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5화 (5/102)

00005 2. 카리스티아 대연회 =========================

정확히 이 주일 후 엘피샤 카르텔리는 자세한 도안과 시제품을 저택으로 보내왔다. 마리는 그걸 가만 살펴 보더니 연신 감탄성을 내질렀다. 이런 완성도가 이 기한만에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확실히 내 눈에도 그녀의 드레스는 엄청났다. 고위귀족 여성으로 평생 살아온 일레인이 직접 신경 써서 후원한 디자이너이니 아무렴 서투를까 싶었긴 하다만.

현대적인 감성이 다분히 들어가 전생의 인식이 잔존한 내게도 전혀 촌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드레스는 현재의 내가 사는 이 곳이 창작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소설 속 세계라는 걸 구태여 상기시켰다. 장미를 모티브로 삼고, 전생에서의 용어를 빌려오자면 엠파이어 라인을 변형한 듯한 모양의 드레스는 격조 있는 붉은색이었다. 어깨가 아닌 가슴부터 휘감아 펼쳐지는 치맛자락은 가녀린 꽃잎처럼 하늘거리면서도 경박할 정도로 펄럭이진 않았다. 포인트 부분에 얇은 은실로 수놓인 장미 모양과 기타 장식, 주름은 단조로움을 피하고 화려함을 더했다. 이후 몇 번의 조율을 거쳐 내 손에 떨어진 완성본은 다른 준비를 하는 동안 고이 모셔져 있다가 개막 당일 꺼내졌다.

그렇게 카리스티아의 아침이 밝았다. 가족 전체는 일찍 일어나 길고 긴 목욕부터 하고 채비에 돌입했다.

올해 열세 살이 된 셀리아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는 아니지만 관례에 따라 진정한 황실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아 카리스티아에 참석하게 됐다. 파티에는 얼굴만 잠깐 비추고 어린 후계자나 황족들을 위해 마련된 장소로 바로 이동할 예정임에도 셀리아는 마냥 신난 기색이었다.

셀리아는 후계자가 아니지만, 황족들은 황가라는 뿌리에 묶여 가주나 후계자라는 개념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카리스티아에 전원 참석할 의무를 지닌다. 소집령은 중대사 처리와 대의회 개최 그리고 귀족 감시, 카리스티아는 대연회와 황족 감시의 의도를 지닌 행사라는 게 뻔히 드러나는 셈이지.

해가 지고 나서 시작되는 개막 연회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시점에서, 나는 저택 2층 서재의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들었다. 이미 대부분의 치장은 끝난지 오래라 시간이 빈 탓이다. 연두색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셀리아가 옆에 앉아 날 따라해 보겠답시고 책을 펼쳐들었다가 금세 선잠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얇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고요가 찾아왔다. 노을이라 하기엔 애매한, 늦오후의 빛바랜 종이 같은 햇살은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창을 그대로 투과해 발 끝에 일렁였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괜시리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윤이설일 적에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도서관에 가야지만 볼 수 있어 아쉬웠는데, 라니아가 되니 넘쳐나는 게 돈이라 어떤 서적이든 쉽게 구할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또한 피아노를 좋아한다. 부드럽고도 강인한 음색을, 풍성하게 펼쳐지는 음역대를, 온유한 슬픔부터 격정적인 희열까지 표현해내는 다양성을 즐긴다. 몇 없는 친구 중 유달리 친했던 아이의 어머니가 피아노 강사셨던 탓에 집에 놀러갈 때마다 그곳에 있는 피아노로 무료 강습을 받았던 것이 생각난다. 이론은 이미 책으로 익혀 두었고 배움도 빠른 편이라 금세 몇 곡 정도는 외워서 칠 정도가 되었었지. 그건 정말 행운이었다.

'라니아'도 책을, 피아노를 좋아했을까?

그것은 소설 속에 전시된 악녀에게는 설명이 허락되지 않은 개성이었다. 철저히 주인공에 맞춰 재단하고 편집한 활자 덩어리가 그녀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삭제된 것인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지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살아 숨쉬는 인간 라니아의 정체성이었다.

무엇이 나를 다시 숨쉬게 했는가? 무엇이 '라니아'를 죽였는가?

잊을 만하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읽는 것에 지쳐서 그만 치워두기로 한 골칫덩이 책이 왜인지 정신 차리고 나면 손에 들려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짜증이 나서 들고 있던 책에 억지로 집중했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관심을 가져 온 대륙 역사서였다. 어느 세계든 다를 것은 없는지 여기도 각종 흥망성쇠가 시대별로 이뤄졌고 인과 관계가 명확한 역사적 사건들이 세대를 건너 이어졌다. 이 책의 작가는 정말로 '꽃물 든 하늘'을 쓸 당시에 이렇게까지 상세한 설정을 해 두었을까? 내가 보기에 그렇진 않다. 주인공 커플의 이야기를 쓰기에도 부족할 시간에 몇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대륙 전체의 세세한 역사를 지정할 이유는 없지 않나.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세상이다.

