 빠져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해가 이글거리며 저물고 있다. 나는 밤이 오듯이 극도의 격정에서 벗어나 점차 식어갔다. 남은 것은 언제나처럼 냉랭한 이성, 그리고 삭막한 허탈감.
한 걸음마다 라인하르트의 멍청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증오스런 나의 옛 친구는 정말로 자기가 무얼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공포가 나를 넘어뜨릴 듯 휘감고 올라왔다. 책에서는 라인하르트의 냉막한 성격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나와 르쉬네, 그 밖에 많은 이들을 휩쓸고 지나간 숙청이 바로 그 원인이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괴롭고도 고통스럽게, 나는 허망히 웃었다.
잔인하고 또 잔인한 활자의 세상은 내게 얼마나 더 깊은 비극을 선물할 셈일까.
생각이 번잡해질수록 걸음은 빨라졌다.
분노로 후들거리던 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되돌아왔고, 나는 별다른 불쾌한 마주침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외궁 구역에 들어설 수 있었다.
외궁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그 세력을 쉬이 떠올리는 고위 귀족들이 이따금 오늘 같은 날에 어울리지 않는 방문자 라니아를 흘끔 쳐다보기를 몇 차례.
막 대정전 안으로 들어가려던 샤카르가 나를 발견했다. 솔직히 말해서 길을 잃어버렸다가 간신히 찾은 기분이었다. 이 근본 모를 안도란. 나도 영 글러먹었어.
"어? 라니아."
그가 새벽처럼 짙푸른 머리칼을 휘날리며 내 앞까지 왔다. 아까와는 달리 말쑥해진 차림이며 꾸밈새가 외려 흐트러진 모습보다 어색했다. 그가 나를 향해 다가오자 그 움직임을 쫓은 일부 귀족들의 시선이 이내 내게 닿았다가 슬쩍 떨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건드리고 싶어지는 신분은 아니지, 내가. 아무리 힘없는 황자의 딸이래도 황족은 황족이다. 마침 저 멀리 황태자가 나타나서 귀족들은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황태자는 보아 하니 늦는 황태손 대신 양해를 구하러 온 것 같았다.
그쪽을 대강 확인하고 관심을 끊은 샤카르가 가벼이 물었다.
"넌 벌써 용건 끝났냐? 부러운걸.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네. 입장이 오래 걸리나 보네요."
"아니, 글쎄 황태손 그 놈이......쿨럭! 황태손 저하께서 도통 나타나질 않으셔서 개회가 지연되고 있다니까. 짜증나. 집에 가고 싶다."
말하다 말고 제 언사가 장소상 부적절함을 깨달은 그가 헛기침을 격렬하게 하더니 왈칵 짜증을 부렸다. 얼마나 지루했으면 마음에도 없는 집타령일까. 측은해서 어깨를 두드려 줬다. 사실 좀 미안하기도 했고. 내가 붙잡아 두는 바람에 황태손이 지각하게 됐으니.
"첫 참석인데, 이대로 돌아가면 안되죠. 조금만 더 기다려요, 곧 황태손이 나타날 거니까."
샤카르는 싫은 티를 팍팍 내다 말고 그를 두드리는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묘하게 쳐다보았다. 꼭 심해의 미지 생물을 보듯이. 짧은 간극을 두고 그가 감탄조로 내뱉었다.
"와우. 우리 에빌이가 이런 것도 할 줄 알다니."
"뭐라고요? 우리, 뭐?"
어이가 없어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더니 그는 입을 싹 씻고 뻔뻔하게 굴었다. 실실 쪼개는 꼴이 아주 가관이다.
"응?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말했나?"
"......하하."
결국 나는 어색하게 웃고 주먹으로 샤카르의 명치를 가격했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그의 기준에서는 한없이 느린 공격인데도 그냥 맞아준 걸 보면 자기도 방금 그게 미친 소리인 걸 아는 모양이다.
