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20화 (20/102)

00020 4. 그물과 물고기 =========================

- 에빌에게.

필요할 때만 나 부르는 거 뻔히 알면서도 네 편지를 받으니 기쁜걸. 그래, 어떤 나쁜 놈이 널 곤경에 빠뜨렸다고?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나는 나대로 짜증나는 일이 요새 너무 많아서 어렵겠다. 대신 네 부탁대로 세이잔과 피치엔, 그리고 루 할레시온 사이의 관계 정리는 확실하게 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참에 잘만 하면 피치엔을 통해 진범까지 자백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너는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신중하게 행동하면 돼.

그리고 하나 더, 윗줄과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추가해 쓴다. 시간 나면 에단한테나 한 번 가 봐라. 그 녀석 저번에 너한테 뭔 말을 들은 건지 나랑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꼭 다섯 줄 이상은 자기반성과 자책으로 채우더라. 그 쫄보 새낀 너한테 감히 그런 거 티도 못 내겠지만 난 아니니까 패기돋게 지적할게. 그 때 너만 친구 잃은 거 아니다.

아무튼 건강히 잘 지내라. 나 없는 사이에 라인하르트 놈이랑 결혼하지 말고. S.M. -

참 그다운 편지였다. 나는 읽는 내내 피식피식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고 말았다. 에단과는 또 어떤 경로로 친해진 건지. 카리스티아 때부터 친분 있는 티는 났다만. 설마 술 대작하다가 친해진 건 아니겠지? 샤카르와 에단이 수도 사교계에서 술고래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냥 한 번 세워본 가설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왠지 맞는 것 같다. 하여간 대단한 인간들.

나는 편지를 다 읽고 대충 접어 서랍에 넣고 나서 전령사에게 일러 르웰린 후작가에 방문 요청을 넣도록 했다. 돌아온 전령사가 허가되었음을 알렸고, 정오 즈음에 호위들을 데리고 외출했다. 샤카르가 말미에 쓴 날카로운 지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차 창문을 통해 보이는 거리는 추위로 인해 한산했다. 어언 1월 말이니 이제 한겨울 중에서도 절정인 셈이다. 나 역시 두꺼운 옷을 입고 목도리까지 둘렀다. 몸이 좀 둔해진 느낌이지만 얼어죽는 것보단 낫겠지. 외출할 때면 빠짐없이 끼고 다니는 장갑 덕에 손도 안 시리고 좋았다.

어느 순간 속도감이 줄어들더니 마차가 멈추었다. 다 왔군. 십이현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마중나와 있던 에단이 다가와 엷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미리 알린 도착 예정 시간에 거의 딱 맞춰 왔는데, 왜인지 그의 얼굴에는 한기로 인해 발그레한 기가 돌았다. 빨갛게 언 코가 마치 눈밭에서 한참 구르며 논 아이 같았다. 괜히 설레발 쳐서 일찍부터 나와 있었나.

"갑작스런 방문 죄송해요. 오랜만에 영식의 과수원을 구경하고 싶어져서 그만."

사실 한겨울의 정원에서 볼 게 얼마나 있겠느냐만은, 그게 진짜 목적이 아니니 상관할 바 아니다. 에단도 순순히 수긍은 하지만 믿진 않겠지.

"아, 아닙니다. 라니아 대공녀라면 언제든 와도 좋습니다. 날이 추우니 우선은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는 나를 이끌고 저택으로 들어가려다 잠시 사현과 십이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3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인 에단은 표면상 그들의 상관이니 오십현의 존재를 모를 리도 없거니와 그들이 내게 붙어있는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그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그들에게서 관심을 끊었다.

르웰린 가의 응접실은 탁 트인 전경을 가진 루 할레시온 가의 것과 달리 아늑하고 고풍스러웠다. 창문이 작아 조명이 많았다. 불꽃이 장작을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집어삼키고 있는 작은 벽난로 앞에 의자를 끌어와 나를 앉힌 그는 하녀에게 뭔가 주문을 하더니 금세 손에 뜨뜻한 핫초코 두 잔을 받아들었다. 하나를 조심스레 내게 내민 그는 자기 몫의 핫초코를 후후 불어 한모금 마시고는 한결 풀어진 얼굴을 했다. 많이 추웠나보다. 나는 목도리를 벗어 옆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내 옆에다가 의자를 놓고 앉은 에단이 불을 바라보며 미미한 웃음기가 번진 목소리로 잔잔히 말했다.

"어릴 때 생각이 나서요. 아직 이걸 좋아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입맛은 쉽게 변하지 않죠. 에단도 아직 이걸 좋아하는가 보군요."

"아......예. 겨울엔 역시 이것만한 게 없습니다."

카리스티아에서 잔뜩 거리를 둔 말투를 사용한 것과 달리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에단의 표정이 모호하게 뭉개졌다. 수면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 모습은 슬퍼도 보였고, 기뻐도 보였다. 괜히 미안해지게.

"그저께 황실 만찬에서 만났을 때는 미처 인사할 새가 없었어요."

