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21화 (21/102)

00021 4. 그물과 물고기 =========================

레테일은 사냥이나 할까 하고 겨울 별장으로 가던 도중에 소식을 듣고 진로를 틀어 내게 왔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한 후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사색이 되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보고 나만큼이나 놀란 마리가 재빨리 내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고 손에 따뜻한 차 한 잔까지 쥐어주었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주위를 물리고 자신까지 알아서 나가줬다. 정말 어지간히도 일 잘하는 하녀였다.

나는 책상에 앉아 현재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안 좋아서 선택지마저 몇 개 없었다.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고 깃펜으로 휘갈겨 적었다. 내 평소의 글씨체와는 많이 다른 날림체였다.

하나. 라인하르트의 비호 뒤에 숨어서 그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알아서 수습해주길 기다린다.

먼저 가장 편한 방법을 적었다. 그래, 편하긴 무지하게 편하겠지. 하지만 이미 그의 비호가 미칠 수 있는 범위는 사건을 은폐하려던 사실이 드러난 이상 매우 협소해졌다. 어쭙잖게 날 보호하려 들다가는 공범이냐는 의심까지 살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한마디로 너무 위험하고 효과가 미미한 방법이라는 소리다. 그러니 이건 폐기. 깃펜을 힘주어 잡고 글자 위에 두 줄을 좍좍 그었다. 오래 전에, 그러니까 환생하기 전에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서술형 수정을 이렇게 하던 것이 습관이 되어서.

둘. 직접 공개 석상에 나서서 결백을 호소하고 진짜 공범인 피치엔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믿어 줄까? 내가 범인으로 몰리기 전에 계획적으로 공범을 잡아들이는 것과, 범인으로 낙인찍힌 후에 다른 이를 범인이라 찝어내는 것은 온도차가 컸다. 원래대로라면 완벽한 연결 고리를 만든 후 라인하르트로 하여금 화재 사건이 의도된 방화임을 밝히고 증거물을 공개하며 지체 없이 피치엔을 몰아가게 할 셈이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완전히 순서를 뒤틀어 버려서, 쓰기에 썩 좋지는 않다. 이것도 폐기.

셋. 누군가로 하여금 나를 변호하게 한다.

지금까지 알아낸 모든 것을 믿을 만한 자에게 넘기고 진범을 대신 밝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결백만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 누군가가 범인으로 몰린 자를 변호하고도 역공을 받지 않고 대중을 납득시킬 만큼의 공신력을 가진 인물이어야 한다는 게 영 걸린다. 공신력. 도대체 내 주위의 누가 어마어마한 명예와 지위를 갖춘 동시에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 전부 나와 연결되지 않은 제 3자의 탈을 쓰고 있단 말인가?

대체, 누가.

빌어먹을. 또 막혔다.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진범이 쳐 놓은 그물의 주도권을 빼앗아보려다 된통 걸리고 말았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뭘 해야 하지? 정말 이대로 들어앉아 지금껏 쌓아올린 것들을 박탈당하고 여주인공 아이린이 내 목을 베러 올 날만 기다려야 하는 건가?

원래는 이런 전개가 아니었다. 악녀 라니아는 끝까지 발뺌하고, 아이린은 결국 수도 사교계에 입성해 남주인공들의 도움을 받으며 라니아를 몰아넣어 처단하는데. 아직은 그 때가 아닌데. 어째서.

줄거리가 틀어지려니 또 이렇게도 틀어지는구나. 눈앞이 깜깜했다.

하루종일 밥도 안 먹고 우두커니 앉아 몇 시간이고 흘려보낸 나는 온 집안에 나에 관련한 불미스런 소식이 퍼지고 나서부터 벌써 몇 번째 걱정을 담고 열리는 방문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이번엔 또 뭐야.

"라니아, 내 사랑스런 딸. 신문에 호외 기사가 떴구나. 읽어보렴. 이제 다 괜찮단다. 다 괜찮아. 문제는 해결됐어."

뭐라고? 순간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일절 반응 없이 날선 눈매를 하고 그녀가 하는 양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나의 어머니 일레인은 그녀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허둥지둥 들어와 내 이름이 헤드라인에 큼지막하게 박힌 신문을 책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신문으로 주의를 집중해 글자를 읽어내렸다.

- 오늘 오전 에네아스 백작가의 충격적인 폭로로 인해 범인으로 몰린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 대공녀는 누명을 썼던 것으로 밝혀졌다.

