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7. 빛의 종언 =========================
여름의 녹음은 깊이 고인 호수처럼 색이 짙었다. 계절이 절정으로 향할수록 더위가 기승을 부려, 사람들은 지쳐 늘어질 것이다. 그 시기가 오기 전에 제국은 수도의 귀족을 위한 짧은 축제를 열었다.
일명 사냥 축제라고 불리는 이 여름 행사는 삼일 동안 계속되며, 귀족과 황족만이 참여할 수 있다. 낮에는 수도에서 가장 짐승이 많이 살기로 유명한 산으로 가 사냥을 하거나 자기네들끼리 대련을 벌인다. 그리고 밤에는 날마다 다른 종류의 연회를 즐긴다. 필수 참석은 아니지만 다들 웬만하면 오려고 한다. 행사 기간 동안 지켜야 하는 유일한 규칙은 '그 어떤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위도 하지 말 것'. 매년 11월에 열리는 카리스티아 대연회가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를 품었다면, 사냥 축제는 순수하게 유흥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긴 규율이었다. 따라서 사흘 동안에는 조회나 의회 등 공식적인 정치활동도 중지된다.
축제의 주제가 사냥이라서, 남은 일주일 중 이틀 정도를 활 연습에 할애했다. 축제 전날인 오늘은 단련장을 찾았다. 이곳은 수도 한 켠에 국비로 마련된 종합체육관 같은 시설인데, 황족 또는 작위를 가진 자만 출입이 가능하다. 집 뒤뜰의 활터보다는 여기가 더 본격적으로 연습하기에 좋은 장소라서 한 번쯤은 방문해 보는 게 좋다.
출입 허가를 받고 활쏘기 연습 구역으로 갔다. 활터는 몸풀기용 공동 활터와 여러 개의 독립된 공간으로 격리된 개별 연습장으로 다시 나눠지는데, 나는 먼저 몸풀기용 활터로 향했다.
입구에서 출입 인원을 관리하는 사람이 나를 보더니 난처한 낯을 했다. 가만히 쳐다봐주자 우물쭈물 말을 꺼낸다.
"루 할레시온 대공녀님, 이 활터에는 황태손 저하께서 들어가 계십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와 내가 전 약혼자 사이인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했다. 무감하게 대꾸했다.
"괜찮으니 삼십 분 정도만 적어주게."
"알겠습니다. 삼십 분 후에 나오시면 개별 연습장을 배정해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관리인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십 개의 과녁이 마련된 숲 속 운동장 같은 전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몇몇 귀족들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개중에는 라인하르트도 있었다. 황태자가 사냥 축제 기간에만 잠시 그의 활동 금지령을 풀어준다고 했었는데, 거기에 준비 기간도 포함됐나보다.
내가 등장하기 무섭게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들은 라인하르트와, 그에게 점점 다가가는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의아하다는 낯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라인하르트의 바로 옆에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내 손을 보았다. 내가 옆에 놓인 화살 중 하나를 집어 그에게 내밀어서였다. 전 약혼자라는 관계만 아니면 딱히 특별할 것 없는 행동이었다. 그냥 그의 조수 노릇을 잠시 해주겠다는 거다. 흔히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둘씩 짝을 지어 번갈아가며 연습을 돕거든.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눈에 띄게 표정을 바꾸며 뭔가 자신만의 혼란에 빠졌다가,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둔 관심을 끄라는 뜻으로 주위 사람들을 일일이 쳐다본 것이다. 끈질긴 눈길이 얼추 떨어져나가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가 준 화살을 받아 활시위에 걸었다.
정면의 과녁에 집중하며, 그는 건조하게 말을 건넸다.
"왜 내게 왔지? 빈 과녁도 많은데."
나 역시도 상당히 감정 없이 대답했다.
"한 번 말해볼까 해서."
"......무엇을?"
"감정. 과거. 계획. 또 그밖에 너와 내게 얽힌 것들.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칠 거니까."
