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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49화 (49/102)

00049 8. 폭풍우 =========================

사방에서 번개가 쳤다. 폭풍이 더욱 몰아친 탓이다.

샤카르가 하인을 소리쳐 불렀다. 창 밖의 광경을 보고 기함하며 자빠진 하인 한 명을 시작으로 곧 여기저기서 사태를 파악한 집안 사람들이 정원으로 와글와글 몰려들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정원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샤카르는 힘이 풀린 내가 걷기 힘들다는 걸 확인하고 안아들었다. 일단 그는 살아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짤막하게나마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나는 경황없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샤카르가 달래듯 말했다.

"괜찮다니까. 그 자객들,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사현이 심문용으로 일부러 살려둔 것 같다. 어쨌든 확실히 제압됐으니 안심해."

"......알, 아요. 나도, 아는데.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떠올리자마자,"

"됐다, 됐어. 다 꺼져가는 목소리 하나도 못 알아듣겠으니까 그냥 숨이나 골라."

"......"

그는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갔다.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 쓴 양 끔찍한 기분이었다. 검투 경기를 볼 때와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나는 샤카르에게 안겨 옮겨지는 짧은 시간에 반쯤 고장난 머리를 억지로 썼고, 두서없는 말을 내놓았다.

"샤카르, 당신은 안 무서워요? 이제 그만 도망가고 싶지 않아요?"

"그건 왜 묻냐."

나지막하게 깔린 음성이 돌아왔다. 힘을 풀고 그에게 머리를 기대고 있어서 소리의 울림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심장소리와 얽혀서.

"궁금해서요."

"별 걸 다 궁금해한다."

"얼른 대답해줘요."

"무섭지, 당연히."

"그런데 왜 괜찮은 척해요?"

다음 박자는 쉼표였다. 몇 박자고 더 흘려보낸 샤카르가 문을 열고 들어가 나를 눕히며 작게 얘기했다.

"뭐, 그냥. 널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자체로 좀 진정이 됐다. 투박한 손이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무섭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새벽이 사라진 방에는 수수께끼만이 덩그러니 남아 나를 심란하게 했다.

나는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중에 좀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 일레인에게 듣기로 샤카르가 앞장서서 뒷수습을 했다고 한다. 대공은 사현과 나의 친분이 들키는 것을 막기 위해 마침 저택에 놀러왔던 샤카르가 자객을 처리한 것으로 해두었다. 그동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들을 꼬박꼬박 부모님과 논의해둬서인지 그 정도 대처는 무리없이 해내더라.

얼추 이성이 돌아온 늦저녁에, 헬렌이 내 앞에 조심스레 나타났다. 헬렌은 자신이 저지한 자객들이 나를 노릴 경로를 탐색할 요량으로 저택에 잠복 중이었을 거라고 예상했다. 자객들은 타겟이 황궁에 사는 자가 아닐 경우에 밤에 바로 들이닥치는 것보다는 미리 들어와서 대기하며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방법을 고르기도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괜찮으십니까?"

"조금 놀랐을 뿐이야."

"사안이 시급해 주군께서 살육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자객을 처리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주군께서 원하시는 만큼 제게 벌을 주십시오."

"내 목숨을 구했는데 벌을 내린다면 아무도 나를 지키려 하지 않겠지. 나는 헬렌에게 그저 감사를 표하고 싶어. 그런데, 왜 그 시각에 저택 안으로 들어왔는지 물어봐도 될까."

목소리에 힘은 없어도 나름 견딜 만했다. 일레인은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며 의사를 데려왔지만 말이다. 사현은 푹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며 보고했다.

"스카일러 후작가의 하인이었으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겼던 자를 매수해 정보국에 스카일러를 고발하게 했습니다."

"그걸 보고하러 왔었구나."

"서신 전달도 고려해 보았으나 사적인 감정에 의해 직접 움직였습니다. 이 또한 송구합니다."

"죄송하단 말은 그만. 그럼 현재 상황은 어떠하지?"

"정보국에서 사안을 접수했고 현재 수사중에 있습니다. 때마침 그 사실이 새어나갔는지 오늘 오후부터 상당한 수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고 합니다."

소문은 샤카르와 세크네트 쌍둥이가 약간 손을 써서 더 빨리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정보국의 사건 접수 내역이 새어나가게 한 건 알피어스 하시펜도를 이용한 내 짓이다. 그는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간부급의 인물이거든.

사현은 혹여나 들킬까 싶어 말을 마치고 재빨리 떠났다. 자정도 훌쩍 넘은 시각이기에, 나는 얼른 씻고 자기로 했다. 오늘 밤에는 필시 악몽을 꿀 것이고, 아침이 다 가서야 겨우 낑낑대며 눈을 뜨고 이불과 씨름하겠지.

