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7. 빛의 종언 =========================
시퍼런 검날이 오가는 광경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격전이 벌어지는 곳과 내가 있는 관중석의 거리가 매우 멀어서 직접적인 거부감은 없었다. 귀족이니 좌석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데, 나와 일행은 쾌적한 관람을 위해 일부러 뒷자리로 갔다. 경기장 가까이에 있으면 날리는 흙먼지와 튀는 핏물, 광란하는 분위기에 정신이 쏙 빠진다더라. 그래서 나처럼 평화로운 관전을 원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뒷자리로 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하나 둘 결판이 났다.
"참가번호 8번 유르웬 백작, 승!"
"참가번호 25번 알로이 훼산 백작 영애, 승!"
"참가번호 11번 티아렌 카실리아드 자작 영식, 승!"
"참가번호 23번......"
"참가번호 37번......"
빠르게 16강이 끝났고, 8강도 이제 막바지다. 어느새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참가번호 6번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후작 영식, 승!"
나는 난폭하기 그지없었던 프리드리히의 경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샤카르의 과자를 훔쳐먹었다. 어디서 샀는지 되게 맛있었다. 과자를 거진 다 빼앗긴 샤카르는 울상이었다.
"세상에......스카일러 후작 영식께서 나드 백작 영식을 거의 난도질하셨어요. 전투를 이어가기 어려운 부위만 집중 공격했네요."
"저 영식의 평소 성격과 딱 맞는 전략이에요. 영악한 동시에 야비하죠."
큰 부상을 입히지 않고 핵심 공략법만 이행하는 방식을 쓴 프리드리히는 현란하고도 경로를 예측하기 힘든 기이한 검술로 상대를 갖고 놀았다. 말 그대로 '난도질했다'. 대충 보니 나드 백작이 한 번 움직일 타이밍에 프리드리히는 두 번 움직여 빈틈을 찌르고 전투력을 상실시켰다. 여러모로 까다로운 상대다. 주종목도 아닌 검술이 저 정도라면 비도를 날리는 실력은 대체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경외심이 들 지경이군. 고소한 과자를 오도독 씹어먹으며 생각했다.
너덜너덜해진 나드 백작은 비틀거리며 패자의 문으로 퇴장했다. 프리드리히는 황태자에게 인사를 올리고 큰 박수와 연호를 받으며 당당히 승자의 문으로 나갔다.
4강이 시작하기 전에 1시간 동안 참가자들에게 정비 시간이 주어졌다. 정확히 새벽 한 시에 재개된다고 한다.
토너먼트 형식이었던 다른 경기와 달리 4강은 네 명의 진출자들이 한꺼번에 나와 집단 결투를 벌인다. 혹시나 8강까지 거쳐오면서 운좋게 쉬운 상대만 만난 자가 있다면 여기서 탈탈 털리라고 그렇게 한 거다. 진검을 가지고 네 명 중 두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게 되는데, 먼젓번 경기들과 같이 상대를 죽이거나 심한 부상을 입혀서는 안 되며 서로 동맹을 맺거나 배신하는 것은 허용된다. 어차피 누가 됐든 넷 중에 둘만 무장해제시키거나 목에 칼을 겨누어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4강 진출자는 다음과 같다."
열두 시 반쯤에 황태자가 다시 확성기를 잡았다. 간식을 먹으며 오늘의 경기에 대한 평가를 하거나 시답잖은 수다를 떨던 사람들이 일시에 집중했다. 새까만 하늘 아래 수많은 횃불이 괴물의 혀처럼 낼름거렸다.
"참가번호 2번 에단 르웰린 후작 영식, 6번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후작 영식, 25번 알로이 훼산 백작 영애, 그리고 4번 세크네트 로엔세르 공작 영식."
