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5. 등장 =========================
마주하기 두렵지만, 그럼에도 맞서야만 하는 진실이 있다.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말해야만 하는 거짓이 있듯이.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 - 제 2장 : 여름》
봄이 도래했다. 꽃은 피어나고, 동물은 깨어나고, 연녹빛 풀잎은 새로이 돋아난다. 바야흐로 소생의 계절이었다.
나는 세이잔 화재사건이 해결된 이후로 칩거했던 사 년 만큼이나 정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하는 일이라곤 라인하르트의 약혼녀라는 신분으로 이런저런 사교계 행사에 참석해 인맥을 쌓고 지지층을 형성하는 등 최근 들어 늘 하던대로 영향력을 넓혀가는 게 전부였다.
이 기회를 놓치기 싫어 정원에 핀 꽃들을 가지고 꽃꽂이도 하고, 사현과 십이현을 앞에 앉혀놓고 티타임을 즐기기도 했으며, 셀리아와 피아노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그저 평범한 배역을 부여받았다면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이러고 살 수도 있었겠지. 억울했지만 별 수 있나. 나는 라니아인 것을.
아무튼간에 오랜만에 무료한 시간이었다. 소설 내용을 바탕으로 비틀린 것과 그대로인 것을 추려낸 뒤 다시 정리하고 보니 아이린의 등장도 아직 몇 주 남은 듯 싶고. 약 한 달간 주어진 내 자유시간에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일단 오늘은 날씨가 좋기에 르쉬네의 저택에 가기로 했다.
저번에 갔을 때 관리가 안 된 티가 너무 팍팍 나서 마음이 언짢던 차였다. 집 안은 너무 넓으니 나중에 하인들이라도 동원해서 어떻게 하도록 하고, 오늘은 나 혼자 가서 정원의 상태를 확인할 셈이다. 살아있는 식물들의 수와 위치를 기록하고 돌아와 다음에 갈 때 싹 정리해야지.
나는 거리로 나섰다. 집 앞의 빌데론 거리를 지나다가 엘피샤의 가게에 잠시 들러 티타임을 한 시간 정도 가지고, 다시 출발했다. 사현과 십이현은 언제나처럼 기척도 없이 어디선가 나를 따라오고 있을 것이다.
흰색 구름이 하늘에 번졌다. 쨍한 태양과 따뜻한 기온은 나른하고도 쾌청했다. 나는 변온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지만 날씨가 좋으니 덩달아 기분이 붕 떠서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느 2층짜리 건물의 천장에서 휙 떨어져 내 바로 옆 건물 틈의 좁은 골목으로 눈에 띄지 않게 내려섰던 십이현이 내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이제 그녀는 내게 먼저 말을 걸 만큼 발전했다. 사현은 아직도 난공불락에 가깝지만, 언젠가는 그녀 또한 이렇게 만들어 주리라. 이게 은근히 성취감이 있거든. 나직이 웃었다.
"날씨가 좋아서."
"기분 좋으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뒤에 누군가 따라붙었습니다. 처리할까요?"
가명대로 십이현보다 몇 수 위이기는 한지 사현이 언제 온지도 모르게 내 왼쪽에 붙어서서는 흉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따라붙었다고? 이 대낮에? 아무래도 그녀의 오해인 것 같아 바로 지시하지 않고 물었다.
"누군데?"
"저와 십이현의 상관이십니다."
"뭐?"
상관을 처리하겠다고 말하는 사현을 어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 쳐다봐주자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군의 적은 평소 주군과 친밀한 관계가 아닐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또한 제 상관이 아닐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에단."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곧바로 내 뒤에 있는 자가 누군지 알아냈다. 그래서 그녀와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뒤돌아 그를 불렀다. 저 멀리에 있던 인영이 흠칫해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라니아."
그는 반가이 내 이름을 부르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신경 안 써서 몰랐는데 그도 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에단이 머쓱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길을 걷던 중에 대공녀가 보여서, 말을 걸려 했는데......그게 좀......"
"아, 잠깐만요. 저기, 옆에 시꺼먼 기사 둘은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어?"
"예, 주군."
"알겠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호위하겠습니다."
이왕 말 늘어진 김에 등 뒤에서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감시꾼들을 몰아냈다. 이 자들 때문에 말 걸지 못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에단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저 분들이 좀 꽉 막히셨지요? 이해하십시오. 원체 그런 분들이라 아무리 노력하셔도 그걸 바꾸는 건 어려우실 겁니다."
"다루기 힘들긴 하지만 아예 안 통하는 건 아니니 괜찮아요. 그나저나, 저들에게 존칭을 쓰나요? 상관이라던데."
"아, 예. 대외적인 명목상의 상관일 뿐, 사실 내부에서의 실질적인 직급은 저 분들이 더 높습니다. 군부에서는 오십현 개개인을 기사단장으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들 딴에는 농담한 거였군요."
