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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48화 (48/102)

00048 8. 폭풍우 =========================

여름에 걸맞는 폭풍우가 할레시온의 수도를 덮쳤다. 대낮에도 어두운 하늘에서 장대비가 거칠게 쏟아진다. 요 며칠 하늘에 무섭도록 꽉꽉 들어차던 먹구름이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기분이 요즘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요. 혹시 대공녀님께서 휘저어 놓으셨습니까?"

샤카르와 함께 저택에 찾아온 세크네트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질문했다. 커피에 설탕을 한 스푼 넣어 휘휘 젓던 샤카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매형, 한 번만 더 걸러서 생각해 보면 답 나오잖아. 에빌이 조종한 황태손이 스카일러를 쑤신 벌집마냥 정신없게 만들었겠지. 안 그래, 라니아?"

"네. 제가 그러라 했어요."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한 후 평온하게 차를 홀짝였다. 세크네트는 회색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넘기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히야. 근신령 떨어진 황태손을 끝까지 활용하시는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겠습니다, 대공녀님.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정말 황제 되실 생각 없으십니까? 대공녀님께 의지만 있다면 제 인생의 좌우명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저 더러운 진흙밭에 발을 붙여볼 텐데."

"정신 나간 소리는 사석에서도 적당히 자제할 줄 알지, 좀. 매형은 언제나 그 입이 문제라니까."

다리를 꼬고 의자에 늘어진 샤카르가 설렁설렁 제동을 걸었다. 세크네트는 씨익 개구지게 입가를 끌어당기며 찻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맑은 소리가 땡땡 울렸다. 종소리 같아서 좀 싫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근데 대공녀님 지금 벌이시는 일들 모아보면 딱 견적이 나와버리잖습니까. 나는 이 판국을 다 뒤집어 엎어버리고 새 세상 만들겠다, 라고."

그가 장난을 빙자해 생글거리는 건 이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은지 오래됐다. 세크네트 로엔세르는 사실 타고난 정치가다.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의 천진난만함이라는 가면이 완벽하게 그것을 가리고 있지만, 꾸준히 접근하고 분석하면 얼핏 본색이 드러났다. 지금처럼 본래 알던 지인과 함께 있을 때는 특히 그 점이 더 잘 드러나고. 쌍둥이라서 첫째 둘째를 가리기 애매한 탓에 충분히 레테일을 제치고 가주 후계자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점이 참 의외다.

아, 물론 그러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나는 그리 생각하며 여유가 서린 미소를 조용히 띄웠다.

"새 세상은 잘 모르겠네요.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비슷하게 돌아가는 세상 아닌가요. 다만 제가 딛고 선 땅만 뒤집는 건 좀 고려하는 중이지만요."

"에이, 내숭 떠시긴. 고려가 아니라 실행 중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 난리는 어떻게 진행됩니까? 미리 알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닌 척 파고들어 핵심을 거칠게 끄집어내는 그에게 빈껍데기 뿐인 내숭을 내밀었다.

"글쎄요. 미리 알려드리면 재미없지 않나요?"

"제가 나서서 판을 더 키워드리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세크네트는 당연히 유연하게 그것을 넘겼다.

"호오. 그건 좀 끌리는 걸요. 그럼, 알려드릴게요. 저는 프리드리히의 열등감을 건드려 형 에셀레드 스카일러를 몰아내려 하게 만드는 중이에요. 그가 그 일에 신경을 쏟는 동안, 저는 불씨에 기름을 부어보려 해요."

"목적은 스카일러 가문의 몰락입니까?"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개국공신 가문을 개인의 힘으로 뿌리까지 뽑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요. 하지만 당분간은 머리를 못 들게 밟아둘 수는 있죠."

"굳이 스카일러를 그렇게 만들어야 할 이유는요?"

"나인하트와 거래를 했어요."

"야야, 라니아. 너 너무 막 털어놓는데. 너도 자제하지 그러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샤카르가 급히 막아섰으나 나는 손을 부채처럼 가볍게 저었다.

"이 정보의 누설로 인해 제가 받게 될 손해는 곧 루 할레시온 가의 손해고, 또한 로엔세르 가의 손해예요. 로엔세르 출신인 제 어머니의 존재 때문이죠. 혈연이란 그런 거예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샤카르의 누나 셰카이나는 수 년 전 이 시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혈연을 맺기 위해 세크네트에게 찾아갔다. 샤카르에게 이보다 더 좋은 예는 없겠지. 그는 끙 소리를 내더니 못내 불안한 듯 주절거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 거야. 특히 매형 같은 사람은 말이지, 극단적인 패도 손에서 끝까지 안 놓는다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 평하는 처남도 조심해야 할 사람에 속하지 않나? 대공녀님, 그냥 저희 같은 놈들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십쇼.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저흴 쫓아내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래서 나인하트와는 무슨 거래를 하셨길래요?"

