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2. 카리스티아 대연회 =========================
"여긴 어떻게 온 거죠? 설마, 아까 어머니께서 손님 오셨다고 한 게 당신이었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2층 피아노방에 올라가는 걸 허락받을 만큼 그가 일레인과 친하진 않을 텐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샤카르는 그런 내 의문을 짐작했는지 진상을 술술 풀어놓았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나와 아버지가 사전에 연락을 취하고 정식으로 너의 집에 방문한 거지."
"왜요?"
"왜라니, 서운하게시리. 카리스티아가 폐막해서 나 이제 돌아가 봐야 한다고. 그 전에 우리 가문이랑 친한 루 할레시온 가 저택에 인사차 들른 거야."
이거 아무래도 핑계 같군. 엄격하기 그지없다던 자기 아버지까지 그럴듯한 이유로 꾀어내서 온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든다. 비상한 머리를 왜 이런 쓸데없는 잔꾀에 갖다 쓰는 건지.
"제 가문과 당신 가문이 언제부터 우호 관계였죠?"
"루 할레시온이라는 가문이 막 생길 무렵부터. 진짜 몰랐냐? 가문 일에 지나치게 관심이 없구만. 장차 가주가 될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4년 전이라. 그랬었나. 난 왜 처음 듣는 소리일까. 그의 말대로 내가 가문에 관심이 너무 없긴 했다만. 자업자득인가. 고개를 갸웃하곤 손짓으로 셀리아를 내보냈다. 우리는 문틀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 형세가 되었다.
"아무리 그렇대도 여긴 가족 개인의 공간이에요. 외부인인 당신이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닐 텐데요. 게다가 어머니께서 날 불러 당신과 백작께 인사를 드리게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부상 중이기 때문이죠. 설마 그걸 당신이 몰랐다고 할 셈인가요?"
"쏘아붙이기는. 대공비께서 너 보는 거 허락하셨다, 이 경계심 많은 동업자야."
"어투가 도를 넘네요?"
"아, 미안. 화내지 마라. 너 되게 무서워."
샤카르가 투덜대다 내게 입막음당했다. 그러고는 뭘 잘했다고 또 싱글거리는데 솔직히 웃을 때 미모가 정말 봐줄 만하긴 하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매우 얄미웠다. 팔짱을 끼고 따지듯 흘겨보자 그가 두 손을 항복하듯 들고 빠르게 말했다.
"대공비께서 샤카르 멘데로프라는 이름을 들으시고는 바로 네 친한 친구 취급하시면서 네가 지금 위에 있으니 올라가 봐도 좋다 하시던데. 웬만하면 피아노 치는 건 방해하기 싫어서 연주 끝날 때까지 기다렸어."
"친한 친구요......?"
무슨 그런 헛소리를. 나는 즉시 그의 멱살을 부여잡을 준비 태세를 갖추며 일레인에게 뭔 짓을 했기에 취급이 그렇게 됐냐고 매섭게 추궁했다. 기세 좋게 한 발짝 앞으로 내딛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딱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다시 한 발. 또 한 발. 복도가 운동장처럼 넓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벽에 몰렸다. 난처한지 얼굴을 검지로 공연히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는데, 나는 집요하게 캐물었고 굴복한 쪽은 그가 되었다.
샤카르는 나를 살며시 밀어내며 인상을 쓰고 마지못해 설명했다.
"1년 전에. 장례식장에서. 네가 나 위로해 주는 걸 대공비께서 보셨나 보더라고."
설마 했는데 그거였구나. 머릿속이 일순 복잡해지는 바람에 일그러지려는 눈꼬리에 힘을 주었다. 두어 걸음 도로 물러나서 일부러 놀리듯 비아냥거렸다.
"아. 전설의 울보 샤카르 멘데로프를 탄생시킨 그 순간 말이로군요?"
"으악, 젠장!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쪽팔려 뒈져버릴 것 같으니까......와, 미친......그렇게 말하는 걸 직접 들으니까 진짜 죽고 싶다......"
그의 얼굴에 드물게 홍조가 졌다.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는 등 제자리에서 별 난리를 다 치던 그는 내가 짜게 식어 동정 섞인 한심함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늦게 깨닫고 당장이라도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어하는 투였다. 말리고 싶지는 않다만 그렇게 되면 저택 1층 천장이 뚫릴 테니 할 수 없지.
"뭘 새삼스럽게 창피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냥 차라리 당신답게 뻔뻔하게 구시죠?"
"내가 아무리 얼굴에 철판 깔았대도 그렇지, 어떻게 그 깽판짓을 떠올리고 멀쩡할 수가 있냐......으윽, 내가 진짜 미쳤지! 미쳤어!"
그러더니 또 머리를 쥐어뜯는 게 아닌가. 이런 덜떨어진 작자를 보았나. 한숨을 쉬고 그의 팔을 잡아 내렸다.
"자학은 작작 하시죠. 그러다 탈모 생기겠어요."
"염병, 네가 캐물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아으악, 진짜 깡그리 잊고 싶은 과거였는데."