귀족회의 종료 직후인 오후 4시경, 피치엔 공방의 재정을 맡은 고위 간부 프레센덴스 씨가 회의 내용을 정리한 본 신문사의 1차 호외를 접하고 사실을 알리겠다는 용건으로 정보국을 방문했다. 정보국에 의해 실시간으로 일반에 공개된 평민 프레센덴스 씨의 진술에 따르면 최근 재정난에 시달리던 피치엔 공방은 본래 가문의 표식을 제작하는 건으로 거래하고 있던 루 할레시온 대공가에 경영자금 부족을 호소하며 투자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결국 지난해 12월 피치엔 공방은 폐업 위기에 처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피치엔 공방의 최고경영자 맥 씨는 익명의 인물이 세이잔 자작가 저택에 방화하고 가짜 증거물인 루 할레시온 가문의 표식을 현장에 두는 데 협조하는 대가로 루 할레시온 가문이 받을 불이익을 보장하고 폐업 위기인 공방에 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프레센덴스 씨는 주장했다.

또한 프레센덴스 씨를 통해 그가 관리하던 내부 서류가 공개되었다. 이것은 피치엔 공방이 1059년 당시 이모레타 지방으로 본점을 이전하고 그 일대의 공업품 판매를 독점해 가격을 올려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이모레타 지방의 관리 가문인 세이잔 자작가에서 중앙 보고를 올리고 막대한 금액의 벌금을 매긴 뒤 이모레타 내 입점 금지 조치를 내려 큰 손실을 입었다는 재정 기록이다. 프레센덴스 씨는 최고경영자 맥 씨가 세이잔에 불을 지르는 것에 쉽게 동조했던 이유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 서류를 정보국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정보국은 프레센덴스 씨의 진술과 제출한 증거물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방금 전인 오후 9시경 수사관들을 소집해 피치엔 공방의 조사에 착수했다. 관계자는 수일 내로 피치엔 공방의 최고경영자와 이하 간부들을 정보국 본부로 소환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한편, 이에 앞서 귀족회의가 진행 중이던 오후 2시경, 회의에 참석하셨던 황태손께서도 수사를 은폐하려던 것이 아니라 진범이 수사의 진척 상황을 보며 반박증거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내부 수사로 전환했던 것이라 해명하셨다. 또한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수석 보좌관은 섣불리 지엄한 황손의 명예를 훼손하려 한 에네아스 백작가에게 죄질에 걸맞는 징계를 내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

모든 게 완벽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사를 끝까지 다 읽은 즉시 온몸에 전율에 가까운 감각이 덮쳐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누가?

아니. 사실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미 답을 냈다. 스스로 확신하면서도 믿지 못할 뿐. 아연하게 일레인을 불렀다.

"어머니."

"그래, 라니아. 많이 놀랐지? 이제 악몽은 끝났으니 늦은 시간이지만 뭐라도 좀 먹으렴. 오늘 점심부터 계속 걸렀잖니."

일레인이 다정하게 내 등을 토닥이며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나는 반쯤 넋이 나가서, 힘이 그닥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일레인을 뿌리쳤다. 그녀는 내 이상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고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니? 혹 어디가 아프다면 어서 말하렴."

"어머니."

"듣고 있단다."

"고작 사흘이었어요. 더 정확하게 시간으로 따지면 아마 60시간을 조금 넘기는 정도밖에 안 될 텐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더 자세히 얘기해 주련?"

"편지가 도착하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가정해도, 오늘은 너무 빨라요. 꼭 미리부터 대비하고 있던 것처럼......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유일하게 제대로 대응했어요. 대체 어떻게?"

나는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통째로 얼어 부스러진 듯 텅 비었다가, 순식간에 해일이 밀려오는 것처럼 꽉 찼다. 방금 일어난 일은 상식선에서 벌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심히 비현실적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찰나, 일레인이 내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쥐고 자신을 보도록 고개를 돌려놓았다.

"라니아, 정신 차리고 차분하게, 무엇 때문에 네가 이리 혼란스러워하는지 알려주렴.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지 않겠니?"

전에 없이 단호한 음색과 표정이었다. 그제서야 물 속에서 떠돌던 나는 그녀의 손에 의해 건져졌다.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뜨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숨을 고르다가, 말을 뱉기 전에 미리 정리해 보았더니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 뿐이었다.

"서부의 에온 지방으로 가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제가 갈 수 있을까요?"

샤카르 멘데로프. 그를 만나야 했다.

