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2. 카리스티아 대연회 =========================
나는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고 말끔히 정돈된 사무적인 눈으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그와의 결말은 적의와 친분 둘 다 없는 완벽한 타인으로의 회귀였다.
"분명히 당신의 잘못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때로 존재만으로 제게 위협이 되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게......접니까."
"예."
당연한 사실을 되묻는 걸 보니 영 찜찜한가 보다. 그래도 난 단호히 대답했다.
에단은 금붕어처럼 입만 몇 번 뻐끔대다 더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봄철 잔디를 연상시키는 색의 머리카락이 어쩐지 풀죽어 보였다. 나는 의례상 입가를 끌어올리고는 황족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그들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다가 내 등장을 눈치 빠르게 인식하고 알아서 주제를 전환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안녕하셨나요, 여러분."
"오, 대공녀가 왔구만. 참으로 오랜만일세."
"에빌 대공녀님을 뵈어요."
"잘 지내셨나요?"
황족들은 제각각 마주 인사했다. 황녀, 황비,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대표적인 구성원이었다. 황자들이야 씨가 마른지 오래고. 오늘은 라인하르트의 누나, 1공주도 왔군.
"정말 오랜만에 만나네요, 에빌 대공녀. 저번에 제 딸아이의 약혼식에도 오지 않으시고......몸이 많이 좋지 않으셨나 봐요?"
그 중 2황녀가 섭섭하다는 듯 내 오랜 부재를 지적했다. 나는 태연스런 거짓으로 대처했다.
"아, 네. 제가 불행히도 잔병치레가 많은 체질이라 그 날 아쉽게 불참하게 되었네요. 그 일은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나, 괜찮아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아니에요. 제 불찰이죠."
손에 들린 샴페인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게 맛이 좋다. 그러자 에단의 어머니, 1황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화가 끊긴 타이밍을 잡아챘다.
"에빌 대공녀, 황태손 저하와 곧 약혼하신다 들었어요. 언제부터 추진되던 사안이었나요?"
1황녀 또한 종친회 소속이다. 사실 그녀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어른들 거의 전부가 그렇다. 즉 내막을 다 알면서 일부러 화두로 제시한 거다.
황태손비라는 자리가 우리 가문에게는 구원인 동시에 새로운 외줄타기의 시작이겠지만, 반대로 이미 황실과 겹으로 혈연을 맺은 르웰린 후작가에게는 한 쌍의 날개를 더 다는 셈이 될 것이다. 내심 그 자리가 탐났겠지. 마침 에단의 여동생이 혼인에 적합한 나이대이기도 하고. 물론 소설 내용대로 후일 나타난 아이린이 약혼자 자리를 빼앗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르웰린의 야망은 금세 식을 테지만 말이다. 몇몇이 집중한 가운데 사근사근 말했다.
"한 달쯤 되었어요. 종친회에서 황태손 저하의 의사를 받들어 진행했다고 하더군요."
"아아, 그렇군요. 축하해요."
"축하드려요."
"축하하네."
진정성 없이 내건 축하 멘트를 주위의 황족들이 앵무새처럼 일제히 따라했다. 몇몇은 부러운 눈초리였고 몇몇은 시샘이나 질투를 담아 나를 은근하게 쳐다보았다. 황태손비 작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진심으로 축복하는 투였지만.
나는 축하에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내게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상황을 관망하던 황태자 부부를 살폈다. 필시 전략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결정임을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탐탁지 않을 터.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썩 좋지만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위 귀족의 가주들을 만나러 갔다. 난 은근히 안심했다. 솔직히 지금 당장 그들이 말을 걸어 온다면 어찌 대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잡히던 상태였거든. 예비 며느리 노릇을 자처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조카 노릇을 하자니 주변 눈총 때문에 별로고.
어쨌든 기분 나쁜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나도 라인하르트의 비가 된다는 생각만 하면 체할 것 같단 말이야. 어떻게든 이 약혼을 파탄내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아 아직까지는 기회를 엿보며 숨죽이고 있는 것 뿐이다.
"에빌 대공녀."