풀 수 없는 숙제를 안고 시간은 내달렸다.

"아가씨, 출발 채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가자."

나는 바닥에 늘어진 마지막 노을을 밟고 일어섰다. 사브작사브작,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적막 속에서 울렸다. 셀리아는 하녀의 등장과 동시에 퍼뜩 깨어나고는 눈을 부비며 날 올려다보았다. 그런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셀리아. 갈 시간이야."

"응, 언니."

아이의 손을 잡고 방 밖으로 나와서 일레인과 대공을 대동한 채 다 같이 한 마차에 올랐다. 출발 직전 헐레벌떡 달려온 하인이 내게 뭔가 내밀었다. 금빛 깃털로 장식한 자그마한 브로치였다.

"파트너 분께서 꼭 착용해달라 하셨습니다."

나는 그걸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애매한 투로 쳐다보았다. 내가 입을 드레스 디자인에 딱 어울리는 장식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럼 대단하신 파트너께서는 오늘의 스타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게 되는군. 하긴 그 사람 정보상 세력이 좀 짱짱한가.

개막일에 입는 개시 드레스는 개인의 개성과 명성을 드러내기에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것의 디자인이 결정되면 나머지 일정에서 입을 옷들은 적당히 모방하거나 변형하는 식으로 맞출 정도니까. 그만큼 각자 제가 입을 드레스를 비밀에 부치기 바빠서 캐내기가 국가 기밀만큼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물론 관례상 나도 아무나 옷을 볼 수 없게 조치를 취해 두었고.

방금 든 생각인데, 그와 동업자가 되지 않았다면 상황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겠다. 내 선택은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파트너는 누구로 정했느냐?"

마차가 출발했다. 대공, 라니아의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브로치를 살피며 물었다. 일레인이 제 남편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한 달 동안 기어코 이 부부는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결국 한 쪽만이 이겼다. 이로써 일레인과 같은 입장이었던 내가 받아낸 결과는 패배.

나는 카리스티아가 종결된 후 절차를 거쳐 라인하르트와 약혼한다. 결국 시간이나 죽이며 은거하려던 내 계획은 영영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긋하게 눈웃음지으며 대공에게 답했다.

"적당한 영식을 골라 청을 넣었습니다."

영식이라는 호칭은 결코 황태손에게 쓸 수 없다. 대공의 표정에 못마땅함이 서렸다. 이 황실에서 견줄 자 드물게 정통성 있는 피를 타고난 황자 치고는 형편없이 혼탁한 빛의 눈이 내게 쓸모없는 객기를 부린다고 질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는 중간에 뜨문뜨문 대화를 빙자한 대치를 벌이며, 루 할레시온 가의 구성원들은 황궁에 입성했다.

개막 연회가 벌어지는 곳은 규모가 장대하기로 유명한 솔지아 궁이었다. 깜깜한 밤을 밝히는 조명이 빈틈없이 주변 정원과 길을 메웠고, 샹들리에 불빛이 궁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 새어나왔다. 우아하게 퍼지는 음악 소리와 우렁차게 외치는 입장 알림이 건물 밖까지 들렸다.

"투르크 백작 부부와 투르크 영식, 그 파트너 둘째 달리움 자작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안테뮬란 자작 부부께서 입장하십니다."

"데가사르 남작 부부와 데가사르 영애, 그 파트너 셋째 하시펜도 자작 영식께서......"

신분 상관 없이 도착한 순서대로 입장이 진행됐다. 앞에 줄 선 다섯여 개 가문의 일원들이 들어가고 나서 우리는 초대장과 신분 증명패를 내밀며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올랐다. 아마 꽤 오랜 세월 황궁에 몸담아왔을 것이라 추측되는 나이 지긋한 시녀와 시종이 우리를 보고 동시에 놀라 서로를 난처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그들에게 흘끔 시선을 주자 시종이 뒤늦게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크흠. 루 할레시온 대공녀와 그 파트너, 멘데로프 영식께서 입장하십니다."

부모와 일부러 따로 입장한 가문의 후계자에 약혼이 비공식적으로 확정난 여인의 파트너가 된 다른 가문의 영식까지. 시종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난 하나도 안 유쾌한 상황인데 샤카르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연신 작게 킥킥댔다.

"아무래도 에빌은 천재가 분명해. 혹시 황태손을 엿먹이는 101가지 방법 같은 책 가지고 있는 거 아냐?"

"그런 무가치한 질문은 대체 왜 하는 거죠?"

"있으면 하나 달라고 부탁하려 했지."

"그딴 것 없으니 그만 웃어요. 안 그래도 쏠린 시선이 더 쏠리니까."

