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7. 빛의 종언 =========================
축제 삼 일 째, 즉 마지막 날이다. 해가 완전히 질 무렵에, 수도에 거주하는 젊은 귀족들을 태운 마차 행렬은 일제히 황궁 정문으로 향했다.
나는 마차 안에서 화려한 가면을 고쳐 쓰며 마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의 사냥 대회 우승자는 파르상 자작이라고 한다. 가면 무도회 참석자 명단이 내가 한창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저택에 전달됐는데, 삼십 세 이상은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더라. 역시 아직까지 그나마 체력이 남은 청춘들을 겨냥한 마지막 날의 행사다웠다.
엘피샤가 만들어 준 검푸른 색상의 풍성한 드레스와 족히 칠 센치는 되어보이는 하이힐 때문에 움직임은 좀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시야를 일정부분 가리는 진녹색 가면 때문에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축제 첫 날의 수수했던 옷이 그리웠다.
가슴께에 단 황금빛 브로치를 매만져 정돈했다. 이건 작년 카리스티아 대연회 이후로 처음 단다. 샤카르가 어제 헤어지기 전에 날 바래다주면서, 가면 무도회에 참석할 거면 이걸 하고 오라고 했거든. 자기도 하고 올 테니가. 그럼 서로를 바로 알아보게 돼서 김새지 않냐고 했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도착하고 나서 시종의 안내를 받아 파티장으로 들어서자 그 웃음의 의도를 약간 알 것 같았다.
"오늘의 파티 주제는 '미로 속의 비밀'입니다. 이곳은 황궁 대후원 서편의 미로 정원이며, 참석자 분들께서는 각자 다른 문으로 입장하셔야 합니다. 미로 정원의 입구는 참석자 수의 반절에 맞추어 62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퇴장하실 때에는 이 62개의 입구 중 하나를 찾아 그리로 나오시면 됩니다. 하오면, 아무쪼록 즐거운 파티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이 발광석을 하늘을 향해 높이 던져주십시오."
시종은 오묘한 빛을 띄는 밝은 돌을 하나 주고 물러나갔다. 나는 내 앞의 작은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밤하늘 아래 풀빛 미로가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길거리의 것과 같은 은은한 오렌지빛 등불이 촘촘히 설치되어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분위기는 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신비로운 숲을 탐험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내 파티 컨셉이 왜 미로 속의 '비밀'인지도 대충 눈치를 챘다. 일단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것부터가 비밀스러운 기류를 깔았다. 게다가 이 미로는 구조상 많은 사람이 한데 모이기가 어렵다. 지극히 사적인 만남이 조성되기에 알맞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연애가 자유로운 제국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구나.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이 파티 하나만을 위해 특별히 조성된 정원이라서, 길은 황족인 나도 모른다.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오른쪽으로 틀어보았다. 그러다 몇몇 귀족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가면을 쓰고 조명이 어두울 뿐인데 대부분을 못 알아봤다. 그들과 나는 마치 초면인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서로의 신분을 뒤늦게 확인해야 했다. 물론 실제로 초면인 사람도 몇 있긴 했다. 내가 사교계를 활보하고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서.
아무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내가 언제 또 이러고 놀겠어. 찬찬히 조경 구경도 하고, 각종 식물로 뒤덮인 초록 미로의 벽에 핀 이름 모를 꽃향기도 맡으면서 나 혼자 잘 놀았다. 간간히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으면 평범하게 대하거나 길을 물었다. 아직까지는 나와 가까운 지인을 만나지 못했다.
"이 길은 4번 입구로 이어집니다. 퇴장을 원하지 않으시면 왼쪽 갈림길로 가 주십시오."
어쩌다가 우연히 출구를 찾아버리면 그 앞에 선 시종들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 준 덕에 다시 미로 안쪽으로 돌아갔다. 늦게 일어난데다가 아까 낮잠까지 잤더니 완연한 밤을 향해 시간이 질주해도 그닥 졸리지 않았다.
둥, 둥, 둥.
삼십 분 단위로 들리는 북소리였다. 열한 번 울렸으니 열한 시 정각이군. 아까 열 시가 조금 넘어서 들어왔으니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여기 있었다. 슬슬 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되었는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와 마주쳤다. 드레스를 입은 사람이 부채를 접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가면 무도회는 잘 즐기고 계신가요, 누구신지 모를 영애? 이 미로를 제가 주도해 구성하였는데, 마음에 드실런지 모르겠어요."
에티에네트 1공주구나. 그녀가 흘린 힌트를 단박에 집어들며 입가를 당겨 웃었다.
"아주 흡족한 무도회예요. 공주께서도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물론이에요. 그런데 영애께서는 누구신지요? 제 정체를 알려드렸으니 이제 영애의 차례예요."
