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는 살아남고 싶었다-57화 (57/102)

00057 Bridge 3. Shachar Menderope : 푸른 새벽 =========================

"어? 라니아."

부름에 응해 라니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장소가 야외이니만큼 대공녀라고 칭하려고 했는데, 의지를 배반한 입이 제멋대로 지껄였다. 샤카르는 찰나 제 입을 한 대 치고 싶어졌으나, 라니아가 아무런 제지나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넌 벌써 용건 끝났냐? 부러운 걸.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혹여나 그냥 지나칠까 싶어 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다행히도 라니아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묻는 말에 잘 대답해 주었다. 다만 비 내리던 그 날의 말미에 부탁한 반말 사용은 절대 안 했다.

석양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분수대에 앉아, 그는 일부러 더 허술한 사람처럼 굴었다. 외투 위에 앉아 일 년 전과 다름없이 얘기하는 라니아가 그의 바로 옆에 있었다. 닿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와 가까운 쪽의 팔이 간지러웠다. 시선을 똑바로 맞추기가 쉽지 않아, 샤카르는 약간 난처했다.

어렵사리 왜 아직도 존대를 쓰냐고 물었다. 바람결에 잊혀질 한 철의 잎사귀처럼, 라니아가 잔잔히 답했다.

"편하게 말하다 보면 친해지니까."

여전하구나. 샤카르는 조용히 쓴웃음을 삼켰다. 아까 맞은 명치가 뒤늦게 먹먹하니 아파서 몰래 문질렀다.

"너 그런데 라인하르트 그 새끼한테는 반말하잖아."

뭐라도 반응은 해야 했기에 대충 아무거나 예리한 것을 집어든다는 게 그만 또 황태손을 건드리고 말았다. 평정심이 무너진 탓이다.

"주위에 사람들 별로 없다고 이젠 아예 막 나가는군요?"

라니아는 때아닌 추궁을 어물쩍 넘겼다. 지은 잘못이 있으니 샤카르는 그저 모르는 척 흐름을 따라가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캐고 들어갈 수 있겠지만, 굳이 그 작자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우울해 보이는 라니아의 마음을 뒤집어 놓기도 싫었다. 그렇게 다시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로 돌아갔다. 나이 얘기였다.

"자신이 늙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요?"

말꼬리를 붙잡는 게 우스워서 픽 웃고 대꾸했다.

"무슨 그런 소리를. 나 아직 스물일곱 밖에 안 됐는데?"

"나는 열아홉인데. 늙었군요."

라니아는 그를 놀리며 입가를 늘였다. 석양에 한 꺼풀 씌워진 미소는 다른 때와 달랐다. 그 안에서 같은 동시에 다른 사람이 느껴졌다. 얼핏 검은색이 비췄다. 순간이지만 라니아의 적안과 금발이 모두 흑색으로 보였다. 눈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가? 샤카르는 터무니없다며 자신을 질책했다. 하지만 이상한 직감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열아홉은 이런 웃음을 지을 나이가 아니다. 무의식이 제멋대로 혀를 놀렸다.

"어라. 네 나이가 그것밖에 안 됐었냐? 하여간 얘기하다 보면 자꾸 잊는다니까. 워낙 풍기는 분위기가 여타 네 나이대 인간들하곤 딴판이라."

그 대가로 샤카르는 미처 후회하기도 전에 무의미한 해명 하나를 들었다.

"인생을 두 번 살아서 그래요."

정말이지 무의미하게도, 그 찰나 흔들린 어느 동공을 얼핏 목도했다.

"아하. 그렇구만."

샤카르는 여상하게 대꾸하고 라니아의 무심한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재회 때문에 설계해 뒀던 미래가 샤카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 일환으로 계획 또한 어그러졌다. 다행히 수습 못할 지경은 아니었다.

난데없이 들어온 카리스티아 파트너 신청에 놀라기는 했으나 망설이지 않았다. 동업자의 재미난 장난에 장단 맞춰주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샤카르는 벤에게 받은 금빛 브로치 하나를 라니아에게 주었다. 귀족들은 이것을 커플링에 맞먹는 의미로 볼 것이다. 소문이 퍼지겠지. 라니아는 황실에 압력에 못이겨 사지로 들어가는 중이며, 황태손에게 사랑 따위는 주지 않을 거라고. 이미 그녀에게는 다른 상대가 있다고. 일종의 영역 표시로 느껴져 샤카르는 스스로를 한심하다 질책했지만 역시나 그만두지는 않았다.

