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Bridge 2. Seknet Loenscher : 회색 계절 =========================
참 많이도 무너졌어.
《Bridge 2. Seknet Loenscher : 회색 계절》
세크네트 로엔세르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십여 분 차이로 형은 레테일이 되었다. 둘은 같은 회색 머리카락과 갈빛 눈을 가진 데다가 얼굴 생김새까지 쌍둥이답게 아주 흡사했다.
로엔세르 공작은 틈만 나면 어떻게 쌍둥이면서 성격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고는 했다. 점잖은 레테일과는 달리 체신머리 없이 마냥 헤실헤실 풀어진 세크네트에게 그놈의 행동거지 좀 고쳐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잘못 짚었다고, 두 쌍둥이는 하나같이 생각했다. 능숙하게 처신하는 쪽은 오히려 세크네트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으로만 따지자면 세크네트가 레테일보다 한 수 위였다. 그걸 쓸데없는 데 사용하느라 진가를 발휘하지 못할 뿐이지. 힘 들이지 않고 나무에 올라가는 방법이나 가정 교사가 내 준 숙제를 하지 못한 이유를 빠르게 다섯 개 이상 만들어내는 방법 따위의 웃기지도 않는 것에 머리를 굴리는 형제에게 레테일은 항상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의외로 실생활에 필요한 경우가 많아 결국 슬그머니 다가가 그 방법들을 묻는 레테일이었다.
열다섯 살 때 참석한 황태손 책봉 축하 연회에서 세크네트는 라인하르트를 만났다. 레테일은 그 즈음 사냥을 하러 갔다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오지 못했다. 황태손은 그의 유쾌한 면에 이끌려 먼저 말을 걸었고, 세크네트는 그런 식으로 많은 친구를 만들었다. 그들과 세크네트는 삼 년 후 정식으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모임 안에는 황태손을 비롯한 황족과 귀족의 자제들이 여럿 소속되어 있었다. 그 무게를 그가 모르는 바 아니었다.
"모임이라고? 대귀족과 황족까지 대거 소속된?"
"응! 멋지지? 재미있을 것 같아."
"별로. 오히려 위험해 보이는데."
건조한 책 냄새가 나는 서재에서 책을 읽던 형제에게 그 소식을 알리러 간 세크네트는 영 시큰둥한 반응에도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이번 세대의 귀족 자제들이 처음으로 결성한 집합체잖아? 원래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법이라고."
레테일은 읽고 있던 두꺼운 책을 탁 덮고 고개를 들어 세크네트를 바라보았다.
"그런 어마어마한 집단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대를 쌓을 즈음이면 뭔가 일이 터질 거야. 그럼 그 모임은 그대로 파탄이지. 그 파편들은 나중에 그들이 장성했을 때 적과 아군을 판단하는 밑거름이 될 거야. 거기 휘말리면, 넌 그저 '위험한 일이었다'라고 태평하게 평가하지는 못할 텐데?"
"......숙청이 일어날 거라고?"
세크네트는 파편으로 흩어진 레테일의 추리를 한 마디로 집약해 시간대를 넓히고 되물었다. 그러나 레테일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딱 자신이 짚어낸 범위까지의 부가 설명을 제시했을 뿐이다. 세크네트는 이런 일이 예사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현재 시점에서는 아직 머나먼 후일이다.
"요즘 귀족들의 힘이 너무 강해. 그래서 아버지께서도 적당히 몸 사리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시잖아? 지금 당장은 활개치고 다니는 다른 귀족들이 좋아보일지 몰라도 미래를 예측한 이상 잘 처신해야지."
세크네트는 쓴 약을 삼킨 양 인상을 썼다.
"숙청 말이야, 얼마나 잘려나갈지 도무지 예상이 안 가. 너무 어려운 문제야."
"그 문제를 풀어서 뭐하게?"
"내가 어디까지 간을 봐도 될지 가늠해볼 거야."
