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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46화 (46/102)

00046 7. 빛의 종언 =========================

새벽이 짙었다. 전혀 지치지 않은 기색의 관중들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삼 년에 한 번만 열리는 경기라 그런지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과연 이번에 '수석 기사'와 우승의 영예를 거머쥘 자는 누굴까. 이미 돈을 건 내기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불법 도박인가.

"에빌, 넌 어디다 걸래?"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샤카르가 돈 주머니를 짤랑거리며 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돈 없어요."

사실 있지만 뻥 좀 쳤다. 하지만 샤카르가 한 수 위였다.

"내가 네 것까지 내줄게."

"그럼 에단이요."

"오오, 역시 옛 친구라 이건가!"

"아뇨, 그냥 아무나 찍었어요."

"그래......네가 그럼 그렇지......"

"왜 그리 떨떠름한 눈으로 봐요?"

"왜겠냐."

샤카르는 퍽 울적한 눈으로 웅얼거렸다. 그는 우리의 좌석 뒤로 지나가는 장사꾼에게 500스칸을 건네고 내기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스칸 단위를 내가 예전에 살던 나라 기준으로 바꿔 생각할 때는 영을 두 개 더 붙이면 된다. 즉 약 오만 원이지. 샤카르는 세크네트에게 같은 금액을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결승의 막이 올랐다.

이미 둘 다 지쳐있을 시각이었다. 다만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세크네트는 호전적으로 입꼬리를 당길 따름이었고, 그에 비견되게 에단은 진지했다. 표정만 보면 결연한 초심자와 오만한 마왕 같지만 놀랍게도 둘의 우열은 아직 제대로 검증된 전례가 없다. 누가 마왕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의 대결이 가치를 갖는 거지.

새까맣게 불타오르는 밤을 가르며, 호각이 울렸다. 두 손으로 검을 꽉 쥔 풀빛 머리의 인영과, 오른손에 든 검을 설렁설렁 늘어뜨린 잿빛 머리의 형체가 일순 격돌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유심히 관찰했다.

경기 초반, 세크네트는 방어 위주로 움직였다. 일부러 빈틈을 뚫어두고, 거기에 에단이 걸려들면 갑자기 돌변해 검을 거침없이 맞부딪쳤다. 힘에 있어서는 누구도 밀리지 않았다. 세크네트가 멋들어지게 검을 휘둘렀다. 반원형을 그리던 궤적을 몸을 틀며 예고 없이 멈춰세우고 그대로 정면을 향해 꽂았다. 목숨을 앗아가서는 안 되는 이런 대련에서 찌르기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다.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다행히도 에단은 강하게 검날의 옆구리를 쳐냈다. 저 정도면 손에서 놓칠 법 한데, 세크네트의 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건재했다. 반동을 딛고 다시 한 번 깊숙히 파고드는 공격에 흠칫한 에단은 재빨리 몸을 돌려 피했다.

들어올린 검끼리 날을 맞대고 까가각 소리를 내며 대치하다 동시에 떨어져나갔다. 두 사람의 굳게 디딘 발이 뒤로 주욱 밀려 바닥이 파였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밀어낸 검이 에단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빗겨가기도 했다. 멀리서 보고 있었는데 찰나 진짜 뚫린 줄 알고 움찔했다. 쫓아가기 힘들 지경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태세와 동작에 모래바람이 일었다. 축축하고 더운 공기가 내 뒤편에서 은은하게 깔리던 시안의 체향을 한 입에 집어삼켰다.

어느 시점에, 세크네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오른쪽 아랫배를 꾹 누른 그의 왼손이 언뜻 붉게 물든 듯했다. 진검을 쥐고 하는 경기인 이상 중상이 아닌 부상은 종종 생기니 어쩔 수 없었다. 샤카르가 혀를 찼다.

"매형이 안 하던 실수를 했어."

"그럴 수도 있죠."

"맞아. 근데 그 성격상 지는 걸 되게 싫어해서 문제지."

