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7. 빛의 종언 =========================
입구로 돌아와 다시 만난 관리인의 표정이 또 예사롭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별 일은 아니었다만.
"그......멘데로프 영식께서 대공녀님의 자리와 다른 지인 분들의 자리까지 함께 예약하셨습니다. 제가 안 된다고 하였는데도 끝까지 우기시는 바람에......불쾌하셨다면 송구합니다. 지금이라도 바꿔 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네. 몇 번 연습장이지?"
"아, 네, 2번입니다.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셔야 하니 말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일이 쉽게 풀리자 관리인은 의아한 눈치였다. 고생이 많은 사람이군. 사실 저번에 저녁을 같이 먹은 인원이 다시 모여 연습을 하기로 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예약제가 아니라서 한 활터에 배정받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차에, 가장 먼저 도착한 샤카르가 일을 친 모양이다. 하여간 막무가내.
사냥 축제가 진행될 엘바사 산을 등지고 세워진 이 단련장은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갈수록 숲과 비슷한 환경을 지녔다. 관리인에게서 받은 갈색 말에 올라타 천천히 그리로 향하는 도중에 본 것이라곤 구불구불한 흙길과 진초록색 나무들 뿐이었으니 말 다했지.
제비나비 몇 마리가 길을 가로지르고, 연한 풀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조금은 서투르게 말고삐를 쥐고 찾아간 2번 연습장에서, 나는 벤치에 드러눕듯이 앉은 샤카르를 발견했다.
"거기서 뭐해요?"
"어, 왔냐."
졸고 있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비척비척 일어나서는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다짜고짜 웬 손이냐고 물었더니 도와주는 거랜다. 능숙하진 않지만 나 혼자서도 말에서 내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해주며, 예의상 거절하지 않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갰다. 까슬하면서도 건조하고 따뜻한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발받침에서 발을 빼려다 순간 휘청했다. 샤카르가 잡은 손에 힘을 준 덕에 별로 위태롭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는 내가 영 못미더웠는지 반쯤 안아 내렸다.
"참 신기하다. 어째 넌 뭔 일이 터져도 약속 시간은 반드시 지키냐."
내가 옷매무새를 정돈하는 사이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자기 활과 화살을 가져오며, 샤카르가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뭔 일'이라뇨?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전 아주 평화롭게 여기까지 왔어요."
"어휴. 넌 말이야, 나보고 뻔뻔하다고 하기 전에 자신부터 성찰해야 돼. 그래서, 황태손이 뭐라든?"
"내가 황태손을 만난 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연습장 배정받으러 갔다가 관리인과 네가 하는 말을 들었지."
"대단하네요, 그걸 어떻게 들었대. 그와는 늘상 그렇듯이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러냐. 네가 괜찮다면야 별 얘기 안 한 거겠지. 아, 내가 너랑 히엘로 공작이랑 카르텔리 영애까지 묶어서 여기 배정받았는데, 어때?"
"괜찮네요. 한산하고."
"그런데 결정적으로 공작과 영애가 안 왔어."
"그 분들이야말로 중간에 뭔 일이 생겼나보죠."
"카르텔리 영애야 운영하는 가게가 있으니 그렇다쳐도, 히엘로 공작은 한가할 텐데?"
"언젠간 오겠죠, 뭐. 마침 바람도 좀 잦아들었는데 연습이나 해요."
샤카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과녁 앞에 자리잡았다. 나도 말에 매어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와 합세했다.
궁술은 집중이 생명이다. 바람을 읽고, 과녁을 겨누고, 쏘는 순간 숨을 멈추어 떨림까지 없애야 하니까. 우리는 아무 말없이 화살을 날렸다. 아까 못다한 몸풀기를 여기서 다 할 기세로 하다 보니 화살 한 움큼이 사라졌다. 샤카르가 내 과녁을 흘긋 보더니 고개만 돌리고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너 밥먹고 활만 잡았냐. 장난 아닌데?"
"옛날에 누구한테 제대로 배웠거든요."
탁! 샤카르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날린 화살과 내가 말하며 날린 화살이 모두 제대로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실력은 당신이 훨씬 출중하네요. 비결이 뭐예요?"
"배고파 죽겠어서 산짐승 사냥 몇 번 하고, 괴팍한 스승한테 목숨 걸고 배웠더니 이렇게 됐지 뭐야."
"......대체 어렸을 때 뭐하고 살았어요?"
"가출해서 목적지 없이 여행하다가 수도 할렌센까지 흘러들어와 정보상에서 일 배웠지."