세크네트는 씩 웃고 바지 주머니에 껄렁하게 손을 꽂아넣은 채 뒤돌아섰다. 불규칙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제 형제의 뒷모습이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던 레테일은 이내 다시 책을 펼쳤다.
저택의 후원에는 좋은 나무 그늘이 많았다. 세크네트는 그 아래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후덥지근한 여름날이었다. 새파란 하늘 위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흰구름이 떠다닌다. 연둣빛 나뭇잎이 가끔씩 살랑거리며 한적한 시야를 방해했다.
모임의 핵심 일원들이 오늘 만나서 논다던데. 세크네트는 지난 이틀 간의 가벼운 몸살 탓에 거기 가지 못한 것에 안도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헷갈려 그냥 생각을 포기했다. 입에 강아지풀을 물고 한량마냥 중얼거렸다.
"이야, 바람 분다."
끈적하고 더운 여름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은 가뭄에 단비와도 같았다. 세크네트가 히히 웃으며 손을 들어 허공에 가져다 대었다. 실바람이 손가락 사이에 엉켰다. 바람의 정령이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아 세크네트는 또 소리내어 웃었다.
마냥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
세크네트의 분석 결과, 모임은 애초에 말도 안되는 조합이었다. 황태자의 아들, 2황자의 딸, 황태손의 육촌, 1황녀의 아들. 모임에는 이렇게 네 명이 주동자였다. 라인하르트와 에단만 같은 파벌이고 나머지 둘은 황태자의 계승을 위협하는 위치에 있었다. 황태자의 기반이 확고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황족은 잠재적인 적이었다. 그런데 그 자제들끼리 친한 친구라니? 이건 매우 불길한 징조였다.
몇 년 가지 않아 세 파벌 중 하나가 승리하면, 야심을 품고 있었든 아니든 간에 나머지 둘은 반역자로 몰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모임은 깨지고, 친구는 원수가 되겠지. 세크네트는 거의 확신하다시피 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결론을 냈다. 모임에 적당히 발만 걸치고 있자고. 그래서 다른 목적이 있어 친분을 유지해 둔 라인하르트나 에단을 빼고는 구성원들의 얼굴도 잘 몰랐다. 아예 이름만 알지 한 번도 안 만난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에빌 대공녀 같은. 그건 세크네트가 유독 그녀를 만나길 꺼려한 탓이었다.
에빌 대공녀는 세크네트의 사고 속에서 언제나 난제였다. 곁에 사람은 많이 두었으나 마음을 내준 자는 극소수고, 친인들이 전해주는 단편적인 정보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하나로 들어맞질 않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한 명인 척 하는 줄 알았을 정도다. 그런데다가 '모임'의 최대 핵심 인물이기까지 하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지, 어째서 혼돈에 가까운 퍼즐 조각을 가졌는지. 궁금증이 극에 달한 세크네트는 제드릭 공녀, 라인하르트, 에단, 심지어는 정보상의 힘까지 빌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손을 싹 씻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우려했던 첫 번째 사건이 터졌다.
제드릭 공녀가 죽고 에빌 대공녀가 음지로 숨어들었다. 모임의 구성원 중 절반이 사라졌다. 모임은 끝장났다. 스물두 살의 세크네트는 제대로 된 추측 덕분에 처절한 비극에서 한 발 물러나 관망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제야 시작이었다.
황태자와 황태손이 주도권을 휘어잡고 무자비한 숙청을 자행하며 혼란한 시대가 도래하던 때.
세크네트는 돌연 청혼을 받았다. 물론 정략혼이었다. 상대는 멘데로프 백작가의 딸, 셰카이나 멘데로프. 나이는 25세. 연상이었다. 부부는 남자 쪽이 나이가 많은 편이 보통인 제국의 풍습에 어긋나긴 했지만, 그냥 전통일 뿐이니 그런 게 딱히 문제되는 건 아니었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멘데로프 백작가는 에온 지방의 관리권을 하사받고 최근 대백작가로 급부상하고 있는 가문이었다. 해서 처음에는 정세의 혼란을 틈타 백작이 자신의 딸을 명망높은 공작가에 시집보내 가문의 세를 더 불릴 작정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결혼이 확정되지 않은 시점에서 저택으로 찾아온 셰카이나를 만난 날, 이제껏 틀린 적이 거의 없었던 세크네트의 가설이 빗나갔다.
