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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35화 (35/102)

00035 6. 꽃의 사슬 =========================

꽃잎이 팔랑이며 창문을 수놓는다. 원래 크기보다 훨씬 큰 그림자를 우리 쪽으로 드리우며. 시안은 자기 왼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과, 그것을 가지고 그림자 장난을 치는 꽃잎을 손바닥으로 대강 가렸다.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 나를 보았다.

"표정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시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만.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는 어쩐지,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사교계에서의 거짓 미소와 사석에서의 진짜 웃음 두 가지를 모두 배운 나는 저 감정이 진짜라는 걸 알 수 있다. 작게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정돈하고 대꾸했다.

"아니에요. 제가 예민하게 반응했네요."

"무슨 생각을 하셨기에 그리 명료하게 불만을 표하셨습니까?"

"제 인생을 뒤바꿔버린 어느 두 존재를 떠올려서요."

"누가 그대의 인생을 바꿨나요?"

"글쎄요. 신?"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도박하듯 직설적으로 던졌다. 누구라도 들어줬으면 해서. 시안은 테이블 한 켠에 올려둔 눈꽃 모양 종이 책갈피를 읽던 페이지에 끼우고 덮은 뒤 온전히 나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제국은 신의 선택을 받은 현자가 건국한 7왕국이 아니라서 딱히 국교가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럼 어느 신입니까?"

"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그 일곱 명의 신들 중 누굴까요."

"에온의 바람신, 프리제의 시간신, 시힐레의 화염신, 엘비올리스의 얼음신, 블로텔지아의 어둠신, 리우네아의 지혜신, 카슈테르의 풍요신. 인생에 손을 댔다면 지혜신 쪽일 수도 있겠군요."

그냥 푸념 좀 해본 건데 상대가 진지하게 나와서 나도 학술적인 대답을 해줘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오늘 일정은 여러모로 예측 불가군. 아침에 일어났더니 황제가 숨넘어갈 위기래서 약혼 파기 결정을 내리고, 라인하르트에게 통보하러 입궁한 김에 지난번 신문에 나왔던 예언이나 구경하러 왔다가 시안을 만나고. 이번엔 학문적 대화인가.

"지혜의 신 에웬이 담당하는 분야 중 운명도 있으니 가능성이 가장 크긴 하죠. 역시 나중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리우네아에 가 봐야겠어요."

"리우네아는 망국 에온과 더불어 가장 신앙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곳이니, 신을 섬기지 않는 제국의 황족인 그대가 방문하기에는 그다지 적절치 않은 곳입니다. 굳이 가시겠다면 믿을 만한 호위를 대동하십시오."

"외국에 대해 잘 아시네요."

"책은 많은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정보 수집 수단으로 책보다 좋은 것은 없지요."

독서를 좋아한다더니 정말 말투에 애정이 드러났다. 나보다 더한 독서광이구나. 라니아로서의 나도 소싯적에 책벌레 소리 좀 들어본 사람인데. 한 번 쭉 읽어본 것이 전부인 활자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각종 분야의 책을 탐독하기에 바빴더랬지.

나는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얹어두었다. 둥둥 떠다니던 먼지가 그 위로 사뿐히 올라앉는 것이 빛 때문에 잘 보였다. 그것이 눈에 들어올 만큼 감각을 빼앗는 방해 요소가 없다는 뜻이리라. 이 남자와 같이 있을 때는 분위기가 참 차분해진다. 오늘은 거기에 도서관 특유의 기류까지 더해졌고.

"동감이에요. 저도 책을 통해 여러 도움을 얻었으니까요."

꼭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책이라면 전생에서부터 좋아했다. 스스로를 자괴와 비관 속에 가두어 두고서 외로움에 치를 떨었던 그 시절의 윤이설은 아무 말 없이도 대화가 되는 책을 찾아 공공 도서관으로 숨어들었다. 종이의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데도 왜인지 손에 쥐고 있으면 평온했다. 각박한 현실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나중에 가서는 강박적으로 책을 곁에 두려는 지경까지 갔었던 것 같다.

새삼 그 어렸던 녀석이 안쓰러웠다. 혼자만의 세상에 갇혔으나 그곳에서 끄집어내 주는 사람은 없었던 가련한 아이. 하나 남은 가족이었던 엄마 윤하린은 너무 바빴고, 그저 자신의 딸에게 미안해하는 법밖에 몰랐다. 윤이설은 그걸 또 자기비관의 도구로 삼았고. 지금 되돌아보면 희망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지독히도 불행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 차라리 이번 생이 그 어둡던 전생보다는 행복한 편인지도. 깨닫는 것도 여럿, 배우는 것도 여럿.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정신도 조금은 자랐고. 조금은 성숙해졌고.

어쩌면, 운명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지난 삶보다 더욱 예측할 수 없고.

"대공녀."

