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4 1. 지친 악녀 =========================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집에 돌아와 보니 늦은 저녁이었다. 시간의 덧없음을 여실히 체감하며 방에 들어앉아 하녀 마리가 전하는 소식을 들었다. 목욕 준비를 하는 하녀들이 오기 전까지의 짧은 공백 때였다.
"가문의 표식을 제작하는 일을 맡은 피치엔 공방에서 금전난을 호소하며 지원을 청해왔는데, 대공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오후에는 대공비께서 로엔세르 가에서 열리는 다과회에 참석하셨고, 셀리아 아가씨도 동행하셨습니다."
요즘 나의 외가인 로엔세르 공작가와 나의 어머니 일레인의 교류가 잦아진 것 같다. 슬슬 그쪽의 힘이 다시 필요해진 걸까.
"그리고 마님께서 카리스티아에 입고 갈 의상을 맞추기 위해 디자이너를 한 사람 섭외하셨습니다. 내일 오전에 자신이 직접 저택으로 찾아오거나, 그게 아니면 아가씨께서 자신의 가게로 찾아와 주길 부탁드린다고 했습니다. 어찌 하겠다고 전할까요?"
현 황제 오벨 3세, 즉 내 조부는 수십 년 전 형제고 뭐고 그 세대 황족을 거의 산림 벌목하다시피 쓸어버리며 어렵사리 구축한 절대 황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카리스티아를 만들었다. 4년 전 또 한 번의 황족 숙청 사건 이후 줄곧 안 열리다가 올해부터 다시 열리기 시작했는데 품격이 높아 드레스 몇 벌 정도야 기본으로 준비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나저나 자칫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디자이너의 발언에 나는 눈을 연속으로 두 번 깜박였다.
"두 선택지가 다른 장단점을 가지고 있나 보지?"
"예, 아가씨께서 직접 방문을 하시면 제작이 더 수월하고, 드레스를 만들 재료 선택의 폭도 넓어진다고 했습니다."
"직접 가겠다 해."
"알겠습니다."
바람이나 쐴 겸 시가지로 걸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오늘처럼 참으로 뭣 같은 목적의 외출은 솔직히 외출이라고 해주고 싶지도 않아서. 막판에 농담따먹기라도 안 했으면 정말 폭발했을 거다.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곧 들어온 하녀들에 의해 목욕을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좀 살 만하네.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와 폭신한 침대에 파묻혀서 역시 집이 최고야 따위의 시답잖은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는데 할 일을 마치고 나가있던 마리가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와 공손히 고했다.
"아가씨, 마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잠들지 않으셨다면 잠시 마님의 방으로 오라 하셨습니다."
"알았다."
의아한 채로 주섬주섬 일어나 옆 방으로 갔다.
허락을 받고 들어선 방 안은 오렌지빛 촛불 몇 개만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이번 생의 '어머니'는 책상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온화하게 웃으며 맞아주시길래 나도 살풋 웃으며 앞자리에 앉았다.
"아직 자고 있지 않았구나. 무슨 고민이라도 하던 중이었니?"
라니아의 어머니, 일레인 로엔세르 루 할레시온은 뜨개질을 멈추고 주섬주섬 치우더니 내게 다정히 물었다. 고개를 살랑 저었다.
"아니요. 그냥, 잠이 오질 않아서요. 그런데 제게 무슨 할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오늘 오후에 황태손 저하를 뵈러 갔다고 하녀 아이들이 그러더구나."
"별 것 아니었어요."
"저런. 얼굴이 굳은 것은 알고 있니, 내 딸?"
뜨끔해서 나도 모르게 손을 얼굴에 올렸다. 일레인은 우아하게 후후 웃더니 그 손을 잡아 감싸쥐었다. 언제나 어색한 온기가 와닿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무표정하니 시선만 피하고 있자 그녀는 안타깝고 가여운 것을 보듯 눈매를 처연히 늘어뜨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네가 말을 하지 않으니 나도 굳이 오래된 일을 들춰내려 하지는 않았단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어미가 아이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지 않을까? 이 엄마는 항상 내 딸이 행복하기를 바라. 그래서 늘 걱정하고, 신경 쓰고, 또 참견이라도 해서 돕고 싶은 거야."