팍! 화살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허공을 내달려 과녁 가장자리에 간신히 꽂혔다. 집중력이 엉망이라는 걸 반증하는 결과였다.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새 화살을 그에게 주었다. 라인하르트는 별 말 않고 받았다.
"반가운 소리군."
"기다렸어?"
"그래. 이번 화살은 네 손으로 날려."
그가 내게 활을 넘겼다. 내 것도 있었지만 그냥 주는대로 잡았다. 화살을 줄에 올리고 힘껏 당겼다. 남자인 라인하르트에 비해 힘이 딸리는 내가 쓰기에는 너무 팽팽한 활이다. 내가 보낸 화살도 비스듬히 날아가 그의 것과 비슷한 위치에 꽂혔다.
귀족들은 슬슬 눈치를 보다가 우리가 연달아 실수를 하자 몸풀기를 서둘러 마치고 본연습장을 배정받으러 나갔다. 항상 황태손 곁에 붙어다니는, 프리드리히를 제외한 수행원들도 함께였다. 그들은 아마 눈치 빠르게 다른 이가 연습장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숲을 지나오며 시원해진 바람이 머리칼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여린 색의 금발을 귀 뒤로 넘겨 정돈했다. 시선은 계속해서 라인하르트가 아닌 정면을 향했다. 문득 지금의 내 표정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가을처럼 서늘할까, 봄처럼 건조할까?
그도 아니면 수면처럼 고요할까.
딱히 답을 내지는 않고, 밑바닥에 눌러붙은 검은 재를 긁어냈다.
"르쉬네가 무고하다는 건 조금만 조사해봐도 나오는 사실이었어.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지. 당시의 나는 널 증오하기로 마음먹었어."
경황이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의 어깨 너머에서 목이 잘리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옅게 미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얼굴이 나로 하여금 이 나락을 선택하게 했다. 떠올리는 것조차 거부하고 방치했으며, 끝장을 보지 못하고 깊어지는 늪으로 무기력하게 빠져들었다.
"꼭 필요한 정치적 희생이라며 너를 떠민 명분이나, 네 목을 노리는 적에게 느낀 불안감 같은 건 고려하고 싶지도 않았어. 그저 네가 어리석었고, 나는 르쉬네와 함께 배신당한 거라고 생각했지."
한없이 조용했다. 말이 없는 그에게 받아든 새 화살을 쏘기 위한 자세를 취하며, 나는 잠시 생각했다.
만일 열다섯 살 때 '꽃물 든 하늘'의 남주인공이 라인하르트라는 걸 몰랐다면.
나는 그를 죽였을까?
아마 아니겠지.
"그런데 왜 나는 그 때 마음만 먹고 실행을 하지 않았는지, 혹시 알아?"
얼음 같은 말을 뱉으며 몸을 돌려 라인하르트와 마주선 채 뒤로 몇 발짝 빠르게 물러났다. 내 손에 들려 과녁을 겨누던 화살은 정확히 그의 머리를 향했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체념한 얼굴을 보자 케케묵은 화가 새삼 치고 올라왔다.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증오했다면 그 자리에서 복수했어야 하는데. 그래야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할 텐데 말이야."
일부러 더 모난 소리를 했다. 그러나 빌어먹게도 내가 그를 잘 알듯 그도 나를 잘 알았다.
"너까지 그 날 반역을 일으켰다면 나는 마지막 보루를 잃었겠지. 결국 우리마저 적이 되었을 테고, 누군가는 죽었을 거고, 누군가는 남아 부서졌겠지. 너는 그런 미래를 걱정해 단념한 것 아니었나?"
그 말을 듣자마자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내 손을 떠난 화살이 거침없이 날아갔다.
라인하르트 엔리케 할레시온의 까마귀 같은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자르고.
아깝게 빗나가버렸다.