"당신 에온 지방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거기서 수도까지면 거리가 엄청날 텐데. 천천히 빙 돌아 유람했다면 반 년은 걸렸겠네요."
"맞아. 대충 반 년쯤. 아아, 그 때 무진장 재미있었는데."
회상에 잠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설렁설렁 쏘는 화살은 신기하게도 죄다 명중했다. 나는 저런 사람을 한 명 더 안다. 로제 카나이클. 내게 궁술과 마법 이론,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쓸모없는 지식을 가르쳐준 스승. 그는 어떤 자세로 활을 당겼더라. 기억을 더듬어가며 어설프게 재현했다.
"작년 가을에 에온 지방으로 다시 돌아갔었잖아요. 그리고선 얼마 안 가 다시 가출했고. 그건 어렸을 적의 경험과 느낌이 달랐나요?"
"그럼, 많이 달랐지."
로제의 자세대로 하려니 영 어색했다. 과녁 가장자리를 맞췄다. 그냥 재미삼아 몇 번 더 해보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샤카르의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휙 돌렸다.
"네가 북부 지방의 궁술을 어떻게 아냐? 참, 스승이 외국인 마법학자랬나......근데 팔을 조금 더 이렇게 뻗어야 돼. 그렇지, 좋아."
어느새 자기 활을 놓고 내 바로 옆으로 온 그가 자세를 제대로 잡아주었다. 여름처럼 청량한 향기가 가까웠다. 원한다면 속눈썹의 개수를 세어 볼 수 있을 만큼, 지척에 그가 있었다.
왜인지 들이마신 숨을 내쉬지 못했다. 어디 한 켠이 간지러웠다. 너무 뜬금없어서 제 풀에 놀랐다.
문득 생소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시야가 번진 물감처럼 살며시 흐려졌다. 예고도 없이. 햇살에 젖어 색채가 옅어진 풍경이 바람에 쓸렸다. 꿈꾸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내달리는 박동이 흐르는 시간의 초침 소리를 대신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체 뭔 해괴한 소린지 나도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랬다.
손을 아주 조금만 뻗으면 잡힐 거리였다. 짙푸른 머리칼이 실바람에 얽혀 끝부분만 살랑였다. 대충 묶은 꽁지머리는 어깨에 반쯤 얹혔다. 건조하고 따뜻한 손이 내 팔을 살짝 잡았고, 태양을 담은 금안이 설핏 휘어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방금 그의 뒤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른 것 같았는데.
별 건 아니지만 잡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 어떤 논리나 이성도 없이.
"내 스승이 북부 블로텔지아 출신이라 이런 자세를 구사했었지. 감회가 새롭구만......음?"
활줄을 당기던 것을 슬며시 그만두었다. 화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잠깐 멈칫했다가, 빈 손을 느리게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누군가의 얼굴을 이런 식으로 만지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서툴게 눈을 맞췄다. 태양을 등지고 올려다 본 그는 꽤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신이 반쯤 빠진 상태였다. 그건 인정한다.
"......"
그런데 왜 손을 못 떼겠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눈만 어찌할 바를 몰라 빠르게 깜박이던 와중에, 갑자기 그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숨결이 섞였다. 눈길도 섞였다. 내 왼뺨 또한 그의 커다란 손에 덮혔다. 데인 듯 움찔했으나 피하지 않았다. 그는 돌연히 웃음기 하나 없이 진중한 낯을 했다. 내리깐 속눈썹이 그 어떤 목소리보다도 짙었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을 내려 시야를 암전 속으로 몰아넣었다. 곧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이 오른뺨에 나비처럼 내려앉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생각을 전개할 여유가 없어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멀어진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건지 몇 초간 숨만 겨우 쉬다가, 동시에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먼저 반응한 쪽은 자신의 행동에 꽤나 충격을 먹은 것 같은 샤카르였다.
"나 방금 뭐 했냐."
이어서 나도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방금 뭘 한 거죠."
"......"
"......"
"으아악! 미친! 미안하다, 에빌.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내가 말이야, 그......"
샤카르는 서둘러 상황 수습을 시도했다. 나도 뒤늦게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둘 다 진짜 미쳤나 봐.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진짜 나도 모르게 그랬어. 용서해 주라."
힘을 뺀 목소리가 슬그머니 기어들어갔다. 나는 공연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그의 눈을 피했다.
"아니, 뭐, 괜찮긴 한데요......"
"......"
"......"
