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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15화 (15/102)

00015 3. 불과 바람과 순리에 관하여 =========================

약혼을 한다고 해서 당장에 황태손비 취급을 받으며 궁에 처박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라인하르트가 결혼이 아닌 약혼이라는 패를 꺼내든 것도 그 때문이지. 약혼은 결혼보다는 파기가 쉽고 주어지는 권력은 정식 황태손비와 비슷한데, 결혼은 권력을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면서 의무만 더럽게 많고 이혼도 어렵다. 고립되기도 한층 쉽고.

듣기로 둘 다 황족인 혼약은 내가 역사상 여섯 번째라던데. 다른 건 모르겠는데 다섯 번째가 누군지는 알겠다. 내 조모 네피아 황후. 그녀는 내 조부 오벨 3세와 사촌지간이었다. 예전에 그녀가 나를 종종 자신의 궁으로 불러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 때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그녀의 약혼녀 시절 에피소드였던 게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이 생활이 어떨지 대충 감을 잡았거든.

"대공녀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나는 오늘만 벌써 몇십 번째 저 말을 듣고 있었다. 웃어주느라 입에 경련 날 지경이라고. 힘에 필연적으로 붙는 거머리인 건 이해하지만 영 성가셨다.

"과찬이에요. 영애도 정말 예쁘신 걸요?"

"어머, 제가 어찌 감히 대공녀님의 미모에 비할 수 있을까요. 부끄러워요."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공장에서 찍어낸 듯 형식적인 말을 영혼 없이 내던지며 어둠이 내려앉은 창문에 눈길을 두었다.

창문 밖으로는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창틀에 소복이 쌓인 눈의 높이로 미루어 보아 꽤 많이 쌓인 것 같다.

현재 시각 새벽 2시경. 카리스티아 이후 한 달여 만에 다시 만난 솔지아 궁은 식을 줄 모르는 귀족들의 수다와 음주, 춤으로 가득했다. 결혼식도 아닌데 피로연처럼 연회를 연다길래 나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이건 상상초월이다. 이러다 밤이라도 샐 작정인 건가. 주인공이라서 함부로 퇴장하겠다고 하기도 어렵고. 피곤하다. 셀리아와 대공, 일레인은 이미 귀가한지 오래인데.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졌다.

"대공녀, 많이 피로하시면 별궁 구역으로 나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달라붙어 재잘대던 귀족 영애들이 드디어 좀 물러나자 레테일이 지나치듯 다가와 귀띔했다.

"그럴까요."

"맞습니다. 영 안색이 나쁘시니 가서 잠시 쉬다 오십시오. 밖은 추울 테니 이걸 가져가시고요."

이때다 싶었는지 레테일의 옆에 있던 에단이 제 팔에 걸치고 다니던 코트를 내밀며 슬쩍 거들었다. 그는 말하면서 흰 장갑을 낀 내 손이 그것을 받아가는 것을 흘끔 들여다보더니 우울한 눈을 했다. 원래 다들 사교계 행사에서는 장갑을 끼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만신창이가 된 내 손이 굳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럼 잠시 쉬다 와야겠네요. 황태손께서 만일 찾으시면 별궁 쪽으로 갔다고 전해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들의 조언에 따라 피신하기로 결정하고 솔지아 궁 내부의 왼쪽에 길게 이어진 복도로 들어섰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곳이라 조명도 한층 어두웠다.

또각이는 구두 소리만 빈 복도에 울렸다. 시끄럽고 장신 사나운 사교의 장에서 벗어나자 일말의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서늘한 공기가 발목을 스친다.

이곳은 복도라기보다는 사실 회랑에 가까운 길다란 연결통로인지라 양 옆으로 길게 창문이 뚫려 있었는데, 검푸른 하늘에서 쏟아내는 함박눈이 풍경을 가득 채웠다. 아무도 건들지 않아 온전한 형태로 고르게 쌓인 눈밭이 바로 눈앞에 어른거린다. 내가 알기로 이 복도 끝은 별궁의 1층, 입구가 있는 로비로 통한다. 즉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아까의 그 감당 못할 드레스는 자정 즈음에 그나마 따뜻하고 편한 재질의 연한 하늘색 드레스로 갈아입었으니 바깥 공기를 맞이해도 얼어죽진 않을 거다. 내 동업자 말마따나 나는 눈 내리는 풍경을 매년 겨울마다 기대하며 보내곤 하는 터라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 고민하다가, 복도가 끝나고 눈 아프지 않게 적당한 샹들리에 조명만이 있는 한적한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외부와 통하는 입구로 나왔다.

별궁 입구는 천장이 바깥으로 처마처럼 튀어나오고 그것을 내 키의 몇 배나 되는 돌기둥들이 듬직하게 받치고 있는 모양새여서, 문 너머로 가도 텅 빈 하늘이 머리 위로 바로 펼쳐지지는 않았다. 눈을 피하는 동시에 구경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구조지.