한눈 판 사이에 금세 또다른 주제로 흐른 이야기에서 은근슬쩍 물러나있던 그 때 1공주 에티에네트가 나를 불렀다. 곧 어느 유력 백작가로 시집을 간다 했던가. 그렇다면 들으나마나 선한 의도의 말은 아닐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그녀를 보았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에티에네트는 모호하게 미소지었다. 모험가에게 수수께끼를 던지는 비밀의 수문장처럼. 보기 좋게 예상을 빗나간 발언에 잠시 머리를 굴리다 한 가지 짚이는 점을 찾아냈다.
"제가요? 적어도 제가 아는 선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저도 모르는 무형의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모를까. 황가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죠."
유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녀는 얕게나마 내 유년 시절이 어떠했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대단하니 어쩌니 뜬금없이 지껄인 건 그 난리를 쳐 놓고도 자기 남동생이랑 약혼할 생각을 다 했냐고 비꼬는 거다. 해서 나는 '나도 이러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다'라고 응수해 주었다.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최근 힘을 불린 귀족가를 황태자파로 포섭하기 위해 정략혼을 하는 그녀를 동시에 꼬집는 말이기도 했다. 너와 나는 다를 것 없는 상황이다, 이거지. 이런 부류의 대화에는 둘 다 뼈가 굵어 못 알아들을 만한 것은 없었고, 에티에네트는 억지로 웃으며 대화를 종결해야 했다.
이후로는 적당히 묻는 말에 대답해주고 대화에 맞장구쳐주며 시간을 버리다 알맞은 때에 이 황금빛 권좌의 집단에서 쏙 빠져나왔다.
혹시 아직 셀리아가 중앙 홀에 남아있나 둘러봤지만 시간이 꽤나 지난 후라 그런지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홀 왼편에는 이곳과 분리되어 복도로 연결된 다른 연회장이 또 있으니 아마 거기 있겠지. 미성년이었던 열세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는 나도 주로 거기에서만 놀았다. 실상 본 홀에 당당히 서 있게 된 것은 사 년간의 카리스티아 폐지라는 공백을 훌쩍 뛰어넘어 열아홉이 된 올해가 처음인 셈이다.
"엇. 저기, 루 할레시온 가의 장녀인가 봐. 레트, 저기 봐봐. 평소에는 사교계에 등판 잘 안 한다면서. 오늘은 나왔어."
"그러게. 국가적 행사여서 그런가. 우리 사촌이지?"
"응. 그렇지......야, 근데 저 영애 진짜 라니아 대공녀 맞아? 어렸을 때 얼굴만 봐서 갑자기 헷갈려."
"이 멍청한 새끼들아, 너네는 자기 친척이 누군지도 몰라? 저 영애는 에빌 대공녀 맞고, 촌수상 너네 사촌도 맞으시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너야말로 멍청한 새꺄. 우리 로엔세르 가문이 저쪽이랑 연 끊고 산 세월이 얼만데. 고모님이 사랑을 선택하시느라 루 할레시온 대공과의 결혼 당시 로엔세르의 이름을 버리기까지 했다니까?"
"그건 좀 의외군. 우리나라에선 연애 결혼 꽤 자유로운 편 아니냐. 로엔세르 공작께서 반대하셨나 보지?"
"듣기로는 혼연을 맺어서 도움될 것 하나 없는 유약한 자라며 노발대발 하셨다더라. 캬, 역시 우리 조부님."
"그러게, 역시 로엔세르 전 공작. 만일 여태껏 살아계셨으면 너네들 하는 꼬라지 보고 불같이 화내셨겠다, 그렇지 않냐?"
"너네라니. 난 빼고 말해라, 이나르. 기분 나쁘니까."
"우리 꽤 모범적인 귀족원이거든? 너나 똑바로 살아, 이 무서운 자식아. 근데 잠깐만, 레트 너 방금 내 욕했지!"
"내가 뭘?"
"헐. 뻔뻔한 내 형제."
"꺼져."
"아이, 왜 그래."
"붙지 말라니까. 말귀를 좀 알아들어 봐라."
"이 놈들 왜 갑자기 사랑싸움이야? 어이, 거기 쌍둥이. 사랑싸움은 집 가서 해."
"아......저 새끼랑 놀지 말아야지. 가자, 세트."
"그래, 레트."
"야, 그렇다고 진짜 날 버리냐! 세크네트! 레테일!"