"아, 이런. 그건 확실히 문제네요."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세크네트는 검을 똑바로 고쳐쥐었다. 에단이 지체 없이 달려들었다. 세찬 바람과 악마의 형상을 닮은 횃불, 관중의 거대한 함성과 신나보이는 황족석의 사람들이 여름의 축제를 광란으로 몰아갔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언제부턴가 이 검투에 고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손에 땀이 났다.

경기는 이제 마지막을 향해 질주했다. 수많은 젊은 남녀는 두 출전자를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나이가 든 사람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할레시온의 바람직한 인재를 응원했다. 나는 끝날 때마다 바닥이 피로 물들고 비린내가 진동한다는 검투사들의 경기보다 이 대회가 훨씬 볼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이 저러고 있으니 너무 조마조마한 걸.

몇 분을 더 끈 끝에, 에단이 부상으로 지친 세크네트의 목에 검을 드리웠다. 세크네트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죽이 웃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우승은 에단 르웰린이었다. 장내가 다시 한 번 박수와 환호성으로 가득찼다.

경기가 종료되고, 에단이 언제 죽일듯이 달려들었냐는 듯 검을 거두고 멋쩍게 손을 내밀었다. 세크네트는 튕기는 척 하더니 이내 맞잡았다. 그 때 갑자기 떠올랐다. '꽃물 든 하늘'의 전개 중에도 검술 대회라고 언급된 사건이 있었다. 그 전개 그대로라면 에단과 프리드리히, 두 서브 남주인공이 결승에서 격돌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긴 이제 '꽃물 든 하늘'이 아니다. 이미 들어맞은 것보다 바뀐 것이 훨씬 많은 세상이다.

'악녀'로 명명되었던 내가 망친 세계와 마주한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뒤틀린 뿌듯함이 나른함과 더불어 느린 파도처럼 머리를 적셨다.

벌써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이쯤 되니 슬슬 졸렸다. 한껏 기세등등했던 분위기가 식고, 시상식이 진행되며 일대의 소란이 멎자 눈꺼풀이 내려왔다. 시야가 깜박 일그러졌다가 돌아오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 사이 레테일은 세크네트 때문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단은 황태자로부터 명예 작위를 수여받았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엄청난 영예였다. 한때 그의 무예 수련을 응원했던 옛 친구로서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잠이 온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다.

잠시 까무룩 졸았던 것 같다.

"에빌, 집에 안 가? 계속 이러고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으음......"

누가 툭툭 건들길래 눈을 비비며 몸을 바로세웠다. 허리를 숙이고 자고 있었나보다. 아, 내 체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샤카르와 시안, 엘피샤와 레테일도 함께였다. 잠기운에 파묻힌 정신을 깨우려 도리질치고 웅얼웅얼 물었다.

"시상식 끝났어요?"

"어, 방금. 너 조는 사이에 도박꾼이 돈도 주고 가더라."

샤카르는 동전 주머니를 흔들어보이며 샐샐 웃었다. 맞다, 내가 에단에게 걸었었지. 잠이 덜 깬 채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샤카르는 약올리듯 주머니 끈을 손가락에 끼워 빙빙 돌렸다.

"애초에 자본금이 내 건데 너한테 줘야 하나?"

"어이가 없네요......그럼 당신이 쓰던지요. 어차피 전 개인 보유금만 해도 500만 스칸은 훨씬 넘을 만큼 아주아주 잘 살고 있으니까. 500스칸 정도야, 뭐 별 것 아니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으스대듯 얘기했다. 샤카르는 헛숨을 뱉더니 팔짱을 딱 꼈다.

"갑자기 웬 궁핍한 가출 청소년 취급이래. 나도 돈 많거든? 됐다, 그냥 너 가져라."

"계획대로군요. 고마워요."

얄밉게 웃으며 돈 주머니를 낼름 빼앗아왔다. 간단한 술수에 말려든 그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에빌, 너 사실 책략가였구나."