- 에빌. 나는 라인하르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잠시 나를 할퀴고 지나간 환청 때문에 입술이 굳었다가 잡힌 손의 온기에 도로 풀렸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일방적인 희생과 납득, 체념에 이어 덧없는 소망.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전생이나 현생이나 어머니 복은 타고난 것 같다. 실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말해줄 수 있겠니? 황태손 저하와 네 관계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비록 내가 안다 하여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잘 것 없는 도움이라도 내어 주고 싶어지는구나."
어느 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간단하게 정리했다. 마치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것들이 한 방에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듯, 오늘만 나는 벌써 적어도 세 번째로 그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사 년 전에, 라인하르트는 제 친구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넣었어요.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 말이에요. 그래서 전 그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뿐이에요."
"......네가 그리도 슬퍼했던 죽음인데 모를 리 없지. 하지만 억울한 죽음인지는 몰랐구나. 그것이 황태손께서 초래한 결과였는지는 더더욱 몰랐고."
그녀는 놀란 듯, 그러나 너무 티 내지는 않고 반응했다. 담담히 듣는 나를 말없이 예의 그 처연한 눈으로 바라보던 일레인은 한숨을 포옥 내쉬더니 잔잔히 내 이름을 불렀다.
"라니아. 내 사랑스런 딸."
맑은 회안이 흔들리는 촛불을 따라 일렁였다. 뜸까지 들여가며 이름을 부르는 것이, 또다른 용건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직감적인 불안감이 저편에서 밀고 올라왔다. 다시 한 박자를 넘긴 일레인은 결심한 듯 결연히 소식을 전했다.
"실은 황가에서 너를 황태손의 짝으로 맺어주고자 일을 추진하고 있단다."
하. 나는 헛숨을 뱉었다. 황실 어른이랍시고 권좌에 들어앉은 것들이 또 권력 놀음을 하는구나. 그제서야 나는 이 사적인 시간에 그녀가 굳이 나를 불러낸 이유를 알았다. 앞선 말들이 다 이걸 위한 준비작업이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일레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녀는 비록 지금은 황위계승에서 밀려난 별 힘도 없는 황족의 부인일 뿐이지만,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명망이 드높은 공작가 로엔세르의 셋째 딸이자 사교계의 꽃이었다. 원작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바로는 2황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싶었지만 본가에서 힘을 주기 아까운 황자라며 불허하자 가문과 아예 절연하고 도망치듯 결혼식을 올린 후 가문 보란듯이 제 남편을 황제로 만드려는 준비에 착수했다더라. 물론 4년 전 그 난리가 나면서 내 친구와 3황자에 이어 2황자인 라니아의 아버지까지 도마 위에 오르자 과감하게 황자 작위를 포기하고 방계로 나가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이렇듯 여장부에 킹 메이커였던 그녀가 나와 라인하르트를 엮는 것이 혼인을 통한 또 하나의 족쇄를 만드려는 직계 황실 측의 같잖은 계획임을 모를 리 없었다.
"해서 혹여나 네가 황태손 저하를 좋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요량으로 네게 이 사실을 밝힌 거란다. 그러나 너 역시 달가워 하는 눈치가 아니로구나. 역시 이 혼인......어떻게 해서든 무효로 만들어야겠어."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가 제게 어떤 존재인지 아셨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든'이라니, 아무래도 또 거절하기 어렵도록 뭔가 걸어둔 모양이네요."
냉소적인 미소와 함께 도전적인 투의 언사가 튀어나왔다. 기분이 심히 나쁠 때 보이는 '라니아'의 버릇 같은 태도였다. 어느새 나의 것이 되어버린, 작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언급된 그녀 고유의 사소한 특징이기도 했다. 일레인이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잠시 손을 떼어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공께서 네 혼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단다. 이 엄마는 당연히 네 결정을 지지해 줄 테지만, 그이가 걱정이야."
