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3. 불과 바람과 순리에 관하여 =========================
얼마간 더 쉬다가 방으로 올라가는 길에 마리와 곧잘 함께 수다를 떨던 하녀가 가까이에서 지나가길래 잠깐 붙잡고 그녀가 갖고 싶다고 한 게 있었냐 물었다. 그랬더니 갖고 싶은 건 딱히 모르겠고 오늘 밤에 있는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보러 가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입이 닳도록 말하고 다니기는 했다더라. 하지만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는 종속 하녀라 좌절되고 말았다고.
불꽃놀이라. 그거야 어렵지 않지. 어차피 엘피샤와 보러 갈 참이었으니까. 그냥 딸려가는 수행인으로 치지 뭐. 나는 일레인에게 밤외출을 허락받으며 슬그머니 그녀를 끼워넣음으로써 생일 선물을 퉁쳤다. 찔리게도 아주 어릴 때부터 내 곁에 있었던 하녀의 생일을 챙겨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차에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깥 날씨가 얼마나 춥던 간에 항상 가녀린 햇살이 들어오는 나의 방은 따쓰했다. 나는 방 옆에 딸린 쪽방 중 가장 작은 곳에 둔 새장에서 사는 전서구를 데리고 와 궁술 연습을 하러 가기 전에 써 두었던 편지를 다리에 매달았다. 이 전서구는 내 동업자가 준 그와의 전용 통신 기구의 일종이고, 이 쪽지는 그에게 보내는 안내 문구다. 그 인간 생일이 1월 3일이라 벌써 며칠 전에 생일 선물을 미리 전령사에게 딸려 보냈는데, 혹시나 수상한 것인 줄 알고 받지 않을까봐 비슷한 날짜에 도착하도록 간단히 몇 마디 첨언해서 전서구를 날려보내는 거다.
새하얀 전서구는 끼룩 울더니 창문을 열어주자마자 알아서 파드득 날아올라 하늘 저 멀리 사라졌다. 한기를 막으려 재빨리 창문을 다시 닫고 이번에는 침대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 내용물을 재확인했다. 엘피샤 카르텔리는 오늘 아침에 내게 새해 기념 선물이라며 함께할 외출에서 입을 옷을 보냈다. 그게 이거다. 안감에 털이 달려있어 딱 봐도 따뜻해 보이는 겨울용 망토와 방한 소재의 간편한 외출용 드레스. 센스 있게 두툼한 장갑도 챙겨 넣었네.
나는 아무리 덜 아물었다지만 선명하게 남은 왼손의 흉터를 가만 들여다보다가 장갑을 꼈다. 따뜻하니 좋다. 이따 꼭 엘피샤가 보낸 것 전부를 세트로 입고 나가야지. 그녀의 옷들은 허언이 아니고 단연 최고였다.
옷 뿐만 아니라 성격도 모나지 않은 게 그럭저럭 대화 나눌 만해서, 카리스티아에서의 일 이후로 편지를 몇 번 주고받다 보니 어디 가서 이 사람과 안면 있는 사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는 되었다. 엘피샤는 직업 특성상 특히 신분이 높은 인사 다수와의 접촉이 잦았고, 그들로부터 얻어낸 크고 작은 정보들은 구미가 확 당기는 것이었다. 또한 나는 엘피샤에게 있어서 친하다고, 단골 손님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때 적잖은 명성을 제공하는 신분상 거물이다. 서로에게서 확실한 이점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우리가 친구라고 공인하고 다니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상호 필요적인 관계일수록 드러내고 다니는 게 좋은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그녀와 나는 이번 새해맞이 축제 때 같이 놀러 다니면서 우리의 친분을 과시하기로 했다. 소문은 분명 거리로 쏟아져 나올 귀족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내줄 것이고. 우리는 단지 아주 친밀한 관계처럼만 보이면 그만이다. 실제로 얼마나 긴밀하게 속내를 공유하고 서로를 특별하게 여기느냐와는 별개로.
그 엇비슷한 관계라면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라인하르트와 나. 내 행동 패턴이 여기서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군.