"원래 이 정도 머리는 있는데요? 제 수준을 뭘로 보고."

"허. 자기 앞의 계단이 있던 말던 발부터 내딛고 보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

손이 잡혀 살짝 뒤로 끌어당겨졌다. 정신없는 와중에 걷느라 계단이고 뭐고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와 또 유치하게 투닥대기보다는 상투적인 말이나 하기로 했다.

"고마워요."

"나도."

"네?"

그에 맞는 평범한 대꾸가 돌아올 거라 예상했던 터라,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대꾸에 앞서 옆으로 바짝 붙어 함께 걷기 시작했다.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나도 고맙다고."

"그러니까 뭐가요?"

"뭐든지."

내가 샤카르에게까지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는 도통 속을 모를 남자였다. 시안이나 프리드리히처럼 대놓고 의뭉스러운 건 아닌데 희한하게 헷갈리는 사람. 나쁜 의미의 '혼란'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이 어떤 기반 사실을 두고 나왔느냐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늘 친절하게 굴면서도 꼭 이럴 때만 불친절했다. 언제나 의문은 미궁에 던져졌다.

우리는 원형 경기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인파에 막혀 뒤늦게 빠져나온 시안과 엘피샤는 각자의 저택으로 곧바로 귀가했다. 늦은 시각인데다가 내일의 일정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샤카르와 나만 아까 결승전을 치른 사람들을 배웅해주기 위해 잠깐 남았다.

별이 눈물 조각처럼 밤하늘 자락에 매달려 흔들렸다. 행인을 위한 자그마한 오렌지빛 등불 아래 서서, 그와 나는 침묵했다. 아직까지 내 오른손은 그에게 붙잡힌 그대로였다. 크기 차이가 많이 나서 거의 감싸쥔 꼴이었다. 내 손은 그의 손에 덮혀 완전히 숨었다. 열기가 식은 밤에 그의 온기만이 선연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있는 걸 까먹은 건가. 너무 태연한데. 나는 자꾸만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괜시리 흙바닥을 신발 앞코로 툭툭 쳤다. 은은한 주홍빛 조명이 그의 머리카락 색을 죽였다. 대신 눈은 평소보다 더 태양처럼 빛났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우리를 알아본 눈치였으나 곧장 시선을 돌리고 모른 척 지나쳤다. 이번엔 뭘 오해했기에 저런 태도람. 나는 그냥 사교계 인사들의 놀라운 자체 해석 능력을 감안하고 신경을 껐다.

"추워?"

혼자인 양 조용히 서 있던 샤카르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다정히 물었다. 가장 최초로 들었던, 그리고 얼마 전까지 당연히 여겼던 말씨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걸 이제서야 알겠다.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나대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언제는 머리가 텅 빈 적이 있었냐만은.

"또 그 눈. 혹시 내가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렸어?"

불만과 걱정이 어린 목소리에, 밤에 뜬 태양 같은 눈을 멀뚱히 응시했다.

"멍 때리고 있었는데요."

"그런 변명은 더 이상 안 통한다고, 라니아."

"이젠 이름을 그냥 막 부르네요?"

"너는 처음부터 내 이름을 그냥 막 불렀잖아. 우리 좀 공평해지자. 응?"

그는 눈꼬리를 내리고 숨결 섞어 미소하며, 호소하듯 말했다. 뭐라 밀어붙일 필요가 없는 데다가 그러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싸늘한 바람이 바닥을 쓸고 지나가자 조금 추웠다.

"......그래요. 이참에 공평해지죠, 우리. 앞으로는 서로 이름으로 불러요."

어떻게 눈치챘는지, 샤카르는 바로 내 어깨에 자기 겉옷을 걸쳐주었다. 하루종일 입지는 않고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니던 환절기용 코트였다. 그는 눈을 접어 싱긋 웃었다. 정말이지 귀족답지 않은 웃음이다.

"그래, 라니아."