이 시점에서 나는 아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실없는 생각을 또 했다.
나는 어머니 복이 있으니 아버지 복은 없나 보다. 공평하기도 해라. 삐뚜름히 엇나간 웃음을 바람 새듯 터뜨렸다.
"대공께서는 절 팔려고 하시는군요."
"라니아, 네 아버지는 그저 우리 모두가 가장 쉽게 안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 이 혼인이라 여기시는 것 뿐이란다. 그 분을 너무 탓하지는 마렴."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내 손을 더욱 꼭 부여잡은 일레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 대각선 아래쪽에 옮겨 두었다.
"안전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이유를 댈 수가 있죠? 대체 누가 선동질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아. 전신이 찬물에 빠진 것처럼 아찔했다. 배배 꼬인 머릿속에 한 가지 끔찍스런 가정이 떠올라서.
혹시, 혹시. 다른 때보다 치밀한 수단을 써가면서까지 만들어 낸 오늘의 만남이, 반드시 '오늘' 나를 만나야 했기 때문인가?
"어머니. 라인하르트도 저와 그의 혼인 추진 계획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아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란다."
이어서 꽂힌, 한 글자마다 칼날 같은 말이 내 속을 난장판으로 뒤집어 놓았다.
"황태손께서 가장 처음 너와의 혼인을 건의하셨고, 이를 받아들인 종친회와 황제 폐하께서 추진하신 것이니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했다. 결국 황제의 이름까지 빌려가며 급하게 불러내 억울하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인 이유가......
라인하르트.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 셈이야.
이를 빠득 갈았다. 더욱 화가 난 것은, 내 방에 돌아가서 원작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둔 그 분홍색 공책을 살펴보고 그와 나의 약혼이 소설에 명시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
하늘이 우중충하다. 저택 밖으로 나와 얼마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이런. 우산 안 챙겼는데. 설마 외출이 끝나기 전에 비가 오진 않겠지. 약간 불길한 가운데 길거리로 나섰다.
일레인이 섭외한 디자이너의 작업실은 빌데론 거리 끝 쪽에 있다고 했다. 난 사실 거기가 정확히 어딘지 잘 모르지만, 하녀 마리가 있으니 알아서 잘 안내할 거다. 실제로 나는 그녀를 따라 순조롭게 걷고 있었다.
큰 길이 있는 번화한 거리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딱 봐도 귀족처럼 생긴 남자 하나가 내게 아는 체를 잠깐 하고 가기도 했고, 실수로 내 앞을 가로막은 셈이 된 평민 하나가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이며 벌벌 떨길래 자애로운 척 억지 미소와 함께 용서해주기도 했다. 뭐, 오래간만의 거리 외출은 그럭저럭 다채로운 경험이 많아 지루하진 않았다. 기분 전환이 좀 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어젯밤 기분이 정말 최악이라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나조차도 감이 안 잡혔었는데. 역시 오늘 디자이너를 찾아가기로 한 것은 탁월한 안배였다.
라인하르트가 벌인 같잖은 짓들은 잠시나마 잊어버리고 거리를 활보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려한 내부가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한복판에 서서 옷감을 점검하고 있던 불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날 발견하고 사뿐히 걸어 다가왔다. 이 여자가 바로 그 디자이너로군.
"에빌 대공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번에 루 할레시온 가의 의상 제작을 맡은 엘피샤 카르텔리라고 합니다."
카르텔리? 내가 알기로 저 성은 분명. 내 의아한 눈빛을 눈치챘는지 엘피샤가 고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소개를 보충했다.
"옛 시힐레 출신이라 제국 분들과는 외양이 조금 다르지요."
눈동자만 들어 그녀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커피색 피부에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 짙은 쌍꺼풀이 진 큰 눈. 과연 망국 시힐레의 왕가에게 새로 내려진 작위, '카르텔리 후작가'의 여인다운 모습이었다. 시힐레는 할레시온이 모국과도 다름없는 카슈테르 왕국을 처음으로 정복한 후 두 번째로 집어삼킨 왕국이었다. 역사에서 사라진 지 한참이나 지났지.
