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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50화 (50/102)

00050 8. 폭풍우 =========================

기사단복을 차려입은 에단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아, 에단. 그간 잘 지냈나요? 대회에서 생긴 상처는 좀 어때요?"

나는 발음이 뭉개지지 않도록 손수건을 조금 떼고 그에게 인사했다. 그걸 발견한 에단은 금세 표정을 굳히고 다가와 잔소리했다.

"상처는 잘 낫고 있습니다만......아니, 비위 약하신 분이 여길 오시면 어떡합니까. 돌아가십시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혹시 몰라서 그냥 대고 있는 거예요. 오늘은 볼 일이 있어 잠시 방문한 거니까, 용건이 끝나면 바로 나가도록 하죠."

"용건이라면......설마 대공녀를 해하려 한 놈을 보려고 오신 겁니까?"

"맞아요."

"그럼 더더욱 돌아가십시오. 굳이 그딴 버러지를 만나실 필요 없잖습니까."

성을 내는 에단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난데없는 웃음에 그는 영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손사래쳤다.

"미안해요. 사용하는 단어가 많이 바뀐 게 재밌어서 그만."

저번에 검투 경기에서도 그러더니 오늘도 그답지 않게 험한 말을 쓴다. 물론 샤카르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에단의 기준에서 '놈'이니 '버러지'니 하는 말들은 강도 높은 욕설이었다.

"아......멘데로프 영식이 하도 비속어를 많이 쓰셔서 그만 저도 물들었나 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 인간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에단. 그러다가 한량 기질까지 닮아버리면 어쩌려고요."

"하하, 음. 그 분과 저는 둘도 없는 술친구라서......이미 안 친하기는 그른 것 같습니다."

"두 사람 틈만 나면 같이 술을 마신댔죠, 참."

"큼. 그렇다고 매일 마시는 건 아닙니다."

"알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대화 주제를 순식간에 바꿔놓은 나는 에단이 멋쩍어하는 사이 쌩하니 내 갈 길을 갔다. 이 복도 끝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틀면 심문실이랬나. 천연덕스런 내 행동에 당황한 에단이 졸졸 쫓아왔다.

"가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별로 유쾌한 광경도 아니고, 자칫하면 위험할 수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만 살짝 돌렸다.

"에단, 저는 자객의 배후를 빨리 알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정말로 위험해지거든요. 적이 누군지 알아야 뭔가 조치를 취하죠."

"그, 그렇지만."

"정 안되겠다 싶으면 저와 함께 가 주세요."

에단이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침침한 복도 벽 곳곳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내 양옆의 철창 안에는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줄줄이 이어진 횃불을 따라 걷는 동안 그에게 물었다.

"에단은 이 시각에 여기 웬일인가요?"

그는 덤덤하게 답했다.

"3기사단에서 첩자가 나왔습니다. 타국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여기 연금되어 있다고 해서 보러 왔습니다."

에단은 자기 휘하의 부하를 상당히 아낀다. 어린 나이에 기사단 일을 시작하며 겪어온 힘든 시간을 부하들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잘 챙겨주지 않을 수가 없다더라. 그런데 그 중에 첩자가 있었음이 밝혀졌다니. 애국심 투철한 에단은 첩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안타까워할지 몰라도.

"화가 났겠군요."

"아니요. 슬픕니다."

"......그런가요."

"네."

그는 어떤 문을 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에단을 뒤따랐다.

요원 몇몇이 한창 자객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온몸이 상처와 피로 뒤덮힌 자객은 축 늘어져 꼭 시체 같았다. 우리를 발견한 요원들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나는 그들의 인사를 대강 받아주고 질문했다.

"이 자인가?"

"네, 대공녀님."

"알아낸 것은?"

"송구하오나 이 자가 아직 이렇다 할 진술을 하지 않습니다."

의자에 축 늘어진 몸뚱이를 흘긋 쳐다보았다. 차갑게 말했다.

"저 지경이 되었는데도?"

"독한 놈입니다.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아서, 고문 강도만 점점 높이고 있습니다."

"저 자 이름은 뭐라던가."

"예? 아, 예. 53번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숫자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웃 국가 블로텔지아에는 고아를 거두어 전문 암살자로 키우는 길드가 몇 있는데, 지닌 도구나 의복, 그리고 이름을 보아 그쪽 출신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사오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블로텔지아의 길드는 나도 안다. 옛 스승 로제가 이야기해 줬거든. 그 길드들은 수많은 구성원에게 이름을 붙여주기 성가시다는 이유로 들어온 순서대로 이름 삼는 관습을 가졌다.