"하하. 맞습니다. 저분들이 저를 두고 상관이라는 말을 쓰는 건 사실 농담에 가까운 언사예요."
기사단장 급이라는 자들의 유머 실력이 저지경이라니, 제국을 떠받치는 12개 기사단의 기사들은 어떠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에단을 짠한 눈으로 보았다. 저번에 농담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던 발언의 출처는 샤카르가 아니라 그의 직장이었군.
내 빤한 시선을 멀뚱히 받아주던 에단은 화제를 바꾸려는지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이걸 사실대로 얘기해줘야 하나. 샤카르 말대로 에단 역시 르쉬네의 친구였긴 한데.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질렀다.
"르쉬네의 저택이 너무 망가져서, 그녀에 대한 마지막 예우로 정돈해주러 가는 길이에요. 오늘은 사전 작업만 할 예정이지만."
"아. 그런, 그렇습니까."
"에단의 목적지는 어딘가요?"
"저는 비공식적인 파견 업무를 나가는 길입니다. 하루 외박할 예정이라, 대공녀를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다음에는 같이 가고 싶습니다."
"그러시면 다음에 갈 때 알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아, 저는 안 그래도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와 나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헤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새까만 옷을 입은 사현과 십이현이 다시 내 곁에 나타났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여상하게 물었다.
"신분이 확실한데다 뭔가 의심가는 짓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 텐데, 왜 경계를 풀지 않아?"
"3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은 르웰린 후작가의 후계입니다, 주군. 경계하셔야 마땅합니다."
"저희가 보기엔 주군께서야말로 경계가 지나치게 느슨한 것 같으셔서 말입니다.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황태손의 약혼자는 르웰린이 예전부터 줄곧 탐내던 자리입니다. 조심하셔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어째 빡빡하게 군다 싶더니 그거였나. 그래도 한때 나름 친했고 성격상 뒤통수를 칠 위인도 아니라 에단 앞에서만큼은 경계벽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소한 것에서조차 계산하고 따져야 하는 황족이란 명패는 참 삭막하다.
이미 날 때부터 황족이었던지라 적응한지는 오래였지만, 쓴 초콜릿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은 르쉬네의 저택에 당도할 때까지 옅게 남아있었다.
가시나무가 얽힌 것 같은 생김새의 녹슨 철제 정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분명 저번 방문 때 잠그고 나간 걸로 기억하는데,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바람이나 산짐승에 의해 잠금쇠가 움직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문 너머로 몸을 들이는 순간, 청량한 봄바람이 벅찰 만큼 상쾌하게 나를 훑고 지나갔다. 마치 결계를 통과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마저 한층 맑아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기에 아주 약하게 달콤한 기가 돌았다. 눈에 들어온 저택은 더 이상 을씨년스럽지도, 더럽지도 않아 보였다. 원래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번과는 풍경 자체가 확연히 달랐다. 역시 지금 내 기분이 좋아서인가. 어쨌든 오랜만에 차분히 안정된 내면이 싫진 않았다.
봄이 왔다는 걸 알리려는지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 앞의 넓은 마당에는 파릇한 잔디가 낮게 깔려 생명력을 과시했다. 누구 하나 관리하는 사람도 없을 텐데 꼭 공들여 다듬은 것마냥 깔끔하다. 이상해. 그 때는 잡초만 무성했었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마당을 거닐었다. 군데군데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은 붉은토끼풀이 낯익었다. 이 집의 옛 주인을 닮은 풀이라고 내가 직접 정의내렸던 것이기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서러워졌다. 나는 애써 눈길을 거두고 발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목적은 저택의 뒤뜰에 있는 넓은 정원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니 그 곳으로 가야 했다. 자꾸만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어쩐지 저번과 달리 먼지도 없고 더 정돈된 느낌이었다. 괜히 드는 위화감에 꼼꼼히 내부를 둘러보다가 은은한 소나무 향이 나는 특이한 향초가 로비 구석의 촛대에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결국 여기 들어온 직후부터 줄곧 느꼈던 변화의 낌새를 확실히 깨달았다. 대체 뭐지? 누가 와서 관리를 하고 갔나?
"에단은 아닐 테고......라인하르트인가?"
터무니없는 추측은 아니었다. 예기치 않게 마주하게 된 진실 때문에 한동안 적잖이 혼란스러워했던 그이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나처럼 그녀의 흔적을 찾아왔을 수도 있지. 그리고는 또 나처럼 저택을 관리하고 싶어 들락거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소나무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소나무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소나무라면 질색했다. 그런 그가 저런 향초를 두었을 리가 없어.
2층으로 올라가는 삐걱이는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며 열심히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나중에는 딱히 해코지를 해 놓은 것도 아닌데 여기 온 사람의 정체를 알아 뭐하나 싶어 도로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1층 로비의 뒷문을 열어젖혔다.