"참. 근데, 황태손이 곧 나타날 거라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개회가 늦어진 원인이 에빌 너인가 보다? 가서 뭔 얘기를 했길래? 설마 화해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리고 너 왜 꿋꿋이 존댓말 쓰냐?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약올리려고?"
나는 마차가 오기 전까지 잠깐 시간이나 때워줄 겸 옆에 있는 정원의 낮은 담벼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샤카르는 신이 났는지 떠벌떠벌 잘도 떠들어 댔다. 아까 마차 안에서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나사 두어 개는 족히 더 빠진 형상이었다. 워낙 오락가락 정신 없는 족속이라 그러려니 했다. 내가 아는 영식들 중 거의 최연장자인 주제에 꼬마애같이 구는 꼴이 퍽 재미있기도 하고.
"물음표가 당신 답지 않게 많네요. 뭐, 하나씩 대답해드리자면."
그래도 귀족가 도련님이라는 신분이 영 거짓은 아닌지 몸에 밴 배려로 내가 앉을 자리에 깔아준 그의 외투를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장난삼아 번갈아 앞뒤로 까딱였다.
"많은 귀족 분들께 죄송스럽게도 황태손을 생각보다 오래 붙잡아 뒀으니 제가 원인인 게 맞아요. 무슨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화해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린지 모르겠군요."
"워, 잠깐. 화내지 마라. 뒷문장에서 눈빛 날카로워진 것 보게나. 이 샤카르가 무서워 하는 거 안 보여?"
그가 눈을 찡긋했다. 나는 아까 프리드리히를 대면했던 때와는 다른 의미로 전신에 돋는 소름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즉시 내게 한 대 더 후려맞았다. 아악! 아파! 그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되도 않는 엄살을 피웠다. 칼로 쑤셔도 안 들어갈 것처럼 탄탄한 몸을 가진 인간이, 잡는 거라곤 기껏해야 활시위 정도인 내게 맞고서 지금 뭐라는 건지. 나는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
"3인칭 쓰지 말아요. 한 번만 더 그딴 닭살돋는 말을 지껄이면 죽여 버리겠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존댓말은 왜 자꾸 쓰냐니까?"
이를 갈며 경고하자 그가 도로 앉으며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머리 위로 성의 없이 들어올리고 샐샐 얄밉게 웃음을 흘렸다. 정말 심각하게 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귀족 계보도를 나중에 한 번 뒤져서 그의 양자 입적 여부를 조사해 봐야겠다. 도저히 이 인간 하는 짓이 귀족이 아닌 것 같단 말이다. 한심하게 쳐다봐 주며 부러 더 딱딱하게 선을 그었다.
"분명 그건 알 바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요?"
"허어. 진짜 취급 너무하네. 자꾸 그러면 나 확 그냥 너랑 한 일 저 안에서 다 불어버리는 수가 있다? 난 네 생각만큼 속 넓은 사람이 아니라고."
샤카르는 그까짓 선긋기로는 어림 없다는 듯 특유의 과장된 투로 팔짱을 끼고 눈을 치켜떴다. 나는 새삼 열다섯 살의 어느날 그를 찾아간 이유가 르쉬네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우선 방패막이로 대강 휘돌려 대꾸했다.
"......당신이 속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전혀 없는데요."
4년 전 당시 일하던 정보상이 반역죄로 몰려 숙청될 뻔했던 경험을 가진 샤카르는 손쉽게 포섭됐고, 우리는 얼마 후 목적을 달성했다. 곧바로 두 부자의 오판을 세상에 드러내 그들의 입지에 큰 손상을 입히고 싶었지만, 이 나라 법이 엉망인지라 지금껏 숨겨와야 했다. 이미 처리된 반역 사건은 진실 여하를 재조사해 뒤집을 수 없고, 만일 그런 시도를 한 자는 반역 동조죄로 처벌받는다는 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나라라니. 아무리 황권에 대한 거역에 극히 민감하고 엄격하더라도 그렇지. 이게 말이 되는가.
나는 너무 화가 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나서는 억지로 기억 속에서 퇴출시켜 버렸다. 어차피 붙잡고 있어 보았자 따갑기만 한, 장미 줄기 같은 문제니까.