그나저나 그와의 약혼 파기는 결국 해가 바뀌도록 진척이 미미했다. 라인하르트를 마음에 두고 쓴 르쉬네의 마지막 편지가 내내 마음에 걸렸긴 하지만 어차피 그건 내 마음에 불과하고. 이미 상황은 개인의 심리에 좌지우지될 법한 규모가 아니게 된지 오래다.
"성가신 종친회."
왜 약혼 제안이 내게 들어왔는지, 그것이 왜 취소되기 힘든지에 대해 내가 그간 나름대로 정리한 바를 설명하기에 이 말이 가장 적절하겠다. 황실 종친들이 죄다 소속된 이 단체는 실질적인 직급은 전혀 없는 명예직의 집합소 주제에 황실 내부 안건에서만큼은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내 약혼을 처음 안건으로 낸 사람이 다름아닌 당사자 라인하르트라는 것부터 큰 건인데, 여기에 황태손비 자리에 내심 욕심이 있었던 1황녀와 같은 인물들을 뺀 나머지 구성원 대부분인 황태자파 종친들이 강력히 동조하기까지 했으니 이건 애초에 일찌감치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동조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치밀한 의도가 깔려 있다. 대표적으로 종친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황태자 쪽의 황족들은 우리 가문의 후계자인 나를 황실로 끌어옴으로써 황궁 바깥에 남아있는 계승권자를 죄다 없애버리겠다는 속셈이다. 우리 가문을 아예 황가의 발밑에 가둬놓겠다는 소리지. 내가 이대로 결혼하면 루 할레시온 가의 독자적인 계보는 자연스럽게 끊기게 된다. 현 세대 황태자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남은 황제의 아들인데다 예전에 킹메이커 일레인의 비밀스런 황제 옹립 작전까지 있었던 위험인물 카시우스 2황자는 황실 규율에 따라 황태손의 장인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귀족인 공작으로 격하되고 황위계승권을 잃기 때문이다. 근친혼이 흔한 건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제국인 만큼 그 정도 안전장치는 규율로 정해져 있다.
계승권을 박탈당한 루 할레시온 대공가는 한미한 귀족가나 다를 바가 없다. 지금도 썩 힘있는 가문은 아니지만, 황자 지위를 내려놓았을 뿐 내 아버지는 여전히 황족이다. 계승권 서열이 멀어졌으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계보상 황태자와 같은 정통성 갑인 황제의 아들이기도 하고. 그 때문에 아무리 숨을 죽이고 제발 살려만 달라며 웅크린 루 할레시온 가문이라도 그 존재감을 위시할 수는 없다. 그게 아직까지 사회에서 우리를 과도하게 무시하지 않고 황족처럼 대우해주는 이유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보루마저 빼앗기고 일반 귀족이 된다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주위를 긴장시키던 아우라가 한순간에 없어진 셈이니 이때야말로 황태자가 내 가족을 형장에 세울 기회가 된다. 비유하자면 이빨 빠진 호랑이를 그도 모자라 종이 호랑이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황태자로서는 거슬리는 위협 요소를 처리하기 아주 쉬워지겠지.
억울하지만 2황자와 그의 후손은 사실 힘이나 야망의 여부에 관계 없이 존재만으로 이렇게 해야 할 정당성이 확립되는 건 맞다. 아무리 가만히 있으려 해도 옆에서 자꾸 찔러대고 툭하면 여러 반란 세력에서 자신들의 군주로 옹립하려 하니까. 거의 섭외 1순위지. 그건 나도 알아. 내가 차기 황제였어도 지금 황태자가 취하는 계승권자 제거의 입장은 같았을 거니까. 이렇게까지 무자비한 과정을 거치지는 않겠지만.
황태자 측 사람들이 머리 하나는 잘 썼다. 누구나 쉽게 생각하면 그들이 나를 황태손의 짝으로 들이는 데 반대표를 던지리라 여기겠지만, 그들은 역시 달랐어.