"저는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정확히는, 당신 가문의 힘이죠."
청록색 머리카락과 금안을 가졌고, 대단히 가녀려 보이는 미인인 셰카이나가 자리에 마주앉아 뱉은 첫마디였다. 세크네트는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짚어냈다.
"엥. 백작께서 필요로 하시는 게 아니고 영애께서 말입니까?"
"네. 제 목표는 백작가를 물려받는 것. 그 과정에서 저의 정당성을 증명해 보일 때 제 남편이 가진 세력이 힘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 후계자는 영애의 동생 되시는 그, 성함이 뭐였더라......"
"샤카르 멘데로프입니다."
"앗, 맞다. 샤카르 영식이었지. 아무튼 그 영식이 후계자 아닙니까?"
제국법상 황가나 귀족 가문의 후계자 선정 기준은 성별이 먼저요, 그 다음이 태어난 순서다. 그렇기에 둘째지만 남자인 샤카르가 후계자 자리를 받았다.
"맞습니다만, 그 아이는 스무 살도 안 되어 집을 나갔습니다. 가끔 백작께서 보낸 용병들에게 잡혀 들어오긴 하지만 끈질기게 재탈출에 성공하지요. 왜 그러냐 물었더니 제게 자신의 자리를 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하더군요."
셰카이나는 동생을 떠올리고 애잔한 표정을 잠깐 내비쳤다. 세크네트는 그 표정이 걱정 또는 질책을 의미함을 알았다.
"의도된 일탈이네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 아이의 희생을 알기에 저는 계승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머지않아 백작은 그 아이를 잡아오는 데 한계를 느끼겠죠. 그 때가 제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입니다. 이번 결혼이 성사되면 기회를 잡을 확률이 상승한다는 것 정도는 영식께서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당연히 압니다. 흠. 그럼, 영애의 간절함을 확인했으니 결혼은 진행해야겠네요. 그 전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제게 오는 이득은 없습니까?"
셰카이나는 유쾌한 미소로 시종일관 나름 가벼운 분위기를 유지하던 세크네트가 예고도 없이 날린 화살에 정통으로 맞았다. 이 남자의 진짜 정체가 급격히 궁금해졌다. 일단, 절대 얕보아서는 안될 인물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테이블 아래 놓인 손을 꽉 말아쥐고 결단을 내렸다.
"제가 물려받을 멘데로프 백작가는 로엔세르의 방패가 될 겁니다."
세크네트는 비로소 완전히 미소를 거두고 그의 인생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진지해졌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손깍지를 껴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셰카이나는 눈 깜짝할 새 반전된 그의 태도에 긴장했다.
"절대적인 아군이자 방패막이 역할을 할 도마뱀의 꼬리가 되겠다는 겁니까?"
"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멘데로프를 대신 내세워 잘라내고 로엔세르는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만 대외적 관계를 유지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렵게 물려받은 가문을 그렇게 헛되이 내버려도 됩니까? 제가 보기에 영애께서는 상당히 야심있는 분이신데. 조력해줄 훌륭한 자가 아무나 두엇 정도만 옆에 있으면 세계 정복도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농담을 빙자한 날선 지적이었다. 셰카이나가 팽팽하게 조여진 공기 흐름을 이겨내고 설핏 웃음지었다. 그녀 역시 만만찮은 사람이었다.
"로엔세르가 실책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멘데로프가 도마뱀의 꼬리가 될 일도 없겠죠."
"실책을 저지를지 안 저지를지는 확신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인데요?"
"확신을 왜 못 하나요? 제가 가문을 물려받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들면 될 것 아닌가요. 저는 제 능력에 자신이 있습니다."