참가번호 14번이었던 헤일렌 나인하트 공작은 8강까지 굉장히 활약했지만, 자신은 우승할 생각이 없다며 4강을 포기했다. 일대 일 싸움에는 능하지만 집단전에는 소질이 없다는 핑계도 덧붙였다. 그래서 8강에서 칼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아깝게 패배했던 훼산 백작 영애가 합의를 거쳐 대신 올라왔다.
라인업은 대충 모두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네 명 다 별칭 '아홉 개의 검'으로 불리우는 제국 최고의 검술 실력자였다.
"누가 이길지 궁금하네. 집단전 경험은 매형이 최고로 많긴 한데......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근접전에 강한 훼산 영애라는 변수도 있고, 무엇보다 이번에 에단 녀석이 제대로 작정한 것 같거든."
팔짱을 딱 끼고 시간을 재던 샤카르가 말했다. 뒤에서 시안이 거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스카일러 영식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이더군요."
"저 놈은 다수를 상대로 칼 날리는 짓만 잘했지, 이런 대련에는 사실상 무경험자입니다. 단기간에 연습은 좀 했겠지만 세크네트 영식만 할까."
뭔가 아는 게 있는 눈치다. 얼른 물었다.
"세크네트 영식께서 얼마나 일대 다수의 싸움을 많이 해봤길래 그런 평가가 나와요?"
"아, 그게 말이지......"
샤카르는 난데없이 웃기 시작했다. 잘 웃지 않는 성격의 레테일도 웬일인지 픽 실소했다. 나와 엘피샤, 그리고 시안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잔뜩 띄웠다.
"매형이 좀 특이한 인간인 건 에빌 너도 알지?"
"네, 당연히."
"세크네트 영식의 소싯적 소일거리가 바로 깡패 소굴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깽판 치고 오는 거였어."
"네?!"
엘피샤가 자기도 모르게 호들갑스런 감탄사를 뱉었다가 눈치를 슥 보며 입을 가렸다. 아마 난 엘피샤보다도 괴상한 표정을 지었을 거다. 대체 깡패 소굴에는 왜 쳐들어가는 건데?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여태 살아계시니 죽지는 않으셨을 테고......많이 다치셨겠네요."
"아니? 다친 건 깡패들 쪽이었지. 아까 16강전하고 8강전 못 봤어? 장난 아니잖냐. 사정 봐주지 않고 다 쓸어버려서 한때 제국 치안이 좋아졌을 정도라니까. 나중에는 치안대에서 영식을 명예 치안대장으로 추대를, 큭큭, 아. 오랜만에 떠올리니까 진짜 웃기네."
"참 새삼스럽게 대단한 분이네요......그런 취미를 즐기게 된 계기가 뭐래요?"
"이유는 또 의외로 정상적이긴 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깡패놈이 지나가던 아이가 자기에게 부딪친 게 화가 나서 그 어린애를 구타하는 장면을 봤대. 원체 남 일에 신경 안 쓰고 사는 양반이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는지 눈이 돌아가서 그 깡패랑 깡패네 근거지까지 박살낸 게 시작이었다나 봐."
"오, 멋진데요."
"야, 근데 매형한테 내 정보상도 깡패 소굴로 오해받아서 박살날 뻔했어. 직원들이 좀 우락부락하게 생겼기도 하고, 다들 성격이 괴팍해서 여기저기 시비가 붙고 그랬거든. 내가 보스 되고 나서는 규제를 빡세게 걸어서 확 나아졌지만."
웃음 섞어 푸념하며, 샤카르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안과 엘피샤가 들어도 되는 얘긴가 싶었는데,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평온했다. 레테일이 표정을 정리하면서 부가설명을 했다.
"결혼하고 몇 달 안 지나서부터 그러더니 반 년 만에 수도 치안을 얼추 정리하고선 깔끔하게 손 뗐습니다. 짐작하기로 언젠가 태어날 자기 애가 떠올라서 그런 일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자기 울타리 밖은 거들떠도 안 보는 주제에. 웃긴 놈이죠."
