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8. 폭풍우 =========================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불빛이 간간히 발치를 밝히는 어두침침한 복도를 지나 다시 문 하나를 더 통과했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1층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나를 나선형 계단으로 안내했다. 맨 꼭대기 층인 5층까지 올라가느라 좀 힘들었다.
층을 오를수록 조직의 상층부 느낌이 확 났다. 이윽고 5층에 도착해 중앙 끝의 가장 화려한 방 앞에 섰다. 사내가 나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문을 똑똑 노크하고 말했다.
"라카스 님, 계십니까?"
"들어와라."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그, 저기 말입니다, 대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누가 왔다고?"
"나예요, 샤카르. 들어갈게요."
그가 얼떨떨하게 되묻는 소리를 듣자마자 사내 대신 대답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헉. 야, 잠깐만, 라니아!"
문 너머로 드러난 집무실 안의 광경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급하게 책상 위를 정리하며 손을 내젓는 샤카르였다. 그는 쌓인 서류를 무작정 쓸어담아 서랍에 욱여넣다가, 나와 눈을 마주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잘 지냈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일주일 넘게 못 만났었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뻔뻔하게 인사를 건넸다. 샤카르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툴툴댔다.
"못 말린다, 진짜. 너 원래 이렇게 저돌적인 사람이었어?"
"글쎄요. 그래서 잘 지냈냐니까요?"
"나야 늘상 잘 지내지. 그보다, 난 네가 더 걱정인데."
그는 엉망이 된 서류를 주섬주섬 마저 치우며 여상히 물었다. 대충 묶은 꽁지머리를 괜히 손으로 쑤석여 까치집을 짓고는, 다시 정돈하기 귀찮았는지 아예 머리끈을 풀었다.
"왜요?"
"그 난리가 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냐."
"그건 그렇죠. 하지만 걱정은 마요. 내 정신력은 꽤 쓸만하니까."
"역시 당당하구만. 맞다, 호위는? 황족 규율 때문에 사병 못 두지 않나."
갑작스런 생명의 위협에 놀란 나는 자객이 발각된 다음날 사현을 다시 불러 내 안위를 보장할 방법이 없겠느냐고 자문을 구했다. 헬렌이 말하길 각자의 호위 대상이 이미 있는 오십현은 안 되고, 고용한 사병 또한 규율에 걸리는 황족의 처지인지라 대처하기가 애매하단다. 그래서 일단은 그녀가 자주 저택에 들르는 것으로 임시방편을 세웠다. 바보가 아닌 이상 황실이 두 번 연속 같은 수법으로 내 간담을 서늘하게 하진 않을 것 같아서, 다른 수단을 찾을 때까지의 여유 시간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샤카르는 이걸 알려달라는 거다.
수십 개의 술병이 주르륵 전시된 찬장에 눈길을 주며 대답했다.
"일단은 사현이 좀 수고해주기로 했어요. 자기가 충성하는 황실이 저들끼리 목숨 갖고 싸우고 앉아있는 것에 많이 당황하더라고요. 그 틈에 슬쩍 부탁했더니 들어줬어요."
"네 손 위에서 놀아나는 그 오십현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고 싶다......"
"애초에 체스말로 쓰려고 가져온 건데 할 수 없죠."
"그것 참 엄청나게 너무한 말 아니냐. 헉, 혹시 나도 체스말 중 하나인 건가!"
뭐, 처음에는 얼추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그 때 내 태도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뭐래요. 아니니까 긴장 풀어요."
빠르고 단호한 대답으로 안심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잠시 손을 멈추었다. 한 박자 늦게 어색한 숨을 뱉고는 더욱 어색하게 말했다.
"음, 다행이네. 다행이야."
그는 끝에 가장 어색한 웃음까지 덧붙였다.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 임시방편을 믿을 거야?"
"몰라요. 아마, 다른 확실한 대책이 설 때까지?"
"흐음. 그건 좀 별론데. 정 그러면 나라도 순찰 돌까?"
"정보상 보스님은 얌전히 서류 처리나 하세요."
"아, 너무하네. 기껏 제안했더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을 들먹이냐."
"당신 같은 귀족이 제 집 앞을 온종일 어슬렁거리면 없던 의심도 살 걸요. 다른 정보상 일원들도 마찬가지예요."