"로엔세르를 조종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세계정복을 도울 만큼의 능력을 가진, 성실하고 완벽한 조력자가 되어드리겠다는 말입니다."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런 야심가의 남편이 된다는 건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세크네트는 끝내 자신이 휘말렸음을 인정했다. 대신 장차 로엔세르를 이끌 후계자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쌍둥이 형제 레테일에게 쓸만한 패 하나를 쥐여줄 수 있게 되었고, 새로운 흥밋거리도 찾았으니 이만하면 당할 만한 수작질이었다.
1057년 겨울, 그들은 결혼했다.
***
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크네트는 레테일도 알고 라인하르트도 알고 프리드리히도 알고 심지어는 셰카이나까지 눈치챘지만 정작 세크네트 본인만은 모르게 사랑에 빠졌다.
사랑이란 원래 인과관계 없이도 뜬금없이 불쑥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불청객 같은 거라지만, 이건 과하게 갑작스러웠다. 레테일이 답지 않게 다정하게 세크네트의 어깨를 토닥이며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끝까지 넋이 나간 채 무자각 상태로 셰카이나를 졸졸 쫓아다녔을 것이다. 세크네트는 한참 후에야 자신의 이상 행동의 원인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보잘 것 없이 짧은 단어 하나 따위가 어려서부터 꾀에는 도가 트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었던 세크네트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의외로 괜찮은 흔들림이었다. 세크네트는 만족했다. 셰카이나가 만약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그저 써먹기 좋은 카드 중 하나로 생각한대도 괜찮았다.
이대로 충분히 온전했다. 아니, 행복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까? 세크네트는 행복의 사전적 정의를 상기했고, 그것만큼 현 상황에 적합한 단어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시선이 너무 따갑군요."
"앗, 미안하오 부인."
차를 마시며 부인을 빤히 쳐다보던 세크네트는 셰카이나의 지적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차를 엎을 만한 상황이었으나 찻잔만 테이블 위에서 데구르르 굴렀다. 다른 데 신경을 쏟느라 그 뜨거운 찻물을 한 번에 다 들이킨 탓에 다행히 안이 비어 있었다. 셰카이나는 말없이 그것을 집어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하녀에게 까딱 손짓해 새로운 찻물을 채웠다. 이번에는 차가운 냉차였다. 입이나 식히라는 무언의 배려이기도 했다. 하지만 배려와는 별개로 남편의 손가락 오그라드는 말투는 오늘에야말로 바꿔보겠노라 마음먹은 그녀였다.
"그 말투......정말 안 어울리는 거 아십니까?"
셰카이나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남편의 어투를 의식할 때마다 태동이 심해지는 것이, 아무래도 태아마저 창피한 모양이었다. 출산 때까지만이라도 말투를 고쳐놔야 생활하기에 조금 편할 것 같다고, 셰카이나는 생각했다.
"아, 안 어울리나? 그럼 어떻게 바꾸지?"
"첫 날의 그 말투가 좋았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앞으로는 이대로 하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너무 거리감 느껴지잖습니까......"
"그 때처럼 냉철한 모습이 야심 가득한 여자에게는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죠."
"......에, 그런가."
"예."
"알겠습니다. 부인이 원한다면야."
그녀가 이 대화를 이어가며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는 것은 둘 다 몰랐다. 오직 찻물을 따르던 하녀만이 그 장면을 목격하고 드디어 주인 나리의 짝사랑이 끝났노라 소문을 내고 다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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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카이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던 그녀는 오늘 아침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았다. 냉랭하나 당당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시체 같았다. 항상 풍겨오던 묘하게 거역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토록 바라던 후계자가 되었다면서 생기 띈 얼굴로 좋아하던 게 아직도 선명한데. 지금 그의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세크네트는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셰카이나는 마른 입술을 달싹여 유언을 말했다.
"아이 이름......우리가 미리 정했던 대로 에리카로 해 줘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셰카이나가 힘이라곤 없는 웃음을 띄웠다.
"그거 말고."
"예?"
"당신의 예전 그 오글거리는 말투로 아무 말이나 해 봐요."