"저와 황태손의 편이 되라고 요구했어요. 더불어 약혼 파기에 찬성하는 것도요. 그 대가로 저는 현 정계의 중심인 스카일러 후작가를 흔들어 그 사이 나인하트 공작가가 주도권을 휘어잡게끔 돕기로 했어요."

즉석에서 거래한 내역 치고는 상당히 조리 있고 괜찮았다. 나인하트가 틀어쥔 권력은 황태손의 뒷배가 될 것이고, 황태손의 영향력은 내가 써먹기에 좋다. 결국 서로 이기는, 윈윈 거래였다. 라인하르트가 우려했듯, 나와 헤일렌 나인하트 공작 둘 다 거래 조건을 잘 수행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하지만.

"그래서, 스카일러 후작가를 위한 기름 붓기는 어떻게 하실런지? 특정한 경로를 정해 두셨습니까?"

"네. 혹시 절 도와주실 생각이시라면 환영해요."

"못할 건 없습니다. 혈연으로 이어진 외사촌께 제 힘을 보태드려야 마땅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대공녀님?"

적으로 두면 심히 위험한 자들 중 하나답게, 그는 말을 잘 알아들었다. 로엔세르가 약혼 파기에 관한 안건에서 친척의 손을 들어준 시점부터 이미 중립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은 증발했다. 입장을 정했으니 이제 남은 건 운명공동체끼리 잘 살아남는 것 뿐이지.

나는 흔쾌히 말했다.

"영식께서는 샤카르와 함께 소문을 퍼뜨려주세요."

이제 원작을 십분 활용할 시간이다.

"스카일러 후작의 두 아들이 그를 살해하고 은폐했다고."

***

비가 며칠째 멈추지 않고 내린다. 루 할레시온 가의 저택에 놀러왔다가 발이 묶인 샤카르는 결국 응접실에 눌러앉았다.

우리는 따뜻한 핫초코와 녹차를 마셨다. 맛있었다. 평화로웠고. 둥그런 벽을 전부 차지한 창문 너머 보이는 물빛 정원은 아름다웠다. 일 층의 응접실은 고즈넉했고, 적당히 서늘했다.

아이린이 요즘 공식 석상에 나타나질 않았다. 하녀 마리를 통해 몇 다리 건너들은 바로는 에네아스 백작이 그녀를 저택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는데. 설마 나대다가 들킨 건가, 라고 작게 말하자 샤카르가 수긍했다.

"맞아. 때마침 에단 녀석이 그 얘기를 하더라. 에둘러 표현하긴 했는데, 아이린이 저번에 에단과 프리드리히에게 도움을 청했던 게 에네아스 백작에게 걸려서 곤경에 처한 모양이야."

"대체 뭐라고 하면서 도움을 청했길래 백작이 그렇게까지 반응을 하죠? 세이잔을 멸문시킨 가문이 에네아스인 것 같다고 생각 없이 다 털어놓았대요?"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그런 바보짓을 할까. 아이린 영애도 어쨌든 태생부터 귀족이잖냐. 다만 그 여자가 도와달랍시고 찾아간 게 하나같이 머리 잘 굴러가는 작자들이라 그런 거지."

개떡같이 말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먹었나 보군. 하긴 에단조차도 순진하지만 추리력은 좋았다. 어릴 적에 두뇌 게임을 하면 그와 같은 팀이 되려고 모두들 눈을 빛냈을 정도니까. 내 속을 종종 읽어대는 얍삽한 프리드리히야 말할 것도 없고.

"둘 중 누군가가 아이린이 품은 의심을 에네아스 백작에게 고발한 거군요. 일종의 배신인가."

"정답."

샤카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경쾌한 소리가 났다. 나는 뚱하게 중얼였다.

"프리드리히 스카일러가 또 일을 쳤나 보네요."

보나마나 범인은 프리드리히다. 에단은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 이를테면 사랑과 평화로 가득한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이라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샤카르 앞에서 아이린을 좋아하는 티도 냈는데, 용의선상에 오를 수가 없지.

"스카일러와 에네아스는 오랜 동맹 관계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아무튼 그건 끝난 일이고, 오늘은 네가 저번에 맡겼던 걸 할 차례야."

"내가 당신에게 맡긴 건 두 개였어요. 에네아스 백작가에 대한 조사, 그리고 스카일러 후작가에 관한 소문 퍼트리기. 그 중 뭔가요?"