"그건 그렇네......너 어떡하냐. 진짜 괜찮겠어?"
"모른다니까요. 슬슬 지치네요, 저도. 사실 전 이게 살아있는 건지 헷갈리는 삶을 사는 중이라서요."
지금 죽으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되지는 않을까? 저번에도 그랬잖아. 나는 전생에 겪은 경험 때문에 이런 식의 생각을 항상 기본으로 행동 전제에 깔곤 한다. 꽤 오랫동안 딱히 유의미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살고 나니 이젠 이게 진짜 삶인지 아리송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내 앞에서 움직이는 이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잠시 망상 속에 잠겨 꿈을 꾸는 거라고 여기기 일쑤였다.
"아이고. 뭐라 위로해줘야 하나, 우리 에빌이."
이런 내 망가진 사고를 훤히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대강인 듯 세심하게 말했다. 뒤에 붙은 호칭이 오글거려서 괜히 태클을 걸었다.
"아, 진짜. 내가 그런 닭살돋는 말 지껄이지 말라고 분명 작년부터 강조해왔는데, 머리 좋은 사람이 그거 하나 못 따라줘요?"
"알았다, 알았어. 방금 그 말 취소. 하여튼 깐깐하다니까."
하지만 툴툴대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 살짝 미안한 감정이 치고 올라왔다. 달래줘야겠다.
"설마 삐졌어요?"
"아니거든."
"딱 봐도 삐졌네요."
"아니라고!"
"열심히 위로해줬는데 까칠하게 굴어서 미안해요. 됐죠?"
"......뭔 말을 못해, 내가."
샤카르는 말미에 피식 웃어버렸다. 음, 기분 풀렸나 보군.
말을 주고받고는 있지만 우리 중 어느 쪽도 서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집무실을 둘러보고, 샤카르는 종이더미를 뒤적인다. 일전의 오묘한 기류 때문이고, 또한 어수선한 지금의 상황 때문이다. 결국 내가 물꼬를 틀었다.
"나 어디 앉아요?"
"아, 미안. 우선은 거기 쇼파에 앉아 있어. 이 방 너무 더러워서 정리 좀 해야겠다."
물음을 듣고서야 내가 여전히 서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뒤늦게 자리를 권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안 더러운데요, 뭐. 근데 아까 그 서류들은 뭐길래 그렇게 급히 치워요?"
"아, 그거......기밀 서류. 외부인한텐 공개하면 안 돼."
"나는 그냥 기다리는 게 귀찮아서 막 쳐들어온 건데, 실례를 했군요. 미안해요. 당신을 만날 때 뭔갈 거리낀 적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네가 보기 전에 다 치웠으니까. 참, 너 여기까지 들어온 건 처음 아니냐? 게다가 평소답지 않게 사전 연락도 없이 왔네. 뭔 일 났어?"
테이블과 책장을 대강 정돈한 그는 눈가를 침범하는 머리칼을 슥슥 쓸어넘기며 내 맞은편 쇼파에 털썩 앉았다.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오늘의 방문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딱히 엄청 급박한 일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게. 나 왜 설레발 쳐서 여기까지 왔지. 스스로를 향한 의문에 휘감긴 나는 결국 어물쩍 넘어갔다.
"급한 일은 아니에요. 그냥 이것저것 얻어낸 정보도 많고, 한 번쯤 이런 식으로 당신을 보고 싶었기도 해서요."
"그래, 잘 왔다. 마실 거 줄까?"
"당신이 맨날 먹는 그 커피, 먹어볼래요."
"알았어. 근데 나 그거 맨날 먹진 않거든?"
샤카르는 방문 앞으로 걸어가 문을 빼꼼 열고 밖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 하나에게 커피 두 잔을 지시했다. 나는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편안히 머리를 붙이며 픽 웃었다.
"요즘 얼굴 볼 때마다 마시고 있더만요, 뭘."