샤카르는 멘데로프 백작에게 붙들려 가주들에게 얼굴 비추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에단과 대화하고 곧이어 황족 무리로 가 인사하는 라니아를 눈으로 쫓았다. 그녀의 뒤쪽에는 레테일과 세크네트 형제가 말로 투닥대는 중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궁으로 빠져나가는 셀리아도 스치듯 보았다. 좋지 않은 사이 때문인지 황족 무리에 끼지 않고 따로 떨어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공 부부는 샤카르의 먼 왼편에 있었다.

"자네가 에온 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실력이 대단하더군. 자네 같은 아들을 둔 멘데로프 백작이 부러워."

라니아를 계속 곁눈으로 지켜보다가 자신의 대답을 요하는 말이 들려와 얼른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스카일러 후작이었다. 샤카르는 살짝 웃고, 대꾸해주었다.

"다방면에서 출중하신 두 아드님과 막내따님을 두신 후작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부끄럽습니다. 에셀레드 영식께서 근자에 승진하셨고, 프리드리히 영식께선 수석 보좌관이 되셨다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넷 영애께서도 오늘 황태손 저하의 파트너가 되셨던데.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잘 가다가 마지막에 엉뚱한 걸 내지른 아들을 멘데로프 백작이 뜨악한 눈으로 노려봤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황태손에게서 라니아를 빼가고 스카일러 영애가 대타를 뛰게 만든 장본인이 이런 발언을 하면 당연히 뼈 있는 말이다. 스카일러 후작 또한 이를 알고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과찬일세. 그럼 나는 이만 전하께 가보지. 잘들 놀다 가게나."

떨떠름하게 퇴장한 스카일러 후작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쳐다보던 멘데로프 백작이 작게 소리죽여 윽박질렀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더냐? 저 구렁이에게 잘못 보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샤카르는 아버지의 심경 따위 집중해 줄 여유가 없었기에 슥 웃고 비아냥거렸다.

"아, 후작은 구렁이라고 불립니까? 프리드리히 놈은 뱀이라 불리는데. 어째 부자가 쌍으로 저 모양인지. 쯧."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멀쩡해졌나 했더니 내 착각이었구나."

"백작님의 멀쩡함의 기준이나 착각 여부 같은 건 그닥 안 궁금하니 못난 아들은 먼저 놀러 갑니다. 후작님 말마따나 '잘 놀다 가십시오'."

"저, 저 놈이!"

백작이 삿대질했지만 샤카르는 주머니에 엄지손가락을 찔러넣고 냉큼 로엔세르 쌍둥이에게로 향했다. 무려 공작 집안이다. 체면이 있으니 백작도 함부로 그 앞에서 깽판을 놓지는 못하리라. 샤카르의 예상은 적중했다. 백작은 포기하고 루 할레시온 대공 부부에게 갔다. 그 꼴을 보고 소리죽여 웃어대는 샤카르를 향해 레테일이 물었다.

"지금 저희를 방패막이로 쓰신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쌍둥이 뒤에 숨은 그가 뻔뻔스레 대답했다. 레테일은 알만하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세크네트는 배를 잡고 낄낄거렸다.

"역시 처남은 최곱니다. 오늘 보니까 황태손 저하께도 브로치 두 개로 큰 웃음 드렸겠던데요. 팔짱 끼고 가족 없이 동시입장하는 것까지 처남이 제의한 겁니까?"

"그건 에빌 대공녀가 주도했죠."

"오오, 간간히 처남 통해서 말씀만 듣던 분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이야! 그 분께 영광이라고 전해주십시오."

관찰력 좋은 세크네트는 그새 브로치까지 파악하고 화두로 꺼내들었다. 샤카르는 어깨를 으쓱이고 옆으로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서 포도주 한 잔을 집어들었다. 음미 따위는 없이 원샷하고 웨이터가 멀어지기 전에 빈 잔을 돌려주었다.

"굳이 절 통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냥 있다가 저쪽 말 끝나면 다가가서 인사하시길."

"으음, 역시 칼 같으시다니까. 거의 레트 급이야. 그치, 레트?"

가만히 있던 레테일을 대화에 끌어당긴 세크네트가 장난스레 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난 왜 갑자기 걸고 넘어지냐, 세트."