***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라인하르트의 분노에 겨운 전폭적 지원과 닦달로 인해 정보국 직원과 취조 대상은 죽어났지만 그에 비례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속도는 빨랐다. 라인하르트는 정기적으로 황궁에 들러 출석 체크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오는 사현과 십이현에게 그의 말을 전해달라 했고, 나는 그들을 통해 편지 대신 말로 그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에네아스 백작가는 현재 황태자파의 일원이라 황태자의 보호로 가벼운 근신 처분만 받고 끝났다. 황태손이 사건을 덮으려 했다는 걸 고발하고 나섰던 가문이 아직도 그의 아버지인 황태자의 비호를 받는다는 게 납득이 안 갈 뻔했는데, 세크네트의 말로는 황태손이 나와 약혼 관계이니 그까지 걸고 넘어져야 약간의 희생은 있더라도 나를 확실히 잡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빼도박도 못하게 제 약혼자까지 써먹은 철두철미한 범인으로 만들겠지만, 황태손이야 나중에 어찌 잘 덮고 변명해 빼내오려 하겠지. 여기도 전생의 내가 살던 곳과 다를 바 없다. 강자는 무슨 잘못을 해도 용케 비난을 피하고, 약자는 아무 잘못 없어도 어떻게든 휘말려 피해받지. 황태자는 그걸 알고 봐준 거라나.

한편 피치엔 공방의 간부들은 줄줄이 잡혀와 진술을 하고 죄를 토설했다. 루 할레시온 가문과 나는 누명을 벗었다. 그러나 익명으로 접근했던 진범만은 피치엔의 그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사건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용의자를 좁혔다. 아무리 세이잔과 마찰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저택에 불을 지를 때 죄를 덮어씌울 사람으로 나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는 건 약간 어색하다. 결국에는 그냥 날 애초부터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속셈이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 화재가 꼭 세이잔 저택에 났어야 하는 이유도 그와 마찬가지일 거다. 애초부터 세이잔의 몰락이 목표였겠지. 이를 토대로 진범은 세이잔과 루 할레시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방에 잡을 속셈이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 가설을 충족하는 용의자라면 몇 없다. 황태자나 황태자파의 대표 가문 중 하나일 게 뻔해. 세이잔은 막대한 재산과 넓은 인맥 덕에 자작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명망 높은 백작가와 거의 비등한 취급을 받는다. 불이 나기 직전까지의 정치적 포지션은 중립. 그러나 한때는 3황자파였고, 또 한때는 2황자파였다. 몇 년 전 두 황자가 격랑에 휩쓸려 죽고 다칠 때 세이잔은 안전하게 발만 걸쳐두었던 것을 쏙 빼서 달아나 박쥐 가문이라는 이명도 얻었던 적이 있다. 어쨌든 한 번도 황태자파였던 적은 없고. 꽤 힘있는 가문인 세이잔이 또 뭔가 눈에 띄는 짓을 하려 했다면 황태자파 입장에서는 위협적이었을 법도 하다. 거기에 결혼의 초석인 약혼을 맺고 없애버릴 날만 기다리고 있는 루 할레시온 가문까지 추가하면 그야말로 완벽한 레시피다.

사건의 진상은 드러나고 있으나 그것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 같다. 루 할레시온 가문이 타깃으로 지목된 이상. 나는 계속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단 수도 정계과 사교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온 사건이 대충 마무리된 시점은 레테일이 나를 찾아온 날로부터 다시금 열흘이 지난 후였다. 신문에는 슬슬 이번 사건 관련 기사가 뒷 페이지로 이동하고 1면에는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줄기차게 내게 날아와 답장하는데 꽤나 애를 먹었던 걱정 편지들도 좀 수그러들었다. 그것들 중에 제일 웃겼던 건 에단이 그 날 걱정이 되어 밤을 새버렸다며 나도 그렇냐고 물어보는 편지였다. 나보다 한 살밖에 안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성격 탓인가.