결국 내가 그와 손을 잡아 얻어낸 실질적 결과는 소설 내용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 뿐이었다. 자꾸 잊어먹지만 샤카르 멘데로프는 소설에서도 라니아의 오른팔 역을 부여받은 인물이라서.
짧은 회상 끝에 내 표정이 누그러지자 그는 이때다 싶은지 어린애마냥 매달렸다.
"아, 진짜! 거 되게 두루뭉술하게 구네. 그냥 지는 셈 치고 알려주라, 좀."
그래서 간단하게만 말해줬다. 붉게 멍든 서쪽 하늘에 넌지시 눈길을 두고, 최대한 담담하게. 지금 이 시간이 기억에 남기 전에 바람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길 바라며.
"편하게 말하다 보면 친해지니까."
항상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실이 있다. 소설의 후반 즈음에 샤카르 멘데로프가 라니아를 떠난다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그가 나를 떠나는 계기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막기에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열다섯 살의 내가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와 손을 잡는다는 선택지 따위는 고려도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라니아 안에 잠든 윤이설은 누군가를 잃는 것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니까. 이별이 예정된 자를 곁에 끌어들여 좋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또다시 상처입기밖에 더 하겠나.
하지만 어리석게도 샤카르를 원작대로 '라니아'의 옆에 두고 말았지. 나는 안일한 생각에 설득당했었다. 내가 악녀가 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틀어지고 여주인공이 내게 복수하려 달려들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자 했다.
실제로 아직까지는 조용하다. 원작에서 바닥을 기었던 라니아의 평판도 신비주의가 과하다는 지적 외에는 딱히 걱정할 만한 수준이 아니고. 이대로 일 년만 더 버티면 이야기가 벌어지는 주 시간대가 지나고, 나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하루하루 불안한 것만 빼면 요즘은 평화로웠다. 그래도 차마 그와 마음껏 말을 놓고 격없이 가까워지기엔 아무래도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 저질러 놓은 일도 있고, 운명도 마음에 걸려서. 나는 그저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 결심이 무색하게 그토록 꺼리는 미들네임 호명을 의도적으로 몇 번 더 찔러보는 그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버렸지만.
"......"
이번엔 그가 한 템포 늦었다. 내 말을 이해하고 정리하느라 그가 이 정도의 시간을 소비한 것은 퍽 드문 일이었다. 생긴 건 멀쩡해서 입만 열면 헛소리인 남자지만, 머리 비상한 것은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었거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계속해서 어린애마냥 허공에 약간 뜬 발을 의미없이 살살 내저었다. 그것에 물끄럼한 시선을 보내던 샤카르는 대뜸 눈썹을 휙 올렸다.
"너 그런데 라인하르트 그 새끼한테는 반말하잖아."
말문이 턱 막혔다. 그와 함께 발놀림도 딱 멈췄다. 아무렇지도 않게 정곡을 찔러오는 게 꽤나 수준급이야. 회피할 말을 재빨리 찾아낸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곤란한 채로 이야기가 끊겼겠어.
"주위에 사람들 별로 없다고 이젠 아예 막 나가는군요?"
"그럼 욕 안 붙이고 어떻게 부르냐? 그 놈 때문에 내 정보상 망할 뻔하고 너네 가문도 망할 뻔하고. 네 친구도......에이, 젠장. 하여간 그렇잖아."
"그럼 계속 해볼래요? 듣기에 좀 후련해서."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마구 휘저으며 하는 말에 속이 시원한 게 지금 내 심리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걸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실없는 말장난 같은 그와의 대화는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샤카르는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그래, 황태손이 사실상 너와 나의 첫 접점이었고 손을 잡는 계기였잖냐. 물론 좋은 계기는 아니었지! 아주아주 좋지 않은 계기였지! 어쨌든 그 재수없는 자식 때문에 너나 나나 잃은 것도 많고 상처받은 것도 한가득인데, 왜! 황태손은 반말이고 나는 존댓말이냐는 물음인 것이지. 음, 과연 그런 것이다."
