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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53화 (53/102)

00053 Bridge 3. Shachar Menderope : 푸른 새벽 =========================

그러니 대답해 주라. 내가 과연 너에게 있어서 좋은 사람이었는지. 네 즐거운 추억의 일부가 되었는지.

《Bridge 3. Shachar Menderope : 푸른 새벽》

대륙력 1034년. 멘데로프 백작가에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누나 셰카이나는 자동으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샤카르는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는 옛 에온 왕국의 땅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에온은 전쟁이 종식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곳곳에 복구되지 않은 폐허가 남은, 풍요롭고 허망한 바람의 왕국이었다. 어릴 적 보았던 동식물은 에온의 것이고, 먹었던 음식도 에온의 것이었다.

그래서 샤카르 멘데로프는 에온이라는 땅에 해박했다. 그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솔베르얀 와인과, 그곳의 원주민들이 지녔던 마법 능력, 파랗고 아름다운 하늘과 잔디밭, 호수와 산. 드넓고 외로운 멘데로프 백작저. 평온하지만 재미는 없는, 무료한 곳.

멘데로프 백작은 이렇게 넓은 에온 영토의 상당 부분과 어마어마한 재산, 명예, 권력을 가졌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날의 샤카르는 평화롭고 재미없는 영토의 지배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했다. 반면에 그의 누나는 가문의 일에 꽤나 관심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누나에게 후계자 칭호를 주면 되겠다. 샤카르는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고 아버지에게 후계 자리를 누나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따귀를 맞았다. 책임감을 내던진 자식은 맞아야 한다면서.

당시의 열다섯 살짜리 소년 샤카르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직계 남자가 있는 가문에서 여자는 가주가 되지 못한다는 법을 알기는 했지만 이상하다 여겨 따르지 않으려 했다. 그는 피멍이 맺힌 볼에 집사가 내민 얼음을 대며 그 법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걸 굳이 수용해야 하는가?

그는 이 불공정하고 모순적인 세상을 이해하길 포기했다.

뺨을 맞은 다음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1월 3일. 탄생화, 사프란. 셰카이나는 그의 생일마다 겨울이라 구할 수 없는 생화 대신 종이로 꽃을 접어줬다.

'원하는 게 이것 뿐이야?'

오렌지빛 불이 장작을 휘감고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 셰카이나는 종이를 조물거렸다. 샤카르는 거의 완성된 종이꽃을 들여다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몇 년 모였더니 자그마한 꽃다발 하나가 되었는데, 어제 백작에게 맞고 넘어지다 밟혀서 뭉개졌다. 아까웠다.

생일날 새벽에, 샤카르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와 자주 말을 타며 노는 들판으로 갔다. 끝도 없이 펼쳐진 강가의 초원에 팔다리를 벌리고 떡하니 누워 냉기가 풀풀 날리는 이슬 맺힌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슴푸레한 하늘이 시야를 온통 푸르게 물들였다. 축축한 갈대와 잡초가 등을 적셔 추웠다. 그래도 자유로웠다.

자유다.

그는 자유를 사랑했다.

"이게 무슨 생일이야."

허탈하게 중얼였다. 1월의 칼바람이 뺨을 계속 올려붙였다. 아팠다. 그렇다고 해서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거지만.

"아, 어디로 훌쩍 여행이나 가 버릴까. 계속 안 돌아오면 나 죽은 줄 알고 누님이 후계자가 되지 않을까?"

아직은 젖살이 덜 빠진 얼굴과, 파란 새벽을 빼닮은 머리카락. 저 멀리서 천천히 떠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담은 눈, 눈을 감으며 지어보는 미소. 손목에서 빛나는 얇은 링 모양의 금팔찌 한 개.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가는데도, 어린 날의 샤카르는 태연하게 웃으며 잠을 잤다. 안 그래도 탈출하느라 새벽을 몽땅 날려서 졸리던 참이다.

죽은 듯이 잠들어 서리에 파묻힌 그를, 얼마 후 하인 하나가 찾아내 저택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백작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의식도 제대로 못 차릴 정도로 심한 감기에 걸려버린 그를 한 대라도 쳤다간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까 싶어 참았다.

지나치리만큼 건강하던 샤카르는 이례적으로 한 달 내내 앓았다. 백작부인을 병으로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백작과 셰카이나는 걱정을 한보따리 안고 그를 극진히 간호했다.

어영부영 1월을 보내고, 여전히 추운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샤카르 멘데로프, 백작가의 어린 후계자가 편지 하나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가출이었다. 다들 한때의 일탈이라고, 금세 엉망이 된 몰골을 하고 울면서 돌아올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그것은 어리석은 단정이었다.

