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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7화 (7/102)

00007 2. 카리스티아 대연회 =========================

새침하게 올라간 눈꼬리는 확실히 생소했으나, 저 머리색은. 또 저 눈색은. 데자뷰 현상마냥 익숙함이 불어닥쳤다. 내가 아는 누군가의 외양 묘사와 심히 닮았는데. 샤카르는 이 여자를 보고 뭔가를 곰곰히 떠올리는 눈치더니 금세 정보상 관계자답게 눈을 빛냈다. 대놓고 말하긴 곤란한 상황이라서, 그는 나보다 먼저 그녀에게 인사하며 내게 자연스레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 세이잔 자작가의 후계시군요. 이번에 비옥한 토지를 새로이 가문의 권역에 편입하시는 데 일조하셨다 들었습니다. 과연 대단하신 수완입니다. 나중에 제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세이잔!

잊을 수 없는 이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리스 세이잔은 여주인공 아이린 세이잔의 언니다. 그녀의 등장으로 나는 단박에 소설 속 '라니아'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사건이 되었던 일의 시작이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이것까지는 라니아가 어떻게 행동하던 간에 상관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급습하는 두려움은 막기 힘들었다. 치맛자락을 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야. 괜찮아. 침착하자. 아직 이 불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악녀 라니아가 아니다.

"......예, 시간이 되면 그리하겠습니다. 멘데로프 영식."

막 성을 낼 작정으로 달려들었던 여자, 이리스 세이잔은 떨떠름하니 대꾸했다. 샤카르는 그 사이 나를 곁눈질로 살피며 자신이 어찌하면 좋겠느냐 눈으로 묻고 있었다. 나는 그를 이 상황에 엮어두고 싶지 않았기에 눈을 굴려 테라스로 가는 길 쪽을 가리켰다. 내가 저기로 슬쩍 빠지겠다는 뜻이다. 샤카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잠시 가 볼 곳이 있어서 이만. 두 분은 이야기 나누시기를."

흠 잡을 데 없는 가식적인 미소를 띄운 샤카르가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사람 많은 곳에서 이러기보다는 조용한 장소로 갈 것을 제안했고, 이리스는 마지못해 응했다.

일말의 친분도 없는 영애 둘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테라스로 향하는 것을 목격한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시선이 쏠리는 게 영 거북해 발걸음을 빨리 했다.

아무 테라스나 골라잡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방에 눈이 가득한 파티장에서 벗어나 은밀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경우 귀족들은 테라스를 찾는다. 대부분은 정치나 연애 등의 이유지만, 나와 이리스는 사뭇 다른 용건일 것이다. 대충 예상가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죄다 성가셔서 머리가 아팠다.

이리스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살벌하게 내게 따졌다.

"대체, 영애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사시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그러고도 그 아이의 친구였다고 하실 자격이 있다고 보시는 건가요?"

대놓고 싸우자는 뜻인가. 나는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 호구처럼 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덩달아 싸한 무표정을 띄웠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세이잔 영애."

"몰라서 물으세요? 영애께서는 그 아이를 소중한 친구인 척, 아주 생색을 냈으면서......결국 다 겉치레였고 거짓말이었잖아요!"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머릿속으로 늘어놓았던 추측 중 세 번째쯤 되는 것이 들어맞았다. 그래. 이리스는 르쉬네의 친구 중 하나였다. 나와 르쉬네가 아주 친했다는 걸 아는 사람이고. 거기다 이번에 르쉬네의 원흉 격인 라인하르트와 내가 약혼할 것 같다는 소식까지 들은 게 분명하다. 에티에네트 1공주에 이어 두 번째 타자로군.

젠장, 나도 황태손과 약혼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해. 빌어먹을 카리스티아.

딱딱하게 굳었던 무표정을 나른하게 풀었다. 테이블에 놓인 와인을 따서 그 옆의 빈 잔에 따라 곧장 입에 털어넣었다. 아, 오늘따라 술이 왜 이렇게 땡기는지.

"세이잔 영애. 영애의 앞뒤 없는 확신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했죠?"

나는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깔아서 말할 때면 내 적안이 어둑하고 위험스럽게 빛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적안을 가진 라인하르트도 그러했고, 황태자도 그러했으며, 황제도 그렇다는 걸 똑똑히 봤으니까. 황가의 핏줄은 어디 안 간다. 이리스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소리 높여 말했다.