다정한 부름에 퍼뜩 상념으로부터 깨어났다. 눈을 살며시 내려뜬 시안이 공연히 책 모서리를 매만지며 조곤히 시를 읊듯 말했다.

"공석에서 뵈었을 때는 더없이 차가운 분인 줄만 알았습니다. 표정 관리에 어려움을 느끼시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없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보는 눈이 많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나요."

"아......제가 너무 감상에 젖은 모양이에요."

"물론 이곳에선 굳이 감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마주한 그대의 얼굴이 지난 어떤 만남보다도 인간적이었으니."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사실 꽤 당황했다. 누가 대놓고 내게 이런 말을 해주겠는가. 눈만 깜박이고 굳어 있자니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이지러진 검은 달처럼 흐린 눈이 긴 속눈썹에 덮여갔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어색함을 밀어내려 부러 신경쓴 듯도 하고, 내 반응이 재미있어 그런 듯도 하다. 나는 그 그림 같은 장면에서 벗어나려 시간을 물었다.

"시안 공. 혹시 지금이 몇 시인지 아시나요?"

"네?"

"일찍 귀가해서 동생과 놀기로 해서요."

정신없는 와중 대충 내민 핑계치고 적당했다. 실제로 마차에 오르기 전 셀리아가 이따 오후에 피아노를 치자고 제안했거든. 그 애는 요즘 일레인이 초빙한 피아노 강사에게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나도 종종 끼어들어 함께 배우는데, 아무래도 절대기억력이나 절대음감 둘 중 하나인 게 틀림없는 셀리아가 습득 속도가 훨씬 빠르다. 조만간 날 앞지르겠어.

시안은 내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시도는 않고 그냥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방금 전 네 시가 되었습니다."

"이만 돌아갈 시간이네요."

"저도 슬슬 나가려던 참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그대와 함께 성문까지 가도 될까요?"

"공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괜찮아요."

그리 말하고 일어섰다. 시안도 따라 일어났다. 그는 사다리를 이용해 내 것을 포함한 책 두 권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밖은 선선했다. 바람이 멎어 있었다. 못다 흩어진 향기가 시안의 것과 섞였다.

그는 황궁 정문까지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렇게 했다.

각자의 마차에 오르기 전 작별인사를 건넬 때에야, 시안이 물었다.

"나흘 후 있을 만찬이 황태손 저하의 약혼자로서 참석하는 마지막 행사가 되는 겁니까?"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공도 그 날 참석하시나요?"

"네. 제가 관심갖고 있는 분께서 참석하신다 하셔서."

"그럼 나흘 후에 황궁에서 다시 뵙겠네요."

그는 물음에 대한 긍정과 인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차에 올랐다.

***

내가 살다살다 황궁 대후원에서 점심을 먹게 될 줄이야. 웬만한 궁정의 정문 못지 않은 멋들어진 대후원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한 생각이었다.

이것이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예비 황태손비라는 신분으로 자리하는 마지막 공식적인 거동이라니. 황족의 약혼자라는 건 참 못해먹을 짓이다.

"총시녀장이 대공녀님을 뵙습니다."

모든 황궁시녀들의 수장이자 황궁의 내사를 책임지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묘했다. 이 여자는 사실 내 먼 친척이거든. 황족 계보상 현 황제와 촌수가 멀어서 직계 황족은 아니지만 어릴 때 황족끼리의 모임에서 많이 봤었다. 사교계에 복귀한 뒤로는 코빼기도 안 비치기에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황위와는 먼 일반적인 방계 황족들이 3대가 이어지기 전에 대부분 다른 귀족가의 첫째와 결혼해 성을 바꿔버리는 식으로 황족의 울타리에서 나가는데, 이 사람은 특이하게도 황궁 안의 삶을 선택한 모양이다. 한 번도 당당히 입성해본 적 없는 가시새장이 뭐가 좋다고 끝까지 매달리는지. 나로선 이해가 잘 안 갔다.

총시녀장은 나를 만찬장으로 안내했다. 적당히 풍경과 위생이 괜찮은 장소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모두가 도착하길 기다리던 대귀족과 황녀 이하 황족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게 하나 둘씩 인사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사람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그들은 답례로 내 눈인사만을 받았다. 이렇게 보니 이 자리에서 딱 네 명을 빼고는 내가 신분상 우위에 있다는 게 한눈에 파악됐다. 확실히 황태손비는 매력적인 직책이다. 목숨줄이 안전하다는 보장만 있다면.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 황태후 폐하와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와 황태손 저하를 뵙습니다."

이 네 명만이 내게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내 인사를 받아주고 제각각 의례적인 말을 몇 마디씩 건넸다.