그들의 최종 목표는 대충 짐작이 간다. 이 정리대로라면 황태자든 그의 사람 중 하나든 누군가는 내 약혼을 결혼으로 이어서 몰아붙인 뒤 성사가 된 즉시 눈엣가시였던 마지막 황자의 집안을 갖은 죄명을 씌워 몰살할 것이다. 사 년 씩이나 두고 봐준 것도 인내심을 많이 발휘한 편이니 최상의 상황이 되는 즉시 검을 휘두르겠지. 나는 황태손비이기에 살아남겠지만, 황태손비이기에 평생 황실의 감옥에 갇혀 고립될 게 뻔하고.
그래도 내 증조모인 카넬린 황태후나 조모 네피아 황후처럼 황실의 최고 어른쯤 되는 분들이 총애하는 손녀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반대표를 던지고 나서줬다면 뒤집혔을 수도 있다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 두 분이 제일 쌍수 들고 환영하셔서 완전히 망했다. 나를 엄청 예뻐하는 줄 알았건만 역시 황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여자들이라 그런가 공과 사 구분은 철저했다.
약혼의 당사자 황태손이 제의하고, 루 할레시온 가문의 수장인 대공과 황실 종친회 대다수 양측이 사이좋게 찬성표를 던진 이 약혼에 이런 뒷사실까지 숨어있다. 나 혼자 힘으로는 파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
상황이 왜 이리 꽉 막힌 걸까. 대공은 이런 생각도 한 번 해보지 못했다는 건가. 화가 치밀었다. 종친회에서 내 결혼이 황위계승권을 평화적으로 포기하고 가문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대공을 부추긴 것 같은데, 아무리 유약하고 멍청한 2황자라도 그렇지 설마 이조차 모른단 말인가?
"아, 정말이지 성가신 황실."
나는 장갑을 벗어던지고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 속에 푹 파묻혔다. 짜증 지수가 마구 오른다.
이대로는 안 돼. 계획이 필요하다. 계획이.
궁시렁대다가, 깊게 생각에 잠겼다가, 심신의 안정을 위해 피아노를 좀 치다가, 방 안에 놓인 식물에게 물도 주고 하면서 오후를 얼렁뚱땅 보내고 밤을 맞이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 해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빌데론 거리부터 황궁 앞 거리까지 길게 펼쳐진 판타지 세계판 야시장 축제를 즐기러 너도나도 나와 있었다. 나도 곧 나갈 예정이다.
엘피샤가 준 옷을 껴입고 부츠까지 신은 뒤 마리를 불렀다. 그녀는 추운 걸 못견뎌 한다며 나보다 더 두껍게 차려입었다. 글쎄, 저러다 굴러가는 건 아닌지 몰라. 영 과한 듯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 결국 나서서 그렇게까진 안 입어도 괜찮을 거라고 언질해줬다. 마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가 생각해도 과했다고 하면서 쪽방에 들어가 겉옷 몇 개를 벗고 왔다. 몇 개......대체 처음에 얼마나 입고 있었길래. 이런 날 밤에 나가본 적이 없는 종속 하녀로서의 특성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래도 얼굴에는 소원 성취에 잔뜩 들뜬 티가 선명하게 났다. 자기가 좋으면 그만이지, 뭐.
나는 일레인의 배웅을 현관에서 받고 나가며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의 마리에게 살며시 물었다.
"마리, 네 정확한 생일이 언제였지? 이 즈음인 것은 기억이 나서 선물 삼아 오늘 함께 나갈 사람으로 널 지목하긴 했다만. 내년부터는 제대로 챙겨줄 생각이라서."
물론 내가 내년까지 살아남는다는 가정 하에 하는 말이다. 나도 참 짓궂은 사람이야. 자조적인 미소를 지그시 입가에 그렸다. 마리는 말을 제대로 못 들었는지 우물쭈물하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예? 저, 저 말씀이신지요?"
"그래, 마리 너."
"아, 제 생일은......1월 27일입니다."
"그렇구나. 알았다."