결국 말을 멈춘 우리는 한참 동안 창피함에 몸서리쳤다.
정적이 활터를 휩쓸었다. 나는 쭈뼛쭈뼛 몸을 숙여 떨어진 화살을 주웠고, 샤카르는 뻣뻣한 걸음걸이로 제자리에 돌아가 괜히 활시위를 당겼다.
절정에 다다른 어색함 때문에 빈 속에 체할 지경이 될 즈음, 뒤늦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대공녀님, 멘데로프 영식! 여기 계셨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요."
"두 분, 혹 싸우셨는지. 서먹해 보입니다."
활터에 입장한 사람들은 엘피샤와 시안이었다. 샤카르는 싸운 게 아니라고 해명했고, 엘피샤는 의아해하며 연습을 준비했다. 시안은 밤에 열리는 연회에만 참석한다더니 진짜로 활 연습은 하지 않을 모양이다. 그는 그냥 대강 고개를 끄덕이더니, 벤치에 자리잡고 책을 펼쳤다.
"대공녀님께선 벌써 한 다발을 다 쏘셨나요? 명중률이 대단하세요! 과녁의 중앙이 너덜너덜해지겠어요."
"아하하, 과찬이세요. 엘피샤의 실력도 상당하다는 걸 저는 아는 걸요. 엘피샤, 저는 잠시 쉴 테니 멘데로프 영식과 연습을 하고 계시겠어요?"
"그래야지요. 대공녀님께선 쉬고 계세요."
나는 엘피샤에게 내가 쓰던 자리를 굳이 떠넘기고 벤치로 갔다. 시안은 내가 다가오는 걸 알아차리고 자리를 살짝 비켜주었다.
나무 벤치에 앉아 한동안 멍을 때리며 버벅거리는 사고회로를 복구하는데 집중했다. 시안은 그런 나를 잠깐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샤카르와 엘피샤가 활 쏘는 모습을 구경하며 겨우 한 숨 돌렸다. 내 옆의 사람과 대화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원상태로 돌아오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시안은 르쉬네의 저택에서 만났던 날처럼 흰 바탕에 푸른 장식과 금빛 문양이 들어간 망토를 입고 있었다. 차분히 정돈된 연파랑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를 덮었다. 책갈피를 꽂고 책을 덮은 그가 어렴풋이 검은 눈을 접어 흐리게 웃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으셨군요."
그는 내가 움직이자마자 편안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역시 신경 안 쓰는 척만 했던 건가.
"아니에요. 별 일 없었어요."
시치미를 떼고 그의 책을 구경했다. 꽤나 낡은 책이다. 잔뜩 헤진 검은 표지가 인상적이었다. 금박을 입힌 낯선 글자가 표지 위에 박혔다. 제목인 듯했다.
"제목이 뭔가요?"
"'세계'라는 책입니다. 환상이론 서적인데, 리우네아 어로 쓰여 있지요."
"재미있겠네요. 이런 게 황궁 도서관에 있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저 또한 어릴 때 리우네아의 왕자에게 선물받은 것이라. 아, 이젠 왕자가 아니라 왕이던가......"
"레비욘 가셋수트 리우네아 국왕과 안면이 있는 사이셨어요?"
"어릴 적 우연한 기회로 잠시 교류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국가의 후계자로서 무결점이었던 그를 한때 동경했지요."
"'한때' 말인가요."
침착하게 그의 어투를 짚었다. 시안은 미소 말고 다른 표정은 지을 줄 모르는지 또 살짝 웃었다.
"정에 이끌려 적을 벌하지 못하고 미비하게 대처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후로는 교류를 끊었습니다. 무결점이 아닌 동경의 대상은 제 발전에 무의미하니까요."
온화한 말씨로 이야기하지만, 퍽 냉정한 내용이었다. 손끝을 까딱이는 것만으로 수십 수백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자인 양 압도적인 아우라가, 그의 곁에는 항상 도사린다. 황족으로 태어난 나는 그 범상찮은 기운을 처음부터 느꼈다. 그걸 감추려 일부러 더 웃는 걸지도 모르겠다. 역시 제국 7대 공작의 타이틀은 어디 안 가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굴곡 많았던 그의 가정사 때문일 수도 있고.
"그렇군요."
"그나저나, 이 책.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카르텔리 영애에게 듣자니 그대는 신비로운 것, 이를 테면 마법 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하여서."
"말씀은 감사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리우네아 어를 배우지 않았어요. 제국어와 옛 카슈테르 어 정도만 할 줄 알아요."