몇 달 전에 에네아스 백작가의 후계자 이나르와 약혼한 에티에네트는 결혼식을 올릴 날만 잡으면 되는 상황에서 내 약혼 때문에 졸지에 뒤로 밀리는 신세가 되었던 사람이다. 내가 약혼을 파기한 덕에 이제야 결혼식 날짜를 잡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나에게는 그닥 호감이 없겠지. 정체를 밝혀보았자 좋을 것이 하등 없는 만남이라 적당히 얼버무렸다.
"공주께서 관심 가지실 필요가 없는 어느 한미한 자작가의 영애랍니다. 얼마 전에도 공주 저하를 뵈었었죠."
"흐음, 자작가의 영애는 한두 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서요.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때는 알려주세요, 영애의 정체를."
"그럴게요. 아, 저는 이만 가 보아야겠어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영애도요."
나는 간단히 목례하고 그녀를 지나쳤다. 에티에네트 유리네 할레시온. 황태자파의 굳건한 한 축인 에네아스 백작가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한 연결 고리로 쓰인 1공주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요새 돌아가는 상황은 일레인의 말대로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깔끔히 무시하고 싶어 고개를 저었다.
그 머리 아픈 정치적 계산 말고도 나는 할 생각이 많다. 정말이지 감당 못하게 많았다. 복잡하게 헝클어진 생각의 실타래를 풀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상 시간이 나를 기다려준 적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무방비하게 맞아들인 것들이 새로운 동시에 두렵다. 기대를 불어일으키지만 고민에 젖게 한다.
그럼에도 나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문제였다.
"......안녕하십니까, 이름 모를 분."
얼마 안 가 다른 사람과 맞닥뜨렸다. 나는 바로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공기 중에 꽃잎을 풀어놓은 것마냥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거든. 어디선가 나타난 반딧불 몇 마리가 은근슬쩍 시안 쪽으로 날아들어 곁을 맴돌았다. 벌레들도 이 향기를 맡은 걸까.
"시안 공과 만나다니, 멋진 우연이네요."
"......"
태연스레 그의 정체를 안다고 말하는 나를 향해, 시안은 그냥 미미하게 입가를 끌어당겼다. 가면 때문인지 조금 어색해 보였다.
"마지막 날 무도회의 참석자 명단에서 공을 발견하고 약간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연회는 별로 선호하지 않으실 거라 믿었거든요."
"산책이나 할 겸 나왔습니다. 헌데, 그 브로치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아, 이것 말인가요?"
다소 갑작스런 화제 전환이었다. 나는 옅게 미소하며 어렵사리 흐름을 쫓아갔다.
"멘데로프 영식이 카리스티아 연회 때 주었던 선물이에요. 시안 공도 그 연회에 참석하셨으니, 이건 두 번째로 보시는 거겠네요."
"아니요. 수없이 많이 보았던 물건입니다."
그리 말하는 시안의 눈빛은 가면에 가려 살피기 어려웠다. 대신 어조 한 켠이 소리 없이 무너졌음은 알 수 있었다. 극적인 변화 자체를 구경하기 어려운 사람이 이러니 궁금증이 돋아서,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화를 이었다.
"그런가요? 굉장히 희귀한 장식품이라고 전해들었는데, 아닌가요?"
우는 것 같은 미풍이 잎사귀를 흔들었다.
"세상에 단 두 개 뿐이니 희귀한 것은 맞습니다. 많은 이의 손을 탄 보물이지요. 저는 이 브로치가 다른 사람의 소유였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단 두 개라. 샤카르와 내가 가진 것이 전부라는 뜻이군. 그렇게까지 희소한 물건일 줄이야. 새로운 사실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물었다.
"아하. 전 주인 분과 아는 사이신가요?"
"단순히 아는 사이만은 아니었지요. 제 유년 시절에 가장 가까웠던 분들이기도 해서. 어찌되었든, 새 주인께서 잘 사용해 주세요. 제게도 꽤나 의미있던 브로치라,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죠. 소중히 다룰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샤카르의 손에 들어오기 전에 브로치를 소유했던 주인과 친밀한 사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연한 바람과 함께 인 감정의 동요는, 역시 그 전 주인을 떠올렸다는 건가. 리데르흐 히엘로라는 사람은 알아갈수록 '과거'에 국한되는 무언가와 접점이 많았다. 캐낼 때마다 뭔가가 딸려나오긴 하는데 그렇다고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정도로 충분한 정보는 아니라서 확언하기는 또 힘들었다. 워낙 감추고 있는 게 한가득인 사람이라 만일을 대비해 웬만큼 파악해두려 했는데, 이게 여간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다.