"알았어, 알았어. 나도 이 전쟁터에서 계속 웃을 수 있을 만큼 머릿속이 꽃밭인 건 아니라고."

샤카르는 그 말대로 곧 유쾌한 미소를 지우고 품위 넘치는 온화한 표정을 띄웠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다정스런 눈빛을 한 채 팔을 내미는 것에서 그가 귀족 영식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와중에 내가 착용한 금빛 브로치를 곁눈질로 확인하고 슬쩍 눈을 찡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틈에 나 역시 그의 가슴팍에 달린 똑같은 브로치를 발견했다.

내가 보기엔 샤카르, 당신도 황태손의 기분을 망치는 방법을 꽤 잘 아는 것 같아. 심드렁하니 생각했다.

나는 샤카르의 팔짱을 끼고 문을 지나 금빛 찬란한 홀에 발을 디뎠다. 수백 명의 귀족들 중 상당수가 우리를 주목했다. 개중에는 라인하르트도 있었다. 차마 드러내놓고 따지지는 못하지만 그는 수많은 감정을 담아 나를, 그리고 샤카르와 맞춘 황금빛 브로치를 강하게 직시했다. 그의 옆에 나를 대신해 자리한 프리드리히의 여동생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마 보좌관의 누이라는 이유로 원래 파트너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억지로 끌려온 거겠지. 따가운 눈길들을 무시하고 보란듯이 홀 중앙을 지나 계속 걸었다.

입장 이후로 내가 취해야 할 첫 행동은 라니아의 증조모 카넬린 황태후와 조모 네피아 황후에게 인사하는 것. 현 황제 오벨 3세는 최근 몇 년새 병증이 심해져 겨우 자리만 지키고 있지, 실질적인 업무 수행은 불가한 상태라 오늘도 오지 않았다. 덕분에 황태자만 불안한 권력을 가지고 직무대행 중이지. 나는 샤카르를 양심상 잠시 떼어두고 홀로 단상 위에 올라가 예법에 맞게 고개를 숙였다.

"황태후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국의 꽃을 보아 나 또한 기분이 좋구나. 그래, 일전에 황태손과는 잘 놀다 갔느냐?"

황태후는 나를 예뻐하는 황실 어른 중 한 사람이다. 말하는 걸 보아 하니 일전에 보낸 편지도 이 분 작품이었나보군. 하기사 오락가락하는 황제 양반이 제 손자의 요청을 받고 그런 멀쩡한 편지를 나한테 보냈을 거라 생각하는 바보는 적어도 할레시온에는 없겠다만. 잠깐, 그럼 라인하르트는 무려 증조모에게까지 그딴 부탁을 했단 말인가. 어이가 없군 그래?

그녀는 황태손과 나의 사적인 만남에 협조했지만 그저 증손자 녀석 청 한 번 들어주고 만 것이었는지 내 파트너에 대한 추궁은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나 또한 생긋 웃으며 입 싹 씻었다.

"예.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못 본 새 훌쩍 자라 어른이 되었구나, 라니아. 할미가 더 자주 초대해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한이다."

품위의 결정체이자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황후가 이어서 말했다. 얼굴에는 주름이 졌지만 노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가 돌았다. 할머니라기보다는 큰어머니 뻘로 보인다. 물론 라니아의 진짜 큰어머니는 르웰린 가 출신의 황태자비로서, 황후와 별로 닮진 않았지만.

오벨 3세의 사촌으로, 할레시온 황실의 유전인 적안을 매우 뚜렷하게 물려받은 네피아 황후는 라니아의 든든한 뒷배이며 그녀 자신의 젊은 시절과 거의 판박이 수준으로 닮은 손녀 라니아를 어릴 적부터 예뻐했다. 그녀 덕에 라니아가 황실에서 어느 정도 인간적인 입지를 지킬 수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정중하게 대해드려야 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뵐게요, 황후 폐하. 언제든 괜찮으실 때 불러 주세요."

"아무렴 그래야지. 안 그래도 네가 너무 저택에만 기거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던 차였다."

"제가 그닥 외향적이지 않아 그런 것이니 염려는 마세요."

어차피 라인하르트와의 약혼 때문에 더이상 마음 놓고 저택에 붙어있을 수 없게 되었는 걸. 부아가 치밀었으나 생글생글 웃으며 감추었다.

"그렇더라도 얼마간의 교류는 유지토록 하여라."

"물론이에요, 황후 폐하."

대화는 안부 형식으로 짧게 하고 마무리지었다. 인사를 올리고 단상 아래로 내려가 이번에는 황실 일원들이 오랜만에 한데 모여 회포를 푸는 쪽으로 갔다. 내가 황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신분이라 그랬다. 샤카르는 여기까지도 대동하지 못했다. 어차피 데리고 가려고 찾아 봐도 어디로 간 건지 도통 보이지를 않아서. 그냥 적당히 놀다 내게 돌아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주길 바라며 지나가는 시종이 든 쟁반에서 샴페인 한 잔을 집어들다가.