"그 점은 사과하죠. 자, 이제 제 얼굴도 봤으니 이만 내려가세요. 멘데로프 백작님과 제 부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나요?"
"벌써 가라고?"
"네. 떠나기 전의 인사는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요? 얼굴도 봤고, 에피타이저로 피아노 연주도 들었고, 지금 이렇게 대화도 나누고 있고. 또 뭐가 필요하죠?"
성의없이 말하고 그를 떠밀었다. 다시는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작별인사라니, 나도 지금 만만찮게 오글거린단 말이다. 울상이 된 샤카르는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대강 정리하고선,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서운한 기색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나를 질타했다. 그것은 나를 단박에 깊은 고뇌로 자빠뜨리는 원망이었다.
"냉정한 동업자 같으니. 에빌, 그거 아냐? 나 이제 가면 오랫동안 너 못 만날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카리스티아 덕에 거의 일 년 만에 얼굴 본 거였는데."
"당연히 그렇겠죠. 저는 곧 황태손의 약혼자가 되어 여러 성가신 사교 행사에 참석하느라 바빠질 게 눈에 훤하고, 당신은 후계자가 되었으니 당신대로 할 일이 많을 테고."
나야 어릴 적에는 그냥 황자의 딸이었고, 할레시온이라는 성 앞에 '루'를 달고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서도 방계 황족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만. 유력 귀족가문인 멘데로프의 후계 지위를 최근에 가진 샤카르는 그것에 크게 얽매이게 되는 게 현실이다. 냉정하게 선을 긋자면 샤카르와는 필요할 때 거래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정도의 교류만 있으면 족하니 굳이 자주 만날 필요성도 못 느끼겠고. 요약하자면 아쉬울 것 없다는 소리다.
샤카르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한바탕 설전을 벌여야 할 것 같아서 생각으로 그쳤지만, 이게 내 머릿속에서의 관점이었다.
"그러니 아쉬움은 거기까지만 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동업자."
타이르듯, 그러나 확실하게 끊어냈다. 머리 비상하기로는 나를 어디까지 능가하는지도 짐작하지 못할 수준의 그는 복잡하게 얽힌 상념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았다가, 체념했다.
"......그렇지. 너, 황태손 그 새끼 약혼자였지. 나는, 멘데로프의 가주 후계였고. 에휴, 그래. 나도 이게 뭔 주책인지 모르겠다."
미묘한 감정이 섞인 발언이었다. 마치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 한 켠이 뜨끔해지는. 그러니까, 실상 그와 나의 사고방식이란 상상 이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얘기는 쉬워지지. 나는 내 딴에는 이성적이고 사무적인 무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분석하기 힘든 사람이지만, 필요 이상의 것을 손에 쥐고 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내 분석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당장에 원래의 당신으로 돌아가야 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모호한 말을 그가 어찌 받아들일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아무쪼록 '꽃물 든 하늘'의 샤카르처럼 흘러가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가 바꿀 것이다. 이미 선택해 버린 것이니 내가 책임져야지. 그 시작은, 그가 나와 너무 친밀해지는 것을 막는 일이 되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극히 협소한 인간관계를 가진, 샤카르와 다를 바 없는 소설 속 운명에 묶인. 사람이었단 말이다. 빌어먹을.
짜증이 나는 통에 무표정에 쩍 금이 가 버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가만 두어야 했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았다간 당신이 위험해져."
"에빌. 이럴 때면 이 모든 게 거짓이길 바라게 되니까, 거기까지만 하자."
나는 고개를 모로 돌리며 어렵사리 뱉어냈고, 샤카르는 애원인 듯 다정히 제안했다. 내가 하는 말의 반은 알아들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소설의 내용을 다 알고 시작한 나와 아무것도 모르는 샤카르의 정보 차이 때문에 당연히 다 알아듣지는 못할 말이니 그로서는 최대한의 이해를 순식간에 마무리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볼수록, 나는 그가 알 수 있는 범주 이상까지 초월해 알아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함에 휩싸여야 했다.
얼마간의 침묵을 흘려보내고 인사나 하려고 다시 그에게 눈길을 돌렸는데, 새벽 같은 색의 짙푸른 머리카락이 단단한 굳은살이 곳곳에 자리잡은 손에 의해 또 헝클어지고 있었다. 자학하지 말랬더니 자기 머리 스타일을 망치고 앉았네. 하여간 말 참 안 듣는다니까.
샤카르는 눈이 마주치자 생전 처음 웃는 사람마냥 서툴게 입가를 끌어당겼다가, 금방 일자로 되돌아왔다. 온갖 시답잖은 농담을 곧잘 지껄이곤 하던 그 입술이 움직였고, 얼핏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별을 선언했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가문의 관할 구역이 있는 옛 에온 왕국의 영토로 돌아갈 거다. 이번에는 가출 안 해."
"그렇군요."
무감하게 대꾸했다. 가출을 안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참 잘된 일이다.