레테일은 눈에 띄게 미간을 구기며 팔을 확 쳐냈다. 세크네트는 시무룩해졌다.

"내 형제는 정말 너무하다니까."

"네 행실부터 돌아보고 그런 소리를 해라."

샤카르는 후계 싸움이 벌어지기 딱 좋은 요건의 귀족 쌍둥이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사이가 좋은 그들이 투닥대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다, 한 가지 납득했다. 두 사람은 애초에 공작가의 주인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거다. 그러니 단지 최대의 효율만을 따져, 둘 중 누가 더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를 판단해 물밑 합의를 거쳤으리라.

어느 순간 에네아스 백작가의 후계자 이나르가 슬그머니 공작가의 쌍둥이에게 다가왔다. 살짝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은 파벌을 가리지 않고 인맥이 매우 넓었다. 그들이 이나르와 스스럼 없이 말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샤카르는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사실 그들과 더 친밀한 사이인 사람은 샤카르지만, 선을 긋기 위해 존대를 쓰는 그가 이나르의 눈에는 자신을 위해 비켜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정치적 요인인 동시에 자신과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발 앞에 선을 그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데다 쉽게 상처받는 부류인 에단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서.

생각난 김에 이번에는 에단에게 갔다. 아까 라니아 때문에 에단이 타격을 입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술에 진탕 취하면 두세 번당 한 번 꼴로 라니아 이야기를 하는 에단은 유독 그녀에게만 썩 명료하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고마운 사람이랬다가, 서운한 사람이랬다가, 미안한 사람이랬다가. 여하튼 변화무쌍했다. 황태손과 제드릭 공녀에게 한결같이 연민을 표하는 것과는 달리.

"에단."

"헉! 아, 이런. 멘데로프 영식이셨습니까. 놀랐습니다."

등을 보이고 있길래 이름을 불렀더니, 에단이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샤카르는 대충 사태를 파악했다.

"뭐냐, 그 반응. 대체 뭐라고 쏘아붙였길래 애가 경기를 다 해? 내가 에빌 대신 수습해 줄 테니까 말해 봐라. 에빌이 뭐라든?"

"그게......황태자파인 저와는 가까이 지내고 싶지도, 그럴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벽한 타인으로의 회귀를 원하시는 것 같아요."

"아하. 또 그 얘기군. 근데 그건 나도 뭐라 해줄 말이 없다......사실이잖냐. 네 핏줄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꼭 그 점이 아니더라도 저는 잘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 때 전 겁쟁이였으니까요. 그러니 괜찮습니다. 괜찮아야 합니다."

에단이 씩씩하게 말했다. 샤카르가 어깨를 툭 쳤다.

"그래. 부기사단장씩이나 된 녀석이 이런 데서 울면 쓰나."

"안 울었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할지......그런데 아까 혹시, 혹시 말입니다. 에빌......이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잘못 들었나 해서."

"어? 어. 그런데 왜?"

갑자기 엉뚱한 데를 짚어내기에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단이 더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이러다 이 거대한 카리스티아 대연회 개막식장 한복판에서 울기라도 하면 개망신이다. 샤카르는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야! 너 여기서 울면 안 된다고 방금 말했잖냐!"

"안 웁니다, 훌쩍."

"그럼 뒤에 훌쩍임은 뭔데!"

"저 멀쩡합니다."

충혈된 눈으로 잘도 멀쩡하다, 라고 퉁하니 내뱉은 샤카르가 일단 좀 진정한 에단을 확인하고 한숨 돌렸다. 바야흐로 그의 수난시대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샤카르가 눈짓으로 왜 이런 반응이냐고 무언으로 묻자  에단이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라니아 대공녀는 쉽게 미들 네임을 허락할 분이 아닙니다, 멘데로프 영식은 모르시는 듯 하지만."

"나도 안다, 그 정도는."

"예?! 그, 그럼 정말 허락을 받으셨다는 겁니까?"

"아니. 옛날에 경고까지 받았는데 그냥 막무가내로 부르고 있지."

"아......하지만 샤카르, 그 이름은 웬만하면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니, 그래 주십시오."

"갑자기 내 성은 어디로 가고 이름을 부르냐? 이게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는 뜻이구만?"