"자식을 위해 가구와 옷을 준비하는 예비 부모는 많이 봤어도 길거리까지 정리하는 아버지는 처음이에요. 역시 세크네트 영식."
"그 놈이 욕심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아니었으면......아, 경기가 시작합니다."
레테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마어마한 소리가 관중석 전체에서 쏟아져나왔다. 네 명의 출전자가 나타난 것이다. 다른 좌석과 격리된 오페라 공연장의 2층 특수석처럼 황금으로 특별히 장식된 직계 황족의 자리에 앉은 황태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넓은 원형 경기장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무시무시한 정적을 뚫고, 진행자가 짐승의 뿔로 만든 피리를 세게 불었다. 낮고 웅장한 호각 소리와 함께 네 명이 중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돌풍이 일었다. 관중의 응원 열기가 거세진다.
알로이 영애와 에단은 동맹을 맺은 눈치였다. 눈으로 간신히 따라잡을 만큼 빠른 프리드리히의 공격을 에단이 막아내고, 동시에 알로이 영애가 뒤를 노렸으나 살짝 빗나갔다.
세크네트는 빠른 흐름을 타고 쇄도하는 에단의 검을 유연하게 피하고 발목을 걷어찼다. 에단이 비틀거리는 순간 타이밍을 놓친 프리드리히의 검이 에단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휙 지나갔다. 뭐지. 프리드리히 이 작자는 에단의 목을 베어버릴 셈이었단 말인가? 미쳤군.
"아니, 저 새끼가 돌았나."
옆에서 욕설을 뱉는 샤카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격전은 속개됐다. 묘한 각도로 틀어 내지른 에단의 검이 프리드리히의 오른쪽 팔을 긋고 지나갔다. 관중석에서는 프리드리히를 응원하는 자들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왼손으로 검을 바꿔쥐자, 탄식은 환호로 바뀌었다.
"쟤 양손잡이거든."
샤카르가 귀띔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순간 프리드리히의 톤 다운된 금발이 휘청 흔들렸다. 세크네트가 다리를 노리고 검을 아래로 휘둘러서였다. 세크네트 또한 프리드리히의 전투 방식이 상당히 성가시다고 판단한 건지, 다른 이들보다 그에게 먼저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겨우 피했으나 시간 손실이 상당히 컸고, 결국 알로이 영애의 강한 공격을 검날로 직접 맞부딪쳐서 저지해야 했다. 충격파가 꽤 셀 텐데, 아직까지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인가.
"삼 대 일 구도입니다. 스카일러 영식이 너무 눈에 띄는 전술을 구사한 탓에 첫 번째 공동 목표로 몰리고 말았어요. 스카일러 영식이 이 상황에 선택할 수 있는 돌파구라면 르웰린 영식을 제거하는 것 뿐이니......곧 누구든 첫 탈락자가 나올 것 같습니다."
시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관전하며 말했다. 나는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위험하게도 에단의 손목을 겨냥했고, 알로이 영애의 공격을 일부 허용하면서까지 검을 꽂아넣으려 했다. 그러나 세크네트의 방해로 조금 빗나가 손목 대신 팔뚝을 공격한 것 같다.
뭔가 어두운 색을 가진 것이 뚝뚝 떨어졌다. 프리드리히의 부상보다 심각한 상태 같지는 않은데 피는 훨씬 많이 났다. 나는 꼭 내가 다친 것처럼 긴장했다. 무의식적으로 움츠러드는 손을, 샤카르의 손이 이불처럼 포옥 덮었다. 더워서 장갑을 끼고 오지 않은 터라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좀 진정이 됐다.
"저 녀석은 무식할 정도로 튼튼해서 저걸로는 별로 타격도 안 가. 걱정 마라."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보았다. 흔들림 한 점 없는 곧은 시선이 날 다정히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씩 웃었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샤카르가 어벙한 표정을 했다. 그게 웃겨서 입을 막고 또 몰래 웃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한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 의외로 알로이 영애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이 좀 위태로운 상태다.