"둘 다. 조사는 얼마 전에 영 수상쩍은 실마리가 하나 나와서 심층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중인데, 이게 좀 많이 민감한 주제여서 나도 파는 게 조심스러워. 그만큼 진도가 느리고."

"어떤 거길래요?"

"너는 황실 비사록,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비밀들'이 꼭 진실만 담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는 책이다. 언젠가 내 서재에 제멋대로 들어갔을 때 함께 봤나 보다.

"음......세간에 밝히지 못할 진실을 적으려는 의도로 만든 비사록마저 거짓이면 대체 뭐가 진실일까 싶으면서도, 황족만은 마음껏 열람하도록 허가된 도서라면 거꾸로 생각해서 황족에게 가짜 지식을 주입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몰라 유심히 보기는 해요."

"그렇지? 나도 영 찜찜한 소리를 누구한테 듣고 나서부터는 그거 내용을 곧이곧대로 못 받아들이겠더라고. 더 자세한 건 확실한 단서가 나오면 말해줄게. 지금은 한 명이라도 덜 아는 게 좋을 것 같다."

"위험한 거예요?"

순간 걱정이 돼서 표정을 굳히며 묻자 샤카르가 싱글싱글 웃으며 소년처럼 대꾸했다.

"내 기준에선 박진감 넘치고 재밌던데."

"뭔 헛소리예요."

"헛소리 아냐. 진짜 재밌다니까?"

순간 화가 확 치밀었다. 이런 대책 없는 작자를 봤나. 막말을 입속에서 굴리며 뱉을지 말지 고민까지 하다가 겨우 삼켰다. 대신 눈을 날카롭게 치뜨고 성을 냈다.

"사람들이 당신을 일컬어 뭐라는 줄 알아요? 되는대로 막 사는 자유로운 영혼인데 그걸 수습해 줄 머리가 돼서 여태 살아있는 거래요. 그럼 당신이 발견한 '그 찜찜한 것'은 들으나마나 위험한 거겠죠. 그거, 하지 마요."

"거 깐깐하기는. 내 한 몸 내가 알아서 잘 챙기면서 할 테니까, 너는 프리드리히 그 뱀 같은 놈이나 좀 물먹여 봐라."

나는 그의 탁 트인 성격이 오늘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됐으니까 그만하라고요."

"뭐야, 이번엔 갑자기 예민해지네?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네가 들은 말마따나 난 머리가 좋아서 쉽게 안 죽어."

"단정짓지 마요. 그 안일함이 당신 목을 죄는 날이 안 올 거라는 확신도 버려요. 내가 도와달랬지 언제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오라고 했어요? 그러다 잘못되면 그 타격은 어떻게 감당할 건데요!"

무엇보다도 무서운 건 그가 날 돕다가 죽거나, 내가 그를 돕다가 죽는 거였다. 나는 차라리 둘 다 살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의미 있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샤카르는 모르는 걸까.

"알았다, 알았어. 네 표정 보니 더 개기다간 오랜만에 명치에 주먹이 날아오겠다. 그 건은 보류해둘 테니까 진정하고 주먹 펴."

내가 씩씩대며 꽉 쥔 주먹을 그가 손바닥으로 덮었다. 저 인간, 끝까지 유유자적이야. 진짜 때릴 뻔했어. 자기가 불사신도 아니면서. 그 와중에도 내 말은 듣겠다고 한 게 참 다행이었다. 나는 이를 빠드득 갈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누가 보면 과민반응이라며 이상한 눈으로 볼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나 스스로도 그건 안다. 하지만 불안한 걸 어떡해.

결국 샤카르가 싹싹 비는 척까지 하며 사과하고 나서야 내가 부탁했던 다른 것, 소문 퍼뜨리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그는 내 눈치를 슬쩍 보고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소문은 매형이랑 내가 각자의 능력껏 떡밥을 뿌려뒀어. 레테일 영식이 말하길 네가 구상한 작전이 최선에 가까운 축에 들긴 한다는데, 불안하니까 뭐라도 방패 하나는 세워두란다."

나는 멀리 돌아갈 필요 없이 직통으로 정보국에 투서를 꽂아넣겠다고 말했었다. 레테일은 그에 따른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그건 이미 세워뒀죠. 어제 사현이 왔다 갔어요."

"사현? 네가 저번에 알려줬던 그, 황후 폐하를 호위하는 오십현 말이야?"

"네. 제가 괜히 황궁을 지키는 검과 친분을 쌓아뒀겠어요? 바로 이럴 때 쓰려고 만든 인맥이죠. 오십현은 타인에게 들키지 않고 어느 곳이든 들락거릴 수 있고, 은밀한 동시에 확고한 신분을 가지고 있어요. 게다가 나를 주군이라 부르며 절대 충성하니, 사현을 대신 움직여 원하는 걸 뽑아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아요."