덤덤하게 대꾸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걸어 저택 앞 주택 거리를 벗어났다. 음, 아직 거의 한 달이나 남은 거였군. 할 수 없지. 올해는 그냥 이대로 끝내자. 뻔뻔한 건 나도 안다.
밤을 밝히는 조명이 거리의 테두리를 따라 길게 늘어섰다. 나는 그 시작에서 엘피샤를 만났다. 연보라색 계열의 내 옷과 얼추 맞췄는지 그녀는 진자줏빛 의상을 골랐다. 그녀의 출신 국가 특성상 외모가 추위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옷을 저렇게 입으니 겨울 아래 선 여름의 불꽃 같아 나름 특이하고 괜찮았다.
"대공녀님, 정확한 시간에 나오셨네요."
"네. 저는 시간 약속을 딱 맞추는 걸 좋아해서요. 안녕하세요, 엘피샤. 선물해 준 옷은 고마워요. 몸에 딱 맞고 편하네요."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자, 이제 걸어 볼까요? 천천히 구경하다 자정 무렵에 황궁 앞 대로까지 가면 불꽃놀이를 잘 구경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럴까요. 가자, 마리."
"네, 아가씨!"
마리는 벙찐 얼굴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거리를 정신없이 둘러보다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엘피샤가 후후 웃더니 참 쾌활한 하녀네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사정을 짧게 언급하며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다. 엘피샤는 내 말 뒤로도 조금 더 잔잔하게 웃고 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웃는 건 연막이고 정작 머릿속에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나요?"
단지 순수한 궁금증에 물었다. 엘피샤는 허를 찔린 얼굴을 하더니 말없이 나뭇잎 모양의 눈매를 곱게 접었다. 나는 이 얼굴이 어떤 얼굴인지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지어 본 표정인데. 그러니까, 이를테면.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군요. 지금은 만날 수 없지만 한때 소중한 이로서 곁에 있었던."
조금쯤 날카롭게 웃었다.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 쓰잘데기 없이 이런 말을 했지. 허나 이미 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엘피샤는 미소를 거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뒤편으로 신이 난 마리가 노점 앞에 멈춰서서 물건을 사는 것이 보였다.
"이 마음을 읽으셨다는 것은 곧, 대공녀님께서 같은 마음이었던 적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지요."
그녀는 눈을 슬프게 내려떴다가, 그 짙은 감정을 차마 다 지워내지 못한 채로 다시 나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예리한 여자다. 첫 만남부터 짐작은 했다만. 역시 성급한 발언이었어. 나는 방금 전의 말을 후회했다. 나와 그녀의 걸음은 대화가 이어질수록 느려지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감정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제게 드러내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는 섣불리 직선적인 접근은 하지 않으시는 것이 나아요. 저는 망국 시힐레의 마법사 계보를 이어받은 몸. 마법이라 할 것도 없지만, 미력하게나마 내면 파악 정도는 가능하답니다."
"......시힐레의 마법은 소멸한 지 오래라 들었어요. 그게 아니었던 건가요?"
뜬금없는 사실이 튀어나와서, 논점을 뒤틀어 질문했다. 엘피샤는 곤란한지 인상을 굳혔다가, 졌다는 듯 이야기했다.
"시힐레의 마법 능력 승계는 드물게, 그리고 약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을 정확히는 마법의 반소멸 상태라 이르지요."
저번에 읽었던 서적에는 그렇게까지 자세한 설명은 없었는데. 어릴적 스승이었던 로제도 7왕국의 한창때 기적과도 같았던 마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그들 다수가 망국한 현 시대의 다 죽어가는 마법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어보길 잘했다.
"새로운 사실이군요. 실은 제가 마법에 학문적 관심이 많아 오래전 스승 하나에게 이론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는 제게 그런 것은 알려주지 않아서요."
다른 건 잘만 설명하면서 왜 이건 빼먹었대. 속으로 툴툴대며 엘피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젖어있었다. 물 속에 잠긴 풀잎처럼 일렁이는 짙은 녹안이 내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고 무언으로 피력했다. 의아했다. 내가 무심결에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기라도 했나?
"스승......이라고 하셨지요."