에단이 준 것을 걸쳐입으니 한결 나았다. 눈 내리는 날은 바람만 불지 않으면 외려 다른 겨울날보다 덜 춥다더니, 그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는지 견딜 만했다. 코트에 배인 과일향이 은은하게 공기에 섞여들었다. 그러고 보니 에단의 저택에는 과일나무가 많았더랬지. 각종 과일나무가 가득한 정원을 구경시켜주다가 셀리아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라임 두 개를 따느라 낑낑대던 어린 날의 그가 떠오른다. 허둥대는 꼴이 얼마나 웃기던지.

문득, 희고 깨끗한 눈이 반짝이며 휘몰아쳤다. 한바탕 향기로운 바람이 인 탓이다. 묶지 않고 차분하게 늘어뜨렸던 머리칼이 휙 휘날렸다. 나도 모르게 호선을 그렸던 입술이 정신을 차리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람에 실린 향기가 처음에는 내 머리에 바른 향유인가 싶었는데, 남은 여운을 곱씹어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이번에도 너무 짧게 코 끝을 스치고 간 터라 미처 자세히 살필 시간이 없었다.

그래, 이번에도. 그 날처럼.

이상하다.

"에빌 대공녀님."

휙 고개를 돌렸다. 실은 조금 놀랐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금은 실망했는지도. 이유 없이 그런 직감이 감각을 지배했다. 목소리가 들린 쪽은 내 바로 뒤였다. 살짝 열린 큼지막한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어두워서 누군지 잘 보이지 않는......아니.

이 남자는.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후작 영식."

냉랭히 그를 불렀다. 왜 하필 이런 외진 곳에서 만난단 말인가. 우연이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얄궂었다. 여전히 눈바람이 일었으나 더이상 알싸하고도 달콤한 향기는 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여상하게 웃음짓고 두어 발짝 더 걸어와 내 옆에 태연스레 서서 눈 내리는 밤하늘을 구경했다.

"어딜 가셨나 했더니, 이런 곳에 계셨군요. 연회가 많이 힘드셨나봅니다."

"체력이 그닥 강하지 않아 잠시라도 쉬어주어야 하는 몸이라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해 있었답니다. 그나저나, 저를 찾으셨나요?"

마지못해 대꾸했다. 잘 쉬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람. 그는 어쩌다 안으로 날아온 눈송이 하나를 천진하게 손바닥 위에 올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요, 궁금은 했지만 작정하고 추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대공녀님께 대한 실례가 될 테니. 제 상관 되시는 분께서 분개하실 겁니다."

"저하께선 영식의 능력을 높이 사고 신뢰하여 곁에 두신 걸로 아는데, 일처리에 있어서는 가차없으신가 봅니다."

"예. 워낙 칼 같은 분이시라."

장난치듯 답하고 눈송이가 녹아 물이 되는 것을 가만 지켜보던 그가 이내 흥미를 잃고 손에 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특히나 대공녀님께 관련한 일에는 더 민감하시지요. 제가 지금 대공녀님을 찾아 곁을 지키는 것 또한 황태손 저하의 명으로 인한 것이니 말입니다. 혹 추워하시면 이걸 드리고 오라고도 지시하셨는데, 이미 다른 분의 것을 걸치고 계시는군요."

그제서야 프리드리히의 반대 손에 잡힌 숄이 눈에 들어왔다. 우연이 아니라 라인하르트가 보내서 온 거였군. 저번에 확인하기로 그닥 안 친해 보였던 자기 휘하의 보좌관에게 이런 걸 시킬 정도라면 그는 지금 굉장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까 대충 살피기로도 정계 유명인사들과 한 잔 하고 있던데. 그도 오늘의 주인공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한 발 늦으셨네요. 마음만으로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길."

"그러지요."

"아, 그리고. 굳이 제 곁에 계시지 않아도 괜찮으니 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돌아가세요. 괜히 바쁘신 분을 잡아두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네요."

"괜찮습니다. 저 또한 소란한 분위기는 그닥 즐기지 않아서, 실은 반쯤 도피할 겸 나온 것이기도 하니......"

"아하.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젠장. 보내버리는 건 실패했다. 애잔하게 말꼬리 늘이는 게 거의 사기꾼 수준으로 능숙했다. 이런 식으로 영애들을 여럿 끌어들여 이용해먹었군. 가만 보면 참 웃긴다. 소란한 분위기는 싫고 껄끄러운 분위기는 괜찮다 이건가. 저 자도 참 희한한 인간이다.

"외람되지만, 대공녀님."

"말씀하세요."

대화가 끊기나 싶더니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어졌다. 그와 있을 때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게 목숨줄 잇는데 유리하리라 여겨 풍경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온 신경을 옆에 쏟고 있던 터라 어조가 약간 경직됐다. 추워서 입이 언 것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에 불과하니 별 신경은 안 썼다만.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짙은 녹안이 음침한 늪 같다.

