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1 5. 등장 =========================
루 할레시온 가의 저택 후원은 관리가 잘된 테마 정원 같은 느낌이다. 나와 함께 후원 안쪽으로 들어간 샤카르는 키 큰 수목이 반원형으로 동쪽을 둘러싼 작은 공간 안에 놓인 차양막과 그 아래 테이블을 발견하고 저기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노라 대답했다.
그는 냉큼 앉았다. 나도 따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막 화사하게 피어난 꽃잎을 실은 바람과, 석양에 젖은 흰나비가 우리 주위를 이따금 맴돌다 갔다. 우리는 여기 머물 수 있는 한계를 재려는 듯 하늘을 구경했다.
얼마간의 침묵, 그 말미에.
해가 지평선 위에서 빨갛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살며시 고개를 틀어 바라본 그의 얼굴은 슬픈 미소에 잠긴 것인지, 아니면 별 뜻 없는 무표정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저 주황빛으로 물든 공간과, 잠시 걸음을 늦춘 시간과, 소리죽인 바람과, 실없이 지나가고 있는 내 생일에 취해서.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이윽고 새벽 하늘을 닮은 남자가 슬며시 내민 뒤늦은 생일 선물, 르쉬네의 초상화를 받아들고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속절없이 가만히 두었다.
약아빠진 동업자 같으니. 그렇게 큰소리 떵떵 쳐놓고 아무 선물도 안 가지고 온 줄 알았건만.
"복수예요?"
손바닥만한 크기의 그림을 닿을새라 조심히 손 끝으로 어루만지느라, 나는 안쪽 깊숙한 곳에서 맹렬하게 휘도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웃음도, 울음도 섞인 목소리가 약하게 떨려 나왔다. 나조차 몰랐지만, 사실 나는 열세 살의 생일날 나와 함께 있었던 이들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다른 모습, 다른 관계로 다시 만나야만 했던 그 날의 아이들을, 아무래도 나는 지금껏 홀로 아프도록 부여잡고 있었나 보다. 그만 보내줘야 하는데, 이제는 나도 그들도 변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아아, 하지만 르쉬네. 나는 네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는걸. 안녕, 잘 가 르쉬네. 이렇게 상냥하게 속삭여주지도 못했는데. 라인하르트나 에단, 알피어스처럼 변한 모습으로나마 다시 만나지도 못할 너를 어쩌면 좋을까.
눈시울이 뜨거웠다. 눈가에 위태롭게 매달려 볼을 타고 내려가기 직전인 것을, 샤카르의 손이 스치듯 지나가며 거둬갔다. 나는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선 그의 슬피 웃는 얼굴을 마주했다. 그래. 구별이 간다. 그는 슬픔에 겨워 웃고 있었다.
샤카르가 동화를 읽어주듯 사근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도 누님 초상화 때문에 울었으니까 너도 어디 한 번 펑펑 울어봐라, 하는 못된 의도도 조금은 있었어. 그런데 너 이러는 거 실제로 보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왜 내가 다 울고 싶냐."
"진짜 못됐네요, 당신."
나는 손을 들어 눈가를 재빨리 정리하며 그에게 의미없는 원망을 내밀었다. 지금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반대쪽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미안해."
샤카르는 눈가를 거칠게 쓸어내는 내 손을 조심히 잡아내리고 품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주었다. 그는 왜 모를까, 다정한 말이 울음을 더욱 자극한다는 것을. 결국 한 방울이 그의 잔흉터 많은 까칠한 손등 위에 떨어졌다. 부디 멈추길 빌며 아무 말이라도 정상적으로 해보려 했는데, 목이 메여서 결국에는 울먹이며 투정이나 부리고 말았다.
"망했어. 거의 오 년만에 울어보는 거란 말이야. 적응 안 된다고. 아, 이거 멈추지도 않잖아......눈 화장을 안 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당신 때문에 눈밑 까만 귀신 될 뻔했어......"
샤카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다 말고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이 모습은 또 뭐냐. 어쩜 오 년 가까이 만나도 볼 때마다 새로워, 너는. 어쩌려고 이래."
"조용히 해요, 날 울게 만든 가해자."
"뭐? 아니, 웬 갑자기 범죄자 취급이야?"