***

샤카르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누나와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가출했고, 건강과 돈은 충분했으며, 이제 곧 봄도 올 터였다. 백작이 이 드넓은 에온 지방을 샅샅이 뒤져 그를 찾아내는 데는 족히 몇 달, 아니 어쩌면 일 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때까지 잘만 피해다니며 자유를 만끽하면 된다.

신이 났다. 그는 말을 타고 끝도 없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세상 최고의 희열을 맛보았다. 밤에는 곳곳에 자리한 인심 좋은 민가나 민박에서 잠을 청했고, 여의치 않으면 저번처럼 얼어죽을 지경이 되지 않도록 불을 피워두고 보온용 옷가지와 침낭으로 몸을 싸맨 채 노숙을 했다. 아침이 되면 다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자연 경관을 구경했다. 경험은 쌓여갔고 지식은 늘어갔다. 종종 직면하는 문제는 대부분 샤카르 특유의 친화력과 판단력 덕에 해결할 수 있었고, 가끔씩 정말 곤란한 일이 생길 때는 돈으로 합의를 봤다. 광대하고 평화로운 백작저에서 살 때는 돈의 가치가 이 정도인지 알지 못했던 그는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도 깨닫게 되었다.

이윽고 어느 볕이 좋던 이른 봄날에. 그는 문득 취업을 해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어졌다. 아니면 직접 사업을 벌이던가. 자유를 맛보고 나니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가 죽도록 싫었기 때문이다.

가출한지 대략 반 년이 흘렀다. 무작정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다 제국 할레시온의 수도인 할렌센 부근까지 당도한 샤카르는 확실히 다른 지역보다 번화한 시장 거리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유심히 훑으며 걷고 있었다.

"약초 팝니다! 어제 입고된 싱싱하고 효과 좋은 약초입니다!"

"저 멀리 리우네아에서 건너온 산호 장식이요! 구경들 해보고 가쇼!"

부산스럽고 활기찬 거리를 지나며 뭐 살 만한 것이 없나 이리저리 둘러본 샤카르는 시장 거리를 거의 다 지났을 무렵 갑자기 제 팔을 잡아챈 손 때문에 흠칫 놀라 뒤돌았다. 혼자서 긴 여행을 하다 보니 야생 동물 같은 경계심이 기본으로 장착된지 이미 오래였다. 그를 붙잡은 사람은 꾀죄죄한 행색의 거지 아이였다.

"잘생긴 오빠! 이것 좀 구경하고 가. 얼굴이 딱 봐도 애인 있게 생겨서 내가 특별히 추천해주는 건데, 이게 애인한테 선물하기 딱 좋은 브로치야."

열다섯 살인 샤카르가 보기에도 그 아이는 어렸다. 기껏해야 열 살이 될까말까 한 왜소한 체구의 여자아이가 다짜고짜 뭔가를 내밀며 구매를 권하는 이 상황을 샤카르는 처음 겪는 것이 아니었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이 아이는 생계가 어려워 벼랑 끝까지 몰린 빈민이리라. 길바닥이든 쓰레기장이든 모조리 뒤져 팔 만한 물건을 찾아 시장에 나서는, 수도의 최하층 계급. 그들에게 동정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배운 그는 매몰차게 거절하기로 마음먹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런데.

"꺄아아악!"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서 그걸 팔아치우고 있었구먼! 거지새끼 주제에 감히 벤 정보상의 물건이 든 상자를 중간에서 빼내? 아주 간이 부은 년이여!"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엉엉......"

"시끄러! 너 같은 것은 한 번 오질나게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겄지, 엉?"

때마침 좀 외진 구석이었던지라 이 소동이 시장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는 어려웠다. 대화를 통해 대강 파악하기로는 브로치가 사실 벤 정보상이라는 곳의 물건이고, 아이는 그걸 훔쳐 팔려다가 들킨 상황인 듯했다. 샤카르는 우락부락한 사내에게 덜미를 잡혀 울면서 질질 끌려가는 아이를 가만 지켜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샤카르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성격이 때로는 득이 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어느 쪽 결말이 날까, 하는 일말의 호기심을 갖고서 그가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무슨 일이길래 아이를 끌고 가나?"

열다섯 살이지만 골격이 남달라, 그는 목소리만 잘 깔면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게다가 태생적 배경에 의한 귀티까지 갖췄으니, 이제 말투만 잘 쓰면 사내가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샤카르는 일부러 귀족의 고상한 억양으로 말했다.

"어디 다른 지역에서 오신 귀족이십니꺼? 못 뵈던 분인디......"

사내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퉁명스레 물었다. 샤카르는 무어라 대꾸하려 했다. 그 순간 여름의 쨍한 햇살 아래 은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사내의 머리를 내려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아악! 누구여, 이 빌어처먹을......허거덕, 보스?! 여그는 웬일로 오셨디요?"