다른 귀족들이 뒤쪽에서 저들끼리 속닥거렸......아니, 시끄럽게 떠들었다. 나는 곁눈질로 신원을 확인했다. 후일 여주인공 아이린의 가문이 되는 에네아스 백작가의 장남 이나르와, 일레인의 친가쪽 외사촌들이었다. 내가 좀 크고 나서야 일레인과 그녀의 가문이 끊었던 연을 다시 이었으니 친분은 거의 없다만. 뒤늦게 생긴 사촌이 신기하긴 하겠지. 가주가 병중이라 대타로 쌍둥이 중 둘째를 내보내고 첫째는 예정대로 후계자로서 참석했다더니 정말이군.
그들이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알아본 영애와 영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흥미어린 눈으로 들러붙는 것들을 한참 응대해주느라 같은 자리에 묶여 있었다. 지루하고 성가신 사교 활동에서 해방된 것은 1부 연회의 마지막 순서, 춤 시간이었다.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이 한순간에 흩어졌고, 다수가 파트너를 찾아 댄스 플로어로 들어섰다.
드디어 자유로운 혼자가 된 나는 어쩐지 이방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감상에 젖어 솔지아 궁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하늘 모르고 솟은 천장은 신화적 주제의 그림과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을 고급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문양과 장식이 거대하게 뒤덮었고, 대칭형으로 놓인 조각상과 은촛대가 장식 삼아 구석을 채웠다. 서양의 고궁에서나 볼 법한 사치스럽고 고상한 건물이었다. 테이블과 댄스 플로어, 직계 황족을 위한 단상도 어김없이 눈에 들어왔다. 영광과 축배의 방답게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번쩍거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여기에 어림잡아 수백 명의 귀족과 황족이 천문학적인 가격의 의상을 차려입고 자리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딱 유럽의 궁정 연회 같았다. 복색이며 건축 양식, 기타 물품들이 묘하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 같은 디자인인 것만 빼면.
그리고 나는 이 그림 속의 한 사람이었다. 어느샌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클래식한 음악이 바닥을 깔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짝을 선택해 춤을 추었다. 휘황한 반짝임으로 가득한 사교와 권력의 공간에서, 나는 한동안 할 일을 잃고 테이블 근처에 멀뚱히 서 있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가장 중앙에서 무대를 주도했다. 라인하르트는 영 안 내키는 얼굴로 스카일러 영애와 자세를 잡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 저마다 즐겁거나 담담하거나 아니면 그도 아닌 얼굴을 한 채 우아하게 움직였다.
어쨌거나 이곳은 축제를 위해 열린 공간이었다. 어쩐지 나만 소외된 듯한 카리스티아를 위한.
이대론 안 되겠지. 나도 참석자니까. 이번 곡은 이미 시작했으니 다음이나 다다음 곡에 들어가던지 해야겠다. 그 전에 일단 바람처럼 사라진 내 파트너부터 찾고......
"뭐하냐? 넋 나갔어? 유체이탈?"
아. 바로 찾았네. 나는 김샜다는 표정을 하고 내 눈앞에다 손을 내젓는 샤카르를 확인했다.
"춤추는 거 구경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실망이야. 사라진 파트너는 안중에도 없으시군?"
"당신의 부재를 눈치챈 순간이 몇 초 전이었네요."
"몇 초라니......기뻐하라는 건지, 아님 말라는 건지 도통 의도를 알 수 없는 대꾸라고 생각하지 않냐......"
"흐음? 저는 모르겠어요."
난 모르쇠로 일관하고 아예 의자에 자리잡았다. 샤카르는 어이없어하다가 포기하고 내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우리는 별다른 말 없이 댄스 플로어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한 곡이 거의 끝나갈 즈음 그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슬쩍 알려주었다.
"아까는 아버지한테 붙잡혀서 훈계 좀 듣고 거기에 추가로 다른 가문 가주들 앞에 끌려가 인사 나누느라 자리 비웠었어."
맞다. 샤카르 이 인간, 명문가 멘데로프의 공식적인 후계자였지. 작년에 누이가 죽고 새로이 후계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여기저기 얼굴 비출 곳이 많겠다.
"그랬군요. 어딜 갔나 했더니."
"어. 그렇게 됐다. 미안."
나는 나직이 말하고 자세를 비스듬히 기울여 턱을 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명에서 한끗 빗겨난 장소여서인지는 몰라도 얼굴색이 약간 어두웠다. 그럴 수밖에. 누이의 빈자리를 자신이 대신 받았다는 사실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왔을 테니까.