웃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실없는 개그를 눈앞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툭툭 내던지듯 대충 대꾸를 해주다 어느새 나는 그 독특한 형식에 과도하게 허물 없이 응대해 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존대라는 최소한의 거리적 자각만 남겨둔 채.
"끝이 왜이리 엉성해요?"
"내 화려한 언변에 스스로 할 말을 잃어서?"
"또 헛소리. 작작 좀 하시죠."
"내가 뭘? 네가 내 심오한 언어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야......어억!"
"뭐야. 왜 그래요? 뒤통수에 비수라도 꽂혔어요?"
사실 잠깐이나마 비도의 달인 프리드리히를 의심했다. 망할. 공포증 하나 더 생기겠군. 그 뱀같이 웃는 얼굴이 잘생겼다는 게 가장 큰 문제야. 너무 눈에 띄어서 잊혀지지도 않잖아. 나는 임시방편으로 만만찮게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내 곁의 나사 빠진 동업자의 옆얼굴을 눈에 담았다.
"아니. 방금 깨달았다. 네 말 돌리기에 또다시 당했다는 것을! 이런이런. 어린 친구가 벌써부터 이런 화술만 배워먹으면 못 써."
"자신이 늙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요?"
"무슨 그런 소리를. 나 아직 스물일곱 밖에 안 됐는데?"
"나는 열아홉인데. 늙었군요."
비죽이 웃었다. 놀리려 꺼낸 말이었는데 그는 약간 의도와 달리 반응했다.
"어라. 네 나이가 그것밖에 안 됐었냐? 하여간 얘기하다 보면 자꾸 잊는다니까. 워낙 풍기는 분위기가 여타 네 나이대 인간들하곤 딴판이라."
솔직히 뜨끔했다. 반칙이지만 전생의 나이까지 합하면 어언 서른여섯 살인 나였다. 중간에 재부팅 된 것 때문에 정신연령은 그것보다 낮을 것으로 예상 중이다만 그만큼 샤카르의 정신연령도 낮아서-이건 비난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다- 아마 평범한 래들과 어딘가 다르긴 했을 거다. 희미한 괴리감을 눈치챈 것은 순전히 그의 눈썰미 탓이었겠지만. 떠보기 반 장난 반으로 진실을 밝혔다.
"인생을 두 번 살아서 그래요."
"아하. 그렇구만."
"호오. 그 당연하다는 식의 반응은 예상 밖인데요."
"왠지 너라면 그렇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서? 사실 네가 특이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거든."
"희귀동물은 당신 아닌가요......왜 그런 눈으로 보죠?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짜게 식은 금안을 발견하고 지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호박석 같은 맑은 금빛에 가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노을이 그의 뒤편에서 상당히 짙어진 채로 점점 서쪽 끝으로 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만하면 시간 죽이기는 충분하다. 나와 그 모두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다. 샤카르도 뭐라 변명하다 말고 하늘로 향하는 내 시선의 궤적을 쫓아가 시간을 인지했는지 말 끝을 흐렸다. 약간 길게 숨을 뱉고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이제 그만 일어나죠."
"그래야겠다. 아, 같이 시간 때워줘서 고마웠어. 동업자."
"당신의 넘쳐나는 헛소리 덕에 나도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네요. 고마워요."
"끝까지 헛소리로 치부하는구만......내 심오한 언어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다니. 애석해."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일어나 그의 외투나 잘 털어 돌려주었다. 솔직히 대꾸할 가치 없잖나. 자뭇 쿨하게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그가 서운하니 뭐니 의미 없는 인삿말 같은 것을 몇 마디 더 내놓았다.
나는 그것을 길거리 음악처럼 흘려들으며 대정전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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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10화 정도가 쌓일 때까지는 매일연재로 하루에 1~2편정도 올라갈 거예요! 읽어주시는 분들, 선작 추천 코멘트 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D
+BLC발렌시아 님 오타수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