숲의 도입부에 위치한 저택이고, 또 그 중에서도 저택 뒤에 감춰진 후원이지만 햇빛 하나는 참 잘 들어왔다. 머리 위로 한껏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밖으로 나오자 다시금 그 연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과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은, 이를테면 바람의 향기 같았다. 몇 번 이전에도 경험해 본 듯한 향인지라 과거를 되짚다가 떠올려냈다. 자세히는 기억치 못하나 새해 첫 날 불꽃놀이를 구경하러 갔을 때, 그리고 약혼식 날 열린 연회에서 별궁에 피해 있던 중 프리드리히의 등장 직전에 분명 이 향기가 내 곁에 있었다.
어둑한 저택 내부와 달리 화사한 봄볕에 눈을 찡그리다가 이내 적응이 되어 마지막으로 꾹 감았다 떴다.
그런 내 앞에 펼쳐진 것은 황궁의 정원과도 견줄 법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진기한 광경이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과 생기 가득한 잎, 맺힌 이슬. 살짝 젖은 흙내음.
이 꽃들이 내는 향기였던가. 아니, 아닌데. 그렇게까지 진하지는 않아. 분명 다르다. 흐르는 대로 사고하며 꽃밭 안으로 들어섰다.
르쉬네가 열심히 가꾸던 그 꽃은 맞다. 오밀조밀하게 구역을 나누어 크기와 종류별로 나누어 심었던. 그래, 맞는데. 이만큼 성대한 후원은 아니었다. 누구 솜씨인지 참 대단하다. 지난 겨울에 왔을 때는 틀림없이 다 죽은 줄만 알았는데. 정말 라인하르트가 정원사라도 보낸 걸까?
아무튼 내가 여기 온 이유가 사라졌다. 멀쩡하다 못해 끝내주는 후원을 내가 굳이 보살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냥 구석에 여전히 잘 살아있는 구기자나무를 한 번 쓰다듬고 후원에서 나왔다.
엘피샤가 선물해 줘서 입고 온 흰색을 바탕으로 푸른 허리띠와 장식이 예쁘게 자리잡은 봄철용 외출 드레스에 각양각색의 봄꽃 향기가 배었다. 그 잠깐 거기에 있었을 뿐인데. 이제야 후원에 다녀온 르쉬네에게 가까이 가면 선명한 풀내음과 함께 꽃향기가 났던 이유를 알겠다.
꽃을 좋아했던 그녀는 또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챙 넓은 모자와 비슷한 디자인의 모자를 애용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후원의 햇빛이 따가워서 이런 모자가 필수라는 대답이 돌아왔었지. 나는 그 대화를 기억해내고 오늘 집에 있는 이 모자를 쓰고 나왔다. 그녀에게는 사소하게든 크게든 여전히 도움을 받는다.
로비를 가로질러 앞문을 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예쁜 후원을 보고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오늘은 만족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없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찰나 화들짝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유령인가? 이 대낮에? 확 조여진 긴장감 때문에 약간 뻣뻣해진 동작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향기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흰 로브 같은 것을 어깨에 걸치고, 다리 한 쪽은 앞으로 쭉 펴고 나머지 하나는 세워 앉은 남자였다. 이 시대 남자들의 평상복인 긴 바지와 셔츠 차림이다. 당장에 고개만 들면 눈에 넘치도록 담기는 하늘의 색이 남자의 머리카락에 옮겨붙었는지, 그는 샤카르의 것과는 또 다른 푸른 머리의 소유자였다. 샤카르가 어둑한 새벽이라면 남자는 얼음이 맺힌 푸른 달이다.
바람에 끝 결이 살살 흔들리는 연파랑 머리카락. 저 옅은 색감을 왜 어디서 본 것 같지?
엘피샤, 옷 가게의 벽 한 켠, 여우비, 우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 검은 눈, 그리고. 연청색 머리.
"혹시 그 때 그 우산?"
나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가 아차 싶어 입을 가렸다. 그러나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나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흐린 검은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나는 그 때처럼 차마 시선을 피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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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시작합니다. 챕터 소제목다운 오프닝이에요 ㅎㅎ
+사실 이렇게 바로 컴백할 예정은 아니었는데 연달아 두 개의 팬앝을 받아서 기분이 너무 좋아 얼른 돌아왔습니다. 제이jey님께서 악살다와 잘 어울리는 흰색을 비롯한 무채색과 포인트로 예쁜 꽃송이가 어우러진 멋진 표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버들꽃 님께서 차갑고 아름다운 무표정의 여주인공 라니아를 그려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인생 첫 팬앝이에요ㅠㅠ (포풍감동) 두 작품 다 공지에 큰 버전으로 올려두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