그러나 그 감상평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내게 르쉬네가 금기어이듯, 작년부터 샤카르에게 '셰카이나 멘데로프'는 금기어가 되어서. 두 살 터울의 재능 많던 누나를, 샤카르는 끔찍이도 아꼈다. 남성에게 우선적으로 부여되는 계승권을 의도적인 일탈로 제 누이에게 넘길 만큼. 그랬던 그녀의 죽음으로 샤카르는 후계자가 되었지만, 그 허울좋은 칭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그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획득이 되어주진 못했다.
그가 귀족처럼 안 보이는 이유 중에 하나가 특유의 자유로운 영혼 때문이거든. 그런 사람이 평생을 쫓아다닐 가문이라는 구속에 좋아할 리가 없잖아.
"에빌. 너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읽히니까 나 좀 잠깐만 보지 말아주라."
내게 눈 돌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의 시야는 많이 넓은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가벼운 어조가 아닌 낯선 온도를 지닌 것이 들려와서 놀랐다.
"......실례했어요."
"아니 뭐, 실례까진 아닌데. 그냥. 애먼 사람한테 동정받는 느낌이라서."
음. 그건 아닌데.
"저기, 난 스스로가 동정받는 걸 싫어해서 다른 사람도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방금은 당신이 잘못 안 거예요."
조곤히 정정해주자 그가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그러고는 자기가 실수했다면서 사과했다.
"내가 예민하게 군 거라면 미안."
"당신답지 않게 사과를 하네요. 그것도 벌써 두 번째로."
"허. 네 머릿속의 나는 대체 얼마나 안하무인인 거야?"
"알아서 상상하시길."
"아이고 세상에."
잠깐 침울했던 게 무색하게 그는 금세 돌아와서 과장된 투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바람 새듯 웃어넘겼다. 이래야 샤카르지.
어영부영 서너 곡 정도 더 넘기고 나서, 그는 뒤늦게 신사 행세를 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와서 뭔 춤이냐고 따지고 들었더니 반강제로 손을 붙잡아 끌고 나오더라. 하여간 막무가내.
"레이디, 제게 당신과 춤을 추는 영광을 주시겠......아니 파티장에서까지 이래도 되는 거냐?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평판 신경 안 써? 아, 너는 별로 안 쓰던가."
마주서서 댄스 플로어가 정리되고 다음 곡이 시작하길 기다리다가 그가 느끼하게 웃으며 얘기하길래 명치를 향해 주먹을 날렸더니 저 난리다. 샤카르는 가차없는 반사신경으로 중간에서 잡아챈 주먹을 황망히 내려다보곤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힘을 가해 내 손가락을 펼쳐서 살짝 잡았다. 춤을 추기 위한 준비자세의 일환이었다. 샤카르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도대체가 예측 불가하다니까. 이러다간 머지않아 네 주먹 맞고 세상 하직하겠다, 그치?"
나는 그의 어깨에 한 쪽 손을 올리며 태연스레 긍정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당신에게 주어진 선택이 그 둘 뿐이라면. 뒷말은 깊숙히 눌러두었다.
웃자고 한 말에 진지하게 대답한 나 때문에 그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아. 내 목숨 어떡하지......"
"잘만 막더만요, 뭐."
얼빠진 표정을 짓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때마침 시작된 음악에 맞추어 발을 옮겨 디뎠다. 샤카르는 투덜투덜, 뭐라고 궁시렁대더니만 이내 안정적으로 나를 리드했다.
이번 곡명은 아르얀로드의 미뉴에트. 유명한 춤곡이라 이 정도는 무리없이 진행할 자신이 있었다. 그건 샤카르도 마찬가지인지 거의 완벽하게 동작을 수행해나가는 중이었다. 반면에 우리 옆자리의 에단은 운동신경만 뛰어났지 이런 쪽에는 영 젬병이었다. 오죽하면 '꽃물 든 하늘'의 한 장면에 여주인공 아이린과 그의 댄스 강습이 있었겠는가. 파트너가 불쌍했다. 나는 신나게 버벅대고 있는 어떤 영애의 뒤통수를 향해 짠한 시선을 보냈다.
"에헤이. 다른 데 정신팔지 말고 집중해라, 대공녀님."