"그건 인정한다만.....아, 원래는 그냥 문화 체험이나 해 볼까 하고 마셔본 건데, 이게 무진장 맛있어서. 시힐레 지방에서 나는 열매를 지지고 볶고 여하튼 별 난리를 쳐서 만든 괴상한 까만색 음료수가 이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이 세계의 커피 원산지는 망국 시힐레였구나. 이번 생에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커피는 이 시대에 아직 대중적이지 않다. 점점 입소문이 퍼지는 추세긴 하지만.
지시를 마친 샤카르는 다시 쇼파로 돌아왔다. 책상 뒤로 넓게 뚫린 창문을 투과한 수채화 톤의 노을빛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내 손끝과 그의 머리칼 끝을 꽃물처럼 적신다. 하늘에 스며든 꽃물이 여기까지 흘러넘친 것이다. 이게 바로 그 '꽃물 든 하늘'인가? 이 세계에 온 지 20년 만에, 나는 소설 제목의 의미를 얼추 그럴듯하게 추측해냈다.
빨갛게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빛이 강해서 해질녘에 일할 때 불편하겠어요."
"낭만 없기는. 이런 풍경 보는 맛에 돈 들여서 창문 뚫는 거지."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 이 시간에 일 안 하지?"
푹 찌른 정곡에 그가 뜨끔한 얼굴을 했다.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웃어버린다.
"역시 예리하다니까."
"보스가 일을 안 하면 어쩌자는 거예요."
"여기 실세는 따로 있고, 난 그냥 베일 뒤에 감춰진 보스일 뿐이라 큰 타격은 없어. 전 보스한테 직함만 물려받고 실무에는 잘 개입하지 않는 내가 직접 도장 찍어야 할 일은 적거든."
"와. 그런 거였어요? 최고의 직장이네요. 그럼 이 시간엔 뭘 해요?"
방 안을 가득 채운 석양에 온기라도 있는 건지, 공기가 푸근했다. 흰 장갑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대충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그냥, 개인적인 일? 아님 밥을 먹던가."
"주로 뭐 먹어요?"
"에단이 연락하는 날에는 술집 가서 소세지랑 술, 아닌 날에는 직원들이랑 같이 아무거나. 근데 왜?"
"궁금해서요."
"실없긴."
샤카르가 팔을 뒤로해 머리를 도로 묶으며 나직이 웃었다.
그러고는 오늘 이뤄낸 성과를 재잘거리다, 우리 앞으로 도착한 커피를 마셨다. 좀 쓰고 투박하긴 한데 향이 무척 좋았다. 혀 끝에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뒷맛이 남았다.
"에단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경고는 굳이 할 필요 없지 않았냐. 혹시 프리드리히가 불쌍했어?"
내 이야기를 듣던 샤카르가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인 채 질문했다.
"무슨 그런 소리를......집중을 에단 쪽으로 쏠리게 하려는 얕은 수작이었어요."
짜게 식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잔을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갈색 수면이 가볍게 찰랑였다. 느린 파도처럼 일렁이는 노을이 곧바로 커피잔의 색을 잡아먹었다. 저 구석에 놓인 시계의 초침이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그 녀석이 너와의 관계를 순수한 유년 시절의 것 그대로라고 여기는 걸 알면서 벌인 일이야?"
"당연하죠."
"......역시 너답다. 최대의 효율이 먼저인 그 사고방식은 나도 배워야겠어."
"분석이 조금 잘못됐네요. 전 단순히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한 게 아니에요. 감정을 완전히 제하고, 현재 그와 제가 처한 상황만을 고려한 거죠. 황태자파 가문들끼리 싸운다면 제게 이익이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더 대단한 걸. 난 그렇게 못하거든."
고개를 갸웃하며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대었다. 훈훈한 온기가 입술에 전해졌다. 온기. 온기라고. 잠시 쓸데 없는 생각을 해 버렸다. 얼른 안에 든 것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가슴 속까지 뜨겁다. 이런. 바보 같은.
"왜요? 당신도 나 같은 부류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꽤나 이성적인 사람 같았는데."
일부러 시선을 잔뜩 내리깔고,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평가해주니 고맙긴 하다. 근데 아니야. 지금 반 년째 뻘짓하는 중이거든. 미친 짓인 걸 알면서도 기어 들어가는 기분이 얼마나 엿같은지 넌 몰라, 라니아."