최고 윗전인 황태후가 직사각형 모양 테이블이 좁은 면 쪽인 상석에 혼자 앉고, 거기에서 가장 가까운 오른편에 황후가 앉았다. 황태자는 왼편 첫 번째 자리,  황태손은 오른쪽 두 번째 자리니까 내 몫의 의자는 자동으로 왼쪽 두 번째였다. 내가 착석하고 나서 곧바로 음식들이 줄줄이 시종의 손에 들려 세팅됐다. 나는 고기와 채소가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을 별 뜻 없이 훑어보다가 눈을 슥 들었다.

가슴이 쎄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싸늘한 긴장과 고요한 경계를 담아, 나는 저 멀리 오른쪽 줄 끝부분에 앉은 한 여자를 응시했다.

아이린 에네아스.

만들어진 세계의 주인공이 오늘 만찬에 왔다.

화재사건 발생 전에는 그녀나 나나 수도에 살지 않거나 칩거 중이었던 터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린은 가문의 첫째도 아니라서 후계자가 의무적으로 얼굴 비춰야 하는 행사에도 안 왔고, 사교계 정식 데뷔도 나이가 모자라서 작년까지 안 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고, 슬하에 아들 하나뿐인 에네아스 백작의 양딸이다. 여기에 에네아스 백작이 없는 걸로 봐선 대리인이군. 나도 대공의 대리인 겸 예비 황태손비로서 왔으니 안될 건 없다.

나는 일부러 한동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얼굴 가죽이 따가워서라도 언젠가 내게 눈을 맞추도록. 다행히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이린은 영롱히 푸른 벽안을 내게 돌렸다.

입가를 살포시 휘어 웃어주었다. 만약 날 따라 웃는다면 자기 가족을 죽인 범인으로 나를 생각하고는 있으나 이깟 걸로는 동요하지 않는다, 가 될 것이다. 얼굴을 확 구겨버린다면 원작 묘사보다도 더 상대하기 쉬운 사람일 가능성이 올라갈 테고.

아이린은 나보다도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답은 전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저 지경이라면 내가 불 지른 게 아니라고 해명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결국에는, 싸우는 수밖에 답이 없다는 거지. 어차피 기대도 안 했다. 나는 눈을 거두었다.

아직 만찬은 시작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말소리로 꽤나 부산스러웠다. 다들 격조 높은 자리랍시고 위엄을 갖추어 최대한 언동을 자제하는 눈치지만 시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 와중에도 내 두 번째 옆 자리에 앉은 시안은 태연한 무표정으로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조용히 휘젓고 있었다. 저러니까 진짜 소년 같다. 난 전쟁터에서 소리 없는 싸움을 하느라 머리가 다 아픈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리도 평안할까. 가족이 다 죽었다는 것 때문에 망했지만,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었으리라.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건드리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복받은 일인지 시안은 알려나.

시안 외에도 내 주위에는 아레스티제 공작, 나인하트 공작, 르웰린 후작, 스카일러 후작가의 후계자인 에셀레드 영식 등등이 있었다. 아, 에셀레드. 그는 원작대로라면 후일 동생 프리드리히의 쓰레기짓 때문에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나 한참 동안이나 억울하게 강제 귀양살이를 하게 될 인물이다. 기구하기도 해라. 속으로 혀를 차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정면을 쳐다봤다.

앞자리의 라인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바로 어제 나인하트 공작가를 구워삶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편지를 보내왔었지. 그것 때문인가 싶어 다른 이들의 이야기 소리에 적당히 묻히도록 작게 말했다.

"말씀하셨던 선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요, 저하."

"아직 보내지 못하였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가요?"

"물건의 취급 요건이 까다롭소. 조금 시간은 걸리겠으나 조만간 보내리다."

"그렇다면 저하의 선물이 어떤 것일지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 옆에 호시탐탐 날 죽이려 드는 황태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대놓고 말할 깡은 없었다. 그래서 누가 들으면 사이좋은 예비 부부라고밖에 여기지 못할 말투와 내용을 입에 담았다. 물론 사정을 아는 서로는 속뜻을 눈치챌 수 있게끔.

황태자가 옆눈으로 나를 슬쩍 살폈다. 스치듯 지나갔지만 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긴장해서인지 밥맛이 없었다. 대충 깨작거리다 일찍 손을 놓고, 수다나 떨며 적당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퇴장 행렬의 중간 즈음에 끼어 만찬장에서 나갔다.

"대공녀님."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은 건 웃는 얼굴의 아이린이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합니다.

아래는 해시태그입니다. 저번에 삘받아서 열 개 넘게 한꺼번에 해둔 것 중 하나예요.

#자캐가_악기를_연주한다면_어떤_악기일까

(서양악기로)

라니아&셀리아 : 피아노 (실제로 연주장면이 8화에 있죠)

샤카르 : 어쿠스틱 기타

라인하르트 : 플룻

시안 : 첼로

프리드리히 : 바이올린

세크네트 : 팀파니

레테일 : 실로폰

(동양악기로)

라니아 : 가야금

샤카르 : 피리

세크네트 : 태평소

르쉬네 : 해금

에단 :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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