어이없다는 투의 헛웃음으로 반응이 바뀌었다. 나는 볼을 적시는 낯선 눈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애처럼 몇 마디 더 횡설수설 징징댔다.
"나 같이 한심한 인간은 울 자격도 없는데......뭘 잘했다고 내가 우냐고. 대체 뭐가 떳떳해서 우는,"
"아이고, 동업자야."
그러나 곧 샤카르의 두 팔이 나를 감싸안았다. 넉넉한 품 안에 파묻힌 나는 그가 낮게 중얼이는 것을 들었다.
"우는 데도 자격 운운하다가는 세상 모든 인간들이 무감정해질 거다."
나는 조용히 흐느꼈다. 시야가 가려지니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미 못 볼 꼴을 그에게 다 보여주고 말았는데 뭐. 코 끝이 시렸다. 울어서 그런 건지, 청량한 향이 벅차게 밀려와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울어."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는 얼마 후에 내 울음이 잦아들자 나를 놓아주었다. 갑작스레 안기는 와중에도 자기 옷에 눈물 묻을까 봐 손수건으로 눈을 덮은 내게 그럴 정신이 있었냐며 감탄하더라. 난 울어서 망가진 음색으로 당신 동업자의 배려가 이 정도라며 괜히 우물거렸다. 실은 멋쩍은 이 분위기를 타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그는 킥킥대고는 나를 달래듯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 한 귀퉁이를 꺼냈다.
"난 열아홉 살 즈음부터 누나를 위한답시고 집을 나가곤 했는데, 정작 그 짓 때문에 이십대에 접어들고 나서부터는 누님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어. 가끔 아버지가 보낸 하인이나 용병들에게 잡혀서 다시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 눈 피해서 이런 정원 한 귀퉁이에서 잠깐 몇 번 만나는 게 고작이었지. 결혼식장에도 참석 못했고, 누님이 후계자 자리를 얻기 전까지 로엔세르 본가에서 지내려고 짐을 싹 챙길 때도 옆에서 도와주면서 초상화 한 점을 달라고 못 했어, 지독하게 멍청한 놈이. 왜인지 후계자가 되고 나서도 안 돌아오기에 그 집이 마음에 드나보다, 라고 생각은 했지만 뭔가 추억할 만한 걸 주고받지는 못했고. 몇 년 전의 난 누님이 영원히 살 줄 알았나 봐. 그러다 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유품도 안 받아가고, 조카도 안 보러 가고."
개인적이고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나는 여기 어딘가에 있을 사현과 십이현이 이 자리를 비켜주기를 바라며 저쪽을 향해 휙 손을 저었다. 두 오십현은 내가 알아채라고 일부러 기척을 내주며 후원 바깥으로 나갔다. 샤카르도 그걸 느꼈는지 흘끔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딴 멍청이에게 초상화를 갖다 주니 울겠냐, 안 울겠냐."
나는 대답 없이 픽 웃었다. 채 다 멎지도 않은 슬픔 속에서 용케 웃음이 튀어나왔다. 샤카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니까 네 생일 때 뭘 선물해야 할지 가닥이 바로 잡히더라. 네 친구 초상화, 반역자를 기념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죄다 폐기했단 얘기는 예전에 들었거든."
"정보상 보스라는 명패가 헛것은 아니었군요.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잠긴 목소리로 노고를 인정해주자 샤카르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 말 잘했다. 내가 저걸 구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막판에는 켈레브로 궁을 털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고. 거긴 제명된 황족의 기록도 내다 버리지 않는 유일한 장소니까."
켈레브로 궁이라면 역대 황족들의 족보와 초상화를 비롯해 황족 관련 각종 기록물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다. 역시 대단해. 또 웃음이 나왔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네 생일은 얼마 안 남았지, 초상화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지. 제정신이었겠냐. 다행히 3월 말에 6년 전 블로텔지아에 외교 사절단으로 갔다가 거기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정착한 사람이 나타나서 내가 사고는 안 쳤지. 그 사람이 마침 네 친구와 잘 아는 사이라 초상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본가에서 블로텔지아에 있는 그 사람에게 짐을 보내줄 때 그것도 잘 보내줬대. 외국으로 반출되었고, 더 이상 제국민이 아닌 사람이 소유한 초상화라 멀쩡히 남아있었다나."