그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끝으로 말을 마쳤다. 푸욱 한숨을 내쉬며 커피를 홀짝인다. 빛을 받아 금가루처럼 반짝이는 그의 맑은 눈이 어떤 감정에 겨워 얼핏 흔들렸다. 알 수 없는 하소연을 굳이 해석하겠답시고 머리를 굴리던 나는 불그스름하게 젖은 그의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고는 입술을 티나지 않게 잘근 깨물었다. 망할.
이 기분, 뭐야.
"나도 그래요. 실은 이게 다 아무 소용 없는 헛짓인가 싶고, 나라는 사람은 대체 누군지 모르겠고. 참 짜증나는 세상이에요, 여기는."
투덜거렸다. 샤카르가 숨결 섞인 웃음을 짧게 흘렸다. 나는 애꿎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내렸다.
"맞아. 아, 뭐 이딴 세상이 다 있냐. 망할."
그는 팔을 교차해 목 뒤를 받치고 천장을 향해 시선을 올리며 넋두리처럼 말을 뱉어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동조했다. 이름 모를 감정에 발을 담그고서.
웬만한 이야깃거리는 다 쏟아내고 나니, 하늘은 어느새 푸릇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샤카르는 방의 조명을 켜며 내게 돌아가봐야 하지 않느냐 물었다. 나는 그제서야 셀리아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동업자라고 안 부르지만, 난 널 계속 도울 거니까 앞으로도 자주 만나서 이렇게 논의 좀 하고 그래라."
그는 마무리 인사를 했다. 이에 화답했다.
"그러죠. 당신은 끼니 거르지 말고 어서 나가서 뭐라도 먹어요. 전 이만."
"잘 가라."
손을 설렁설렁 흔들며 배웅하는 그를 뒤로 하고 방을 나왔다.
***
결국 그 날 여덟 시가 넘어서야 귀가한 나는 삐진 셀리아를 달래며 저녁식사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 후, 폭풍우가 또 찾아와 기승을 부리는 습한 날에. 스카일러 후작가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가 떴다.
"이리 결론이 날 줄은 몰랐구나."
나와 함께 신문을 읽은 일레인이 복잡한 낯을 했다. 그에 반해 나는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줄거리에 비추어 봤을 때 그닥 새로운 결말은 아니었거든.
"전 대충 예상은 했어요. 프리드리히 영식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아서요."
비가 창문가를 소리나게 때려댔다. 나름 운치있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기대앉아 반듯한 글씨 덩어리를 다시 정독했다. 일레인은 방 밖으로 나간 뒤였다.
- 스카일러 후작가의 참극, 그리고 프리드리히 스카일러 후작 영식의 작위 승계.
이것이 기사의 소제목이었다.
이 일의 전말은 이렇다. 일차적인 조사가 마무리될 즈음, 프리드리히가 빠르게 움직여 자신의 형 에셀레드를 단독 범인으로 몰았다. 후계 자리를 노릴 셈으로 모아뒀던 패들을 이참에 한꺼번에 꺼내 쓴 듯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투서의 내용에서 자기 이름을 뺄 증인과 증거를 내민 그는 에셀레드를 정보국의 심층 수사장에 밀어넣는데 성공했다.
물론 여러 자잘한 법 조항에 걸린 것이 있어서, 프리드리히 역시도 잠시 감옥에 들어갔다가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보석금 외에도 추가적인 벌금을 내야 했으며, 황태손의 보좌관 직책 또한 잃었다. 그래도 귀족 재판정까지 가서 다른 귀족과 황족들의 의견을 취합해 후계자 지위를 박탈하고 3년간 수도 할렌센 밖에서 근신하라는 결론이 난 에셀레드보다는 나은 결말이었다. 그렇게 에셀레드의 귀족 인생은 사실상 끝이 났다. 아마 곧 프리드리히가 가주의 권한을 써서 자기 형 이름을 호적에서 파내겠지.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참 이상하지. 원작과 같은 사건을 터뜨려 놨더니 과정과 그에 따른 몇몇 미래는 바뀌었지만, 당장의 결과는 역시나 똑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신문을 접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다. 뻑뻑한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이것 외에도 사건이 하나 더 있었지. 자객 침입 사건 말이다. 정보국은 그 사건의 배후를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유일한 증인이었던 53번이 내가 자리를 뜬 후에 자결했거든.