"영애와 저하의 약혼이 확정되었다는 발표를 들었어요. 누구보다 그 아이의 죽음에 애석해하고, 크게 영향받아 저택에서 오랜 기간 칩거하셨다면서 황태손 저하와 약혼이라니요? 처음부터 동정을 사 입지를 견고히 하실 작정이 아니었고서야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진 않았을 것 아니에요! 저는 영애의 그 가식을 못 견디겠어요.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고요!"

이 여자, 아까부터 나를 영애라고 칭하고 있다. 말투도 시건방지고. 태도가 전체적으로 영 엉망이군. 지방 사교계 출신이라 그런지 이리스는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했다. 폭발 직전일지라도 꿋꿋이 웃으며 고급진 단어를 사용하는 수도의 귀족 여자들과는 수준이 확연히 차이난다. 나는 그녀를 깔아보며 입술을 움직여 나지막이 경고했다.

"결국에는 억측으로 버무려진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 이거군요. 세이잔 영애, 부탁할게요.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모든 것과 제 약혼을 연결짓지 마세요."

그 때 어딘가에서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스의 뒤쪽에 있는 테라스를 흘깃 살폈다. 거기에서 귀족 몇몇이 훔쳐듣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거리가 멀어서 대화 내용은 잘 들리지 않을 테지만.

불쾌감이 치밀어올랐다. 빈 잔은 내려놓고 새로운 잔에 와인을 채워 마셨다. 이리스는 흥분해서 그 소음을 듣지 못한 듯 격앙된 어조로 대들었다. 목소리 크기 자체는 의도했는지 별로 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저는 적어도 친했던 친구가 불명예로 얼룩진 최후를 맞이한 이후까지 모욕당하는 것을 좌시할 만큼 비열한 사람이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루 할레시온 영애. 영애는 그 아이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는 걸 보고서도 그녀의 복수는 커녕 어떻게든 직계 황실에 붙어 초라한 행색을 벗어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아니면, 애초부터 그 아이를 적으로 여겼으면서 거짓으로 친구가 되고 그 아이가 사랑했던 이를 차지해 승리감이라도 느끼려는 건가요?"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제가 그 '초라한 행색'의 신분으로 영애를 입 다물게 하기 전에 스스로 무례를 취소하시는 건 어떨까요?"

나는 잇새로 비틀린 웃음을 흘리며 물음조로 강요했다. 이 이상 들었다간 내 손으로 직접 카리스티아 대연회의 서막을 장렬하게 부숴버릴 것 같아서 건넨 배려였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지금 무례라 하셨나요? 영애가 그 아이에게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부터 떠올려 보시죠!"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생각 없이 배설한 말은 누구든지 화나게 할 수 있는 특별한 힘을 지녔다. 한낱 자작의 여식 주제에 내 가문의 권위를 싸잡아 깎아내린 것부터 시작해서 르쉬네와 나의 함께한 시절 전체를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나를 비굴하고 싸가지 없는 년으로 만들다니. 분노가 안 끓어오를 수가 있나.

더는 못 들어주겠다. 나는 이만 상황을 종결내기로 결심했고, 그 전에 잠시 소설의 내용을 상기했다. 소설 속의 악녀 라니아는 내가 겪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같은 날에 카리스티아에서 이리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당했다. 라니아가 황태손을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접근하는 영애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다니다가 불의를 참을 수 없었던 이리스가 나서서 화려한 언변으로 큰 망신을 줬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 결과 라니아는 다음 연회부터는 참석조차 할 수 없게 되었지.

이에 분노가 극에 달한 라니아는 이리스의 가문인 세이잔을 없애버리기로 하고 힘있는 조력자 샤카르를 이용해 어느 늦은 밤 세이잔 본가의 저택에 불을 지른다. 그 결과, 세이잔 자작을 비롯한 가족들은 저택과 함께 몰살되었다.

딱 한 명, 당시 새벽까지 밖에서 신년 축제를 즐기느라 집에 없었던 여주인공 아이린 세이잔을 제외하고.

충격에 휩싸인 아이린은 친척 가문인 에네아스 백작가에 입양되어 새오라버니 이나르와 함께 화재 사건의 배후 라니아를 찾아내고, 복수심에 불타 그녀를 직접 나락으로 밀어넣고자 데뷔해 수도 사교계에 입성한다. 아이린은 어차피 머리 좋은 황족인 라니아를 심증이 더 많은 증거만으로 범인으로 몰아 공식적으로 처벌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악녀를 제 손으로 처단해야 하는 주인공이었다.