그런데 외국에서 온 자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난 할레시온 이외의 국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즉 국내의 누군가가 해외의 연줄을 동원했다는 게 된다. 하지만 블로텔지아와 연관된 귀족 가문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할레시온은 정복 전쟁의 시대 이후 블로텔지아와 일체 교류하지 않는다. 제한적인 상품 무역만 가끔 할 뿐이다. 북부에 위치한 블로텔지아의 지리적 특성상, 대륙 중부를 싸그리 차지한 할레시온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수십 년이 지나면 고립으로 인해 썩기 시작하니까. 할레시온은 그걸 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교류를 막아왔다.

그럼 누군가 그 벽을 몰래 뚫고 손을 내민 걸까? 고작 나 하나를 죽이겠답시고?

뭔가 이상하다.

요원들에게 고문으로 인해 기절 상태인 자객을 깨워달라 부탁했다. 물 한 바가지를 맞은 자객이 콜록대며 눈을 떴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53번."

"헉, 헉......너, 너는. 내, 암살 대상......컥!"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저따위라니 유감이다. 에단이 인상을 팍 쓰고 53번을 한 대 쳤다. 정말 좀 달라졌네, 에단. 아이린 때문에 성격에 변화가 왔나. 일단은 손수건을 내던지고 그를 뜯어말렸다.

"에단, 그러다 죽이면 안 되니까 그쯤 해둬요."

"친우를 죽이려던 자를 가만 두고 볼 순 없잖습니까!"

"제 몫은 남겨주시죠. 에단만 혼자 다 응징하고 끝내버릴 건가요?"

가쁜 숨을 내쉬며 가만히 듣고 있던 53번이 흥 코웃음을 쳤다.

"유치하게 싸우지 말고, 그냥 아무나 날 죽여라."

아, 진짜. 이러다 에단이 눈 돌아가면 쟨 끝장이라고. 짜증스럽게 자객을 쳐다보며 부들부들 떠는 에단의 주먹이 다시금 내질러지려는 것을 손으로 막았다. 아무래도 괜히 데려온 것 같아. 그냥 따돌릴 걸.

"죽여달라 말하는 사람이 어째서 지금까지 자살을 안 했어? 배후 세력을 지키고 싶었다면 벌써 자살했어야지. 내가 알기로 전문 암살자들은 어금니 안쪽에 약 하나쯤은 기본으로 심어두고 다닌다는데, 넌 그거 없나 보네. 아니면 있으면서도 차마 못 죽겠나? 그래서 우리에게 비굴한 죽음을 구걸하는 거고?"

차분히 속을 긁었다. 자객은 이를 부드득 갈려다가 제 어금니에 자리잡은 죽음의 독을 내 덕에 상기했는지 순간 멈칫했다. 물론 독이 이갈기만으로 발동하게 심지는 않았겠지만, 사람 심리란 그런 거다. 모르고 살면 괜찮은데 문득 존재를 느끼면 두려워지지. 수면 아래의 적, 운명, 죽음 같은 것들이 대표적으로 사람을 이런 식으로 쥐고 흔든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경악한 자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코웃음쳤다.

"네 놈은 결국 무서워서 여태껏 살아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같잖은 소리는 그만하고 묻는 말에나 제대로 대답하지 그래? 네게 암살을 지시한 자가 누구야?"

상대가 내 심기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나와준다면 나 또한 똑같이 대응하는 게 상책이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자 상소리가 돌아왔다.

"제기랄! 네 년을 그 날 반드시 도륙냈어야 하는데."

옆에서 욕설을 듣고 또 길길이 날뛰는 에단을 요원들에게 지시해 막아세우며 나긋하게 맞받아쳤다.

"저런. 네 실력이 모자란 걸 어쩌겠어. 후회는 언제나 소용없는 짓이야, 53번."

"닥쳐라!"

"너나 닥치렴. 짐승보다 못한 살인 청부업자의 하수인 주제에 어딜 감히 제국의 황족에게 명령을 해?"

"하! 권좌에서 미끄러진 반쪽짜리 황족이 꼴에 신분을 내세우다니. 어이가 없군. 평판도 엉망이던데,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나?"

이 대목에서는 요원들마저 평정심을 잃었다. 황족 모독을 서슴치 않고 저지르는 자객을 어찌 처리할 거냐 묻는 그들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깐. '반쪽짜리 황족'? 블로텔지아의 일개 암살자가 오래 전 교류를 끊은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언급하다니, 놀라운데."