툭 내놓았다. 그저께 초청받아 간 황실 만찬장에서 나는 저번에 단언했던대로 그를 발견하고도 아닌 체하며 뒤돌아섰다. 즉 에단이 속아줄 리 만무한 변론이기에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두 손으로 살며시 감싸쥔 잔을 통해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입에 머금은 달콤함이 몸을 데웠다. 기세가 한풀 꺾인 불길에 장작을 던져넣은 에단이 조금 늦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전 일부러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거예요. 타박하셔도 상관 없어요."

"제가 개의치 않았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런가요? 다행이에요.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대답하고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장작이라는 제물을 삼킨 불이 힘을 얻어 몸집을 불렸다. 에단은 입술을 달싹이다 약하게 인상을 쓰며 관두었다. 끊긴 대화가 아쉬운 쪽은 내 쪽이었으므로 떠보기나 할 겸 뻔한 화두를 꺼냈다.

"가족분들께서는 안 계시나요? 그러고 보니 저를 바로 응접실로 안내하셨네요."

"아버지께선 평소처럼 황궁에 업무차 가셨고, 어머니께선 황태자비 전하를 뵈러 가셨습니다. 누이는 또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겠다며 프리드리히 후작가 저택에 놀러 갔고요."

"아하."

확실히 황태자비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이렇게나 마음 약한 남자일 줄이야. 조금이라도 그의 성정을 고려해줬어야 하나. 그 몇마디 말 때문에 여태껏 끙끙대고 있었다니. 샤카르가 아니었으면 끝까지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 더 막막했다.

대화가 또 끊어졌다. 이번에도 잇는 건 내 몫이었지만 막상 만나니 망설여졌다. 그러나 내가 벌인 일은 내가 수습해야 하는 법이다. 반쯤 마신 핫초코를 옆 테이블에 올려놔 잠시 보류한 후 차분히 그를 직시했다.

"에단. 카리스티아에서 제가 했던 말,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

처지상 어차피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긴 어려우니 나한테 친하게 굴지 말고 그냥 서로 관계 없는 남으로 회귀하자는 뜻으로 한 말을, 르쉬네가 죽고 내가 방계로 격하된 게 다 자신과 가족들의 탓이라며 원망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어떡하자는 말인가. 오해했으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혼자 담아두고 자책하면 내가 뭐가 돼.

에단은 날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그 말씀은."

"멘데로프 영식에게 전해들었어요, 저 때문에 에단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괴, 괴로워한 적 없습니다."

"그럼 자책이었나요?"

"자책도......안 했......"

"거짓으로 부정할 필요 없어요."

그는 결국 어설프게 부정하는 걸 그만두고 내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뭔가 말할 의지는 없는 듯해 내가 먼저 치고 나왔다.

"제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영식을 타박하기 위해서도, 원망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전 그저 그 때의 발언이 영식이 생각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틀린 말을 하신 건 아니었잖습니까. 실제로 르웰린 가문은 4년 전의 그 일에 깊이 동조했고, 또......"

"그렇대도 르쉬네를 죽인 사람은 영식이 아니잖아요."

"그건."

"책임 밖의 일까지 끌어안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시라면 별 수 없겠지만, 제가 아는 영식은 그렇지 않아요. 막지 못한 것을 죄악이라 여기신다면, 저야말로 자책해야겠죠."

뒷말은 내가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좀 걸렸지만 꿋꿋이 이었다. 내가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라면 그라도 빠져나와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제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아 주세요."

했던 말은 한 번쯤 더 반복하며 끝내줘야 알아듣고 얌전해지는 그였다. 에단은 머뭇거리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머니가 1황녀이니 그 역시 황족이다. 짙고 선연한 황가의 적안이 서로를 뜻 없이 응시했다.

"사과입니까?"

이윽고 에단이 꺼낸 말은 확인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렇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긴장이 슬슬 풀리는지 시선을 거두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눈을 접어 웃었다.

"대공녀께서 이런 세심한 분이신 줄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 속이 좁았습니다."

"오해가 풀렸다면 그걸로 됐어요."

핫초코 잔을 다시 집어들며 나지막이 말했다. 할 이야기는 끝났지만 핫초코가 너무 맛있어서 못 일어나겠다. 이 집 사용인은 대체 무슨 솜씨로 이런 별미를 만들어내는지 궁금했다. 나 어릴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에단 보라고 잔을 입에서 떼고 살짝 들어올렸다.

"맛있네요."

"그런가요? 마음에 드시면 제조한 하녀를 루 할레시온 가문으로 이직시키겠습니다."

"그 하녀가 들으면 기절할 말씀을 하시네요."

"무리수였던 건 인정합니다."

에단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대뜸 현실감 없는 소리를 하기에 뭔가 했더니, 그새 농담을 배워온 모양이다. 왜인지 말투만 공손했지 내 동업자의 재미없는 농담의 냄새가 나는데. 그에게 배웠나? 샤카르 이 인간, 감히 설정을 짠 작가를 비롯해 등장인물 모두가 인정한 수도 사교계 최고의 순수남을 이딴 헛소리로 더럽히다니. 뒷일이 두렵지 않은 건가. 애먼 사람을 물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샤카르를 향해 속으로 비난을 보낼 준비를 하며 에단에게 사실 여부를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의아한 눈을 했다.