그렇게 '꽃물 든 하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는, 그녀에게 잘못한 것이 분명 있지만."

나는 그 수순을 그대로 밟고 싶지 않다. 방화야 내가 안 하면 그만이고, 방화의 동기가 되는 '이리스에게 망신당하기' 또한 없는 편이 더 깔끔하다.

고로 내가 참아야 할 까닭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합리화를 마친 나는 목소리에 차츰 감정을 실었다.

"그게 영애가 말하는 종류는 아니에요. 그러니 말도 안되는 소리는 이쯤 하시죠?"

"당신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변명은 그만둬요! 당장, 그 약혼 취소하고 그 아이의 묘역에 가서 백배 사죄하세요."

"멋대로 날 쓰레기로 단정하고서 영애는 마치 자신이 고결하고 의리있는 친구인 양 굴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영애도 만만찮게 엇나갔군요. 영애의 체신 없는 언행은 꼭, 내가 황태손비 내정자가 된 것 자체에 화가 난 것 같단 말이에요? 괜히 내게 질투가 나는 것을 오래전 세상을 뜬 옛 친구를 들먹여 그 이름을 모독하면서까지 풀려는 거잖아. 안 그래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말이지 저열하기 짝이 없군요."

쯧, 혀를 찼다. 이리스는 이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말 그대로 머리끝까지 분개한 상태였다. 엄청난 노기로 인해 완전히 이성이 마비된 채로, 그녀는 삿대질을 하며 소리질렀다.

"이, 이......파렴치한! 넌 사람도 아니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명백한 실언이 드디어 터졌다. 나는 거의 동시에 이리스의 뒤쪽 테라스에 나와 있는 샤카르와 눈을 맞췄다. 꽤 먼 거리인데, 우연이 도왔다. 샤카르는 에단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앞에 팔을 뻗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채 냉랭한 눈길을 이쪽으로 던지고 있었다. 내 신호가 있기 전까지 그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결할 거라 믿을 만큼 나에 대해 잘 아는, 현재로선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의외인 것은, 프리드리히가 구경꾼들 틈에 끼어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런 하찮고 사소한 사교계의 다툼 따위에 신경을 쓰는 인간이 아니다. 경각의 종이 울렸다. 프리드리히가 흥미를 보인다는 것은, 곧 그가 나를 자신의 출세를 위해 쓰고 버릴 소모품 목록에 끼워넣는다는 소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린조차도 그와의 첫 시작은 그런 식이었다.

나는 반쯤 충동적으로 샤카르에게 눈을 다시 돌렸다. 프리드리히만 보면, 자꾸 활자로 읽은 샤카르의 최후가 떠올라서. 짜증나게.

그런데 샤카르가 갑자기 손가락을 들었다. 가리키는 방향이 미묘하게 내게서 벗어났다. 반사적으로 이리스를 응시하는 순간, 그녀의 오른손이 꿈틀했다.

그 손은 바로 옆 테이블에 놓인 와인잔을 아무거나 하나 우악스레 집어들었다. 그건 공교롭게도 아까 내가 마시고 내려놓았던 빈 잔이었다. 나는 그 잔 대신 새로운 잔을 들고 있었다.

난 그녀가 내게 그 어떤 액체도 뿌리지 못하고 헛손질을 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쨍그랑!

이리스는 잔을 세게 내던졌다. 그것도 내 손에. 맞부딪친 두 와인잔은 내 손 위에서 요란하게 산산조각났다. 몇 안 되던 구경꾼이 일순간 싹 사라졌다.

곧이어 샤카르를 비롯한 귀족들이 들이닥쳤다. 사위가 더없이 시끄러워졌다. 홧김에 벌인 짓의 심각성을 깨닫고 벙찐 이리스, 손에서 와인인지 피인지 모를 것을 뚝뚝 흘리며 현실감 없이 서 있는 나.

"아, 이런 개 같은."

감정이 죽은 자가 아니라면 인내력을 잃어야 지당한 상황인지라 나지막이 비속어를 입에 담았다. 정신없는 와중이라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술을 너무 마셔대서 마취가 됐나. 왜 하나도 안 아프지. 이리저리 찢긴 손을 맹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데 손목이 홱 잡혔다.

"너, 괜찮......"

