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5. 등장 =========================
알피어스가 물러가고 나서, 나는 한동안 남은 자들과 수다를 떨거나 귀가하는 중요 인사들을 배웅했다. 그 뒤로는 한산해진 잔디밭 한 켠에 서서 짙어지는 하늘색을 지켜보며 멍을 때렸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몇 없었다. 이제 신경써야 할 사람은 샤카르, 엘피샤, 시안 정도가 전부였다.
"하시펜도 영식이랑 뭔 얘기했냐?"
"아이 깜짝아."
그런 내 눈앞에 샤카르가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품위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한껏 째려봐주며 손을 휘휘 내저어 내게서 멀어지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샤카르는 순순히 세 발짝 물러났다.
"내 편이 되어 주겠다는군요. 그 외엔 별 말 없었어요."
"별 말이 없긴. 너 5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은 왜 빼먹어?"
"엿들었어요? 이런 예의 없는......"
"에헤이, 알았어. 미안해. 내 청력이 너무 좋아서 그만 들어버리고 말았다고. 근데 내가 생각해도 너 정말 한결같다. 신기하단 말이야?"
"남들이야 한창 성숙해갈 시기였겠지만 난 오래전부터 성숙했으니까요. 변한다 하더라도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달라졌겠죠. 이미 다 큰 어른이 그러듯이."
그가 들으면 아마 잘난 척이냐고 키득대며 되묻겠지. 이 생이 두 번째라는 걸 아는 사람은 라인하르트와 르쉬네 뿐이니까. 그나마도 르쉬네는 이제 이 세상에 없고.
갑자기 또 슬퍼져서, 나도 모르게 눈꼬리를 내려뜨렸나 보다. 샤카르는 예상과 달리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냐."
"뭐예요, 그 진지한 반응은? 웃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래?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아님 말고요. 참, 아까 스카일러 영식에게 가서 뭐라 했어요?"
대충 수습하고 얼른 대화 주제를 바꿨다. 샤카르는 이번에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져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지. 샤카르가 껄렁하게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씩 웃었다.
"개수작 말라고 경고해 줬지. 그 놈은 뭔 헛소리냐고 반박했지만."
"뭐라고요? 당신 미쳤어요?"
"어이, 에빌. 설마 내가 그 자식한테 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도 그 능구렁이와 대적할 정도는 된다고."
"그래서, 왜 경고했는데요? 스카일러 영식이 당신한테 뭘 잘못했어요?"
샤카르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가 검지손가락으로 날 가리켰다.
"난 아니고, 너한테 잘못을 했지. 감히 자기 상관의 약혼녀를 의심하고, 떠보고,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제 한 몫 단단히 챙기고."
"그건 또 어떻게."
내가 일러준 적 없는 사실들을 너무 당연하게 언급하고 있군, 이 인간. 눈썹을 휙 올리고 짧게 물었다. 샤카르는 으스대듯 퍽이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역시 못말린다.
"나 정보상 주인이잖냐. 네 사생활 빼고 웬만한 건 다 알지."
"내 사생활은 안 캐려 들어서 다행이에요. 자, 그럼 오랜만에 만난 김에 지난 세 달 동안 캐낸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좀 들어볼까요?"
나는 세 달 전 샤카르에게 편지를 보내 세이잔 화재 사건의 진범을 찾아 달라고 했다. 그 대가로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 가지 들어줄 테니. 그는 그렇게 하겠다는 답장을 보낸 이후 두 달간 감감무소식이더니 한 달 전쯤에 중간 조사 결과를 간결하게 정리해서 보내 줬다.
심증은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물증은 이상할 정도로 없다더라.
피치엔 공방에서 가짜 증거물을 제공받고, 모종의 의도를 품은 채 세이잔 저택에 불을 지르기까지 준비 기간도 꽤 길고 행동 반경도 넓을 텐데 진범이 워낙 꼼꼼해서 꼬리가 안 잡혔다. 샤카르는 아예 증거가 될만한 것들을 지우고 다니는 데 집중한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한 달여가 지난 오늘. 샤카르는 뭔가 진전된 결과를 가지고 왔을까.
기대했지만, 샤카르는 곤란한듯 손가락으로 볼께를 긁는 시늉을 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하도 증거가 희귀해서 소거법으로 제일 의심스러운 황태자파 가문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식으로 용의자를 추리는 방법도 써 봤는데......스카일러 후작가는 몰 것도 없이 제외했고, 카인 공작가는 세이잔 자작가와 오랜 협력 관계여서 역시 제외.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잘 안 좁혀지더라. 사실 다시 생각해보니까 귀족 가문 하나가 벌인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황태자가 직접 배후에 서서 휘하 인간들을 움직였을 가능성도 꽤 높고. 무엇보다 세이잔 자작가의 일원들이 여기저기서 원한도 사고 명망도 얻는 등등 하여간 연줄이 엄청나서. 괜히 작위 한 등급 올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귀족 회의를 할 때마다 나오는 게 아니었어. 젠장."