"블로텔지아에 정착한 사람이라면 르쉬네의 둘째 고모겠네요. 그 분이 늦둥이라 나이 차이가 르쉬네와 얼마 안 나서, 둘이서 곧잘 함께 놀곤 했어요. 그 분에게 선약을 뺏겨서 르쉬네와 못 논 날이 가끔 있었죠."
"맞아. 그 사람이 자기는 반역 사건이 터지기 전 블로텔지아로 망명하면서 황족 리스트에서 제명된 덕에 살아남았다고 직접 말했어."
"잘 지내고 계신대요?"
"3월 말에 내가 직접 찾아갔었는데 잘 살고 있더라."
"다행이네요."
해는 이미 졌다. 별이 총총 박힌 밤의 장막이 붉은 기가 남은 서쪽 하늘을 빠르게 침식해가고, 봄날의 저녁은 아직 추웠다.
이제는 정말 갈 시간이다. 어느 순간 나타나 등불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간 십이현 덕에 그가 돌아갈 때 어둡지는 않겠다. 내 권유에 따라 그는 등불을 들고 일어섰다. 나는 그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었고, 그는 다시 제 발로 멘데로프 저택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정보상으로 연락하라고 했다.
샤카르는 마당으로 따라나와 배웅하는 나를 뒤로 하고 정문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생일 축하한다."
쑥쓰럽다며 일부러 뒤돌아 선 채 그 말을 남기고서.
***
해가 진 이후로는 어머니 일레인, 아버지 카시우스 대공, 여동생 셀리아와 함께 단란한 가족상을 그려내며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작가의 현대적 감성이 섞여들어간 로맨스판타지 소설의 세상답게 케이크도, 촛불을 부는 풍습도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초코 케이크로 추정되는 먹음직스럽게 생긴 2단 케이크에 꽂힌 불 붙은 큰 초 두 개를 훅 불어 끄게 됐다. 또한 주방장의 멋진 솜씨로 만들어진 그 케이크는 내 취향이었으므로 내가 제일 많이 먹었다. 셀리아는 내 입에 붙은 초콜릿을 발견하고 품위 없이 깔깔 웃으며 놀려대다가 어머니 일레인에게 핀잔을 들었다. 대공도 달달한 케이크가 영 입에 안 맞는지 깨작대다가 일레인에게 어쩜 그렇게 맛없게 먹을 수 있냐는 식으로 잔소리를 들었고. 다행히 나는 오늘이 생일이라 그런지 일레인의 가족 관리를 피해갔다.
꽤 괜찮은 생일이었다.
그리고 그 날 밤. 침대에 꿈틀거리며 기어들어가 등 뒤에 베개를 받치고 편안히 기대앉은 나는 샤카르가 준 종이를 읽었다.
- 먼저 정치적인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세이잔 자작가의 최근 행보는 황태자파도 2황자파도 아닌 제 3세력에 치우쳐 있었음. 그간 몇 번 파벌을 갈아타다 요즘처럼 정치판이 폭풍전야 같은 때를 틈타 잠시 몸을 사리며 득실을 따지던 것으로 보임. 작년 10월경 본래 관리하던 이모레타 지방 외에 추가로 사비렝 지방의 관리권을 하사받음. 사비렝 지방은 크기는 작지만 비옥한 토지와 질 좋은 광산이 위치한 알짜배기 땅으로, 황태자 쪽에서 세이잔을 포섭하기 위해 던져준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세이잔은 그걸 꿀꺽하고 나 몰라라 하며 튀었음. 황태자파가 되지 않고 여전히 중간선에 서서 깔짝대던 정황이 여럿 포착됨. 화재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종친회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이 있는 황실 종친들과 접촉하려는 준비에 착수했던 듯함. 의도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눈에 거슬리는 행보임에는 분명하니, 만약 황태자가 진범이라면 이게 결정적인 범행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참고로 황태손은 황태자와 은근히 다른 노선을 걷고 있음. 너와 한 약혼 때문인지, 과거의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적진 한복판에 네 편이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상황.