이 여자의 신분을 알았을 때 의상사라는 직업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따지고 보니 꼭 그럴 것도 없었다.
할레시온 제국 황실은 정복한 왕국의 왕가가 목숨만 살려달라며 설설 기는 입장을 취할 경우 굉장히 인간적인 대우를 해준다. 한 국가의 상징과 다름없는 자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면 자연히 그 나라의 백성에게도 저들처럼 바짝 엎드리라고 홍보할 수 있거든. 하지만 제국 본토의 국민 성향까지 이런 식으로 관대하냐 묻는다면, 대다수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정복당한 국가의 백성 전체는 당연하다는 듯이 차별과 핍박을 받는다. 하물며 망국 왕가 출신이라면 엄청나게 눈에 띌 텐데, 과연 얼마나 고귀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겠어.
결론적으로, 엘피샤 같은 이들에 대한 대우는 상당히 불친절한 편일 확률이 높다. 패자는 그렇게 역사의 권좌에서 내려서는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귀족 내지 황족과 접촉하고 가까워질 일이 많은 디자이너는 직업세계에서 꽤 높게 쳐주는 종목이니 그녀로서는 아마 최선의 직장일지도.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엘피샤."
고개를 까딱여 가볍게 인사하고 그녀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리를 데리고 들어선 내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옷감과 장신구들이 원형의 거대한 방 안에 늘어서 있었다. 흥미로운 눈으로 그것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엘피샤가 무언가를 찾아 그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말을 걸었다. 꽤 자유분방하군. 나 같은 신분적 거물을 두고 이 정도로 긴장감 없이 굴려면 역시 망국의 왕족 정도는 되야 되는가보다.
"루 할레시온 대공비께서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작년 여름 이후로 한동안 의상 제작을 맡기질 않으셔서 찾아뵙질 못했네요."
"무탈하시답니다. 어머니와 친분이 있으신가 봐요?"
"네, 그 분께선 제 능력을 신뢰하시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세요. 저는 이에 감명을 받아 그 분을 사적으로도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고요. 가끔 일을 핑계로 만나 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미처 몰랐네요, 어머니께 훌륭한 친우가 계신 줄은."
"어머, 과찬이세요. 대공비님이야말로 정말 훌륭한 분이시지요."
유일하게 텅 빈 중앙에 나를 세워둔 엘피샤는 먼저 간단히 내 치수를 재고는 내게 여기저기서 찾아낸 샘플 옷을 꺼내 보여주며 어울릴 법한 옷감이나 디자인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대공녀님께서는 피부가 희고 눈매가 도도한 인상을 주셔서 이런 사랑스러운 느낌의 드레스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네요. 지나치게 화사한 장식이나 어려 보이는 드레스는 지양해야겠어요."
그건 나도 바라던 바다. 차라리 좌중을 압도할 만큼 고고하고 화려한, 이를테면 핏빛 장미가 연상되는 드레스면 모를까. 슬쩍 내 취향에 대해 머릿속에서 정리를 하는데 엘피샤가 내 눈을 한참 바라보더니 여상하게 내뱉었다.
"흠, 대공녀님, 혹시 장미꽃을 주제로 잡아도 괜찮을까요? 왠지 대공녀님께서 이런 종류의 옷을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녀가 꺼내든 것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상당히 비슷한 모양의 드레스였다. 순간 속내가 그대로 읽힌 줄 알았다. 역시 프로는 프로다, 이건가. 티는 안 냈지만 내심 놀라웠다. 생긋, 사람 좋게 미소를 띄웠다. 그 나이대 소녀처럼.
"엘피샤는 제 의중을 아주 잘 읽는군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어머, 그런가요? 후후. 제가 가끔 파악에 능통하다는 소리는 들었답니다. 그럼 디자인은 화려한 장미를 주제로 해서 완성하도록 하고, 이제 옷감과 장식을 결정하러 가실까요?"