"네. 라니아 대공녀를 슬프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슬프게 해? 낯선 단어가 나오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얼굴의 웃음기를 싹 지웠다. 지금껏 거부하던 말던 에빌이라고 부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샤카르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자신이 또 무슨 망나니 짓을 벌인 것인가? 순식간에 착 깔린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다. 에단은 머뭇거리다가 겨우 작게 설명했다.

"대공녀와 친분이 있으시니, 제드릭 공녀를 아실 겁니다."

큰일 났다. 뭐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샤카르의 귀에만 들렸다. 아주 제대로 실수했다. 다른 걸 다 건드려도 이것만은 건드려선 안 됐는데.

르쉬네 제드릭 할레시온의 이름이 설마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몰랐던 것이다.

놀라 멍해진 사이 다음 말이 쐐기를 박았다.

"영식 이전에 라니아 대공녀를 미들 네임으로 부르셨던 분은 제드릭 공녀가 유일합니다."

***

미들 네임은 황족만이 가진다. 황족의 미들 네임은 공식 호칭으로서 생각보다 꽤 자주 쓰인다. 퍼스트 네임은 친한 사이거나 그 황족보다 지위가 높을 경우에나 사용한다.

미들 네임 호명 시 특별히 사적인 의미를 갖는 경우는 '에빌 대공녀'가 아닌 '에빌'만을 부를 때 뿐이다. 그것은 애칭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샤카르는 그 의도로 에빌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로.

왜 그리도 싫어하나 했다. 정말 두드려 맞아도 싼 짓을 했구나. 샤카르는 자괴했다.

그러나 슬쩍 고개를 드는 추측이 있었다.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먹자 마차 안에서 다시 언급하긴 했지만, 정작 귀족 총소집 이후로 라니아는 아무 소리 않았다. 절대 떠본 것은 아니었긴 한데, 어쨌든 그녀는 그 시점부터 대강 넘어가 주었다.

카리스티아 개막일의 밤, 그는 귀족들이 춤 추는 광경을 초점 없는 눈으로 지켜보던 라니아를 깨워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자연스러움을 빙자해 슬쩍 떠보았으나 역시나 딱히 반응이 없었지. 아르얀로드의 미뉴에트를 추며, 속은 들끓었지만 결국 르쉬네에 관해서는 전혀 말하지 못했다. 춤을 추다 보니 잠깐 그 충격을 잊어버렸을 정도다. 그만큼 라니아의 의상이 화려했고, 그 화려함에 뒤지지 않은 라니아가 찬란했던 것을 어쩌랴. 보석보다 빛나는 것은 난생 처음 보았다.

......생각이 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튼간에.

아주 최악인 상황은 아닌 건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샤카르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창 밖으로 해가 뜨고 있었다. 피곤이 뒤늦게 확 몰려왔다. 밤을 꼴딱 샌 까닭이다.

연회 막판에 웬 정신 나간 영애 때문에 손을 크게 다친 라니아가 눈에 어른거려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피가 많이 났는데도 라니아는 멍청하리만치 무감각했다. 군데군데 찢어진 게 얼마나 아파 보였는지 샤카르의 손이 다 떨렸다.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어 의자에 앉히고, 의사가 올 때까지 곁을 지켰다. 응급 처치가 시작되고 나서는 조금이나마 덜 아프라고 눈을 가려 주었다. 예전에 무구를 잘못 다뤄 손이 찢기는 것이 예삿일이었기에, 그는 저 아픔의 강도를 잘 알았다.

심지어는 화가 났다. 왜 아픈데 표현하질 않는가. 4년 전의 그 희고 예쁜 인형이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이제야 조금 감정 회로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좋지 않은 상황이 되자 다시 어디론가 깊숙히 숨어버린다. 예전에는 이런 상태의 라니아를 보면 안타까웠는데, 지금은 정말로 화가 났다. 환자에게 버럭버럭 화를 낼 수야 없으니, 샤카르의 마음만 꾹꾹 눌러담다 못해 박살났지만 말이다.

결국 그는 퀭한 눈을 비비고 벌떡 일어나 편지지를 가지러 갔다. 이 상황에 루 할레시온 가 저택에 가긴 좀 그러니 안부 편지라도 써야지 별 수 있겠나.

============================ 작품 후기 ============================

푸른 새벽 5편.

3장 예고편 용도의 글귀를 써보고 있는데 어렵네요.

0