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Bridge 3. Shachar Menderope : 푸른 새벽 =========================
어느덧 계절이 세 번이나 순환해 다시 가을이었다. 샤카르는 동업자에게 끈기있게 매달린 끝에 조금씩 성과를 이뤘다.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가볍게, 능청스럽게. 그러면서도 일정 거리는 유지하고. 이렇게 의도를 깔고 행동한 덕택을 많이 봤다.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진 표현이 비로소 라니아를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의뢰받았던 조사를 마무리지었지만, 샤카르는 라니아와 다시 모르는 사이가 되려 하지 않았다. 다 괜찮은데 유독 1057년의 이야기를 건드릴 때마다 그녀가 모든 게 빠져나간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다 타고 재만 겨우 남은 감정을 내비치는 모습에 샤카르는 더없이 당황했다. 그 광경을 마주하고 나자,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위험할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구원자가 되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 에빌, 오늘은 뭘 하고 노셨나? S.M.
샤카르는 심심하면 편지를 날렸다. 라니아에게 선물해 준, 정보상과 루 할레시온 가 저택을 오가는 전서구가 자주 수고해 주었다. 혹시 몰라 멘데로프 가의 저택까지 날아갈 수 있는 전서구도 함께 주었지만 그 새는 아직까지 새장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 놀다뇨, 전 매우 생산적인 일을 했어요. 책 두 권을 읽었고, 정원에서 어머니와 티타임을 가졌죠. 당신 같은 한량보단 훨씬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고요. R.E.lH.
또박또박한 글씨가 적힌 조각 편지를 들여다보며, 샤카르는 오밤중에 낄낄 웃다가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도 새어나오는 미소는 어쩌지 못했다. 뚜한 얼굴로 틱틱대는 게 눈에 선했다.
- 요즘 날씨 되게 좋은데 그러지 말고 밖에도 좀 놀러다니고 하지 그러냐. 참고로 나 한량 아니다. 무진장 바쁜 사람이거든?
- 나가기 귀찮아요. 그리고 거짓말 하지 마요. 당신 맨날 쓸데없이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어.
- 일하느라 돌아다니는 거야!
- 네, 변명 잘 들었어요.
- 젠장! 좋아, 내 바쁨을 몸소 보여주지. 에빌 너 내일 시간 있냐?
- 이야기가 왜 갑자기 거기로 새요? 시간은 남아돌긴 해요. 아니, 그런데 왜 자꾸 저를 미들네임으로 부르죠? 하지 말랬잖아요. 정말 막무가내로군요.
- 내 특기가 남의 말 안 듣기라서 말이지. 됐고, 내일 한 세 시 쯤에 소광장 앞으로 나와라. 나는 서류 잔뜩 챙겨서 갈 거니까, 너도 할 일 있으면 들고 나오던지.
- 당신의 야외 근무에 동참하라고요? 내가 왜요?
- 혼자 일하는 건 심심하니까. 너도 혼자 노는 건 이제 식상하지 않냐. 엘로솔라냐에서 초콜릿 케이크 사 줄 테니 나와.
- 엘로솔라냐요? 그 제안 받아들이죠. 무르기 없기예요. 자정 넘었는데 우선은 잠이나 잘래요. 나 이제 답장 안 할 거야.
- 마음대로 하시지. 잘 자.
정말로 자는 건지 전서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샤카르도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편지 내용을 다시금 떠올리며 허파에 바람 들어간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었다.
집에만 있었으니 당연히 답답했을 거다. 디저트 가게에도 안 갔을 테고. 샤카르는 오늘도 잘 먹힌 작전에 만족했다.
열여덟 살, 성인이 된 라니아는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가기 싫다고 고집을 피워서였다. 어언 삼 년째 이어지는 칩거에 대공비 일레인만 골치를 썩었다.
샤카르는 그녀가 왜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라니아는 '그 날' 전까지 상당한 수의 고급 인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또한 나이를 먹어 데뷔했을 것이다. 현 사교계에는 애매하게 관계가 끊긴 사람들과, 이제는 원수가 된 사람들이 그득하다는 뜻이다. 그 불편함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참 잔인하다니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은은한 달빛만이 남은 고요한 밤의 집무실에서, 샤카르는 그녀 대신 투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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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디저트 가게 '엘로솔라냐'에서 부드러운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며, 샤카르는 동업자라기보단 마치 나의 옛날 친구처럼 굴었다. 장난을 치고,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는 진심으로 즐거운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듯이.