"제 저택에 제국어로 번역된 것이 있습니다. 그럼 조만간 제가 들고 찾아가도록 할까요."
"아니요. 제가 공의 별장으로 갈게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며 바뀌었을 뒤뜰 정원의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러시다면 축제 종료 후 시간 나실 때 오세요. 추천해드릴 책 몇 권을 더 고르며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이따금 샤카르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시안의 옆에 어정쩡하게 앉아 그의 옆얼굴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귀족들이 말하기를, 대대로 미색이 드문 가문이었던 히엘로 공작가에서 어떻게 이런 선 여린 미남이 튀어나왔는지가 의문이라더라. 그 논점에 대해 또 몇몇 뒷소문에 빠삭한 귀족이 떠들기를, 공작이 젊은 시절 유람 중에 미인으로 유명하던 여자를 만나 짧은 교제를 했고 그 결과로 탄생한 사생아가 이 사람이라던데. 실제로 귀족 계보서에도 그의 이름 옆에는 이름 없는 정부 소생에서 공작부인의 아들로 입적 변경된 흔적이 은근슬쩍 남아있다. 황족조차도 잘 들이지 않는 정부를 들였다가는 평생 구설수에 오르내릴 것이 뻔해서, 전대 히엘로 공작이 일부러 시안과 그의 생모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몇 년 방치해 두었다가 뒤늦게서야 눈에 띄지 않게 시안만 본가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시안의 생모는 실종된 것처럼 꾸몄기에, 현재 진짜 생사 여부는 알 수 없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전해진다. 나는 최근에 사교계 행사에 자주 참석하면서 여러 가십거리를 들었고, 이건 그 중 일부였다. 정치에 관심갖지 않는 심드렁한 태도와, 몰래 떠도는 이런 출생 비화 때문에 시안은 사교계에도 잘 출몰하지 않는 거라 했다.
곤란한 점은, 이 이야기를 들은 뒤로부터 리데르흐 히엘로를 단순히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이어진 사적이자 공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돌이켜 생각하자면 미심쩍은 점이 한둘이 아닌 첫만남이었다. 엘피샤의 가게 앞, 우산을 들고 기다리던 남자. 엘피샤와 친분이 깊지는 않은 듯 구는 사람이 굳이 가게 앞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정치적인 이유일 텐데. 하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두 가문의 합동 작전은 없었다. 나와 시안의 사이보다 시안과 엘피샤의 관계가 외려 더 모순적이었다.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렸다. 그래, 여우비가 내리던 날이었지. 하늘을 초점 나간 눈으로 응시하던 사람이, 문을 열고 나온 나를 발견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갑고 깨끗한 겨울의 향기가 손 끝을 어루만지며 슬피 웃었다......
'시안, 여기에요. 어딜 보는 거예요.'
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이렇다 할 말을 꺼낸 사람은 없었다. 또 환청인가?
그런데 이번 목소리는 다른 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많이 뭉개지지도 않았고, 소리의 높낮이까지 명확했다.
별안간 등골이 서늘했다.
이 목소리는 내 목소리다. 딱 '라니아'의 어릴 적 음성이었다. 확실해.
"무슨 일이십니까?"
시안이 때마침 말을 걸어 줄줄이 늘어나는 생각을 단칼에 끊어냈다. 당황한 채로 대강 대답했다.
"환청을 들은 것 같아서요."
"환청......?"
"별 것 아니에요. 독서를 방해했다면 사과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얇은 잎사귀 모양으로 곱게 휘어진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유려하고 고급진 발음으로 대꾸한 시안은 책장을 넘겼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은 지금 달콤하고 산뜻한 로맨스판타지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를 읽고 계십니다.
+비축분 탈탈 터는 중입니다. 그동안 일상에 치여서 느릿느릿 연재했더니 진행이 너무 느린 것 같아서 위기감을 심기 위해 일부러 이런 유례없는(?) 4일 연속 일일연재를 시도해 봤어요. 조회수나 선작 추천 코멘 뭐 이런 작품통계에 뜨는 반응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이대로 일일연재를 끝낼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면 또 나타나서 테잌 마이 비축분 할 수도 있어요 ㅋ ㅋㅋ ㅋㅋㅋ 애초에 전 기분파라서...하하ㅏ
++오 어느새 총 조회수가 50만을 넘었네요. 감사합니다♡
+++헐 후원쿠폰 창을 늦게 확인해서 이제 알았네요! 구리구리도사 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