다음으로 개인적인 측면에서 접근해보면, 세이잔이 보유했던 거대한 재력과 인맥을 중점적으로 봐야 함. 세이잔의 재산과 이름은 현재 가문 내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린 에네아스의 소유. 상속법에 따르면 만약 아이린까지 사망했을 경우 가장 가까운 방계 친척 가문인 이제타 자작가가 재산과 지위를 즉시 자동으로 상속받았을 것이므로 이제타도 용의자 명단에 추가함.
아이린 역시 신년 축제를 즐기느라 새벽까지 귀가를 하지 않았다지만 너무 깔끔하게 혼자만 살아남는 바람에 미심쩍인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므로 추가. 언니 이리스 세이잔에 밀려 후계가 되지 못했으니 가문을 차지하려 극단적인 짓을 벌였을 수도 있음. 네가 범인이라고 주장한 실질적인 장본인이기도 하고. 또한 홀로 남은 아이린에게 손을 내밀고 세 달 전 너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 일조한데다 황태자파이기까지 한 에네아스 백작가도 수상함.
따라서 가능성 있는 용의자는 황태자나 에네아스 백작가, 이제타 자작가 또는 아이린 영애 본인 정도로 대강 좁혀짐.
ps. 이 한 장짜리 보고서 작성하느라 꽤 고생했으니까 나중에 꼭 내가 원하는 걸 네게서 받아내고 말겠어. 그 때 가서 발뺌하면 안 된다, 동업자. 알겠지? -
마지막 줄의 추신은 저번에 내가 편지를 보내며 조사를 해주면 그가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한 가지 들어주겠노라 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듯했다. 주고 받는 것도 칼 같은 사람이군. 그렇담 나도 철저해져야지. 몸을 일으켜 침대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에 놓인 자그마한 향초의 불꽃에 종이 끝을 가져다 댔다. 종이는 회색 연기를 뱉어내다가 금세 화르륵 타올라 재가 되었다. 마리를 불러 재를 치우게 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잠드셔야 할 시각입니다."
마리가 꼭 내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서 자려던 참이었으므로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속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흰색 잠옷이 사브작거린다. 건조하지만 묘하게 푸근한 소리가 재미있어서 괜시리 꼼지락거려 봤다. 마리는 빙긋이 미소지으며 어두운 오렌지빛의 수면등에 불을 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 나는 뒤돌아선 그녀의 등에다 대고 졸린 목소리로 인사했다.
"잘 자, 마리."
놀랐는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돌린 마리가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씨."
"응."
마리가 나가고, 막 눈을 감으려던 나는 약간 뾰로통해 보이는 십이현을 벽 한 켠의 구석에서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루이제. 왜 그런 표정이야?"
나는 근자에 십이현과 사현의 잊혀진 이름을 그들의 가명 대신 불러주고 있었다. 나라도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좀 충동적으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질끈 올려 묶은 포니테일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얼른 차렷 자세로 내리고 빠릿하게 대답했다.
"누가 봐도 평소와 같은 무표정은 아닌데. 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도? 구석에서 서 있는 게 힘든 거야?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숙소에 돌아가도 좋아. 난 그대들에게 한 번도 밤시간 호위를 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아닙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주군의 안정을 위해 잠드실 때까지만이라도 곁을 지켜드리는 것 정도는 호위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루이제라는 이름을 버리고 십이현이 된 후로 그녀는 줄곧 자신의 주군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주군의 사정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지키는 것에는 아주 익숙했다. 저건 아마도 내가 황궁에 사는 이들처럼 밤마다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하고 암살당할까 두려워 떨 것이라 여기고 하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건 라인하르트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일 뿐, 나는 굳이 정신력을 깎아먹으면서까지 내 안위를 염려할 생각은 없다. 불안해한다고 해서 오던 자객들이 다시 돌아가진 않을 것 아닌가. 그리고 아직은 날 살려서 황태자비로 앉혀야 하니까 자객이 칼 들고 쳐들어올 이유도 없지.
"전 호위대상들이 네게 어떤 주문을 했는지 대강 짐작은 가네. 그런데 벌써 몇 번째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만, 난 혼자 자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아. 나는 적어도 황궁에서는 안 살잖아?"
"정말이십니까?"
"그대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대들은 지금까지 내가 별도로 명을 내리지 않는 이상 어디서나 곁에 있었잖아."