어쩐지 뒷맛이 싸한 것은, 이제껏 그가 일부러 실마리가 담긴 말을 잔뜩 내놓았던 것 같아서다. 헨젤과 그레텔을 유인하려 빵조각을 흘려둔 마녀처럼. 요새 들어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체 뭘 알아주기를 바라는 거지? 아니, 애초에 뭔갈 드러낼 생각이 있기는 한가?
그는 내가 겪어본 최고의 모순이자 의문이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인과를 무시했고, 이득과 손해에 무관했으며, 일관성 없었다. 아예 맞추기 어려울 지경으로 찢겨나간 퍼즐 앞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혹 이 근처에 출구가 있습니까? 자정 전에 퇴장하려 돌아다니고는 있는데 찾기가 어렵군요."
딱히 더 건넬 말을 찾지 못했는지, 그가 질문했다. 반딧불이가 주위를 포르르 날아다니는 바람에, 그의 모습은 마치 빛을 다루는 마법사 같았다. 나는 그 순간 빛이라는 단어 덕에 그에게 도움이 될 법한 것을 떠올려냈다.
"빠른 퇴장을 원하시면 입구에서 받은 발광석을 사용해 보시는 건 어떤가요?"
"아, 이런. 그걸 잊고 있었습니다."
시안은 자켓 품 안에서 빛나는 돌을 꺼내들었다. 힘껏 던져올린 발광석은 일정 높이 이상 올라가자 갑자기 자그마한 폭죽이 되어 터졌다. 그걸 바라보며, 시안이 조용히 미소했다.
"마법을 모방해 발명된 특수 화약이군요."
"어느 국가의......?"
"시힐레와 에온의 기적을 모방한 듯합니다. 망국 당시에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할레시온이 잘 활용했어요."
"이게 바로 불꽃놀이에 쓰이는 재료였나 봐요."
시안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의 검은 눈이 별처럼 미미하게 흐려진 채 불꽃의 잔재를 담았다.
곧 시종이 왔다. 그는 내게 인사하며 짧게 덧붙였다.
"저택 방문은 당분간 힘드시겠지요."
뭘 듣고 하는 소린진 모르겠는데 맞는 말이었다. 곧 프리드리히와 관련해 할 일이 있거든. 때려맞춘 거라기엔 너무 정확하게 언급해서 살짝 뒷맛이 쎄했지만, 나쁜 수작을 부릴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 우선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네, 아쉽게도. 시간이 비면 그 때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는 시종을 따라 출구로 갔다. 초록색 빛을 내던 반딧불이와, 싱그러운 향기는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졌다. 원래부터 존재한 적 없다는 듯이. 없는 자의 삶처럼.
흔적을 지워내듯 돌연 바람이 불었다. 구름이 마지못해 물러났다. 달이 검게 퇴색한 하늘에는 무수한 별만이 찬연했다. 나는 자정까지 '그'를 못 찾으면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좀 더 걸었다.
윤이설의 어머니 윤하린은 이렇게 하늘에 가득한 별을 올려다보던 날에, 소망이 때로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말해줬었지. 소망이라면 믿지 못할 일을 실현할 수 있다면서.
어렸던 윤이설은 딱히 빌 것이 없었다. 그 생의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가슴을 스친 소망은, 죽은 엄마를 다시 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찰나의 선택으로 나는 이루지 못할 것을 소원했다. 그리고는 이 세계에서 환생했다.
그러니 어쩌면 이 세계 어딘가에 내가 찾는 엄마 '윤하린'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윤하린을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자 다른 가정이 비집고 올라온다.
활자로써 이 세계를 써내려간 사람이 바로 엄마 윤하린이 아니었을까, 하는. 전생을 되짚어보면 의외로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다. 엄마는 자주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는,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설명 하에 타자를 두드렸거든. 하지만 번역한다는 원서는 늘 그녀 곁에 없었고.
하지만 단순히 창조했다는 것만으로 이 세계가 내가 찾던 윤하린 그 자체라고 하기엔 억지가 있으니......이면의 진실이 더 있겠지. 언젠가는 답을 알게 되려나.
이제 와서 알아봤자 달라질 것도, 바꿀 수 있는 것도 없을 것 같아 허탈해지지만. 그래도, 궁금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심오한 세계를 쳐다보듯 경외 어린 눈으로 밤하늘을 감상하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내렸다. 이동 속도를 아까보단 조금 높였다. 그렇게 한산한 미로를 거닐다가.
"찾았다."
조용한 공기를 흩어내고, 목소리가 들렸다. 거의 삼일 내내 들었던 음성이다. 가면은 유명무실했다. 금빛 브로치가 우리를 증명했으니까.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그는 날 보며 손을 흔들었다. 뻔히 알지만 확인했다.
"샤카르예요?"
"어, 맞아. 너 몇 번 입구로 들어왔냐? 진짜 한참 돌아다녔네."