그는 말하면 할수록 자기도 열이 뻗치는지 점점 어조에 감정을 싣더니 끝을 욕으로 맺었다. 짜증이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딱히 제지는 않고 그저 그가 얼추 진정할 때까지 가만 놔뒀다. 샤카르는 잔뜩 꽁한 표정을 하고도 이성은 멀쩡해서, 손을 찔러넣고 있던 주머니를 뒤적여 꾸깃하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또 그걸 성격과 안 맞게 열심히 반듯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더니 대충 봐줄 만한 모양이 된 것을 내밀었다.
"위에는 실마리가 될 만한 사실들, 아래는 그걸 바탕으로 해서 억지로라도 추려 본 용의자 명단. 대부분 심증이니까 너무 믿진 말고."
나는 그것을 받아 대강 훑었다.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곧고 힘있는 필체가 검푸른 잉크로써 종이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자세히 보지는 않고 들고 있던 작은 핸드백에 집어넣었다. 이런 데서 읽을 만한 건 아니니까.
종이 한 장에 간단히 정리될 정보를 찾으려고 모르긴 몰라도 세 달 내내 시달렸겠지. 수사의 진척은 더뎠지만, 어쨌든 나 좋으라고 귀찮음도 무릅쓰고 봉사활동처럼 해주는 일이니 칭찬은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그가 내 진심을 알아줄지 몰라서 아까 그가 했던 행동을 따라하기로 했다. 아, 그런데 높이가 안 맞네.
"샤카르. 키 좀 낮춰 봐요."
"음? 왜?"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는 하라는대로 허리를 숙였다. 눈높이가 나와 비슷해졌다. 나는 웃음기를 머금고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려 서툴게 슥슥 쓰다듬었다. 아니, 사실 쓰다듬는다기보단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것에 가까웠지만.
"수고했어요. 기특한데요?"
의도는 좋았다. 다만 내가 이런 데 많이 서툴러서 결국 모방한답시고 한 게 샤카르 식의 행동이었던 게 판단 미스였다. 막상 하고 나니 내 이미지랑은 너무 안 어울리잖아. 그걸 깨닫고 급격히 민망해져서 재빨리 손을 떼어냈다. 다시 반듯하게 선 샤카르도 만만치 않게 벙찐 얼굴이었다. 눈이 뎅그레져서는 날 맹하니 쳐다보는 꼴이 웃겨서, 그리고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이 멋쩍고 부끄러워서. 나는 그냥 감정에 서툰 어린애처럼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미안해요. 머리카락 다 망가졌네요. 내가 이런 짓을 처음 해 봐서. 좀 어색했죠?"
"와, 나, 미친......"
"너무 싫어하진 마요. 머리 망가뜨린 건 나중에 마리라도 불러서 복구해 줄 테니까."
"너 진짜 너무하다."
"미안하다니까요?"
"진짜, 와. 어떻게 이렇게까지 너무할 수가 있지......"
샤카르는 손을 내가 쓰다듬었던 자기 머리에 얹고 울상을 지었다. 내가 너무했나. 알고 보니 샤카르가 머리를 감는 데만 두 시간, 말리느라 한 시간, 정돈하려고 다시 두 시간을 썼던 걸까. 그렇다면 실수한 게 맞긴 한데, 내가 그걸 어떻게 염두에 두고 행동하겠어?
"아니, 미안하다고 몇 번 말해야 해요? 나도 나름 좋은 의도로 시도한 거......"
말이 나오다 말고 가로막혔다. 더 정확하게는 나도 모르게 중간에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손을 내린 샤카르가 처음 보는 눈빛,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그렇게 분해요?"
좀 움찔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샤카르는 눈을 잠깐 감았다 떠서 그 생경한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힘을 빼고 웃었다. 극단적인 변화였으나 왜인지 그가 하니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 화 안 났으니까 긴장 풀어, 동업자."
"한 번 더 머리에 손 댔다가는 절연하겠네요. 무서워서 어디 동업자 노릇 하겠어요?"
"미안하다. 아무리 나라도 가끔은 감정 조절이 안 될 때가 있어."
"화 안 났다면서요."
"내 반응을 꼭 분노로 단정지어야겠냐."
"그럼 뭔데요?"
"아이고. 됐다, 됐어."
답답하게 굴기는. 나는 보통 궁금한 걸 안 참는 성격이었으므로 팔짱을 딱 끼고 눈짓으로 그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손을 휘휘 저으며 회피하려던 샤카르는 결국 끙 소리를 내고 툭 던지듯 말했다.
"기뻐서."
"......설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진짜야."