라인하르트는 다급하게 내 손을 확인하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는 당혹에 젖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손을 타고 내려온 검붉은 것이 내 손목을 잡은 그의 손으로 뚝뚝 흘렀다. 반쯤은 와인이고 반쯤은 피 같다. 어찌되었든 내 부상의 근본적 원인제공자인 그의 걱정 따위 받고 싶지 않았으므로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신경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황궁의 불러올 테니까 여기서 그대로 기다려."

"말 못 알아들어?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위선 떨지 말고 꺼지라고."

싸늘하게 잘라냈다. 그는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사나운 태도에 주춤했다. 망설이더니 손을 놓고 몇 발짝 물러선다. 연회의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이려는지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한 투의 권고가 내게 날아왔다.

"너 아직 화가 덜 가라앉았어. 일단 진정하고, 황궁의 오면 간단하게라도 처치 받은 다음에 귀가해서 제대로 치료해."

"......"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화 낼 대상이 옮겨간 건지, 그가 그렇게 못마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황태자 부부와 최고위 귀족들이 여기에 도착해서 더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그런 내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한 라인하르트는 북새통이 된 좁은 홀과 그 너머를 둘러보더니 이내 어지러운 틈을 타 허둥지둥 도망친 이리스를 찾겠다며 자리를 떴다.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건 또 뭔 일이야."

아까부터 라인하르트의 반대편에 서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샤카르가 손에 박힌 유리조각의 개수를 세더니 짜증스레 툭 내뱉었다. 그는 어조만 제외하면 다른 이들과 달리 이 상황에서 지나치리만큼 침착하고 평온했다. 평소 드러내고 다니는 성격과는 완전히 딴판인지라 주의가 쏠렸다.

"네 개 정도 박혔는데 그나마 다행으로 인대는 멀쩡해. 저 새끼 보좌관이 방금 황궁의들 데리러 갔으니까 말마따나 앉아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

그러더니 내 동의는 구하지 않고 멋대로 부축하고 가서 의자에 앉혀버리는 게 아닌가. 그가 옆에서 눈높이를 맞추느라 의자를 짚고 허리를 숙여 조곤하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거 꽤 아플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옆에 있어줄 걸 그랬다."

"당신도 유리 파편에 맞아 봤군요?"

"그렇다마다."

"대체 무슨 인생을 산 거예요."

"재미난 인생이었지. 물어 뭣하냐. 아니, 그래서 아프냐고, 안 아프냐고. 에빌 너 질문에 맞는 대답을 내놓는 경우가 손에 꼽는 것 알고 있어?"

그랬었나. 뭐, 그런가보지. 무시하고 아까 것에만 대답했다.

"안 아파요."

"진짜? 그럴 리가 없는데. 너 혹시 취했어?"

"샴페인 세 잔에 와인 두 잔쯤 마셨으니까 멀쩡한 상태는 아니겠죠?"

"내가 아는 네 주량에는 아직 못 미쳤긴 한데. 약간의 마취효과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정도 고통이 술 마신 걸로 상쇄될 만한 게 절대 아닌데.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하나......"

말끝을 흐리던 샤카르는 문득 생각났다며 주의사항을 일러 줬다.

"아, 유리조각 뽑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냅둬라. 괜히 상처 건드려서 피 두 배로 보지 말고."

"알았어요."

나는 다친 손을 얌전히 들고 움직이지 않았다. 차츰 피가 멈추는 것 같기도 했다. 이미 손은 피범벅이었지만. 흉터 없는 신체는 이제 글렀군.

"근데 당신, 평소랑 다를 바가 없네요. 다들 놀라는데 혼자만 너무 평온한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당황했을 사람 옆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벌거려 봤자 불안감만 더 키워주는 거잖냐.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환자가 겁을 덜 집어먹지."

"......그건 그렇군요."

사실 현실감이 좀 없어서 애초에 심경에 이렇다 할 혼란이 오진 않았으나, 그의 말대로 저런 태도가 조금 더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었다. 어지간히 많이 다쳐 본 건지, 그의 대처는 참 명쾌했다.

황궁의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등받이에 기대 쉬면서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좀 했다.

"샤카르."

"응?"

"저번처럼 욕 좀 해봐요. 이 뭣같은 상황에 대한 광역적인 비난이 필요해요."

"안 될 것 없지."

나는 아수라장이 된 한밤중의 테라스에서 샤카르의 신랄한 욕지거리를 감상하며 말없이 분을 삭였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다음편은 오늘 자정 즈음에 올라갑니다 :D

*2017.6.7 본문 수정 완료. 라니아를 테라스로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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