아, 또. 라인하르트가 그러길 새해 벽두부터 겁도 없이 황궁에 쳐들어왔던 자객들의 배후도 얼추 윤곽이 잡혔다고 한다. 정보국에 신설된 전담 부서가 중간 조사 결과를 보고했는데, 황궁 곳곳에서 마법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제국이 전쟁 목적으로 수백 년간 모아온 마법 자료를 참고해 분석했더니 '시간의 흔적을 지우는 능력'을 가진 망국 프리제의 마법사가 자객들 중 하나였다는 것으로 추정된단다. 그것 때문에 정보국은 한 차례 더 뒤집어졌다. 마법사 혈통이 남아있을 만한 프리제의 직계 왕가는 할레시온 제국에게 정복될 당시에 싸그리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거든. 그래서 수사가 꽤 장기화될 모양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남은 건 샤카르 뿐이었다. 아무리 납득해보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토록 완전무결한 시나리오를 단 사흘만에 썼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그가 세기의 천재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프레센덴스인지 뭔지 하는 인간을 포섭하고, 서류를 조작하고, 세이잔 자작가와 피치엔 공방 간의 원한관계를 만들어내고, 결정적으로 세이잔과 루 할레시온 그리고 피치엔을 인과관계에 맞게 엮기까지 하는 게 얼마나 성가시고 오래 걸리는 일일지 섣불리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새삼 그와 가장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상기했다. 멘데로프 백작과 함께 저택에 온 그는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앞에서 기다렸다고 했지. 일레인은 샤카르가 가고 나서 내게 인사가 너무 길었다고 말했었다. 그 때는 그저 우리가 피아노를 막 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기다렸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셀리아와 내가 친 곡은 기껏해야 여섯 곡이었다. 거의 쉬지 않고 계속 쳤으니 많아도 삼십 분은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삼십 분 가지고 집주인인 일레인이 눈치챌 정도로 역정을 낼 백작이 아니다. 그는 정치판에서 오래 구른 고위 귀족이니 웬만큼 화나는 일에는 표정 변화가 없는 게 당연하다.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대화를 잠시 나누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였고. 그렇다면 결국 샤카르가 삼십 분 넘게 2층에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내가 피아노를 치기 전부터.

과연 그동안 그는 나와 셀리아,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어디에 있었을까. 애석하게도 이 또한 답이 나와있는 질문이었다.

그는 서재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소설 줄거리를 정리해 두고 이따금 주의할 만한 것을 다시 곱씹어 보며 몇 자 끄적이던 분홍색 표지의 공책을 발견했겠지. 마침 그 날 공책은 서재에 있었다. 전날 저녁에 책을 읽으러 갈 때 들고 갔다가 깜박하고 그냥 두고 와서, 샤카르가 수도를 떠난 날 저녁에 르쉬네의 편지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아 밤을 샌 다음에 서재를 다시 나가다 우연히 발견해 안도하며 챙겨 나왔었다. 어차피 서재에는 우리 가족 말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주군, 전서구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까요?"

기감이 인외의 경지에 이른 게 분명한 사현이 구석에 없는 듯 서 있다가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다. 그저께 아침부터 초조하게 기다리던 답장이 드디어 돌아왔다는 말에 책상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당장 그리 하라고 했다. 날 애태우고 싶기라도 했는지 이번에는 전서구가 좀 늦었다.

새하얀 전서구가 창틀에 앉았다. 예전에, 샤카르는 나와 연락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서구 두 마리를 선물했다. 하나는 갈색 깃털을 가진 새로, 그의 정보상 건물과 내 저택 사이를 오가도록 훈련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하얀 새는 그의 가문 저택과 내 저택을 오간다. 당시에는 정보상을 아는 새만 주면 될 것이지 왜 제 발로 뛰쳐나온 지 오래된 그의 집을 아는 새까지 주는지 몰랐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게 될 줄이야. 역시 그는 언젠가 가문의 품으로 되돌아갈 계획이었던 건가. 준비성에 감탄하며 꼭꼭 접어 부피를 줄인 후 작은 목걸이처럼 매단 편지를 손에 넣고 전서구는 새장으로 돌려보냈다.

"저희는 밖으로 나가있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십이현이 말했다. 나는 눈짓으로 허가했다.

내가 그에게 급히 보냈던 편지에는 단 한 줄만을 적었었다.

- 당신, 내 서재에서 분홍색 표지의 공책 읽은 적 있죠? R.E.lH. -

어떤 대답이 왔을까. 차라리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내용이었으면 좋겠다. 심호흡을 하고, 꼬깃하게 접힌 연파랑 편지지를 잘 펼쳐 안에 든 내용을 읽었다.

- 에빌에게.