그러다가 과한 오지랖으로 인해 정작 내 발이 꼬여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샤카르가 순발력을 발휘해 등을 받쳐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멋쩍어서 마지못해 고맙다고 말했다. 방금, 얼굴이 너무 가까웠어.
"에단 녀석 구경하고 있었지, 너?"
"어떻게 알았어요?"
"바로 앞에 있는 내가 네 눈이 어딜 보는지도 모르겠냐."
"그건 그렇네요."
빠르게 대답하고 폴짝 뛰어 반 바퀴 돌았다. 이어서 오른쪽으로 한 발짝 내딛고 그 자리에 멈춘 상태로 다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자 장미를 주제로 한 붉은색 드레스가 풍성하게 부풀어올랐다. 정말 장미가 개화하듯 예뻤다. 샤카르는 파트너끼리 밀착하게 되는 다음 동작에서 내게 드레스 하난 잘 맞췄다고 칭찬했다.
"아, 그리고. 아까 에단한테 뭐라고 말했는지 물어봐도 되나?"
멘데로프 백작에게 끌려간 와중에도 날 관찰했군. 딱히 언급하진 않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왜요?"
조명 탓에 거의 하얗게 보이는, 옅은 색감의 묶지 않고 늘어뜨린 백금발이 가볍게 찰랑였다. 샤카르는 손에 스치듯 닿은 머리칼 때문에 간지러운지 손의 위치를 슬그머니 바꾸었다.
"그 녀석 아까부터 생각이 많아 보이길래."
"아. 그거 제가 그렇게 만들었을 거예요, 아마. 옛날에 모호하게 끝난 관계를 재정립한 것뿐이니 신경쓰지 마시길."
"둘이 사귀던 사이였어? 그런 정보는 못 들어봤는데."
"뭘 어떻게 해석해야 그렇게 들리는 거죠? 그와는 어릴 적에 친구였어요. 그닥 깊이 친한 것도 아니었긴 하지만."
"아하."
반응은 그게 다였다. 시간차를 두고 기다려 봤지만 샤카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생각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끊긴 듯한 미뉴에트 도중의 대화는 이후 더 이어지지 못하고 노래의 종료와 함께 끝을 맺었다. 아르얀로드의 미뉴에트를 끝으로 1부 춤 시간이 끝났다. 2부에는 이것보다 긴 춤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 1부에서는 맛보기만 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피차 입을 닫을 우리는 아니었으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빌 대공녀. 저는 영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댄스 플로어에서 나와 테이블로 돌아가자마자 웬 영애가 대뜸 다가와 공격적으로 말을 걸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왜인지 올리기 직전 마지막 수정을 거치고 나면 분량이 1~4화까지의 제 기준에서는 나름 빵빵했던 분량과 같아지는 듯한 느낌이...하하...이번 편도 결국 공백포함 8600자에 육박하는군요...
+다음 편은 내일 업데이트 됩니다! 이 진행 속도대로라면 이번주 토요일 쯤이면 10편까지 무리없이 쌓일 것 같습니다. 이미 있는 비축분으로 10편 쌓기 하는 동안 열심히 새로운 비축을 만들어서 이후로도 연재 빵꾸 안나게 노력하겠습니당 (현재 비축분 12화 정도까지 쌓여 있으니 아..아직은.....여유로울 겁니다! 아마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 항상 감사드립니다! 재미있다고 해주시는 댓글이랑 점점 늘어나는 작품통계 숫자들 볼 때마다 힘이 납니다 ㅎㅎ
+++이번 편 코멘트에 라니아의 약혼이 성사된 이유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네요! 그 관련 내용은 비축분 11회차에 써 두었습니다. 정신없는 카리스티아 대연회 챕터에서 이것까지 주저리거렸다가는 스토리 진행이 난리날 것 같아서 뒤로 미뤘습니다 ㅎㅎ...자세한 내용은 11화에서 확인해 주세용!
++++잉여잉여07님 오타수정 코멘트 감사합니다!
+++++jihana님 조언 감사합니다! '여러분'으로 수정했습니다. 모여있는 황족들 중에는 에티에네트 1공주처럼 어르신이 아닌 분들도 계셔서요 ㅎㅎ
《오늘의 악.살.다》
아르얀로드Arianrhod는 웨일즈 신화의 시간의 여신이다. 즉 아르얀로드의 미뉴에트=시간의 춤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