"예, 언제나.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번에 대답한 사람은 십이현이 아닌 사현, 헬렌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거둬 준 첫 주군이 독에 당해 망가져가는 것을 지금껏 지켜봐왔다고 했지. 그 때문인가, 목소리가 결연함까지 실린 것은.
잠깐이었지만 낭패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저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된 듯한 느낌인데. 가까워져야 하는 건 맞지만, 이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 진정한 주군과 기사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미안하지만 나는 저들의 주군이 될 마음가짐이 안 되어 있을 뿐더러 그럴 자격도 없다만.
단지 가벼이 이용하기 위해 말을 걸고, 재미를 위해 친해지고, 죽음을 앞에 둔 르쉬네가 끝까지 지켜내라 유언삼아 당부했던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까이 둔 호위였다. 솔직히 초반에는 라인하르트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여겨 비호감과 불쾌 쪽에 더 가까이 있던 이들이었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란 참 신기하다. 생각 없이 나눴던 대화와 시간과 감정이 무자각 중에 얽히고 설켜, 어느 순간 직시했을 때는 이미 끊어낼 수도 없게 탄탄한 연결이 서로를 휘감고 있다니.
"앞으로도 계속 그래 준다면야 고맙지. 자, 본론으로 돌아와서. 루이제의 표정은 대체 왜 불퉁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이불 밖으로 머리만 쏙 내밀고 체통 없이 물었다. 사현이 슬쩍 눈치를 주자 십이현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송구하고 무례하게도, 왜 저 하녀에게만 다정히 잘 자라 말씀해주셨는지, 그것이 궁금했고......저 하녀가 부러웠습니다."
간단한 종류군. 그거야 해결하기에 어렵지 않지. 나는 설핏 웃고 몸을 돌려 옆으로 누우며 말을 툭 던졌다.
"잘 자, 루이제. 헬렌도. 됐지?"
"앗, 감사합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혼자 주무시고 싶으시다면 나가 있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음, 그리고. 변덕 같지만 오늘은 나 잠들 때까지만 이 방에 있어 줘. 다리 아프면 저기 쇼파에 앉아 있어도 괜찮으니까."
"알겠습니다."
"명을 받듭니다."
사현은 부드러운 무표정으로, 십이현은 씨익 웃으면서 깍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눈꺼풀을 내렸다. 왜 변덕을 부렸냐 물으면 곤란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들은 묻지 않았다.
하기사 내 변명을 들었어도 별 의미 없었으려나.
그저 잘 때 다른 누군가와 같은 방에 있어본 적이 오래되어 그 비슷한 느낌이라도 내 보고 싶었다고밖에 말 못했을 테니까.
============================ 작품 후기 ============================
이번 편을 끝으로 5챕터, '등장'은 끝입니다. 다음 편부터는 6챕터, '꽃의 사슬'이 시작됩니다.
이번 편의 앞부분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제가 처음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장면은 실제 글로 표현된 것보다 좀 더 애잔하고 슬프고 또 그러면서도 잔잔하게 기쁜, 꽤나 예쁜 느낌이었는데...실력이 부족해서 그만큼 표현이 안 된 것 같아 아쉬워요 ㅠㅠ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약간 수정할 수도 있어용
+독자님들의 반응과 표현 맨날 하나하나 다 보면서 헤헤헿(소듕하게 쓰다듬)하고 있어요! 요즘 개인적으로 현실 때문에 너무 답답해서 혼자 막 열폭하고 좌절하고 하루종일 글 한 글자도 못쓰고 난리도 아니었는데(이것 때문에 이제 비축분은 더 딸립니다...망햇어요 ㅎ..) 추천이나 코멘트나 팬아트나 이런 거 보면 갑자기 확 풀리더라고요...엉엉 독자님들 못난 글쟁이 멘탈 잡아주셔서 감사하고 또 부족한 점 넘쳐나는 글 봐주시고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자정감성(?)이라 좀 두서없고 난리난 후기일 가능성이 200%인데...일단은 그대로 업로드하고 나머지는 내일의 저에게 맡기겠습니다(?)
+++2월 5일~10일까지는 잠시 개학이라 기숙사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한 편도 안 올라올 수도 있고, 한 편 정도는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또 뭔가 쓰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요...나중에라도 생각나면 여기든 다음편 후기든 어딘가에 추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