사현, 헬렌 바세야프는 어제 저녁에 홀연히 활터 구석에 나타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헤어지던 날 내게 몰래 알려준 연락수단 덕에 바로 불러냈다. 마리를 따돌리고 오느라 약간 늦은 나는 어둠에서 솟아나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명령했다.

'일어나, 헬렌.'

나도, 헬렌도, 심지어는 습하고 서늘한 밤공기마저도 어조가 차갑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그러나 헬렌은 한결같은 무표정이었다. 나는 그 무감정함에 힘입어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주군의 명이라면 언제든 따르겠습니다.'

'스카일러 백작가와 연관된 평민 중 하나를 매수해 이 종이에 적힌 내용을 정보국에 고발하게 해. 그 저택의 하인 출신이면 더 좋아. 대신 아무것도, 네 정체마저도 밝혀져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주군의 명을 따릅니다.'

헬렌은 내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고 신기루처럼 감쪽같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런 의문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많이 궁금하고 또 실망스러웠겠지.

"음, 괜찮네. 만약 잘못되더라도 사현의 현재 주군인 네피아 황후 폐하부터 의심받을 테니까. 간단하게 마침표 잘 찍었구만."

손바닥 부분만 덮는 모양의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대뜸 볼가에 와닿았다. 무심한 척 팔을 뻗어 소심하게 닿을락 말락 볼을 감싸는 손을 눈동자만 돌려 바라보았다. 뭐라고 퉁명스레 대꾸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 안 나와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샤카르는 속상한 듯이 이어 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어떤데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냐......굳이 표현하자면, 내 조카 에리카 로엔세르가 자기 장난감을 손에서 놓쳤을 때의 반응이랑 똑같아."

"그 아이가 울었나요? 하지만 저는 울고 있지 않잖아요."

"......"

착잡한 사람처럼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볼에 댔던 손을 옮겨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기껏 정돈한 머리카락이 다시 부스스해졌지만 딱히 제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울지 마라, 좀."

손을 거두며 또 엉뚱한 소리를 하길래 슥 흘겨보았다.

"안 운다니까요?"

"그랬으면 좋겠다."

"또 해석 안 되는 말이군요."

"......계속 몰라도 돼."

"조만간 통역사라도 한 명 불러야겠어요. 요새 들어 당신이 하는 말 중에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비중이 좀 줄었다고요. 내가......"

일상적인 어투로 술술 말하다 슬쩍 내 옆쪽의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다음 단어를 발음하지 못했다.

저게 뭐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얼굴에서 핏기와 표정이 함께 빠져나갔다. 땅속에 갇힌 것마냥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창문까지 튄 검붉은 핏자국이 세찬 빗물에 희석되며 씻겨내려갔다. 정원에 심어진 어느 나무 앞에 미동도 없이 선 검은 사신은 붉은 물이 흐르는 칼을 들었다. 그의 앞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덩어리 두엇이 비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닥 먼 거리가 아니라서 어디가 어떻게 베였는지까지 한눈에 파악이 됐다. 저 정도면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끔찍하고 고요한 살인 현장이었다.

"라니아."

샤카르가 다급한 나머지 이름만 겨우 부르며 내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늦었다. 나는 삽시간에 새파랗게 질려 입술을 잘게 떨었다.

피해자는 누군지 모를 자였다. 그리고 가해자는 헬렌 바세야프, 사현이었다.

아니, 아니지. 내가 피해자고, 쓰러진 자들이 가해자다.

나는 눈이 가려지기 직전 헬렌이 더없이 냉혹한 눈으로 시신을 확인하는 것을 똑똑히 목도했다.

검은 옷자락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검붉었다.

피가, 피가 흥건했다. 정원에 이질적인 색이 덮여 적막하게 선뜩했다.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도 피를 흘리며 칼에 베여 죽었다.

윤이설의 엄마 윤하린도 피를 쏟으며 죽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인상을 쓰며 옷의 목 부분을 움켜쥐었지만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나는 순간 공포에 질려, 잇새로 말인지 무엇일지 모를 짐승의 낑낑거림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샤카르가 아예 가까이 다가와 나를 꽉 감싸안으며 이를 부득 갈았다.

"괜찮아. 괜찮아, 라니아. 사현이 자객을 처리한 것 같다."

자객이 샤카르와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 작품 후기 ============================

자정에 분명 올리고 잤는데 일어나보니 업뎃이 안 되어 있네요...다시 올립니다. 8챕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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