활이 너무 팽팽해 당기기 어려웠던 탓이다. 이 활로는 가까운 거리에서도 명중률이 떨어졌다.
"참고로, 죽는 쪽은 나였을 거다. 이 말을 들으면 더 화내겠지만, 이게 진실이니까......나는 르쉬네는 죽여도 넌 못 죽인다. 결국 너 혼자 남아 모든 걸 떠안아야 한다는 걸, 그 때의 너는 알았을 거 아닌가."
라인하르트는 방금 죽을 뻔했음에도 현실감 없이 지껄였다. 나 역시 후회보다도 쓸모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너라면, 너와 르쉬네 둘 다 못 죽일 텐데. 아마 모든 걸 망가뜨려 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고 자살했을 걸. 그게 가장 멍청하면서도 현명한 해결방법이니까. 하지만 넌 절대 그렇겐 못 하겠지, 성격상."
활을 쥔 손의 힘을 완전히 풀었다. 활이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죽으면 될까."
"아니. 너 하나 죽는다고 이 세상의 적수가 전부 사라지진 않아."
"우린 르쉬네가 사라진 순간부터 적이었나?"
"적과 배신자는 종이 한 장 차이야."
라인하르트가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허무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냥 나와 황태자 전하를 죽여, 라니아. 네 방패막이 역할까지 다 하고, 쓸모가 사라지면."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에 살풋 인상을 썼다.
존재만으로 위협이 되는 황족이라는 이유로 여러 수모와 불행을 받아내며 살아왔다. 어차피 언젠가는 개죽음당할 것, 반역을 일으킬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방금 그 스스로가 정곡을 찔렀듯이 죽고, 남겨지고, 무너질 것들이 걱정돼서.
차마 라인하르트까지 죽일 수가 없어서.
나는 반역 대신 혼자 꾸역꾸역 살아내는 법만 터득했었다.
"난 분명 널 못 죽인다고 말했잖아."
세크네트가 나보고 황제가 될 생각이 없느냐 물으며 은근슬쩍 반역의 가능성을 점쳐 볼 때도 나는 분명히 부정의 뜻을 내비쳤다. 함께 놀던 이들의 유년을 모조리 부순 배신자도 내 친구랍시고, 나답지 않게 다 끌어안으려 하면서까지 맞이한 혼돈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적과 배신자가 종이 한 장 차이라면서. 아버지는 적이고 나는 배신자다. 너와 우리의 존재가 위협이 된다면 싸울 수밖에."
"반정을 권고하는 황태손이라. 너 미쳤어?"
"내가 건넬 수 있는 최선이자 최악의 방법이다."
"......알아."
갑자기 감당하지 못할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와 숨이 턱 막혔다. 인상을 쓰고 시선을 피하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뭔지도 모르는 게 날 두드려대서 정신이 없었다. 저번에 한바탕 울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가끔씩 위기가 찾아왔다. 이 불쾌한 감정을 억지로 꾸욱 내리누르며 이어 말했다.
"단 두 가지의 길밖에 없다는 거."
"저울의 양 극단에 놓인 선택지니까."
"넌 아무렇지도 않아? 이젠 아무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는 거냐고."
"내 선에 줄 수 있는 도움은 약혼 파기와 네 기반 세력의 제공까지였다. 네게 몇 장의 패를 쥐어준 대신 아버지의 경계와 의심을 샀고, 그 쪽 세력을 잃었어. 더는 움직이지 못할 만큼 사방이 꽉 막혀서, 당분간 나는 이름뿐인 황태손일 거다. 어쩌면 꽤 오래. 점점 고립되다가 결국에는 죽임당할지도. 아무튼 나는 이렇게나마 스스로의 행동에 따른 대가까지 받았다. 바라는 것이 없군."