투정부리듯 말을 툭 던지는 그의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믿어주고 넘기기로 했다. 화난 것보다야 낫지. 기쁨이라면 내 의도에 부합하는 반응이기도 하고.
"알았어요."
"근데 난 네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방금 표정 좀 웃겼는데 한 번만 더 당황해보면 안 돼?"
"이 인간이 진짜......"
결국 언제 정색했냐는 듯 능글맞게 실실대던 그는 내게 명치를 맞을 뻔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특출난 반사신경으로 중간에서 내 주먹을 막아세웠지만.
"얄미워서 그러는데 한 번만 맞아주면 안 될까요?"
놀림조로 그의 말을 비슷하게 따라하자 샤카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네 주먹이 얼마나 센지 모르고 하는 소리지? 나니까 이 정도로 끝나는 거지, 다른 비실비실한 놈들이었어 봐. 벌써 두엇은 황천행이다."
"은근히 잘난 척 하는 건 세계 최고네요."
그 말을 하면서 무심코 정문 쪽을 보았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풍경에서 길다란 그림자 몇이 한꺼번에 정문을 나서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던 그룹이 함께 귀가하는 눈치였다. 엘피샤와 시안, 알피어스가 그동안 남은 몇몇의 주의를 끌어주며 대화를 이어간 탓에 나와 샤카르는 퍽 주요 인사들임에도 주목에서 여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집에 잘 들어가라는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다가가려는데 엘피샤가 그런 날 발견하고는 의미심장하게 생글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알아서 잘 갈 테니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작게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샤카르에게 눈을 돌렸다.
"샤카르. 아까 히엘로 공과 오면서 무슨 말을 했기에 첫인상이 그 모양이에요?"
"그냥 최근까지 후계 수업을 받으며 겪은 일들이랑 내 일상에 대한 얘기. 근데 공께서 나 별로래?"
"별로까지는 아니고, 희한한 인간이라고 단정지은 것 같더라고요."
"그럼 상관 없어."
"희한하다는 것도 딱히 칭찬은 아닐 텐데요?"
"뭐 어때. 사실이잖냐."
"인정이 빨라서 다행이에요."
"난 적어도 내 주제 정도는 알아."
"어련하시겠어요."
능청스레 말하는 그와 장난처럼 대꾸하는 나 외에 이곳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일몰이 지나고 나면 난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지금 내 등 뒤로 한창 주홍빛 태양이 추락하고 있으니 그 또한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그런데 당신, 집에 안 가요?"
"쫓아내는 거냐? 서운하네."
"해 지잖아요."
"나 집 없어. 가출했다고."
그가 시무룩한 척을 하며 입을 비죽였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십대 시절부터 줄기차게 집을 뛰쳐나오고 다시 붙잡혀 오기를 반복했다던 사람이 어딜 가겠어. 그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다는 것은 일전에 들어 알고 있긴 한데, 이번 가출은 좀 특이한 경우였다. 카리스티아 종료 이후 제 발로 걸어들어간 집이었다. 거기서 또 세 달만에 뛰쳐나올 줄이야.
"또요?"
"어. 집구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마음에 든 적이 있긴 해요?"
"없지."
"저런. 그렇다고 해서 설마 내 집에 빌붙겠다는 건 아니겠죠?"
"걱정 마. 그런 무례한 짓은 안 해. 정보상 건물에서 자야지 뭐. 그치만 거기 가면 재미없으니까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버티다 가려고."
"얼마나 더 있다 가고 싶은데요?"
반쯤 승낙조인 내 물음에 그는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흐릿하게 웃었다. 숨결이 많이 섞인 나직한 웃음소리가 짧게 허공에 흩어졌다.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그냥 잠깐만, 저 해 다 질 때까지만. 같이 있어주라."
그가 오랜만에 하는 부탁이었다. 못 들어줄 이유는 없지. 지방 세력가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대백작가 멘데로프의 정당한 후계자가 집이 없다며 축 늘어진 어깨를 하는 게 좀 불쌍해 보이기도 했고.
"안 될 것 없죠."
언젠가 그가 나 대신 욕을 한 바가지 해 줬을 때처럼, 나도 그를 위해 작은 위안이나마 되어 주기로 했다.
"아, 그러고보니 당신 내 후원 한 번도 못 가봤죠? 거기 작은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앉아서 차 마시면서 일몰 보기에 딱 좋아요. 여기서 시간 때울래요, 아님 후원에 갈래요?"
"물어 뭣하냐. 당연히 후원이지. 가자!"
"갑자기 살아났네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외치는 그에게 손을 잡혀 이끌리다시피 저택 뒤쪽으로 향하며, 나는 숨을 뱉듯 웃었다. 저택 구조를 잘 모르는 그는 중간쯤 가다가 결국 멈춰섰고, 그때부터는 내가 그를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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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살다를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