내 조롱 때문이 아니었다. 53번은 절대 내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눈을 하고 있었어. 어쩌면 거짓말을 해서 조사에 혼선을 놓으려고 그 날까지 어금니에 숨겨둔 약을 먹지 않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정보국의 요원들은 내가 말하기 전까지 53번의 입 안에 그게 숨겨져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너무 감쪽같아서. 하지만 내가 그 독을 언급하자 이를 갈다 움찔한 것이 확실히 포착되어 독의 존재를 확신하고 내 퇴장 이후에 제거하려 했으나 늦어버렸다.
현재 공식적으로는 배후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하지만, 나는 황태자를 필두로 한 황실이 개입해 블로텔지아를 상대로 세운 벽을 몰래 허물고 자객을 들여왔을 거라고 거의 확신한다. 그리고선 이제껏 그랬듯이 어물쩍 덮어둔 게 분명해.
다만 이걸 확실한 물증 없이 지금 당장 터뜨릴 수는 없다. 터뜨리는 순간 졸지에 타국이 엮인 대사건이 되어 버리는데, 황실에선 자객이 블로텔지아에서 왔으니 내 암살을 그 나라 사람들이 지시했다고 발뺌하면 끝이다. 그게 바로 황태자파가 원하는 결말이라고.
나는 지금 답을 뻔히 알지만 움직일 수 없다. 내 안전 뿐만 아니라, 프리드리히를 잡아챈 올가미 또한 챙겨야 했다.
철저하게 준비했군. 결국엔 선전포고인가. 나는 헛웃음을 뱉으며 손에 쥔 신문을 구겨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기어코 나와 전쟁을 하겠단 말이지, 황태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나는 요즘 들어 감정을 조절하기가 어려웠다. 애써 깊게 숨을 내쉬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으로는 폭풍우가 친다.
7월이 폭우에 불어난 강물처럼 빠르게 흐른다.
***
그리고, 비가 그친 뒤의 어느 날.
"하하하, 정말 통쾌하게 스카일러 영식을 누르셨습니다. 덕분에 저와 대공녀님의 거래는 성황리에 성사되겠어요."
나인하트 공작가에서 개최한 파티가 시작하기 전에 나를 미리 부른 헤일렌은, 내가 내민 결과에 만족하며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나는 차분히 그쪽의 성과를 물었다.
"빈 자리는 차지하기 쉽던가요?"
"아무렴요. 업무 개편이 되고 새로 행정 고위직과 주요 의결권직에 앉은 자들이 어느 파벌인지 보세요, 대공녀님. 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역시 대단한 수완이세요, 공작."
"제가 달라는 것을 구해주셨으니 이제 저도 대공녀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사 드려야겠군요."
고풍스럽고 드높은 나인하트 가문의 저택 응접실에서, 헤일렌은 진한 홍차를 홀짝였다. 나는 파티에서 많이 마시기로 하고 물로 목만 축였다. 이어진 그녀의 말에 잔에 댄 입술이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헤일렌 나인하트는 이 시각 이후로 황태자파의 스파이다.
"황태손 저하의 금족령은 황태자 전하의 눈밖에 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 빠른 시일 안에 풀고, 전하 가까이에 붙어 쓸만한 조각을 주워 오겠습니다. 퍼즐은 대공녀께서도 맞추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라인하르트는 자기 입지가 이미 망했다고 결론지었지만, 금족령을 풀면 아예 그가 딛고 서 있던 땅에서 빼내오는 것이 되니 적어도 숨통은 트일 것이다. 단, 나머지는 이제 그가 알아서 해야 한다.
회중시계에 눈길을 준 그녀가 말했다.
"자아,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일어날까요?"
먼저 일어나는 헤일렌을 따라 나도 치맛단을 정리하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러죠."
7월의 어느 오후였다.
============================ 작품 후기 ============================
8챕터, 폭풍우 완료. 이로써 '2장 : 여름'의 본편이 끝났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길고 긴 'Bridge 3. Shachar Menderope : 푸른 새벽'이 시작됩니다. 샤카르 외전입니다.
+1연참 달성되었습니다. 이것으로 간단하게 연재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