얼핏 달콤한 목소리가 차갑게 허공을 휘돌았다.

"오늘 불미스런 일로 참석치 못한 가문이 하나 있는데, 아십니까?"

아.

그 말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한기에 몸이 굳었다. 눈이 확 뜨였다. 뻣뻣해진 손으로 치맛자락을 한껏 말아쥐었다.

역시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끌어 갈, 모종의 거대한 사건이. 왜인지 맥락 없이 그런 생각이 꽉 들어찼다.

괜찮아.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헤쳐나가면 된다. 내 운명을 아는 행운으로 악녀로 태어난 불운을 없애면 그만인 일이지만, 그저 그러면 되는 것이지만.

이렇게나 불안한 것은 어째서인지.

프리드리히는 말하기 직전에 시선을 눈 날리는 허공으로 옮겨 두어 이런 내 동요를 보지 못한 채 위험스레 눈을 빛냈다. 그의 옆얼굴이 일종의 흥미로 덮인 것은 충분히 경계할 만한 사항이었다. 침착하게 한 마디씩 내놓았다. 자세한 정보를 전해들어야 했다.

"미처 몰랐습니다. 귀족원이 아주 많이 참석하셔서. 그런데 불미스런 일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예, 유감스럽게도."

그런데 차분히 깔린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앞이 휘청 흔들리고 흐려졌다. 날카로운 이명이 귓전을 때렸다. 뭐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않았나. 이번에도 피로가 과했나. 아침부터 무리를 하긴 했다만. 혹 내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어 이러저러한 추측을 시도하며 고개를 흔들어 어지럼증을 털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세이잔 자작가 본가에 지난 1월 1일 화재가 발생해 아이린 세이잔 영애를 제외한 가솔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방금 화재라고 하셨나요?"

"예."

흉터가 남은 손이 걷잡을 수 없이 파르르 떨렸다. 그 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눈앞이 회오리쳐 일그러지더니 전구가 퍽 꺼지듯 암전되었다가 어느 시점에서 복구되었다. 헉, 숨을 엇박자로 들이켰다가 신음을 뱉으며 겨우겨우 내쉬었다. 배가 꽉 조여들어 메스꺼웠다. 풀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손을 바닥에 짚고 억지로 고개를 들자 환영처럼 눈앞에 열기가 아른거렸다. 바로 앞에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은 것처럼 시야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어느새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더없이 건조한 바람이 기억마저 쓸어갈 것처럼 광폭하게 불었다. 맹렬하게 솟아오르는 불기둥과, 불길에 통째로 휩싸여 무너지는 형체도 불분명한 건물, 그리고 매캐한 연기 구름과 타는 냄새, 새까맣게 탄 잔해. 그것을 속절없이 지켜보며 초라하게 울부짖는......

갑자기 구역질이 울컥 치밀었다. 게워낼까 했는데 프리드리히의 목소리가 생경한 장소에 잠긴 나를 곧바로 거칠게 건져올렸다. 속이 마구 뒤틀렸다.

"황태손 저하께서는 시기상 부적절한 사건이라며 우선 함구할 것을 명하셨으나......대공녀님? 괜찮으십니까?"

방금 무엇을 본 거지. 극렬한 혼란에 휩싸여서 그가 말하는 내용이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대체, 이게 뭐야.

"저런,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프리드리히가 실제로도 주저앉아 있던 나를 부드러이 잡아 일으키려 했다. 경련하듯 강하게 손길을 내쳤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자세를 낮추어 내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이걸 무어라 정의내려야 할지 고민하던 투더니, 무심히 툭 내뱉는다.

"제가 어떤 건드려선 안될 것에 상해를 입혔나 보군요. 송구합니다."

그가 내린 진단은 트라우마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는 불타 죽은 적도 없고, 누가 불타 죽는 걸 본 적도 없다.

프리드리히는 내가 진정하게 뒀다가 나중에 더 얘기하려는지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고 기다렸다. 심호흡을 하다 차츰 이성이 돌아오자 판단을 내릴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이건 세이잔 자작가의 화재 장면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째서 내가 그것을 현장에서 목도한 것처럼 환영이 펼쳐졌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일단 하나는 확실해졌다. 소설 줄거리의 서막과도 다름없는 세이잔 자작가 화재 사건이라는 결론은 결국 동일하게 발생했지만 그 과정에서 뒤틀림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내일 자정 즈음에 올라갑니다.

+헷갈림을 막기 위해 앞으로 질문 코멘트를 다실 때는 앞에 @를 붙여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질문 중에 혹시 대답하기 곤란한 (답변이 스포가 되는 경우 등등) 질문이 있다면 제 판단 하에 드랍될 수 있음을 참고해주세용

+일단 1장(봄 파트)까지는 열심히 달리기로 했습니다. 현재 비축분이 거기까진 대강 쌓여서요! 1장은 플롯상 캐릭터 외전 포함 24화에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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