"별 일이 없으면 내년 카리스티아 즈음에 네 얼굴, 볼 수 있겠지."
샤카르는 제 희망사항을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년......1062년이로군요."
혼잣말처럼 힘없이 읊조렸다. 모든 것이 끝날 그 해, '꽃물 든 하늘'의 주된 시간적 배경인 1062년이 내년이다.
"될 수 있으면 오지 마세요."
그런다고 안 올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지만. 혹시 모르니까.
샤카르는 그새 진지함의 시한이 만료되었는지 다정스레 설핏 미소하고 손가락으로 내 볼을 콕 찔렀다.
"왜, 내년에 그 새끼랑 결혼하려고?"
나는 인상을 팍 썼다. 망할, 이 거지같은 약혼은 내가 해 가기 전에 어떻게든 끝장낼 테다. 멀쩡한 오른손에 힘을 실어 그의 손가락을 쳐내고 속삭이듯 윽박질렀다.
"죽고 싶어요?"
"그 여리여리한 손으로 어디 한 번 죽여 보라지. 헹."
그러거나 말거나 샤카르는 자신을 향해 퍽이나 위협적으로 손톱을 세우는 새끼 고양이를 앞에 둔 양 코웃음쳤다. 진짜 한 대만 때리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눈매를 찡그렸다.
"이 글러먹은 작자가......당신 내가 활 잘 쏘는 것 모르죠? 내 손에 지금 활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요."
"아는데? 난 네가 칼을 무서워해서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못 썬다는 것도 알고, 종소리를 꺼리는 것도 알고, 나른한 오후 나절의 햇살을 즐기면서 갖는 티타임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눈 내리는 풍경을 매년 겨울마다 기대하는 것도 알아."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그만 폭설이 머릿속을 희게 덮었는지 깡그리 잊고 말았다. 그의 목소리가 2층 복도에 나직하게 깔렸다.
"그러니까 나 없는 동안 엿 같은 상황이 생기면 바로 불러. 나만큼 널 잘 알고, 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 오늘은 내가 엿 같은 상황이라 떠나는 거지만, 네가 도움을 청한다면 그것도 무릅쓰고 올 테니까."
"그러다 당신 인생이 망하면 어쩌려고요."
"음, 예전엔 분명 내 인생만 안 망하면 다였는데 말이야. 어쩌다 보니 이제는 네 인생이 망하면 나도 망하는 게 되어 버려서. 우린 동업자, 그러니까 운명공동체잖아?"
"저런. 피곤한 인생이군요. 미안해요."
"네가 뭘. 내가 머저리인 탓이지."
손사래를 친 그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으로 확인하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갈 때가 다 됐나보다. 나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짤막하게 인사를 내놓고 돌아섰다.
"잘 있어라."
나는 나지막이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잘 있어요."
아직까지는.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나서, 시간을 재다가 이쯤이면 멘데로프 부자가 떠났겠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나도 아래층으로 갔다. 셀리아와 일레인, 대공이 한데 모여 있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길래 왜 그러냐 눈으로 물었다. 일레인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멘데로프 백작과 그 영식은 방금 우리가 배웅하고 오는 길이란다. 그런데 멘데로프 영식과의 인사가 너무 오래 걸렸구나. 백작께서 꽤 기다리셨어. 불쾌해 보이시던데 멘데로프 영식이 혼이라도 나지는 않을지 걱정이구나. "
그렇게 오래 걸렸나? 체감상 시간이 별로 안 지난 것 같았는데. 아닌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가요."
"아, 그리고. 이건 네게 전해 달라던 것인데."
일레인은 품에서 작은 종이 조각을 꺼내 내게 주었다. 누가 보면 무슨 영원한 이별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짐작하기로 이 헤어짐에 그 나름대로 큰 의미를 두었기에 이러는 것 같긴 한데, 아무리 그렇대도 너무 유별나지 않은가. 참 특이한 인간이다.
3층의 내 방으로 올라가서, 침대에 편하게 파묻혀 로즈마리 향을 느끼며 그가 남긴 것을 읽었다.
- 한 달여 동안 놀아줘서 고마웠어, 동업자. S.M. -
나는 그 종이조각을 저번 카리스티아에서 파트너 상징으로 받았던 금빛 브로치와 함께 세 번째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그냥 버리긴 좀 미안해서.
============================ 작품 후기 ============================
예약 아이템으로 올립니다. 오늘 아마 3편 이상은 올라갈 거예요! (비축분은 그렇게 탈탈 털리고......)
+7편에서 활약 (?)하신 이리스 세이잔 영애는 원작소설 '꽃물 든 하늘'의 여주인공 아이린 세이잔의 언니입니다! 제가 본편에서 너무 대충 설명했나바여 ㅠㅠ 7화에 한 문장 더 임팩트 줘서 설명 추가해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한 편 올릴게요 독자님들 모두 좋은밤되세요! 아 물론 읽어주시고 선추코 주시는 모든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관심바라기라 선추코처럼 독자님들께서 보여주시는 반응을 좀 많이 좋아해요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속닥속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