큰 보폭으로 성큼 걸어 내 바로 앞까지 온 그가 물었다. 알싸한 새벽의 향이 코 끝을 자극했다.
"4번 입구였어요. 당신은요?"
"아이고. 난 46번이었는데."
"입구 배정이 원흉이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근데 너 자정까지만 여기 있을 거라 말하지 않았냐, 어제?"
"네. 그 전에 얼굴 봐서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이 브로치 정말 눈에 잘 띄네요. 저 멀리서부터 한 눈에 들어와요. 이런 걸 어디서 구했어요?"
"으음. 그건 이야기가 좀 길어서. 요약하자면, 정신 차리고 나니 내 소유가 되어 있었어."
"원래는 누구 거였는지 혹시 알아요?"
"에온 왕실의 유물이라고 했었나......아마 그럴 거다."
왜 뜬금없이 왕실이 튀어나오는 거지. 점점 늪으로 빠지네. 지나치게 혼란스러워져서, 지금 당장은 미뤄두기로 했다. 나는 다른 것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멀리서 왔네요."
이 주제는 대충 마무리지었다. 애초에 길게 얘기할 거리도 안 된다.
"멀리 왔지."
샤카르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읊조렸다.
별 조각이 내렸다. 분위기에 잠긴 비언어가 숨을 담고 흩어졌다. 그 끝에 서늘한 여름이 있었다. 우리는 삽시간에 어디론가 쓸려갔다.
잠시 가만히 침묵했다. 침잠한 눈을 찬찬히 감았다가 떴다. 밤기운 속에서 홀로 선명한 얼굴은, 시야가 암전해도 변함없이 눈앞을 맴돌았다. 높디 높은 허공을 휘감고, 어떤 마음이 불꽃처럼 울렁였다.
가라앉은 밤의 장막이 느릿하게 파도쳤다. 푸르른 바람결에 파르르 떠는 별빛이 그렇게 위태로울 수가 없었다. 끝간 데 없이 다정한 공기에 부드러이 떠밀렸다.
쫙 빼입은 샤카르의 드문 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는 가면을 벗었다. 답답해서. 샤카르는 의아한 눈을 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나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어떤 거? 말해 봐."
선선히 대답하는 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면서 빠르고 확실한 도망을 위해 발광석을 꺼내 하늘로 휙 던졌다. 펑 소리를 내며, 빛나는 돌은 폭죽이 되어 예쁜 모양으로 산개했다. 단 둘만의 짧은 불꽃놀이였다. 찰나를 위한 마법이었다. 샤카르는 내 돌발 행동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진솔하게 느껴지게끔 담백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샤카르."
날카롭고도 시원한 발음이 입에 감겼다.
모르겠으면 일단 부딪쳐 봐야 한다는 판단 하에, 나는 지난 삼 일간 열심히 활동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알듯 말듯 모호하다. 안개가 시야를 뒤덮은 걸까, 빗줄기가 귀를 막은 걸까.
"당신에게 나는 뭐예요?"
이유도 없이 목이 메였다. 뜨거운 것이 울컥 치고 올라왔다. 그냥, 그냥 그랬다.
"나에게 당신은 또 뭘까요?"
그는 상당히 당황한 낯으로, 그러나 결코 고개를 돌려 회피하지는 않으며 내 눈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나는 외치듯 호소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비산하던 빛가루가 허공에 녹아들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답변이 돌아왔다.
"글쎄. 사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샤카르는 맞지 않는 눈높이 때문에 허리를 약간 숙였다. 바람에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겨주고, 멋쩍은 듯 상냥하게 웃었다.
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열심히 찾는 중이야. 네가 요즘 그러는 것처럼."
그때 나는 나 자신조차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정체보다 추리하기 어려운, 이름 없는 감정 덩어리가 결국에는 나를 지배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아직 뭔지도 모르는 걸 함께 찾기 전에, 먼저 한 가지만 제안할까."
자정을 알리는 북소리가 멀찍이서 아득하게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그는 내 손에 있던 가면을 가져와 다시 씌워주며, 끝내 매몰될 비밀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이제 우린 동업자 아닌 걸로 하자.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으니까."
밤기운이 사뭇 농밀했다. 술도 안 마셨는데 취한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있잖나. 약해진 이성의 틈으로, 홀린 듯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요."
6월 22일에서 23일로 넘어가는,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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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 끝났습니다. 악살다 47편은 고개를 들어주세요. (빼꼼)
+48편은 이어서 자정 즈음에 올라옵니다.
다음 편부터는 새로운 8챕터, 폭풍우(Tempest)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폭풍우 챕터 끝나고 나면 캐릭터 브릿지 진행하고 드디어 대망의 3장 : 가을 로 넘어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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