그 날 밤, 나는 불현듯 끔찍한 가정에 사로잡혔다. 뒤늦은 자각과 경계였다.
-
그러게. 우리는 뭘 얼마나 잘못했던 걸까.
'멘데로프 영애께서 돌아가셨습니다.'
편지를 받고 멘데로프 백작과 함께 도착한 장례식장은 온통 절망적인 분위기였다. 장례식 날, 비 맞은 잔디밭은 검은 옷으로 뒤덮였다. 오랜만에 입는 검은 정복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샤카르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우산도 쓰지 않고 단단한 나무관만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덧없다.
"우산, 안 가지고 오셨다면 하나 드리겠습니다."
레테일이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는 서럽게 훌쩍이는 제 쌍둥이 형제를 달래느라 방금 전까지 옆에 달라붙어 있다가, 이제야 잠시 한숨 돌리러 나온 듯했다. 샤카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가운 안개비가 천천히 어깨며 머리칼을 적셨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조카는 훗날 어머니라는 존재를 기억하기나 할까. 어머니가 되기 위해 셰카이나는 굳이 생명까지 저버려야 했나. 못된 생각들이 안개처럼 음습하게 기어올라왔다. 미웠다.
장례식은 느릿하게 진행됐다. 진혼곡이 묵직하게 울었다. 세크네트의 왼쪽에 서서 묵념하는 그 때 샤카르는 가장 외로웠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다들 충격이 큰지라, 각자 감정을 추스르느라 바빠 그에게는 제대로 된 위로의 손 하나 없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거세지기 시작하는 빗줄기에 검은 행렬이 싹 씻겨나갔다. 가까운 친지들만이 남아 한 번 더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이어서 퇴장했다.
이참에 또 자신을 백작령으로 데려가려는 백작을 피해 주위를 뜻 없이 배회하다가, 어느 건물 뒤편으로 가 벽에 기댔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구석이었다. 딱딱하고 시린 벽돌의 감촉이 등에 그대로 느껴졌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때문에 안 그래도 끝까지 곤두박칠쳤던 기분이 진흙탕에 내던져졌다.
길 잃은 아이처럼 문득 한없이 아득해졌다. 먹먹하게 죄여오는 감정에 목 졸린 듯 울음을 토해냈다. 그는 현재에 이어 과거를 잃었다. 처음에는 억울해서 울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슬퍼서. 또 속상해서. 아무리 참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먹장구름이 머리 위에서 잿빛으로 엉겨들었다. 쏴아아, 소리를 내며 그를 때리는 굵은 빗물에 한기가 돌았다. 주르륵 미끄러지듯 허리를 숙이고 손으로 두 무릎을 짚었다. 땅을 향한 시선 끝을 타고, 비와 함께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그렇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빗속에 숨었다.
절망이 아니었다. 짙은 설움이었다. 그래서 더욱 숨 죽이고 울었다.
한동안 그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금 지쳤다. 이만 일어나야겠다 싶었다. 여기저기가 쑤셨다. 조금만 더 그대로 있다가는 아무리 체력 좋은 그라도 쓰러지고 말 것이다. 푹 젖은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상치 못한 인물이 검은 우산을 들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기척 없이 나타난 그녀가 우산을 샤카르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비가 곧장 그에게서 달아났다.
"여기서 뭐해요? 다 젖었잖아요, 당신."
무감하게 말하는 이의 이름을 멍하니 불렀다.
"......에빌?"
"여기서 비를 맞는다고 뭔가 달라지지는 않을 걸요, 아마도."
"너는 여기 왜."
갈라지는 목소리로 왜 왔느냐 물으려는 순간 깨달았다. 라니아의 어머니인 일레인은 로엔세르 공작가 출신이다. 즉, 라니아는 세크네트의 외사촌이다. 이 자리에 올 거라고 왜 생각하질 못했을까. 하릴없이 울기만 하는 모습 따위 보여줄 필요 없었는데. 샤카르는 소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이 흥건한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훔쳤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눈가만 더 붉어져 버렸다.
그런 그의 빗물 젖은 얼굴을 제대로 훔쳐내 준 것은 라니아의 손수건이었다. 라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런 짓을 해 봐서 잘 아는데, 이제 곧 열이 날 거예요. 그럼 내가 당신을 들쳐업고 정보상 건물까지 데려다 줘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테니까, 이만 일어나요."