나이는 외양상 기껏해야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니 망국 이후에 태어났을 테고. 그럼 저 재주를 써먹을 일이 이런 일 외에는 없었으렸다. 나는 은연중에 저 여자의 왕국이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널리 이름을 떨친 정치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 접어들었다. 아무리 사람을 보는 눈이 썩 괜찮다는 평을 받아온 나여도 짧은 대면만으로 엘피샤라는 인간을 단정지을 수는 없는 거지만, 어쩐지 그랬다.
나는 다시 그녀를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외국인도 만나고, 오늘 참 흥미로워. 따위의 감상을 속으로 중얼이면서.
옷감의 종류와 색에 이어 엘피샤의 작업실과 협업 관계라는 유명한 보석상에 주문할 보석과 각종 장신구까지 정한 다음, 나는 입구로 다시 나왔다. 마리가 나를 대신해 계산을 치렀고, 엘피샤는 구체적인 디자인을 완성한 후 결과물의 견본을 만들어 보내겠다고 했다. 그 후 마음에 든다고 편지를 띄우면 그대로 작업을 시작할 거란다. 일종의 피드백인 셈이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견본 완성에는 이 주일 정도 걸릴 예정이니 느긋하게 기다려 주세요. 카리스티아는 삼 주쯤 뒤라고 하셨나요?"
"맞아요. 귀족원 소집령이 가장 먼저 시작되고, 그 뒤로 여러 정치적 일정들이 있다가 마지막이 카리스티아라서요."
"지방 귀족들에 대한 배려인가 보네요."
"그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모인 김에 한꺼번에 중대사를 처리하겠다는 뜻일 거예요."
"아하, 그런 것이로군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대공녀님."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녀에게 아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맑게 울렸다. 나는 약간 불쾌해졌다. 종소리는 내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다. 게다가 바깥에는 우려했던 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그리 어둡지 않으니 잠깐 지나가는 여우비일 것 같긴 하다만. 마리가 우산을 구해올까요, 라고 물었지만 그냥 됐다고 했다. 비 좀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집도 가까우니까.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급히 가게에서 나왔다.
그리고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다, 어떤 광경에 잠시 주의를 빼앗겼다.
소년이, 아니. 청년인가? 모르겠다. 섬세한 외양 때문에 나이를 단정키 힘든 남자가 우산을 든 채 가게 귀퉁이 차양막 아래에서 벽에 멍하니 기대어 있었다. 환영처럼, 바람이 불면 흩어져 버릴 것 같다. 하늘 한구석을 하염없이 응시하는 옆모습이 이상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가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수채화로 그려낸 것처럼 여렸다. 빗속에 조심스럽게 피어난 연파랑 야생화 꽃잎이 퍽 잘 어울리는 비유가 되리라. 새까맣지 않고 어렴풋하게 흐린 검은 눈이 미약한 감정 조각을 담고 잘게 일렁였다.
홀린 듯, 나는 미처 그 시선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비, 아마 계속 올 겁니다."
옅은 은청빛 머리색을 가진 남자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음절마다 끊어 말했다. 말까지 할 거라는 예상은 못했는데.
쏴아아―.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아까보다 한층 거세졌다.
"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이름 모를 분. 이걸 쓰고 가세요."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부드럽고도 미려한 얼굴을 하고 들고 있던 우산을 살며시 내밀었다. 나는 조금쯤 얼결에, 단정하게 접힌 것을 받아 펼쳤다.
"감사합니다."
호의에 간단히 감사를 표하고 걸음을 옮겼다.
여우비를 머금은 구름이 채 덮지 못한 햇빛에, 빗줄기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곤두박질쳤다.
============================ 작품 후기 ============================
1챕터는 여기까지입니다. 프롤로그 겸 떡밥투척 파트 겸 작품 전반적인 초석 다지기 파트인지라 이 네 편 쓰는데만 매애애애애우 오래 걸렸었죠 (아련)
+다음편은 오늘 자정~새벽 1시 사이에 올라옵니다. 조회 추천 선작 코멘트 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