"가,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의뢰자가 알려줬나 보군. 그 외에도 입국 이후로 네 스스로 이것저것 주워듣고 다녔고. 어째 나 하나를 죽이려고 들어온 게 아닌 것 같단 말이지."

"......"

53번은 퉁퉁 부은 눈을 들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진득하니 선명한 살기가 나를 향했다. 그래 봤자지. 조금 틈을 두고 다시 냉막하게 어투를 바꾸어 물었다.

"두 번째로 묻겠다. 널 보낸 자가 누구지? 할레시온의 귀족 중 하나인가?"

"교류를 끊은 지 오래인 나라의 길드가 어떻게 제국의 귀족에게 의뢰를 받겠나?"

"안될 건 없지. 어떻게든 길을 뚫었다면."

심드렁히 대꾸한 나는 무어라 성을 내는 자객을 말끔히 무시하며 에단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놈을 이만큼 말하게 했으면 충분하냐고 물은 것이었다. 요원들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흡족하게 53번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마무리에 착수했다.

"53번. 만일 네가 끝까지 불지 않으면 무기징역을 받거나 최하급 노예가 될 거야.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지. 기대해. 비록 난 방계로 물러난 황족이지만 아는 황태손도 있고 친한 대귀족도 많거든. 그들에게 부탁하면 너 하나쯤 내 멋대로 하는 거야 어렵지 않을 걸. 단 자백을 한다면 자비를 베풀어 네가 원하는 조치를 취해주지. 기사단에 입단시키든, 너를 키워준 암살자 집단을 처부수고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든. 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은 알아서 해."

줄줄이 말을 뱉어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뒤돌며 에단에게 까딱 손짓했다. 이제 퇴장할 것이다. 아직까지 화나 있는 에단이 53번에게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고리에 손을 대려는 찰나, 예상치 못한 발언이 나왔다.

"......네 뒤에 선 기사가 배후라면 어쩔 셈이냐? 친분이 있어 보이던데."

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지. 열이 확 올라서 도로 자세를 돌렸다. 53번은 일반인이라면 상상조차 못할, 지독하리만치 우그러진 비웃음을 살벌하게 짓고 있었다. 그보다 가까이에 선 에단은 완전히 어이가 나간 얼굴이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가소로움을 가득 담아 마주 미소했다.

"이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소린가?"

"알다마다. 의뢰주인데 모를 리가 있나?"

"말해 봐."

"에단 르웰린. 르웰린 후작가의 후계. 그가 날 찾아와 네 숨을 거두라 말했다."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입꼬리가 약하게 경련했다.

억지에 가까운 말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의심은 작은 빌미로도 쉽게 싹을 틔우고,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남는 법이다. 나 같은 사람들은 특히나 더 조심해야 했다. 눈길이 저절로 에단을 향했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 미간을 구긴 그는 아주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박함이 엿보이는 그 태도에서 나는 진심을 읽었다. 아니다. 그 밖에 여러 상황을 고려해 봐도 에단은 아니야.

그럼 왜 하필 에단을 찍었는지를 캐내야겠다.

"거짓말 잘하네. 에단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아는 사람이야. 게다가 르웰린 후작 본인도, 그 집 하인도 아닌 에단이 왜 널 찾아가? 후계자는 작위를 가진 가주보다도 철저하게 몸을 사리는 건 모르고 내질렀구나. 하필 에단을 지목한 이유가 뭐지? 단순히 네 눈앞에 있고, 나와 친해 보여서? 내 선처를 받아 챙기려고 그냥 아무나 가리켰나? 아냐, 넌 뒷수습은 허술하지만 꽤 영악해."

"......"

"유사시에 에단, 그러니까 르웰린 후작가를 몰아가라는 지시가 있었나?"

"......"

더 이상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제국과의 교류가 거의 끊긴 블로텔지아의 길드원, 에단 르웰린의 얼굴과 5년 전의 그 사건을 아는 암살자. 르웰린 후작가를 대신 내세워도 괜찮은 그의 배후.

망할. 이게 뭐지?

============================ 작품 후기 ============================

이 정도야 뭐 일상이죠. 역시 평온한 일상물 악살다. (온화한 미소

+아 이건 그냥 잡담이긴 한데, 2장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요 캐릭터 외전도 자꾸 길어지고...(누군가의 외전이 벌써 3만자에 가까워졌다는 소식입니다ㅋㅋㅋ심지어 아직 넣어야 할 게 한참 남았는데! 일반 챕터보다 외전 하나가 훨씬 길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으아ㅏ아아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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