샤카르는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작스런 등장에, 갑작스런 친절. 늘 이런 행동의 주체는 샤카르 자신이었기에 지금 이 상황이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엉거주춤하게 있자 라니아가 조곤히 재촉했다.
"동업자."
그의 푹 젖은 옷깃을 잡아당긴다. 가소로운 수준의 힘이었던지라 그는 끌려가는 기색조차 없었다. 라니아는 별 수 없이 일단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검은 치마의 끝자락이 진흙탕에 쓸려 더러워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비밀을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당신 꼭 저 같군요."
대답하지 않자, 라니아는 그의 손에 우산 손잡이를 쥐어주었다.
"그 때 저는 위로라는 걸 못 받아서 그런지, 이런 모습을 그냥 둘 수가 없어요. 위로해 주고 싶어요.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도 알겠고요."
감정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샤카르에게 가까워지다가, 엇갈렸다. 라니아는 두 팔을 뻗어 그의 젖은 등을 살며시 둘러안고 토닥였다. 온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샤카르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이를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문득 서러움이 다시금 밀려 올라왔다. 그는 조용히 훌쩍였다. 샤카르가 그걸 숨기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기에, 라니아는 가만히 등만 토닥였다.
얼음꽃처럼 스쳐간 그 시간의 종지부는 라니아가 찍었다. 울음이 사그라들자.
"하지만 내가 해줄 위로는 딱 여기까지예요."
라니아는 냉정하게 손을 떼고 선언했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가 적막한 사위에 홀로 선연했다. 잔잔한 슬픔이 물빛으로 깔린 어느 새벽 같은 오후,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노을마저 없었다. 오로지 먹구름만이 하늘을 점령한 그 계절에.
가장 잔인한 말은 정작 죽음이 아닌 라니아의 입술이 속삭였음을.
그 날의 막바지에서야 알았다.
"당신은 자꾸 무언가를 잃고 있어요. 제 탓이겠죠?"
'라니아'에게 묶이기 위해 샤카르는 무언가를 계속 상실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말하는 투가 심상찮음을 느낀 그는 부러 여상한 척 대꾸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을 내밀었는데.
"......무슨 소리래. 동업자,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지 그러냐."
라니아는 그에게 반응하지 않고 독백처럼 멋대로 이어 말했다.
"전 당신에게서 황태손도 겹쳐 보여요. 그는 당신처럼 제가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날 밖으로 이끌었죠. 그리고 바깥을 오히려 더욱 두려운 대상으로 만들어 줬어요. 당신도 그럴까요?"
철렁했다. 샤카르는 황급히 시린 손끝으로 라니아의 손을 잡아챘다. 놓치면 안될 것 같았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라니아는 부드럽게 그 손을 뿌리쳤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들어선 곳은 '동업자'라는 관계로서 허용되는 범위 너머였어요, 샤카르. 저도 이제야 깨달았지만 우린 걸맞지 않은 교류를 해 왔더군요."
"에빌."
"다시 말하지만 그 이름, 저는 허락한 적이 없어요. 경고할게요. 입에 담지 마요. 선은 지켜 줘요."
비의 온도보다 차게 단언한 그녀가 흘긋 입구 쪽을 응시했다. 그것이 샤카르의 눈에는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우리 그만 친해져요. 멘데로프 백작께서 오늘 당신을 데려갈 생각이시던데. 이참에 따라가 드리는 것도 좋겠네요. 후계자를 잃은 가문은 당신을 필요로 할 테니까."
라니아는 끝내 두려워하고 말았다. 열다섯 살에 잃은 친구와 비슷한 위치를 자처한 샤카르가, 그녀는 두려웠다. 또다시 그 날의 비극이 반복될까 봐.
활자 속에 명시된 결말도 발목을 잡았다. 라니아는 꼭 자신 때문에 그가 그 길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도 사람인데. 분명히 살아 움직이는, 활자 덩어리가 아닌, 사람이잖나.
늦기 전에 끊어내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빨랐다. 다만 빛에 취한 나방처럼 맴도는 동안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을 뿐이다. 결국에는 한 발 늦게 매듭짓기를 시도하게 됐다.
그건 명백한 실책이었다.