역시 누가 내 동업자 아니랄까봐 두뇌 회전이 빠르구만? 하지만 다는 못 읽었어. 웬 처음 보는 딱딱한 모양의 언어로 쓰여져서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읽은 건 그 이상한 글씨가 가득찬 페이지의 뒤쪽에, 네가 대충 제국어로 휘갈겨 놓은 단편적인 정보들 뿐이었어.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내용이라 잘 분석했다가 미리 대비해 본 것 뿐이지. 준비해서 나쁜 건 이 세상에 없다고, 내 옛 친구가 그랬거든. 그런데 진짜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나도 몰랐다. 아무튼 네 사생활 침해해서 미안하게 됐다. 에빌 너는 그 수상쩍은 정보에 대해 묻는 것도 사생활 침해라고 날뛸테니 입 다물게.

참, 정보상 애들 보고를 듣자니 네가 날 찾아가려고 저택 밖으로 나와서 동네 떠나가라 난동을 피우다가 겨우 붙잡혀 들어갔다던데. 여기까지 어느 세월에 오려고 그래. 오지 마. 여긴 수도보다 더 춥다고. 아, 이 편지가 네가 떠나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다. 발송이 늦어져서. S.M. -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맞다. 혹시나 누가 엿볼까봐 대부분은 한글로 써 놨었지. 내게는 제국어나 한글이나 다 익숙한 글자라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멍청한......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불안에 젖은 채로 보낸 열흘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내가 정리해보려고 한 번 대강 써 본 그 조각난 정보들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재구성한 것만으로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대체 얼마나 머리가 좋은 거야, 이 인간은.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새 편지지를 꺼내들어 안에 글자를 적어 넣었다.

- 그렇게까지 시끄럽게 날뛰진 않았는데. 정보상의 부하들 입이 과장된 말을 잘 하나 보죠?

그나저나 대단하군요. 내가 제국어로 써 놓은 건 조각난 정보들 뿐이었는데. 능력은 인정할 테니까, 그럼 이번엔 그 비상한 머리에 당신의 정보상까지 총동원해서 조사 좀 해봐요. 화재 사건의 진범을 찾아야겠어요.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아요. 대신 당신도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요구해요. 상호 협력적인 관계여야 동업자라는 이름이 유효한 거잖아요? R.E.lH. -

유비무환이라는 말은 전생에 윤이설일 때 몇 번 들어본 말이다. 샤카르가 그랬듯 나도 그 말대로 만일에 대한 대비를 해놓으려 한다. 혹시 샤카르의 대처에 구멍이 발견돼서 또다시 내 이름이 용의자로 거론되면 그때야말로 확실히 아니라고 할 수 있어야 하니까. 이번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진범이 아니라 공범만 열심히 머리 써서 찾아낸 것에 불과하니 아직 안도해서는 안 된다. 이참에 내게 이빨을 세우는 것들이 누군지 확정지어 보자고.

편지를 반듯하게 접어 봉투에 넣고 직접 봉해 마리에게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어쨌든 이걸로 당장의 문제는 해결됐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리를 불러 간단한 간식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추운 복도에 오래 세워두기 미안해 사현과 십이현을 안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062년의 첫 달도 이제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4챕터 끝입니다. 다음 편은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자정 즈음에 올라가요! 다음 편의 소제목은 'Bridge 1 : 개기 일식' 입니다. 라인하르트 외전이에요.

그리고 미리 공지드립니다. 사실 제가 현재 예비 고2인데다 기숙사 학교에 다녀서 학기중에는 글 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3월 이후로는 연재가 좀 뜸해질 수도 있어요. 일단 방학 동안 최대한 비축분도 쌓고 연재도 열심히 할 생각이지만...방학 안에 완결이 못 날 건 거의 기정사실이라서요ㅠㅠ 앞으로 혹 연재 주기가 가끔 느려지더라도 양해 부탁드려요ㅠㅜㅠㅜ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제가 저번 후기에 빼먹고 안 썼는데 원래 악살다의 제목은 '겨울의 종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제가 직접 만든 표지에도 윗부분에 어두운 파란색 영어로 THE END OF WINTER이라고 써 있어요. 물론 제가 표지 만드는 실력이 없어서 잘 안보이지만요ㅋㅋ 지금 현재는 '겨울의 종말'을 부제목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조만간 빠른 연재와 글쟁이의 의지 상승을 위해 연참이벤트를 열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비축분을 쌓아보는 중입니다. 연참 조건을 코멘트로 할지, 추천으로 할지, 팬아트/팬픽으로 할지는 아직 고민중이에요ㅎㅎ 어떤 게 연참조건을 적당히 달성하기에 적합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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