라인하르트는 가능성 있는 모든 일에 손을 댔다. 독이 묻은 것이어도 개의치 않고. 그 결과 황궁 안에 철저히 갇혔으니 얌전히 결말이나 기다리겠다는 거였다. 그가 살아있는 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이름값으로 간간히 날 구렁텅이에서 건져내주면서.
여태 그와 어떤 관계로든 가까이 지냈던 사람으로서 놀랄 만한 사실도 아니건만, 새삼 경악스러웠다.
대체 어디까지 포기한 거야, 라인하르트.
"나인하트도 결국에는 간을 보다가 더 기세등등한 쪽에 붙겠지. 우선은 협조하는 척 하지만, 언제 다시 돌변할 지 몰라. 그러니 조심해."
"당부는 됐고,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길을 제시한 건 나지만 선택은 언제나처럼 네 몫이다."
할 말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걸고 넘어져야 할지, 무엇부터 건드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런 와중에 꼭 옛날로 돌아간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라니아."
다정하고도 스스럼없었던, 그 때 그 목소리.
듣기 싫다.
"이름 부르지 마."
"라니아 에빌 할레시온."
"부르지 말라고."
별안간 그가 푸스스 웃었다. 무너진 세계를 녹이는 노을 아래 선 이 시대 마지막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며 이성을 붙잡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유일하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옳은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이제 와서 내가 자격 운운할 처지는 아니지만, 넌 동정받을 자격은 있되 용서받을 자격은 없지 않아?"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살짝 빗겨난 햇살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눈이 시렸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을 해."
라인하르트는 절대 남 앞에서 울지 않았다. 아직 미숙했을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함께한 나조차 단 한 번도 그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오늘도 역시 그는 일그러진 얼굴일 뿐이었다.
"네 앞에서 가면은 못 쓰겠어서."
"......"
나는 그의 피 같은 적안을 마주보며 침묵했다. 더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핵심 주제는 얼추 이야기했다. 남은 건 마무리였다.
사실 굳이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낸 건, 이 날 이후로 그와 만나 이렇게 대화할 기회가 없을 거라는 추측을 해서였다. 얼마 후에 열리는 사냥 축제에서는 일행과 몰려다닐 거고, 그 뒤로는 라인하르트가 다시 활동에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아주 만약에, 다시 우연히 마주친대도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마 직설적으로 뱉어내지 못한 수많은 진심을, 서로를 잘 아는 우리는 이미 언어가 아닌 형태로 알아들었기에.
"난 이제 개별 연습장을 배정받으러 갈 거야. 너는 조금 있다가 다른 구역으로 가."
황태손을 대하는 대공녀의 입장으로 꾸벅 목례하고 활을 주워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지."
"네가 제시한 길은 그닥 내키지 않지만 일단 고려해 볼게."
"......그래."
라인하르트의 손이 돌아서서 멀어지는 나를 잡을까 하다가 공연히 허공만 쥐는 것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42화 이후로 라인하르트는 한동안 라니아와 직접 만나지 않습니다. 즉 직접 출연을 한동안 안 한다는 뜻이에요. (대신 간접 출연은 있습니다) 그의 감정선은 이쯤에서 충분히 마무리되었다고 봅니다. :) 아, 그리고 원래는 후기에 넣으려고 이번 화의 감상포인트를 따로 정리했었는데 너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 같아서 그냥 스루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다음편이 43편이군요 ㅎ ㅎㅎ 여러분 다음 편에 그 분들 나와요 머리 파ㄹㅏㄴ(조용히 해
++분위기 집중을 위해 이번 화는 넬-멀어지다 라는 노래를 듀엣가요제에서 가수 김필과 파트너가 편곡해 부른 버전으로 계속 들으면서 썼어요. 아마 멜로디가 잘 맞을 거예요, 이 노래 들어보시면서 읽으셔도 좋을 듯 합니다!
+++ㅎ...얼른 여름 파트 끝내려고 했는데 아직 끝내지도 못한 채로 비축분 거의 다 털렸...제 비축분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여러분...(아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