"사랑하오."
세크네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셰카이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픽 웃어버렸다.
"역시 오글거리는군요. 하지만 당신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건 없겠죠."
"......"
"사랑해요."
마지막 순간 셰카이나는 부끄러운 듯이 엷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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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에리카를 좋아할 수 없었다. 레테일은 그런 그를 마구 타박하며 죄없는 아기에게 무슨 짓이냐고 욕을 해댔고, 세크네트는 뒤늦게 잘못을 깨달았다.
셰카이나가 죽기 전까지는 가끔 놀러와 그와 말장난이나 하고 놀던 처남 샤카르는 그녀의 죽음 이후 발길을 끊었다. 세크네트는 자신과 죽이 잘 맞았던 그가 자신과 조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꾸중할 수 없었다. 한때 그도 그러했으니까.
그랬던 샤카르를 변화시킨 건 1년 뒤의 에빌 대공녀였다. 세크네트가 외면한 과거의 모임에서 핵심 일원이었고, 손수 판에 끌어낸 요주 인물이고, 셰카이나와 품행이 닮은 사람. 로엔세르 출신의 루 할레시온 대공비를 통해 초상화를 가져갈 때부터 대강 짐작한대로 에빌 대공녀는 그것을 샤카르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샤카르가 직접 로엔세르 본가까지 찾아와 조카와 세크네트를 만나고 갔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서부 에온 지방에서 먼 길 왔는데 에빌 대공녀는 만났냐고 장난스레 물었더니 의외로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게 자기 신상에 이롭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그러나 세크네트는 웃지 않았다.
아무튼 에빌 대공녀는 샤카르를 비롯해 셰카이나의 빈자리에 슬퍼하는 이들에게 큰 공헌을 했다. 세크네트는 자신이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에빌 대공녀가 카리스티아에서 입었던 붉은 드레스와 모양이 같은 것을 선물로 받은 에리카가 그것을 입을 수 있게 되기까지 성장하는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는 것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위험요소가 될 인물들과 일부러 친분을 쌓으며 중재자 겸 감시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껏 그래왔듯이 주변에서 무슨 비극이 일어나든 제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다.
그것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숨겨야 할 유일하고도 완전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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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열쇠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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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크네트는 허탈하게 헛웃음을 뱉었다.
보통 가장 불행한 자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지.
보통 가장 두려운 자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고.
그러나 이 공식을 깨고 더욱 불행한 자도, 더욱 두려운 자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레테일이 말하길 꽤나 많은 공식에는 예외가 있다고 했다.
때로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자일 수도 있고.
때로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 가장 두려운 자일 수도 있다.
휘몰아치는 하늘은 먹장구름에 잡아먹히고, 뼛속까지 시린 겨울에. 세크네트는 직감했다.
세계가 무너진다.
============================ 작품 후기 ============================
사실 출연한 양으로만 따지면 그렇게까지 주요인물이라고 보기는 힘든 여주인공의 친척 포지션입니다만, 세크네트의 특성상 딱 맞는 위치라고 생각해 초기 설정에서 이런 포지션을 부여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번 편인 라인하르트 외전의 코멘트는 언제나 그렇듯이 꼼꼼히 다 읽어보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이 좀 많이 논해졌네요. 하지만 제가 스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적어요.ㅠㅠ 일단 조심스럽게 언급하자면 독자님들께서 의문점을 제기하신 부분은 점차 풀려갈 일들의 추상적인 (?)예고편으로 살짝 끼워넣은 부분이에요. 앞으로 2장이 진행되면서 설정오류나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없도록 잘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새로운 파트인 2장 도입이라 업로드 일자를 확언하기가 어려우니 그냥 머지않은 언젠가-라고 해두겠습니다. 일단 내일은 아니에요.
++++버들꽃 님, 라엘린 님 오타수정 감사합니다! ㅋㅋㅋ...고유명사 오타라니....이번 편 퇴고 엄청 했는데 왜 저걸 못 봤을까요... (창피
*2017.6.20 본문 대거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