"라, 라니아 대공녀."

나와 가까운 쪽에서 정재계 인사들과 이야기를 막 끝낸 에단을 맞닥뜨렸다. 그는 우물쭈물, 자기가 말을 걸어놓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는 투로 난처한 얼굴을 했다. 라인하르트는 변했지만 에단은 어쩜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인물 설정이 그토록 굳건할 줄이야. 난 솔직히 그가 금세 지쳐서 내게 관심을 끄고 나가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 음,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보네요, 르웰린. 거의 일 년 만인가요?"

"사적으로는 그렇지만, 공적으로는 반 년 정도 됐습니다."

"그랬던가요."

평온하게 말하며 샴페인 잔을 하나 더 집어 잔뜩 긴장한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멀뚱히 쳐다보다 얼결에 그걸 건네받았다. 딱히 개인적인 억하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그를 나름 부드럽게 대해주었다. 에단은 거기에 놀란 모양이다. 4년 전 사적으로 교류하던 많은 이와 절연하고 원한 관계든 아니든 거리를 두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확실한 정리를 해두려 한다. 일괄적으로 잘라냈던 관계들에게 알맞은 결론을 내 줄 필요성을 최근 느꼈거든.

"얼마 전에 3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축하합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

"......"

미치도록 어색하군. 에단은 연락을 끊기 전만 해도 남자들만 득시글한 무가에서 태어나 여자 대하는 데 한없이 서투르다면서 나와는 잘만 놀던 인간이었는데. 나는 심지어 그가 내 성별을 여자가 아니라고 규정한 것인가 하는 추측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웬 조심스러움이람. 제멋대로 돌아선 나를 향한 원망이면 모를까. 지난날 내가 너무했나. 뭐, 대화할 거리가 없다면 나도 더 시간을 허비하진 않을 것이다.

"더 말씀할 것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황실 종친들께 인사를 올리러......"

"자, 잠깐!"

뱅글 뒤돌아서 한 발짝 떼기 무섭게 에단이 다급하게 막았다. 또 뭐.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봐주자 강아지마냥 끙끙대던 에단이 어렵사리 얼버무렸다.

"왜......그동안......"

"문을 걸어 잠궜냐고요?"

말을 대신 마저 이어준 건 나였다. 에단이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이 두절되고, 만나자는 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잖......습니까. 사 년 동안. 사교계에도 필수가 아니면 거의 안 나오시고. 어쩌다 만나도 대화란 대화는 전부 끊어버리시고."

"네, 그랬지요."

"제드릭 공녀, 때문입니까?"

이 대목에서 그는 애완견이 주인 눈치를 보듯 했다.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나올 뻔한 걸 겨우 되삼켰다. 내 선택에서 비롯된 상황이니 뭐라 하진 않겠지만 좀, 성가신 건 사실이었다.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말했다.

"제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한 황태손을 증오할 수는 있어도, 그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당신을 같은 이유로 외면할 수는 없어요."

"그럼......"

"제가 끊어낸 것은 당신 개인이 아니에요. 정말로 반역을 도모했던 3황자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수많은 귀족과 황족을 반역이라는 명목 하에 한데 묶어 숙청한 황태자와 그 일가, 살아남기 위해 반역 의사가 없음을 방계 독립으로 증명하기까지 한 제 가족을 이참에 쳐내야 한다고 강력 주장하던 황태자비와 1황녀를 가족으로 둔 당신. 저는 이 모든 사람들이 속해 있던 모임 전체를 제게서 떨어뜨려 놓았을 뿐입니다."

르웰린 후작은 지극한 황태자파로서, 르웰린 가를 깊이 신뢰하고 힘을 실어주고자 한 황태자에 의해 누이를 황태자비로, 1황녀를 부인으로 둔 사람이다. 그러니 두 여인의 주장에 르웰린 후작의 의견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이로써 나와 명백한 적대 관계가 된 르웰린 가의 후계자 에단과는 가까이 지낼 이유가 없게 됐다.

고모를 황태자비로, 어머니를 제국의 1황녀로 둔 나와 라인하르트의 외사촌 에단 르웰린은 할 말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두 번째 챕터 돌입입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선추코는 특히 더 사랑합니다 (뜬금 사랑고백)

+앗 이걸 빼먹었네요. 다음 편은 아마 내일 올라갈 거예요! 최종 수정이 빨리 끝나면 오늘 안에 한 편 더 올라갈수도 있지만 확실하지가 않네요...

《오늘의 악.살.다》

에단 르웰린의 기준에서, 라인하르트는 그의 내종형제 (친사촌)이자 외종형제 (외사촌)이다. 즉 겹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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