"네. 왜 그러시죠?"
울고 싶어하는 눈이 나를 간곡히 응시했다.
"그 분의, 이야기를. 제게 더 들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어렵지 않은 일이죠."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엘피샤는 힘겹게 슬픔을 지우고 웃었다. 나는 간단히 추측했다. 그녀와 로제가 혹 아는 사이였을까, 하는. 마법이 사라져가는 시대임에도 꽤 뛰어난 마법사였던 로제는 가명일 게 분명한 성 '카나이클'을 쓰면서까지 신분을 숨겼지만, 오로지 7왕국의 왕족이나 그 피가 진하게 섞인 몇몇 고위 귀족에게만 허용되는 마법 능력을 승계받았으니 최소 고위 귀족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억양이나 외양을 증거로 들어 그를 북부 왕국 출신으로 추정했었다. 거기다 엘피샤 역시 남부에 위치했던 왕국 시힐레의 방계 왕족이고. 둘 다 각국의 고위 신분이었으니 접점이 있을 법도 하다.
저리도 슬퍼하는 것을 보아 로제는 죽은 걸까. 실타래로 묶어놓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 두 번째 추측으로 인해 아마 내 적안은 평소의 빛을 잃고 차분하게 가라앉았으리라.
"그의 이름은 로제 카나이클이에요."
걸음의 속도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엘피샤는 더이상 동요하지 않고 잠자코 내가 하는 말을 집중해 들으며 발을 맞추어 걸었다. 호객꾼의 우렁찬 목소리가 인파의 목소리와 섞여 거리에 흔한 소음 중 하나로 수그러들었다. 깊고 깊은 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건조하고 한랭한 바람에 별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곰곰히 되짚어보니 제가 열두 살 때까지 그와 교류했던 것이 맞군요. 1054년 당시에 스스로 밝히기로 나이가 백 스물네 살이라 했던 게 기억나네요. 말도 안되는 소리라 농담처럼 듣고 넘겼지만요."
"로제의 당시 실제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답니다. 역시 그다운 발상이에요. 나이 앞에 단순히 백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는 동시에 진실에 가까운 쉬운 문제를 낸 것이 되니 말이에요."
엘피샤가 쓰린 웃음을 섞어 말했다. 내가 오랫동안 파헤쳐 볼 엄두도 안 내던 괴짜스러운 걸 바로 해석해내다니. 역시 많이 친한 사이였구나. 나는 아예 그걸 입 밖에 냈다.
"로제와 엘피샤, 친한 친구였나 보네요. 어쩐지 저보다 더 그를 '진실에 가깝게'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연인이었으니 그럴 수밖에요."
뭐?
============================ 작품 후기 ============================
허얼 전체투베 2위라니!! 제 글이 이렇게 많은 분들께 읽힐 줄이야...감동이에요ㅠㅠ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코멘트창 확인하다가 버튼 잘못 눌러서 후원자 목록 페이지가 떴는데 후원쿠폰 주신 분이 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후원쿠폰 주신 루위나 님 감사합니다!
++bloodborne님, 추천해주신 곡 잘 들었습니다! a hisa의 rainy waltz는 원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곡은 새롭네요 추천 감사합니다 ㅎㅎ
+++아, 참고로 제가 현재까지 악살다를 쓰면서 주요 캐릭터의 분위기와 맞는 곡을 지정해놓고 그 캐릭터가 주류로 나오는 파트일 때 그 노래를 들으면서 쓰는데요, 대표적인 몇 곡만 소개할게요!
라니아 : 에일리 - SAKURA, 라인하르트 : 목소리 - 월피스카터, 샤카르 : about me - 아라키
이 외에도 다른 주요인물들을 위한 곡도 있지만...그들은 아직 제대로 등장하지 않았으니 다음에 다시 소개하는 걸로 할게용 아니면 가끔 주요 회차마다 어울리는 분위기의 브금이나 곡 추천을 할 수도 있어요
《오늘의 악.살.다》
1월 27일의 탄생화 마가목의 꽃말은 '게으름을 모르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