뭔가 했더니 옆면이 넓적한 칼이었다. 만약 저걸 세로로 세워서 내리쳤다면 머리가 갈라졌겠지. 뜬금없이 끔찍한 광경을 상상한 샤카르가 자기도 모르게 으엑, 상황에 맞지 않는 감탄사를 뱉었다. 그걸 본 '보스'가 툭 던지듯 질문했다.

"댁은 누구요?"

급히 표정을 정돈한 샤카르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가출 중이라 그건 밝힐 수 없다."

실수했다.

"가출? 어라리. 그 누구야, 그, 높으신 분 의뢰에 이 비스무리한 인적사항을 가진 용의자가 있었는데. 아놔, 이 옘병할 기억력. 야, 말덴아. 몇 달 전에 자기 아들 가출했다고 의뢰 넣은 귀족 나리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냐?"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고 불량하게 짝다리를 짚고 선 구릿빛 피부의 중년 남자가 태평하게 하는 말이 샤카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잘못 걸렸다. 정보상 보스로 추정되는 남자는 일전에 멘데로프 백작에게 샤카르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모양이었다. 바짝 긴장한 샤카르는 두 체격 좋은 사내가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하는 틈을 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모르겄는디요......"

"예라이, 나보다 젊은 놈이 그걸 몰라?"

"아아아니요! 아따, 그 뭐시기냐,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디!"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라잉?"

"그, 그것이 그러니까, 어! 그렇지! 그 의뢰자 분이 무슨 백작이라 하셨던 것 같은디요, 그것 말고는 영 기억이 안나부러서 지도 곤란합니더."

"아아! 그렇지,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만."

샤카르는 말덴이라고 불린 사내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 관심에서 멀어진 작은 소녀가 숨을 죽이고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건장한 사내를 상대로 한 어린아이의 탈출은 요원해 보였다. 결국 샤카르가 돈으로 브로치를 구매해 사건을 해결해주거나, 이 사내들로부터 도망가는 김에 소녀도 데리고 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해답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샤카르는 결국 모험을 강행했다.

그는 두 사람이 정신을 판 사이에 달려들어 아이를 재빨리 낚아채고 반대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난데없는 도주에 사내들은 잠시나마 시간을 지체할 거라는 계산 하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몇 발짝 내딛지도 않았는데 눈앞에서 번쩍이는 예의 그 은빛 검날에 소스라쳐 뒤로 고꾸라진 샤카르는 어느샌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두 사내를 보고 또 아연실색했다.

"뭐, 뭐지."

"튀는 걸 보니 의뢰인이 찾는 사람이 맞구먼? 뭐긴 뭐겠습니까, '샤카르 멘데로프' 도련님. 도련님을 잡아 대령하라는 멘데로프 백작님의 명령을 따르는 중입죠. 자아, 순순히 따라가십시다? 기절시켜 데려갔다가는 귀하신 도련님 몸에 흠집 냈다고 백작님이 노하질지도 모르니까."

무섭게 씨익 입가를 당겨 웃은 정보상의 보스가 부하 말덴을 시켜 샤카르를 골목 샛길로 끌고 들어갔다. 그 사이에 소녀는 눈치 좋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샤카르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도, 인생 최고로 즐거웠던 생활이 이대로 끝이 나는 건가 싶어 눈앞이 깜깜했다.

으슥한 뒷골목으로 잡혀가 밧줄로 꽁꽁 묶인 그는 그대로 말덴의 등에 들쳐업혀 정보상 건물로 옮겨졌다. 그야말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격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다시 에온의 재미없는 백작저로 돌아가는 불상사가 생길 테니까. 물론 백작에게도 엄청 깨지겠지. 정말 무지나게 혼이 날 거다. 어디 감금해둘지도 몰라. 거기까지 예상한 샤카르가 희게 질렸다. 다만 그 와중에도 번득이는 기지가 그를 살렸다.

샤카르는 한창 그를 에온으로 보낼 준비를 하던 보스를 불러세우고 말했다.

"그쪽 정보상은 규모가 꽤 큰가? 아버지께서 아무에게나 좋지 않은 가정사를 밝히며 의뢰를 하지는 않을 텐데."

"뭘 좀 아십니다? 제 정보상이 이래봬도 어두운 경로와 밝은 경로를 가리지 않고 정보나 물건을 수집해 되파는 데에는 정통해서, 여러 곳에 연줄이 닿아 있습죠.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정보상입니다."

"날 반 년만에 찾아낸 자가 그쪽이라니, 영광인 줄 알아라. 그나저나, 아까 그 여자애는 안 쫓아가나? 그 브로치, 꽤나 중요한 물건이라는 소리를 아까 들은 것 같은데."