욕조에 들어가 수면에 뜬 장미 꽃잎이나 휘적였다. 물이 따뜻해서 목욕 가운만 살짝 걸치고도 바로 옆에 있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약한 한기 외에는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수증기에 뽀얗게 잠긴 욕실은 훈훈한 오렌지빛 인테리어와 멋들어진 장식들 덕에 그냥 생활용 방 같았다. 물 밖으로 머리만 빼꼼 내밀고 금으로 장식된 나뭇가지 모양의 조명이 달린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용하고 차분한 공간이었다. 곧 시야가 흐려지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전개됐다.

오늘 저택에 벌레처럼 숨어들었던 자객들은 누가 보낸 것인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이 사건도 내일 아침 쯤이면 스카일러 후작가 관련 사건처럼 공론화될 테니 진범은 좀 찔리겠지. 이참에 스카일러가 의심받으면 더 좋고.

그들이 연타를 얻어맞을 확률이 높아지도록 내게 오는 초대장 중 하나 정도를 골라 참석하겠다고 해야겠다. 피해자인 내가 직접 입을 놀리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할 테니.

찰박. 반쯤 누워있었더니 불편해서 자세를 바꿨다. 물이 결을 만들어내며 출렁였다.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가 음산했다. 눈길을 옮긴 창문에는 밤이 덮인 바깥 풍경 대신 내 얼굴이 비쳤다.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이다. 빛이 바랜 듯 여린 금발에, 루비처럼 빨간 눈. 갸름한 턱선과 오똑한 코, 매끄럽고 생기가 도는 피부. 가히 최고의 미인이라 칭해도 될 미모였다. 소설 속 세계라는 특성상 할레시온에 미인은 차고 넘치지만 지금껏 본 여자 중에서는 라니아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찌되었든 이십 년 전부터는 이게 내 얼굴이다. 지금 윤이설일 시절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오히려 그게 어색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만큼 익숙해진 탓인가?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프리드리히와 에단, 샤카르와 라니아, 라인하르트와 아이린. 소설 속 인물들의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막을 방도가 없거나,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줄거리라고 해도 최소한의 자각은 했어야 하는데. 피할 건 피하고, 휘둘리지 않으려 했는데. 그러려고 많은 애를 썼다고 자신했는데. 어리석은 단정이었다.

나는 라인하르트를 증오하겠다고 결심했으면서 더 모질게 굴지 못했다. 이용한다는 구실로 그와 조우해 독설을 퍼부었고, 그만큼 나도 상처를 얻었다. 서로에게 감정을 토로해 그와 나를 양 극단으로 내몬 원인을 감히 건드려 싸웠다. 그리고 둘 다 속으로만 울었다.

에단을 밀어내기로 작정해 놓고서 다시 손을 내밀어버렸고.

프리드리히를 없는 사람으로 여기려 했지만 어느새 나는 그와 정면으로 대립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더러운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으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정신을 차려 보니 폭풍우가 몰아치는 냉혹한 여름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 뜻대로 된 일이 거의 없었다.

이번 생만큼은 후회 없게, 나만 잘 살아보려 했었다. 철저한 이기주의에 물들어서라도 행복하게, 화려하게,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르쉬네는 나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달라고 부탁했고, 라인하르트는 한때 나를 믿었다. 원래 내게는 많은 친구도 있었다. 삶이 좋아졌었다. 처음으로.

그러나 행복한 순간이 있기에 불행한 순간이 도래하면 더욱 아프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은 감당하기 벅찰 텐데. 어떡하면 좋지? 목이 메였다.

두려움이 찾아왔다.

어쩌면 나는 피와 칼보다는 그것이 상징하는 죽음을, 죽음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슬픔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종소리와 칼을 싫어하는 것도 그 맥락이었던 거다.

희생에 몸서리치는 것마저도. 그랬다. 무심결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울어버릴까봐.

"샤카르."

내가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

- 피해자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 대공녀의 심문 참관을 허가합니다.

사현이 일부러 살려둔 자객 한 명의 심문에 참석하게 해 달라고 청원을 넣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는 사건 발생 일주일 후에야 얼추 충격을 회복한 척하며 여러 파티 초대에 선택적으로 응했다. 암살 위협을 당했던 일만이 내게 다가온 자들과의 대화 주제였다. 자연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고, 정보국에서는 수사를 결코 설렁설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오후 두 시 즈음, 나는 집 밖으로 나섰다. 일레인과 셀리아가 배웅해 주었다.

"힘들지는 않겠니?"

"날 죽이려 했던 자가 엉망인 몰골을 하고 있는 걸 보는 게 왜 힘들겠어요. 통쾌하면 또 모를까."

"라니아......"

"걱정 마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언니, 얼른 갔다 와서 나랑 피아노 치자!"

"그래, 셀리아. 먼저 수업 받고 있어."

"응. 알았어."

나는 셀리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고 일레인에게 목례한 후 길을 나섰다.