"어떻게 된 거죠?"
"알로이 영애가 공격을 잘못 받아냈어요. 강한 힘이 가해져서 검이 반쯤 부러진 것 같아요."
"스카일러 영식의 검술은 힘보다는 전술 쪽인데,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뭔가 이상하다?"
"앗, 알로이 영애가 탈락했어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탈락자가 나왔다. 에단이 최대한 막아보려 했지만, 이 기회를 노린 프리드리히가 빈 공간을 파고들어 원 궤적을 그리며 검을 내질러 알로이 영애의 검을 쳐냈다. 무장해제였다. 이렇게 되면 그녀와 동맹이었던 에단이 위태롭다. 왼손을 사용하는 중이라 오히려 다음 동작을 더 예측하기 어려워진 프리드리히와, 판을 자꾸 몇 수 앞까지 읽어버리면서 은근슬쩍 격전의 한복판에서 조금 빗겨나 있던 여유의 대가 세크네트가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에단이 탈락할 차례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채앵!
"헐."
쇳소리가 쨍하게 울렸다. 샤카르가 감탄성을 뱉으며 급히 내 눈을 가렸다. 그를 비롯한 모두가 충격을 받은 분위기였다. 어우우, 하는 경악 섞인 소리가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갑자기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뭐야, 이번엔 또 뭔데요?"
분명 내가 못 보는 광경이 벌어진 거라고 확신했다. 궁금해서 얼른 묻자, 그에게선 대답보다 먼저 감탄사부터 튀어나왔다.
"이야, 이게 뭔 상황이람."
"샤카르. 왜 내 눈을 가려요?"
"아아, 별 거 아니야. 그냥 어떤 놈이 나대다가 결국 두 대 얻어맞았어."
"얻어맞아요? 누가요?"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아하. 음, 아주 끔찍한 장면인가요? 설마 정도 이상으로 당하진 않았겠죠, 규칙이 있는데?"
"글쎄, 일단 불구가 되거나 죽진 않은 것 같다. 그냥 손 뗄까?"
"네. 설마 보고 기절하진 않겠죠, 뭐."
"안일하기는. 힘들면 말해라."
샤카르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치웠다. 곧바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땅바닥에 손을 짚고 엎드려서 켁켁대는 프리드리히의 모습이었다. 그의 곁으로 그림자처럼 검붉은 자국이 점점이 찍혔다. 무장해제는 물론이요 목에 에단의 칼까지 드리워졌다. 칼의 주인은 상당히 화난 기색으로 우뚝 서서 뭐라 말했다. 다들 기함하며 입을 다문 탓에 아주 멀리서도 잘 들렸다.
"작작 하십시오, 좀."
에단답지 않게 필터링 없이 나온 말에 관중석은 도로 시끄러워졌다. 샤카르는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 상황 파악을 못한 내게 시안이 조용히 웃으며 설명해줬다.
"마지막 순간에 로엔세르 영식이 검의 향로를 옆으로 틀어 스카일러 영식의 옆허리를 베고 반격을 피하려 걷어찼습니다. 르웰린 영식은 쓰러진 그를 탈락시켰고요. 알로이 영애의 검이 스카일러 영식의 술수에 넘어갔나 봅니다. 동맹을 깨고 르웰린 영식까지 제하면 바로 결승이라, 로엔세르 영식만 그 사실을 몰랐다면 일이 순조로웠겠지만......눈썰미가 좋은 분이었군요."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의 대귀족을 무자비하게 베고 걷어차다니, 역시 세크네트는 남다른 부류다.
"흥미롭네요. 그럼, 결승은......"
말꼬리를 흐렸다. 남은 두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샤카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엔세르와 르웰린의 대결이라니, 대회가 미쳐 돌아가는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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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아마도 4월 26일 이후에 올릴 것 같아요. 중간고사 보시는 모든 독자님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