그 미소의 의미는 또 무엇이었을까. 속뜻에 집중하기 시작하니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세상조차 새로웠다. 나는 옷깃을 여몄다. 청량한 향을 함뿍 들이마시며.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대로 괜찮지 않을까?

괜찮았으면 좋겠어.

***

에단과 세크네트는 몸 곳곳에 난 잔상처를 치료하고 오느라 조금 늦게 나타났다. 샤카르와 나는 우선 그들에게 수고했다는 말부터 건넸다. 샤카르가 세크네트에게 대련에서 졌다 해서 속 좁게 굴지는 말라고 하자, 그는 시원스레 웃으며 손사래쳤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뒤끝은 길게 못 남기겠다더라.

간단한 인사와 배웅의 말을 끝으로 우리도 해산했다. 집에 가서 대충 씻고 잘 준비를 마쳤더니 세 시가 다 되어서, 하녀 마리에게 내일 사냥 대회는 거를 테니 되도록이면 늦게 깨우라고 분부해 뒀다.

그러고선 일어났더니 열한 시였다. 마리가 나를 깨우며 말하길, 다른 귀족들도 피곤해서 오늘 같은 축제의 마지막 날은 사냥 대회에 불참하는 경우가 많단다. 그 예로 어머니 일레인과 아버지 카시우스 대공도 비슷한 시각에 일어나 지금 나와 함께 아침밥을 먹는 중이다.

"셀리아는요?"

"나이가 어려 이번 축제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또래 귀족 자제들과 다과회를 하러 갔단다."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샐러드를 입 안에 넣었다. 상큼한 소스가 잠을 깨웠다.

"다과회 장소가 어디라 하였소?"

"아레스티제 공작가의 저택이에요."

"그 가문의 열네 살 난 아들이 주최했나 보군."

"그럴 거예요."

나는 대공과 일레인의 일상적인 대화를 들으며 살짝 양념된 닭고기를 오물거렸다. 아침 식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에는 내게로 화제가 옮겨왔다.

"이틀 동안의 축제는 어때, 재미있었니?"

"생각 외로 즐거웠어요. 좀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 오늘은 푹 쉬렴. 밤에 열리는 가면 무도회는 불참한다고 통보해 둘까?"

"음, 아니요. 잠깐 다녀올까 해요. 거기 연령 제한이 어찌 되죠?"

"열여덟 살 이상이지, 아마?"

"웬만한 사교계 이십 대들은 다 오겠군요."

"특히 결혼하지 않은 이들이 많을 거란다. 아, 아침부터 이런 말을 하기에 조심스럽지만. 혹 이참에 너도 상대를 찾아볼 생각은 없니?"

"지금 시기에 말이에요?"

"뭐든 민감하게 여겨질 상황이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일상과 미래를 포기하게 하고 싶지는 않단다."

황태손과의 약혼을 깨버린다는 것은 사실 라인하르트 뿐만 아니라 내게도 꽤나 큰 타격을 주는 짓이다. 결혼 상대로서의 내 가치는 순식간에 추락했다. 그럼에도 일레인은 나를 존중해 주었다. 대공의 표정은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어쩌겠나. 뒤늦게나마 두 사람과 전략을 공유하고 동의를 받은 뒤에야 추진했던 일인 걸. 그러니 대공이 내게 화를 낼 자격은 없지.

그냥 겉치레로 살짝 웃었다.

"배려 감사해요. 가서 잘 놀다 올게요."

============================ 작품 후기 ============================

3일 간의 축제 중 이틀째의 이야기까지 마무리되었습니다. 에단은 우승했고, 라니아는 부자고, 감정은 알 수 없고, 밤은 예쁘네요. (또 한 화 내용 한 줄로 요약해버리기)

+원래 시험 끝나고 돌아오려 했는데 비축분이 좀 있길래 그냥 올렸습니다. 시험 끝나고 나서 5월 초쯤에는 한 번쯤 우르르 연참해볼 계획이에요.

++조회, 선작, 추천, 코멘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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