"그 애는 털어봤자 썩은 쌀 한 톨도 안 나올 빈민가 거집니다. 브로치야 말덴이가 그 애를 붙잡자마자 다시 빼앗아뒀으니 뭐, 굳이 끝까지 물고 늘어질 필요 있습니까?"

그새 되찾은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보복하지 않다니, 그가 전해들었던 뒷세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샤카르는 약간의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보스 덕에 그가 속으로 내린 결정에 믿음을 더했다.

"그 브로치, 왜 중요한 물건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실은 처음 보자마자 얼핏 짐작은 했다. 그 브로치는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유일한 생산지라는 에온에서 살면서도 책으로만 접한 희귀새 금우조의 깃털과 순금, 그리고 자그마한 루비와 수정까지 장식된 정교한 작품이었다.

"그야 비싼 물건이니 당연히 중요합죠."

"그걸 사겠다고 한 자는 아직 없고?"

"아직 경매장에 내놓지도 않은, 망국 에온의 옛 왕궁 비밀 창고에서 이제 막 입수한 보물 중 하나인데 누가 벌써 소식을 접했겠습니까?"

"그럼 그것, 내가 사지."

예상 밖의 발언에 보스의 눈매가 꿈틀했다. 깍지를 낀 손을 비틀어 뚜둑 소리를 낸 그가 위협적으로 눈을 빛냈다.

"거래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건 아십니까? 이 브로치의 가치는 족히 200만 스칸이 넘어,"

"모를 리가."

샤카르는 품 속의 단도를 이용해 몰래 끊은 밧줄을 풀고 주머니에서 금화 자루를 꺼내 보스의 앞에 던졌다. 그리고 금화를 확인하는 보스에게 제안했다.

"그 안에 든 건 대략 5만 스칸 정도. 현재 내 전 재산이지. 택도 없다는 건 알아. 대신, 모자라는 부분은 여기서 일해서 갚도록 하겠다."

"......정보상 일을 해보고 싶으시단 소리요? 귀족 도련님이 이런 일을?"

의외라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보스를, 샤카르는 지지 않고 곧은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전부터 일이란 걸 해볼 의향이 있었다.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만큼 아버지가 그토록 외쳐대는 가문의 품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뜻으로 알아들었으면 좋겠군."

"흐으음, 왠지 제가 도련님께 자비를 베풀길 바란단 소리로 들립디다? 이 하찮은 평민 정보상 놈이 높으신 분에게 도움이라는 걸 드리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하하하!"

보스는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다. 거기 같이 있던 부하들이 일하다 말고 한 번씩 쳐다볼 정도였다. 웃음을 거두자 흥미와 기대만이 얼굴에 남았다. 샤카르는 아직 사교계에 제대로 나가본 적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보스의 표정을 읽어냈다. 그는 요 맹랑한 도련님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성공이었다.

"그럼 어디 한 번 해보십쇼. 정보상 일. 내 직속 수행부하를 할 거요, 아님 일반 부하가 될 거요?"

샤카르는 씩 웃으며 호기롭게 답을 내놓았다.

"이왕이면 보스 직속이 낫지 않겠습니까?"

단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뀐 말투에 보스가 다시 껄껄 웃었다. 그는 호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샤카르의 어깨를 장난스레 퍽 쳤다.

역시나 샤카르의 분석대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참 단순한 사내였다. 이렇게까지 쉽게 제안을 받아들이고 살가운 척까지 할 줄이야. 어쨌든 그에게는 이득이었다. 이번 선택은 손해가 아닌 이익 쪽의 결말이었다.

"시원스런 도련님이구만! 앞으로는 날 '벤'이라고 불러라. 이게 원래 내 이름은 아니긴 한데, 여기 놈들은 죄다 가명을 써서리. 도련님도 가명 쓸 건가?"

온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난 샤카르가 머릿속에서 자기 이름의 철자를 대충 거꾸로 나열해보더니 다소 성의 없이 가명을 정했다.

"라카스Rahcahs로 하죠."

뜨거운 여름의 한복판에서, 샤카르 멘데로프의 열다섯 살은 새로운 길을 맞이했다.

============================ 작품 후기 ============================

샤카르 외전, 푸른 새벽 시작합니다.

+샤카르 외전은 약 7편(...)으로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다른 시점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쭉 훑고 지나가는 것도 오래 걸렸지만 샤카르의 개별적인 과거만도 3편이라서요...아 솔직히 브릿지는 황태손 외전처럼 적당히 짧은 걸 선호하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하하 하마터면 다 엎어버리고 다시 쓸 뻔했죠. 덕분에 슬럼프도 도래하고^^...(샤카르 : 왜 뭐 왜 내 탓 아니야 네 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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