잠시 물러간 비구름 덕에 날씨는 모처럼만에 쾌청했다. 무더운 여름의 햇볕을 피하려 흰색 양산을 비스듬히 어깨에 걸쳤다.

빌데론 거리 중간의 원형 광장에서 다섯 시 방향으로 난 길로 쭉 가면 정보국이 나온다. 정보국은 제국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수사하고, 첩자나 정보원을 파견해 국내외의 정세를 알아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요즘에는 스카일러 후작 관련 사건과 내 암살미수 사건을 조사하느라 바쁜 부서지.

스카일러 후작 살해 의혹이 불거지자 정보국은 후작이 머물고 있다는 별장에 찾아갔다. 조사원들은 후작이 깊이 잠들었다며 방문을 거절하려는 저택 하인 몇 명의 방해를 뚫고 내부를 샅샅이 뒤진 끝에 후작을 찾아냈다. 그는 깊이 잠들다 못해 숨이 꺼져버린 지 오래인, 시체였다.

설마 했던 것이 실제가 되자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귀족을 대상으로 한 엄격한 처벌은 제정되어 있지 않은 제국법에 의거하여, 재판보다는 바닥으로 떨어질 평판과 귀족 사회에서의 도태가 스카일러 후작가의 두 영식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였다.

정보국은 빠르게 움직였다. 어제 프리드리히와 그의 형 에셀레드가 정보국으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유치장 비슷한 장소에서 밤을 보냈다. 정식 구속은 아니고, 조사가 너무 길어져 일단 딴 짓 못하게 격리된 곳에 머물게 한 것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입구에서 제복을 차려입은 요원 두 명이 용건을 물었다. 귀찮아서 간결하게 내 이름만 말했다.

"라니아 에빌 루 할레시온이다."

"심문 참관을 위해 오셨군요. 들어오십시오."

그들은 용케 잘 알아듣고 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황족 이름값이 유용할 때는 이런 경우뿐인 것 같다.

안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딱히 할 게 없어 생각을 펼쳤다.

'꽃물 든 하늘'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제 아버지를 살해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그 죄명을 형 에셀레드에게 씌우기까지 했지만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빈 후작 자리에 자신이 앉았다. 여주인공 아이린을 이용하려 접근했다가 도리어 사랑에 빠져버린 지 오래인 그는, 그렇게 손에 쥔 권력과 타고난 명석함을 써서 아이린이 사랑하는 황태손을 제거하려 하기에 이른다. 사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던 자는 뒤틀린 애정에 휩싸여 결국 남주인공을 치우고 여주인공의 마음을 제게로 돌리려는 어리석은 짓을 벌이고 말았다.

원작의 프리드리히는 명불허전 쓰레기였다. 현재의 프리드리히 역시 그렇다. 내가 이 세계에 끼어들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형의 그늘에 가려진 둘째고, 따라서 결핍에 의한 갈망과 권력을 향한 야망이 여전하지 않은가. 이건 내가 건들지 않은 부분이어서 딱히 바뀌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도 혹시 몰라서 라인하르트를 통해 신경을 긁어, 초조함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게 만들기까지 했지.

그렇기에 나는 원래대로라면 아무도 몰라야 할 프리드리히의 범행을 고발했고, 정보국의 수사는 내 확신에 쐐기를 박았다. 만약 그가 원작처럼 에셀레드를 범인으로 몰고 자기만 쏙 빠져나간대도 별 상관은 없다. 이미 스카일러 후작가 자체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된 뒤일 테니까. 그 틈을 타고 나인하트 공작가나 다른 반황태자 파의 가문이 치고 올라올 것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자파 전체에게 한 방 먹인 셈이 되는 거지.

다만 최근에 한 행동을 볼 때 아이린과의 감정선은 망한 것 같다.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접근한 여자를 짝사랑하게 된다는 건 진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였나 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식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라인하르트가 극단적인 선택지를 내민 건 사실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었다. 안 그러면 내가 죽게 생겼으니까. 하지만 내 감정은 현재까지 그 선택을 거부하고 있다.

나는 앞뒤 꽉 막힌 미로를 걷는 중이다.

"도착했습니다. 지하에서 심문 중입니다만, 대공녀께서 보시기에 썩 비위 좋은 광경이 아닙니다. 정말 들어가시겠습니까?"

요원이 벽돌로 쌓은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춰 내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나는 저번의 일로 내가 혐오하는 정확한 대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내 비위가 일반인에 비해 강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계단을 내려가자 기분 나쁜 냄새가 코를 찔러서, 지니고 다니는 손수건을 마스크 대용으로 삼았다. 횃불로 밝혀진 내부로 완전히 들어선 나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라니아 대공녀? 왜 이런 곳에서......"

============================ 작품 후기 ============================

예약아이템으로 올립니다. 3시간 후 자정에 한 편 더 예약 걸어두었어요. 독자님들 모두 좋은 연휴 보내세요!

Habika 님 오타 수정과 비문 수정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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