"내가 잡을 수 없게 하려고 줄줄이 말을 늘어놓은 거구나, 동업자. 어쩐지 친절하더라니."
허탈하게 웃음지었다. 샤카르는 외려 라니아보다 한 발 먼저 그들 앞에 나락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1057년의 그 날부터, 그녀에게 관계란 곧 잠재적인 상처였다. 불안정한 세계에서 누구 하나가 발을 헛디딘다면 다른 쪽 역시 무너지리라. 그러나 외면했고, 부정했다. 이유는 몰랐다. 미련이었을까?
이름 모를 어떤 감정 때문이었을까?
미안하다고는 느꼈지만 멀어지기에 이미 너무 멀리 온 듯했다. 멀어지는 것조차 이 시점에선 그녀에게 또 하나의 상처를 던지는 셈이 될까 싶어, 괜찮을 거라고 애써 웃어보이며 한 발 더 다가갔다.
그러나 라니아 본인이 직접 끊어낸다면, 그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막지 못할 결정 앞에서 그가 취할 입장이라고는 수용과 기다림 뿐이었다.
라니아는 아무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나 망설이고 또 망설였는데, 그녀는 단칼에 그를 도려낼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 그에게 의미를 두었나 보다. 있지도 않은 상처가 쓰라렸다.
"네 말대로 여길 떠날 생각이었어, 어차피. 누님마저 없는 멘데로프 가에는 정말로 아버지만 남았으니까. 난 멍청해서 자꾸 정에 휘말린다고. 좋아. 그래. 그럼 나 갈 테니까, 하나만 약속해라."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유마저 내버리고, 단 하나의 기약 없는 가능성을 붙잡다니. 샤카르는 말을 꺼내면서도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주 단단히 돈 게 분명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약속이라면 받아들이죠."
양쪽 다 침착했다. 마치 내일은 해가 뜰 거야, 라고 말하듯이. 샤카르는 통보처럼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나한테 반말 써."
"......고집불통 같으니. 싫어요."
라니아는 불 꺼진 재처럼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책망하는 투가 역력했다.
"이 정도는 감당해야지, 동업자. 안 되겠으면 최선을 다해서 피해 보던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도발했다. 어이 없다는 투의 대꾸가 돌아왔다.
"당신 정말 특이한 사람이에요. 내가 상상했던 반응이랑 너무 다르잖아."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지."
"......양심상 우산은 두고 갈게요. 거기서 얼어 죽든, 집으로 돌아가든 알아서 하시길."
싸늘하게 씹어뱉고 샤카르에게서 등을 돌린 라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졌다.
샤카르는 우산을 쥔 손의 힘을 풀었다. 그것은 툭 떨어져 진흙탕에 나뒹굴었다. 냉기뿐인 손에 얼굴을 묻었다. 뒤늦게, 손끝이 떨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똑, 똑 떨어졌다. 괴로이 중얼였다.
"상실이 싫다면서, 나한테는 그걸 잘만 던지고 간단 말이지......자각도 없이 무자비하구만. 아, 젠장. 젠장......"
그는 빛 한 점 없는 눈을 우울하게 깔고 눈매를 찡그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이며 고개를 떨궜다.
비 오는 날에는 태양을 걱정했지만, 정작 우려했어야 할 것은 새벽이었다. 태양이 뜨지 않아 줄곧 밤처럼 어둑한 하늘에, 푸르른 새벽은 오지 못하니까. 지저에 숨어 구름의 눈물에 질식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1060년의 마지막 만남이 허무하게 종결되고.
샤카르는 이틀 후 에온으로 떠났다.
============================ 작품 후기 ============================
푸른 새벽 3편. 진짜로 아무것도(호의 너머의 모든 감정) 자각하지 못한 상태의 라니아는 이렇습니다. 초반 편수, 그리고 최근 편수의 라니아와 비교해보시면 차이가 느껴지실 거라고 생각해요.
+여담이지만 샤카르는 9편에서 라니아에게 '그만 친하자'라고 통보받은 이 날을 '네게 위로받았던 날'이라고 표현하죠. 샤카르가 기억하고 싶었던 것은 그 날 전체를 통틀어 그 부분 뿐이라서...일부러 오버액션하고 쪽팔려했던 것도 그 맥락이라 보시면 됩니다.
다음편 잘하면 바로 올릴 수도 있긴 한데 으음 일단 퇴고되는 거 보고 결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