"무슨 일이냐?"

문 밖에서 시종 하나가 고했다.

"방문객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방문 허가는 내 준 기억이 없는데."

"예정에 두지 않고 있던 방문인듯 합니다."

"신분이 어찌 되지?"

"방문자께서는 로엔세르 공작가의 후계자, 레테일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셨습니다."

레테일이 여기는 왜? 시종의 말에 나와 에단 둘 다 놀랐다. 로엔세르 공작은 십 년 넘게 절연했던 딸 일레인을 마침내 몇 년 전 받아들이고 교류를 재개하면서 사실상 황태자파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중립적인 성향은 유지했던 탓에 지금껏 큰 소용돌이에 휘말린 전적은 없지만, 후계자로서 가문 간의 관계에 관해서는 빠삭할 레테일이라면 완전한 황태자파인 르웰린의 본가에 겁도 없이 단신으로 오지는 않아야 했다.

에단 또한 부모형제가 모두 출타중인 와중에 찾아온 거물급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투였다. 나라도 곤란을 겪을 법한 상황인지라 그저 그의 판단을 기다렸다. 곰곰히 뭔가를 생각하던 에단이 잠시 후에 시종에게 한 가지를 더 질문했다.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인지 알아내고 다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갔다. 그리고 금세 돌아왔다.

"대공녀님을 찾으러 오셨다고 합니다."

전달받은 사실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에단도 마찬가지로 물음표를 수십 개 띄운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결정권은 내게 넘어왔다. 날 보러 여기까지 올 줄이야. 세크네트보다는 명민하여 허튼 짓은 않을 거라 믿었던 내 착오지.

"곧 나갈 테니 기다리시라 전해드려라."

"예."

나는 조금 남아있던 핫초코를 끝까지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단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문가로 걸어간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로 몸만 반쯤 돌려 인사했다.

"폐를 끼치게 되어 면목이 없어요. 제 외사촌 되시는 분이라 일면식이 있는데, 제게 뭔가 급히 알려야 할 사실이 있나봐요."

"어서 가 보십시오."

에단이 입가를 당겨 미소지었다. 저렇게 잘 웃는 얼굴을 카리스티아에서 가차없이 구겨지게 한 나로서는 좀 뜨끔한 표정이었다. 답례로 살짝 웃어주고 문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한 발 내딛자마자 멈춰서야 했다.

"잠깐!"

"네?"

난데없이 소리친 에단 때문에 휙 돌아선 나는 그의 손에 들린 내 목도리를 발견했다. 아, 놓고 갈 뻔했군. 그는 내게 다가와 목도리를 내밀었다. 베이지색 털실 목도리는 내 어머니 일레인이 직접 뜬 것으로, 고로 잃어버리면 별로 이롭지 못할 터였다. 감사를 표하고 받아들었다. 밖으로 나갈 거니까 둘러야겠다. 길게 늘어진 목도리를 목에 둘둘 감았다.

"그, 저기. 뒤쪽이 좀 엉성한데......"

대강 휘휘 두르던 것을 지켜보다 못한 에단이 손으로 조물조물 모양을 손봐주었다. 나는 그로 인해 잠시 발이 묶였다. 하지만 한동안 애를 쓰던 그는 도리어 자기가 더 망쳐버린 것 같다며 멋쩍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정성이 갸륵해서 괜찮다고 말해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배웅은 정중히 거절했다.

정문으로 나오자 레테일이 따뜻해 보이는 외투를 입고 눈 속에서 서 있었다. 에단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눈이 꽤 많이 내렸다. 마차 안에 있었는지 그에게 내려앉은 눈의 양은 적었다. 간단히 눈인사만 주고받은 뒤 용건부터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절 찾아 여기까지 오실 정도면 보통 사건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레테일은 여간 심각한 얼굴이 아니었다. 심려로 가득찬 표정에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그는 굳은 입술을 움직여 내게 소식을 전했다.

"황태손 저하께서 치던 방어막이 깨졌습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오늘 오전에 에네아스 백작가에서 황태손 저하의 명을 받든 정보국과 기사단이 증거물을 빼돌리고 사건을 은폐하려던 것을 밝혀내어 공론화시키는 바람에 지금 황궁은 물론이고 수도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

나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레테일은 이게 끝이 아니라며 이어 말했다.

"가장 문제인 건 화재 사건의 용의자입니다. 방금 전 긴급 소집된 수도 귀족회의에서 아이린 영애가 대공녀님을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아이린 영애는 후계가 아니라서 이나르 에네아스를 대리 발언인으로 내세웠다고 하는데......"

나는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덜덜 떨리는 손을 내리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른 전개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이 4챕터 마지막 편입니다. 브릿지 (악살다에서 외전을 뜻하는 말이에용) 1, 2가 22~24편까지 들어가고, 25편부터는 드디어 2장 여름파트 시작이에요! (두근두근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언제나 힘이 되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